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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08
    사랑의 경제 (2) - 상호적 인간?_정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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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12/23
    게르니카_정태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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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12/08
    사랑의 경제 (1) - 인간은 이기적일까?
    칼라TV

사랑의 경제 (2) - 상호적 인간?_정태인

정태인.jpg

 

 

정태인(경제평론가)

 

 

사랑의 경제 (2) - 상호적 인간?

 


“잠정 결론” - 상호적 인간(homo reciprocity)

지난 호에 내 드린 문제들은 실험경제학/진화경제학에서는 수천번 되풀이됐고 이제 어느 정도 ‘잠정 결론’에 도달한 것들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소개한 책은 최정규 경북대교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입니다. 지난 대선의 결과 때문에, 혹은 실연 때문에 “역시 인간이라는 종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거나, 아니면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라고 믿고 싶은 분들은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최후통첩게임의 논리적 답은 1원(최소 단위)입니다. 이렇게 거슬러서 추론하는 겁니다. 다연이 처지에서 제안을 거부하면 아무 것도 손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승연이가 무정하게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지 않는 한, 제안을 받아 들이는 것이 무조건 이익입니다(경제학의 가정대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면). 그리고 승연이는 다연이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건 게임이론의 기본 가정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승연이는 1원을 제시해서 999원을 갖게 됩니다. 

실제 결과는 어땠을까요? 대부분의 제안자(승연이에 해당하는 사람들)는 400원에서 500원 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500원이 제일 많았고 250원 이하일 때는 응답자(다연이)가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대부분의 실험은 경제학과, 경영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고, 심지어 미국 최고 대학의 경제학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물론 평균 액수가 조금 낮아집니다. 하하). 이 게임을 반복해서 실시했을 때 초지일관 이기적으로 행동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이기적 행동은 1/4을 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첫번째 결과를 놓고도 해석은 구구합니다. 이 때문에 더 복잡한 실험이 행해졌는데 상대방을 다시는 볼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액수가 훨씬 커지더라도 (우리 월급의 세배쯤 되는 돈을 걸고 해도) 결과는 유사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17년 전 쯤이었습니다. 당시에 유학 가 있던 최정규교수가 사회경제학회의 피시 통신 게시판에 문제를 냈었죠. 그 때 제가 쓴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500원 이상이 제안되면 응답자(다연)는 무조건 받아들인다. 그러나 액수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이 나쁜 놈이...’하는 생각이 커질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제안자(승연)도 짐작할 수 있다. 자기도 무일푼이 되는 경우를 걱정하게 될 것이고 결국 500원보다 조금 낮은 액수를 부를 것이다. 그 차이는 자기가 제안자가 된 행운의 댓가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거죠. 실험의 결과를 거의 정확하게 맞췄지만 그건 곧 제가 경제학의 A,B,C도 모르는 비논리적 인간이라는 걸 증명한 겁니다ㅠㅠ. 

그런데 이 답은 이후에 상호성(reciprocity, 저는 이 개념이 관련된 다른 분야도 고려할 때는 호혜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이라는 인간 본성의 하나로 정식화됩니다. 인간은 남이 좋게 대하면 자신도 좋게 대하지만(“웃는 낯에 침 뱉으랴”) 상대방이 모욕을 주거나 넘어야 하지 않을 선을 넘을 때는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처벌을 한다는 게 (강한)상호성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비슷하죠? 또 칸트의 황금율(“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과도 통합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얘기를 넘어서는 거 같죠? 분명 그건 종교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하면 제 추론은 이렇게까지 확대 해석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자기도 무일푼이 되는 걸 막기 위해 500원에 가까운 액수를 제시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것도 결국 이기적 행위라는 겁니다. 독재자게임은 이런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 게임은 상대방이 거절도 못하니까 한 푼도 안 주는 게 논리적인 답입니다. 과연 게임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조건을 더 하느냐에 따라 액수는 달라졌지만 답은 언제나 플러스로 나왔고 500원도 꽤 많이 제시됐습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행복’에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뭔가 불행한 존재가 된다는 얘깁니다. 

