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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 대중문화란.

1.1 문화

1.2 이데올로기

1.3 대중문화

 

때중문화는 분명한 용어가 아니라 사실상 ‘비어있는’ 개념적 범주이다.

1 문화

그렇다면 ‘대중 문화’에서 문화는 무엇인가.

윌리엄스의 정의

대중문화를 말할 때 보통 2번과 3번째 정의를 사용한다.

1. ‘지적, 정신적 심미적 계발의 일반적 과정’

2.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방식

이때 특정한 생활방식이란 해변가의 후가나 크리스마스 축제 또는 젊은이의 하위문화를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를 보통 ‘살아있는’ 문화 또는 문화적 실천행위라고 부른다.

3.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_ 이는 의미하거나 의미를 생산하는 혹은 의미의 근거가 되는 것을 주된 기능으로 하는 텍스트나 문화적 실천행위를 지칭한다. (이때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가 말하는 실천행위와 동일하다) 이를 보통 문화적 텍스트라고 부르는데 일일 연속극이나팝 뮤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대중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문화와 같이 이데올로기에도 많은 의미들이 얽혀있다.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개념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문화분석에서 대중문화와 혼용되어 사용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대중문화 연구와 관련있는 의미들.

1, 이데올로기는 특정 집단에 의해 부각되는 조직적인 사고체계이다. 예, 노동당의 이데올로기, 직업적 이데올로기 특정 당의 이데올로기

 

2.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눈가림이나 왜곡, 은폐를 의미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이데올로기는 문화적 텍스트나 실천행위들이 어떻게 실제 이미지를 왜곡시키는지 보여준다. 이는 소위 거짓 의식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왜곡은 약자들의 이익과 상반되는 강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한다. 예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이데올로기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첫 번째로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의 지배의 실체를 감추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로는(더 중요하게는) 권력이 없는 자들에게도 피지배의 실체를 은폐해버름으로써, 이들 역시 자신들이 착취나 억압받는 자들로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개념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존재하는 힘의 역학 관계에 대한 상부구조적 반영이나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가정이다. 이 가정에서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구성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적 산물들은 ‘이데올로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회의 경제구조에 의해 이득을 보는 지배계층의 이해를 잠재적, 표면적으로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5장에서 마르크스와 엘겔스 자신들이 이러한 공식을 어떻게 수정하였고 많은 문화비평가들이 대중문화와 문화의 사회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기계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을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떻게 수정했는지 알아보겠다.)

 

3. 이데올로기는 여러 ‘이데올로기 형식을’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 정의는 어떤 텍스트가 항상 세상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나타낸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 인식은 사회가 합의적이라기 보다는 대립적이라는 것에 기반한다. 이 인식에서는 모든 텍스트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브레히트) 각 텍스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부여한다. 대중문화는 ‘의미작용의 정치’ 즉 독자에게 특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도록 한다.

 

4. 이 정의는 알튀세르에 의해 발전된 이데올로기 정의이다. 그의 논점은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관념들의 집합이 아니라 물질적인 실천행위로 보아야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일정한 의식이나 관습을 통해, 어떻게 부와 지위와 권력 등의 엄청나게 불평등한 요소들로 결정되는 사회잘서에 얽매이게 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결제적 상황과 경제적 관계에 필요한 사회적 상황과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5. 롤랑 바르트는 이데올로기가 주로 함축적인 수준에서, 즉 텍스트나 실천행위가 전하거나 전할 수 있는 이차적, 때로는 무의식적인 의미의 단계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내포 의미의 범위를 정하기 위해, 어떤 함축적 의미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함축적 의미를 만들기 위한 헤게모니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예: 영국 보수당 정치선전방송

 

대중문화.

대중문화와 관련된 문화이론의 역사는 ‘문화’, ‘대중적인’ 이라는 두 용어가 특정 역사정, 사회적 맥락내에서 어떤 이론적 작업을 통해 다양하게 연결되었는가에 관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1

첫 번째 방법은 대중문화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좋아하는 문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말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너무 많기에 대중문화의 정의로는 실제로 전혀 쓸모없다. 그럼에도 명백한 것은 대중문화에대한 어떤 정의라도 양적으로 큰 범위를 포함해야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양적인 크기 그 자체만으로는 대중문화에 대한 정의를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명백하다.

 

2.

두 번째 방법은 고급문화를 제외한 수준미달의 작품들이 대중문화라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고급문화는 대중을 배제시키며 일부 특정 소수의 배타성을 확고히 해준다. 피에르부르디외는 문화적 구분이 계급구분을 유지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이데올로기가 사용된다고 말한다. 이 구분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 기준, 믿음에는 문제가 많다. 사실 과거에 대중문화였다가 시간이 지나서 고급문화가 된 사례나(느와르, 세익스피어), 이 둘 사이의 경계를 자유로히 넘나드는 사례도 있다.(루치아노 파바로티) 결국 이 구분의 이면에는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관점에서는 대중적, 대중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열등감을 내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그 차별성을 지속적으로 표시하는데 요구되는, 바로 그 제도외 제도적 과정, 그리고 그 차별성을 지탱하는 힘과 관계라는 것이다.

