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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그리고 노무현

 

정태인(경제평론가)


아마 이 글이 실리는 날이 그의 3주기일 것이다. 허세욱. 그는 한미 FTA 협상 타결을 코 앞에 둔 2007년 4월 1일, 회담장소인 하이야트 호텔 앞에서 “한미 FTA 폐기하라”를 외치며 분신했고 4월 15일 운명했다. 나는 그가 분신하기 직전까지 하이야트 호텔에 있었고,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던 문성현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분신 소식을 들었다. 순간 불길한 직감, “아.. 그일지도 모른다”.

그해 3월인가, 부산에서 연달아 두 건의 강연을 마치고 허겁지겁 비행기로 올라와 중앙대에서 또 한번 했으니 내 몸은 말 그대로 파김치였다. 택시 한 대가 스르르 와서 섰고 자신을 택시노련 소속이라고 밝힌 초로의 기사는 극구 택시비를 받지 않았다. “저 같은 사람도 인사는 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노동당 관악협의회가 개최한 강연에서 그는 질의 응답 시간에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이 말이 나에겐 그의 유언이 되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또 한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미 FTA가 구국의 결단이라고 굳게 믿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협정이 추진된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2005년 말이었다(난 5월에 비서관을 그만 둔 상태였다). 부랴 부랴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지만 그를 직접 만난 건 2006년 3월 중순, 이미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한 뒤 한 달여 흐른 때였다. 대통령 생각의 핵심은 “중국이 제조업에서 우리를 곧 따라 잡는다. 그러므로 한미 FTA를 통해 우리의 서비스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한미 FTA의 본질은 한국의 법과 제도를 미국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건 미국도 공언한 바이고,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한미 FTA 관련 청와대 1호 브리핑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낡은 일본식 제도를 버리고 미국식으로 나라를 바꾸는 것이 한미 FTA의 목표다”. 

2008년 말 바로 그 미국에서 대공황 이후 최대의 금융위기가 발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식 의료제도를 바꾸느라 사투를 시작했다. 내로라 하는 미국 서비스산업의 실체가 눈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그런 제도를 한국에 전격적으로 도입하고 또한 아무리 부작용이 심해도 되돌아 갈 길을 끊어 버리는 게 한미 FTA의 핵심이니 노무현 전 대통령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게다. 최근에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봉하마을로 한덕수, 조윤제 등 과거의 경제참모들을 불렀다. 아뿔싸, 한미 FTA의 국내 총 책임자, 그리고 이른바 ‘선진통상국가론’의 최초 제안자를 불렀으니 그들이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국과 월스트리트는 건재할 겁니다”. 

그 전인지 아니면 후인지 모르지만 2008년 1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간 협정을 체결한 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우리 경제와 금융제도 전반에 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라며 “한미 FTA 안에도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고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고쳐야 할 것”이라며 사실상 재협상을 요구했다. 그렇다. 원래 청와대의 뜻대로 2006년 말에 비준까지 완료됐다면 2007년에 월스트리트산 파생상품이 물밀듯 들어왔을 것이고 미국발 경제위기의 쓰나미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삼켜버렸을 것이다. 

이제 이명박 정부의 주미대사가 된 한덕수는 얼마 전, 자동차 부문 재협상이 필요하다는 말을 슬쩍 흘렸다. 그렇다. 분명 오바마 정부는 자동차 시장 추가개방, 또는 별도의 자동차협정을 통해 미국 자동차의 한국 시장 점유율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어떤 용어로 치장하더라도 사실상 재협상은 불가피하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노 전대통령의 말씀대로 모든 부문에 걸쳐 한미 FTA 협정을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특히 그의 죽음으로 기사회생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야말로 그의 유지를 앞장서 실천해야 한다. 하다 못해 한미 FTA 재검토가 왜 야권 단일화의 전제조건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허세욱과 노무현, 그들이 생을 마감한 이 아름다운 봄날에 나는 두 분의 죽음이 우리 역사에 나란히 빛나게 할 방도를 궁리한다. 꽃들이 눈부시다. 침침한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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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 피디저널에 실릴 글입니다. 


--- 아래 글은 위키백과에서 ---

허세욱(1953년 5월 9일 경기도 안성 ~ 2007년 4월 15일 서울 영등포구)은 대한민국의 택시 기사·노동운동가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2007년에는 민주노동당 서울시지구당 대의원을 지냈다. 시민단체 활동으로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2007년 4월 1일 한미FTA에 반대하여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 호텔 정문 부근에서 분신하였다.

 

 

유서

다음은 4월 1일에 공개된 유서 내용이다.

망국적 한미FTA 폐지하자.

굴욕 졸속 반민주적 협상을 중지하라.

나는 이 나라의 민중을 구한다는 생각이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비열한 반통일적인 단체는 각성하고 우월주의적 생각을 버려라.

졸속 밀실적인 협상 내용을 명백히 공개 홍보하기 전에 체결하지 마라. 우리나라 법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은 곧 술책이다.