인간은 실로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결투를 해서 결국 죽는 중세시대의 기사라든가, 화랑 관창처럼 자기 목숨을 바칠 수도 있고, 조국 해방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건 투사들이 있었고 촛불을 들고 줄기차게 광장으로 나섰던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이기적 인간(homo economicus)이라기 보다 상호적 인간(homo reciprocity)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공동체는 어떻게 운영될까?

공공재게임은 공동체의 운영에 시사점을 줍니다. 공공재는 주류 경제학에서 인정하는 대표적인 ‘시장실패’의 사례입니다.  흔히 드는 예는 국방이나 치안인데 공중파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덕여왕을 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도 아니고(비포화성), 내가 밉다고(또는 돈을 안 낸다고) 나만 못 보게 할 방법도 없습니다(비배제성). 지난 달에 문제로 낸 마을의 가로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이기적 인간이라면 난 가로등 없이도 잘 다닐 수 있다며 돈을 내지 않고 가로등 덕을 한 밤 중에 보려 할 겁니다. 이른바 무임승차자(free rider)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모두 그런 머리를 굴린다면 가로등은 세워질 수가 없겠죠. 그래서 주류 경제학자들도 공공재는 국가가 공급해야 한다고 한발 물러섰습니다. 하긴 신자유주의는 이런 논리를 넘어서 국가가 공공재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면 서비스가 나빠진다면서 다시 공공재를 시장에 맡기려고 합니다. 바로 이명박 정부가 지금 하는 정책들입니다. 

과연 게임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유명한 페르와 슈미트의 게임(1999)의 경우 첫 번째 실험에서, 우리 게임의 가정으로 하면 600원 쯤 나왔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이라면 한푼도 안 나와야 하는데 꽤 많은 돈이 나온 거죠. 평균으로 치면 1인당 120원, 즉 자기 재산의 3/5쯤 내 놓은 겁니다. 그럼 매칭펀드를 합쳐서 1200원을 돌려 주니까 1인당 평균 재산은 320(1200/5 + 400/5)원으로 불어납니다. 그런데 한푼도 안 낸 사람은 자기 돈 200원에 돌려받은 돈 240원(공공재의 이익)을 합쳐서 440원이 되고 200원 전부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내 놓은 ‘착한’ 사람은 240원만 쥐게 됩니다. 

돈을 많이 낸 사람은 화가 날 것이고(아주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만족할까요? 하하) 돈을 적게 낸 사람은, 어쩌면 속으로 자신의 똑똑함을 자화자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을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요? 횟수가 거듭될수록 사람들이 내는 돈은 점점 적어집니다. 돈 안 낸 사람을 처벌할 방법이 없으니 나도 돈 안 내서 응징(비록 자해일지라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나도 이기적으로 행동하자며 따라 한 것일수도 있겠죠. 결국 10번째 게임을 반복하면 70% 이상이 한푼도 안 내고, 나머지도 아주 소액을 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경제학이 예측하는 바와 비슷해진 거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게임에 무임승차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붙이면 각자 내는 액수가 오히려 늘어나거나 거의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처음 게임에서 돈을 적게 낸 것은 응징의 의미가 컸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번 달 질문은 어쩌면 더 간단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일까요, 아니면 이타적일까요? 또 우리는 어떨 때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어떨 땐 헐크처럼 정반대의 인간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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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_정태인

 * 이번 주 피디저널에 실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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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게르니카 



내 공부방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인민 전선(공화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에 대공습이 있었다. 아비규환을 이렇듯 절절하게 표현하는 예술가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공포에 질려 초점을 잃은 눈들이 사면팔방에 불안을 전염시키고 있다. ‘입체파’의 기법이 한껏 효과를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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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세계경제는 말 그대로 공포에 떨었다. 끝없이 솟아오르던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바벨탑은 마비됐고 이미 갈갈이 찢어진 세계가 불통의 언어로 대립하는 일만 남은 것으로 보였다. 30년대 대공황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것 처럼... 