3.

세 번째 정의 방법은 ‘대량문화’로서 대중문화이다. 이 관점은 대중문화가 대량생산으로 찍혀져 나온 것이고 관중은 무분별한 대량 소비자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량문화의 비판자는 현재상황을 그 문화적 형태가 달랐던 황금기와 비교하는데 사실 이는 쓸모없는 낭만적 향수병이라고 피스크가 지적하였다. 5장에서 볼 프랑크부르트 학파의 경우에는 역설적으로 ‘사라진 황금기’를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찾고자 했다.

대량문화라는 이론적 테두리내에서 작업하는 어떤 비평가들은 대량문화는 질적으로 저하된 복제품이 아니라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수입된 미국문화라고 말한다. 이는 영국문화가 미국의 대량생산적 문화에 영향으로 동질화 혹은 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 이야기 할 수 있는 두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대중문화는 유럽보다 미국에서 현저하게, 오랫동안 사회적 제도적으로 중심이 되어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세계적으로 미국문화의 영향은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그 성격은 모순된 점이 있다는 것이다. 50년대의 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국문화를 영국문화 생활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해방의 힘으로 느꼈다. 동시에 이 문화에 대한 두려움은 부상하는 대중문화에 대한 불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또한 정치적 좌파 우파가 있는데 후자에서는 노동계급의 전통적 생활방식이 대중문화의 유혹에 의해 위태롭게 된다는 인식이고 후자는 고급문화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위협이다.

대량문화를 보는 온건하고 순진한 견해도 있는데, 이는 대중문화의 텍스트와 실천행위들이 대중적 환상의 현태로 나타난다는 시작이다. 이 견해에서는 대중문화는 ‘어디로부터 또는 어디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상적 자아도피‘이다,이는 집단적인 소망과 욕망의 가장된 형태이다. 구조주의는 대중문화를 지배이데올로기를 쉽게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의 제조기쯤으로 본다. 독자들은 이미 수동적인 자리에 갇혀 있으며 그의 역할이나 텍스트의 모순성에 대해 논란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에대한 후기 구조주의의 비판은 이 논점에 대한 비판의 여지를 남긴 것이고 4장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4.

네 번째 정의는 대중문화가 민중으로부터 발생되는 문화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대중문화는 민중의 진정에서 우러난 문화이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상징적 저항이 주로 나타나는 곳이다. 이러한 정의의 문제점은 이 문화가 만들어진 재료, 출처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 정의를 고집한다해도, 그들 스스로 만든 재료들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문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남는다. 결국 이 재료는 상업적으로 제공된 것인데 이 접근은 이 결론을 비껴나간다.

5.

5번째 정의는 그람시의 정치적 분석, 그의 헤게모니 개념의 발전에서 나타난 것이다. 문화이론가들이 그람시의 정치 개념을 어떻게 맏아들였고 또 대중문화의 성격과 정치성을 설명하는데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윤곽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접근방식을 채택한 이들은 대중문화를 피지배계층과 지배계층의 투쟁의 장으로 본다. 대중문화는 이 둘 사이의 교환이 일어나는 영역이며, 이 영역은 저항과 통합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은 그람시의 말에 의하면 타협적 평형속에서 움직인다. 이 과정은 통시적이면서 동시에 공시적이다.

신그람시적 관점의 주 개념은 명시화이다. 보수당의 정치방송은 이 과정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수당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정치행위를 비명시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적 행위를 명시화한다.

신그람시주의의 입장에서 제시된 다른 하나는 대중문화의 이론들은 사실 민중의 구성에 대한 이론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문화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갈등이 빚어지는 장소라면, 대중문화의 이론들은 ‘일상생활의 형태를 구성하는 힘의 관계를 조사함으로써, 그 관계가 제공하는 이해관계를 알 수 있기에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8장에서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기호학적으로 사용한 존 피스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6

6 번째 정의는 최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의해서 소개된 것이고 이는 7장의 주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논점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문화는 상업문화라고 단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그 이론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의 인식이 과연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냐라는 문제이다. 이는 7장에서 다룰 것이다.

7

이 모든 정의들이 공통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은 대중문화가 무엇이든 간에 이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뒤따라 일어난 문화라는 것이다. 문화와 대중문화에 관한 정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존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 특정한 시대구분을 뒷받침하는 것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대중문화의 지형에서 문화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에는 일반 문화와 엘리트 문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첫 째로 산업화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오직 현금거래 관계로 변화시켰다. 두 번째로 도시화는 계층관 주거분리를 발생시켰고, 서 번째로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가 정권으로 하여금 급진주의를 분쇄하기 위한 다양한 억압을 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의 결합이 일반문화에서 가부장적 사고 외곽에서 하나의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는 지배계급의 영향 밖에서 대중문화를 만들기 위한 문화공간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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