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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인상적인 시, 학원가기 싫은 날

지금 이슈가 되는 잔혹동시가 있다. 이는 솔로강아지라는 책에서 처음 나왔다. 무수히 많은 잔인, 잔혹한 시들이 있고 꾸준히 출판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표현자체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이 시가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이 읽은 이유는 오직 초등학생이 쓴 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사는 이 시 자체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오직 초등학생이 이런 잔혹한 말을 썼다 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네티즌도 그러하다. 적어도 고등학교 나이쯤 된 사람이 썼다면 섬뜩은 해도 그렇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생이 문제인 것이지 시 자체가 문제가 아닌 듯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시가 아닌 모 초등학생을 중심으로) 수 많은 이들이 도덕적인 어른들 흉내나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음흉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심장이 안전하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그런 식으로 시를 보는 것은 아무런 재미도 없을뿐더러 비윤리적이다. 그들이 섬뜩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시의 표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가 무언가를 건드려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짜증나는 것은 이 시가 담긴 솔로강아지가 전량 폐기처분되는 것이다. 독재정부나 하던 분서갱유를 친히 민주주의(?) 시민들께서 하고 계신다. 책을 불태우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재만 날릴 뿐이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학원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시는 편지나 에세이와 달라서 그 시의 화자와 작가와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그 시의 화자가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창조된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를 읽고 초등학생이 자기 엄마를 죽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소설적 인물의 가치관을 작가의 생각이라 주장하면서 싸잡아서 욕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그 초등학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든 그가 시라는 형식을 선택해 썼다면 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 건 시이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나 회고록이 아니다.
그리고 동시라는 프레임 자체도 별로이다. 대체 동시는 어떤 의미인가? 아이들이 쓴 시? 아이들이 읽는 시? 아이들을 위한 시? 아이들이 읽고 쓸 정도로 쉬운 시? 글쎄 어떤 표현도 그닥 만족스럽지는 않다. 동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은 그 시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면 될 듯 하다. 동시의 세계에는 불협화음이나 문제, 갈등은 거의 없고 있어도 바로 해결될만한 사소한 것들 뿐이다. 피망을 먹냐 안먹냐 같은 문제 말이다. 그리고 동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다분히 환상적이고 작의적이고 거짓말 투성이인 세상을 노래한다. 이렇게 동시가 하는 역할은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 어른의 이익에 맞게 설정된 인식을 주입하고 훈육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학원가기 싫은 날’은 전자의 프레임과 후자의 프레임 사이에 걸쳐있다. 전자에서는 어린 초등학생이 썼기 때문에 동시이며, 후자는 초등학생이 접하는 부조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가 아니다. 이 시가 파괴적인 이유는 이 두 가지 속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동시이면서 동시가 아닌 이 시는 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며 동시적 세계를 파괴한다.
인터넷상에서 이 시를 평가하는 한 가지 단어는 ‘섬뜩’이다. 맞다 섬뜩한 시이다. 하지만 절대 표현이 섬뜩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시의 매력은 섬뜩한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학원이 가기 싫은데 강압적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입장은 화자 뿐만 아니라 한국에 살아가는 다수의 청소년들, 아이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한다. 관심도 없는 영단어 하나 더 외우려고 시간에 쫒겨 학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흔하다.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한 것이 된 것처럼. 보는 입장에서는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보편성을 가진다. 동시에 이 시의 논조는 마치 학원에 가기 싫은 다수의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같다. 학원을 가기 싫다면 학원을 가게 만드는 당신을 죽이라고. 학원을 가게 만드는 원인으로 들어나는 것은 엄마지만 사실은 사회 시스템 자체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두 가지 복합적인 작용을 꾀한다. 첫 번째로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받는 이들에 대한 설득, 선동이다. 두 번째로는 경고이자 선전포고이다. 자신들을 학원으로 내몬 사회에 대한 으름장이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선전포고이다. 네 심장은 안전하겠냐는 서슬퍼런 경고이다. 여기서 우리는 섬뜩함을 느끼는 우리는 그들을 학원으로 내몬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 책을 모아서 폐기처분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공포에 대한 치졸한 복수일 뿐이다.(사실 살만 루시디의 사형선고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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