다행히 인류는 1930년대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 전 세계의 중앙은행이 달러와 자국 통화를 대대적으로 쏟아 부어서 패닉이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막았고 동시에 재정 지출을 늘렸다. 1년 만에 세계는 패닉에서 “불안 속의 낙관”으로 돌아섰다. 아니, 한국에선 낙관이 흘러넘치고 있다. 코 앞에 내외의 위기가 닥쳐 있는데도 7% 경제성장을 내걸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치매걸린 노인처럼 또 다시 토건의 성장신화를 외치고 있다(임기 말에는 기어코 7%를 달성한단다). 

과연 그럴까? 내년 5% 내외의 성장을 예측하고 있는 정부나 민간기관은 모두 3% 정도의 세계경제전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불행히도 붕괴 직전의 바벨탑은 설계가 변경되지 않았다.  대형금융기관이 위험한 투자를 감행해서 성공하면 이익을 챙기고 실패하면 납세자가 손실을 떠안는 “대마불사”의 구조는 여전하다. 위험 분산의 묘약으로 믿었던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도 구체화되지 못한 채, 상업용 부동산이나 자동차 대출 등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똑같은 성격의 폭탄들이 과잉 유동성 밑에 숨어 있다. 더구나 더 장기적이고 더 풀기 어려운 글로벌 불균형 역시 아무런 대책 없이 지금도 부풀어 오르고 있다. 또한 세계경제가 현재의 예측대로 순조롭게 돌아 간다면 지금 같은 유가나 원자재 가격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먹잇감을 찾는 과잉 유동성이 원자재 선물시장으로 몰려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의 낙관적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라는 형식이 큰 몫을 했다. 작년 4/4분기와 금년 1/4분기가 워낙 나빴기 때문에 정부의 온갖 정책이 다 쏟아진 금년 2/4분기와 3/4분기의 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선 건 당연하다(이른바 기저 효과). 그러나 지난 3분기 동안, 즉 봄, 여름, 가을 동안의 경제성장율은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여전히 -1.8%에 머무르고 있다(한은 3/4분기 국민소득(잠정), 12.4). 민간소비는 -1.5%, 설비투자는 -15.5%였고 내수 전체로 -6.8%였으니 서민들의 체감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수출감소(-5.3%)보다 수입감소(-13.2%)가 더 커서 GDP의 폭락을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 내년에 어떻게 갑자기 4.6%(한국은행, 2010년 경제전망, 12.11)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일까? 민간소비가 금년에 비해 3.6%나 늘어나고 설비투자 역시 두자릿 수 감소세에서 11.4% 증가로 급반전할 것이라는 예측이 그 비밀이다. 금년 소비가 이 정도에 머무른 것도 자동차 세제혜택 등 특수 요인에 의한 것이었는데 과연 사람들이 이제 살만 하다며 내구재 소비를 늘릴까? 세계의 불확실성이 여전한데도 기업인들은 갑자기 대대적 설비투자를 시작할까? 불행히도 중장기 기대의 급반전은 케인스의 용어로 “확률관계 0”에 가깝다. 