의정부 여중생을 우롱하듯 감투쓰고 죽이고 두번 죽이지마라 여중생의 한을 풀자.

토론을 강조하면서 실제로 평택기지이전, 한미FTA 토론한 적 없다. 숭고한 민중을 우롱하지 마라.

실제로 4대 선결조건, 투자자 정부제소건, 비위반제소권 합의해주고 의제도 없는 쌀을 연막전술로 펴서 쇠고기 수입하지 마라. 언론을 오도하고 국민을 우롱하지 마라.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은 싫다. 나는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다. 저 멀리 가서도 묵묵히 꾸준히 민주노총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민주택시 조합원 2007.4.1 허세욱 드림.

15일에는 두 번재 유서가 공개되었다.

한독식구
나를 대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읍니다.

나는 절대로 위에 설려고 하지 안았읍니다.

모금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전부 비정규직이니까.

동지들에게 부탁(나를 아는 동지)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전국에 있는 미군기지에 뿌려서 밤새도록 미국놈들 괴롭히게 해주십시요. 효순미선 한을 갚고. 돈 벌금은 내돈으로 부탁.

20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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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경제학 (3), (4)

정태인.jpg

 

정태인(경제평론가)

 

 

 

 

사랑의 경제학 (3) - 우리는 언제 천사가 되는가


제 잘못입니다. 1월호의 구체적인 게임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다양한 답변을 해 주셨지만 2월호의 추상적인 질문, “언제 인간은 이타적이 될까?”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사실 막연합니다. 제가 이 연재를 시작했을 때 밝힌 것 처럼 이 세상 그 누구도 ‘정답’을 모른다는 게 진실일 겁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이타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치지만 현실에서 는 그 주옥같은 교리들이 별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서로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얘기를 해나가야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난 10년 동안 학계에서 논의된 것들이 있지만 저 역시 전공이 아니라서 상당한 논쟁 끝에 합의에 이른 몇몇 결론들만 알 뿐입니다. 여전히 논의는 초보 단계라서 고백하건대 ‘이기적’, ‘이타적’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의조차 애매합니다(오직 분명한 건 경제학이 상정한 인간의 행동원리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이 없는 어머니 사랑”과 동네 단골 

우선 사랑하면 떠오르는 건 “가이 없는 어머니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행동은 실로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드라마에는 아귀같은 어머니들도 나오지만 보통 아이들에게 쏟는 정을 노후자금의 양과 비교하는 어머니는 없을 겁니다. 아버진 조금 덜 한 것 같지만 아마도 가족 관계가  대체로 그렇고 조금 범위를 넓히면 혈연관계에서도 이해타산을 넘어선 이타적 행위는 곧잘 일어납니다. 이렇게 발휘되는 이타성은 아마도 피가 섞인 정도가 적어질수록 줄어들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행위란 바로 우리의 유전자가 하는 이기적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이기적 유전자”) 그렇다 해도 인간의 차원에서 해석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잠깐, 남녀 간의 사랑에서 나타나는 선물 공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돈 한푼 없던 대학생 시절, 없는 솜씨로 직접 그림을 그려서 선물을 하기도 했습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고 내일 헤어지면 바로 남남인데 목숨까지 바치려는 그 열정은 도대체 뭘까요? 예의 유전자론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이기적 행위라고 하겠지만... 이 경우에는 사랑을 얻는 데서 오는 만족감(게임이론의 보수)이 무한대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에로스도 정답의 후보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에게 수천억원, 수조원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면 틀림없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질테니까요. 불행하게도 남녀 간의 사랑에 존재하는 독점성(이건 필연적인 걸까요?)은 제3자에게 어쩌면 그 이상의 좌절을 낳고 심지어 살인까지도 불러 일으키니 이 답에는 어떤 유보를 남겨 둬야할 것 같습니다. 

세번째로는 매일 만나고 또 내일도 만날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이기적 행위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직접적인 보복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왕따를 당할 가능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호에 잠깐 얘기한 게임이론 식으로 말하자면 무한 반복 게임(또는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게임)에서는 이타적 행위가 득이 됩니다. 현실의 예를 찾자면 단골이 그렇습니다. 요즘의 24시 영업점은 사실 익명의 시장거래에 가깝지만, 동네 구멍가게에서 매일 야채를 사러 오는 고객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죠. 오늘 들어온 생선에 문제가 있다면 뜨내기 손님에겐 모르는 척 팔지 모르지만 단골에게는 “오늘 건 물이 별로 좋지 않아. 내일 사, 아님 쇠고기를 사”라고 말할 겁니다. 이렇듯 신뢰에 기초한 장기 거래는 시장경제에서도 매우 효율적입니다. 최근 대규모 리콜 사태로 완전히 체면을 구겼지만 도요타의 경쟁력을 예찬할 때 이런 논의가 사용됐습니다. 