물론 이들 기관의 예측이 조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현재의 수치들을 과거의 모형에 넣어서 나온 결과이고, 그것은 최근의 호전 기미를 단순 연장했다는 걸 의미한다. 정말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면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체계적으로 부동산 거품을 빼는 일이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4대강 등 토목건설에 목을 매달고, 반면 가장 효율적인 장기 투자인 교육과 의료 등 복지의 비중은 줄이고 있다. 게르니카의 공포는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  

잉그릿드 버그만의 청순한 미소는 스페인 내전 속에서 피어났다(“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게르니카의 바스크 지역에서는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몬드라곤 협동조합이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경쟁과 독선이 아닌, 협동과 사랑이 우리의 희망이다. 또 다시 뉴타운과 특목고 등 나와 내 가족만은 성공할 수 있다는 맹신의 주문에서 빠져 나올 때 비로소 우리 아이들을 게르니카의 공포로부터 구할 수 있다. 
***

다 못 쓴 얘기.  나이 50줄에 들어서서 그럴까?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내가 세상에 진 빚을 생각한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진 그 수 없는 빚들... 이제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을 다 접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진 빚부터 남은 생애까지 갚아야겠다. 그래도 못 갚을 것이 너무나 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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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경제 (1) - 인간은 이기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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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 이 글은 작은책 1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이 글에 나온 실험에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실제로 돈을(심지어 실제로 1000만원쯤 주고 한 실험도 있습니다) 가질 수 있는 상태에서 나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사랑의 경제 (1) - 인간은 이기적일까? 



1

늘 하는 소리라 아무런 감흥도 없겠지만, 올해도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특히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큰 일이라서 앞 날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세계금융위기)이 벌어지는 가운데, 너무나 뻔하게 망조의 정책만 펴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려니 그야말로 눈 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하여 지난 1년간 어떤 때는 상당히 긴 호흡의 글을 연재하고(예컨대 석달에 걸쳐 ‘연재’된 스웨덴 모델) 또 어쩔 수 없이 짧은 호흡의 현실 분석을 싣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들쑥 날쑥한 글을 써서 죄송할 뿐입니다. 

또 이미 사멸하고 있는 경제학인데도 뭔가 어렵다는 이유로(단순히 수학을 많이 쓴다는 데서 비롯된 관념일텐데) ‘진실’을 독점한 듯 제 생각을 일방적으로 고지하는 짓을 자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서 금년에는 열두달 내내 특별한 경제 이론이나 통계에 관한 지식이 필요 없는 얘기, 아니 오히려 그런 ‘쓸모없는’ 지식이나 선입관 없이 맨 눈으로 내 주위의 평범한 일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저는 매달 기본적인 문제와 기존의 답만 던지고 여러분의 비판이나 의견을 모아서 다음 달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소통’을 실천해 보려는 거죠. 작은책의 게시판이나 하종강선생님의 홈페이지(hadream.com)에 있는 제 방에서, 그리고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토론을 하려 합니다.

2.

앞으로 1년간 주제는 “사랑의 경제”입니다. ‘네모난 세모’처럼 들리시죠? 경제야말로 사랑이라는 낱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경제 생활에도 사랑은 적용됩니다. 예컨대 아이들에게 학비와 용돈으로 500만원을 줄 때 우리는 언젠가 이자까지 쳐서 정확히 돌려 받겠다고 마음먹지 않습니다. 또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는 부모에게 돌려 주겠다고 마음 먹는 것 같지도 않고, 나아가서 고마워 할 일도 아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래와는 전혀 다른 거죠. 물론 경제학자들은 그 돈을 지출하지 않아서 아이들이 잘 못 됐을 때 더 들어갈 비용(기회비용)을 계산한 결과라고 가르칠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의 기대는 우리들에 대한 보상보다는 우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손자들)에게 비슷하게 하는 것일텐데 이건 경제학의 등가교환과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자기 새끼니까, 조금 더 넓혀서 친족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작년에 세계가 위기의 구렁텅이로 급전직하하고 있을 때 아마도 가장 걱정을 많이 한 곳 중 하나가 구세군었을 겁니다. 그러나 모금액은 2007년보다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다소 비싸도 공정무역 커피를 찾는 ‘착한 소비’도 이런 이타적 행위에 속합니다. 이미 눈치 챈 분도 있겠지만 작년 초에 제가 썼던 ‘세박자 경제론’ 중 풀뿌리 경제(학문 용어로는 사회경제, social economy)는 이렇게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의 속성에 기초합니다. 만일 세상이 전부 사랑으로 가득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때  신나서 일하니까 오히려 생산성도 올라가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후대를 사랑하는 당연한 마음이라면 자연을 더 잘 가꿔야 하고(최소한 그대로 남겨둬야 하고), 또 내 이웃들도 잘 살 수 있도록(최소한 범죄를 저지를만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분배에 훨씬 더 신경쓰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모두 행복해질텐데 왜 날로 세상은 각박해지기만 할까요? ‘사랑의 경제는 원래 불가능한 걸까요?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서 그런 세상은 올 수 없다는 답이 떠오를 겁니다. 실제로 경제학이라는 논리체계는 완벽하게 이기적인 인간을 전제로 구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이기적 인간’이 더 유리하도록 사회경제 제도를 만들어내고 학교에서, 또 가정에서 이기심을 훈련시킵니다. 말로는 ‘협동’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지만 협동하는 능력을 완벽하게 말살하고 경쟁만을 몸에 아로새기는 우리의 교육체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인간은 원래 이기적일까요, 아니면 우리 스스로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걸까요? 분명 세상이 변한다는 말 속에는 이런 학습과정이 들어 있습니다. 제 초등학교 시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래, 아니면 배부른 돼지가 될래?”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친구들은 대부분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소크라테스 쪽에 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 질문을 지금 아이들에게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또 여러분의 솔직한 대답은 어떻습니까? 

3. 

꽤 많은 경제학자들이(물론 전체로 보면 극소수이지만) 이런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특히 게임이론과 실험경제학, 진화경제학을 활용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기적 인간을 가정한 게임의 논리적 답(즉 이기적 인간이라는 가정하에서 도달한 가장 합리적인 행위)과 실제의 실험의 결과가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중 세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최후통첩게임이라고 알려진 겁니다. 하늘에서 1000원이 뚝 떨어졌습니다(또는 제가 줬다고 해도 좋습니다). 승연(제 큰 딸 이름입니다)이가 다연(둘째입니다)이에게 이 중 얼마를 제시합니다. 예컨대 100원을 준다고 할 때 다연이가 “언니 고마워”하고 받으면 이 게임은 끝납니다. 승연이가 900원, 다연이가 100원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런데 만일 다연이가 어떤 이유로든 “싫어”라고 하면 하느님이(또는 옆에서 보던 제가) 1000원을 회수합니다.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 데 대한 벌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승연이와 다연이가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이라면 승연이가 얼마를 주겠다고 하는 게 답일까요? 다연이는 또 얼마를 받을 때 만족할까요? 여러분이라면 얼마를 제시하겠습니까?

둘째는 독재자 게임입니다(게임 이름이 다 거시기하죠?). 최후통첩게임과 다 같은데 이번에는 다연이가 거절할 권한이 없습니다. 승연이가 200원을 주겠다고 하면 다연이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대로 분배가 결정됩니다. 이 게임의 논리적 답은 얼마일까요? 또 여러분이 이 게임을 한다면 얼마를 제시하겠습니까?

셋째는 공공재게임이라고 알려진 겁니다. 5명(10명도 좋고 100명도 좋습니다만)에게 200원씩을 줍니다. 각각 얼마씩 내 놓으면 그 돈은 모두를 위해서, 예를 들어 가로등을 세우는 데 쓰입니다. 요즘 정부가 흔히 지자체에 제시하는 매칭펀드 정책처럼 사람들이 내 놓은 액수만큼 돈을 불려줍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300원을 내 놓으면 300원을 더 붙여서 600원이 됩니다. 공공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그리고 나서 5명에게 똑같이(위 예에서는 120원씩) 나눠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얼마씩 내놓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사랑의 경제’를 만들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우리가 활발하게 토론할 수록 사랑의 경제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서 다음 달에 함께 ‘정답’을 찾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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