월드컵과 노사모

종교라든가, 코스프레 동호회라든가 하는 공동체에서도 이타성은 빛을 발합니다.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우리는 종종 냉정하게 행동합니다. 그가 싫어서라기 보다 모르기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또는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냉정이야말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전제입니다. 그러나 끼리 끼리 모이면 곧잘 협조적인 행위를 합니다. 최근 오바마를 당선시킨 힘이나 그 원조격인 노사모의 힘을 생각해 보십시오.  집단에 속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 뿐 아니라 자기 내부의 창의력이 고양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꽤 많은 경우에 협조는 경제적으로도 우수한 성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이타적인 집단의 크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집단 내부에서는 서로를 돕기 위한 경쟁, 또는 전체의 가치(목표)를 향한 경쟁이 일어나고 최선으로 보이는 행위는 곧잘 모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지극히 이타적인 집단이 바깥의 집단과 싸우기 위해 대단히 비이성적인 양태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즉 외부의 적 때문에 내부의 협력, 이타성이 고양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부의 협력은 외부와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월드컵 축구의 경험도 있지만 남북한의 지배자들은 서로를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내부의 독재를 합리화하기도 했습니다. 종교간 전쟁이 가장 잔인한 살육을 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죠.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협력적 행위, 또는 이타적 행위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건 현실을 잘 이해하게 되어서(게임의 그 구조를 잘 이해하게 되어서) 그럴 수도 있고, 토론과정에서 공동의 가치, 또는 의무감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 호에 소개한 공공재 게임 중간에 토론 기회를 가지면 기부 액수는 현저하게 늘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작은책 독자라면 이타성이 발휘될 조건을 잘 살펴서 서로 충분히 토론한 후 특정한 제도를 만든다면 훨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실 겁니다. 예. 바로 그게 다음 달 주제입니다. 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 물질적으로 못 살 때보다 지금 더 사는 게 훨씬 더 팍팍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제도나 분위기가  이기적인 사람에게 훨씬 더 유리하게 변했다는 것도 들 수 있을 겁니다. 돈을 제외한 어떤 가치도 그저 립서비스일 뿐 실제로는 돈 많은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존중받는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가난한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 뿐 아니라 자식에게도 그냥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인 걸 뿌리치지 못하거나 사랑에 목 매달다 생활이 흐트러지는 사람은 ‘쿨하지 못한 찌질이’일 뿐입니다. 부동산투기나 주식투기로 돈 번 사람, 사교육을 시켜서 아이를 일류대학에 보낸 부모를 겉으론 비아냥거려도 속으론 하냥 부러워 하지 않나요? 이타성이 존중받는 제도란 어떤 걸까요? 그렇지만 위에서 든 아주 간단한 이타성의 예조차 사회적 제도로 번역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역시 “대화가 필요해!”
 


사랑의 경제학 (4) - 협력의 제도화 

  
이타성? 질투?

지난 호에 인간이 이타성을 발휘하는 경우로 혈연(어머니의 사랑), 무한히 반복되는 행위(동네단골), 남녀 간의 사랑, 이해공동체 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질투나 시기의 가능성 때문에 유보를 해 뒀었죠. 협력의 제도화를 얘기하기에 앞서서 이 문제에 관해 잠깐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최정규교수는 “이타적 인간의 출현”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최정규박사가 말하는 이타주의자는 바로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라는 지인의 글을 보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썼습니다. 아랍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전사들이야말로 이타적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사랑에 수반되는 질투나 시기까지 고려하면 도대체 ‘이타적’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런 혼란의 진앙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경제학에서 정의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물질적 이익만 추구한다는 점에서 스크루지 영감을 떠올리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찌질한’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쿨’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동안 소개한 게임에서 드러나는 인간은 남의 행복을 고려하고(약한 상호성), 심지어 손해를 보더라도 이기적 인간을 응징하기도 합니다(강한 상호성). 즉 우리는 남을 생각하고, 그 남의 눈에 비친 나를 생각하는 사람,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닌 어떤 사람을 총칭해서 ‘이타적 인간’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러니까 보통 의미의 ‘이타적 인간’만 여기에 속하는 게 아니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 하는” 사람들도 포함되는 거죠. 즉 이타적 인간이라기 보다 사타적(思他的)인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우리 안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금방 수긍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측은지심’이라고 설파한 마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반면  질투로 숨이 막히는 상황도 모두 경험했을 겁니다(그런 경험이 없는 분은 행복한 걸까요? 아니면 불행한 걸까요?^^). 어느 쪽이든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아닌거죠. 

협력의 제도화 

그런데 우리 사회는, 특히 경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전제로 짜여져 있습니다. 물론 기나긴 인류 역사를 보면 기껏 300년이라는 지극히 짧은 기간만 그런 냉혈한(쿨한 인간)을 표준 인간형으로 상정한 겁니다. 또 “사랑의 경제학(1)에서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얘기를 했습니다만 지난 40년 동안만 봐도 요즘에 이르러 ‘쿨한 인간’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눈 밝은 독자는 이미 눈치챘겠지만 인간이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측면도 있는 겁니다. 즉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화’가 작용하는 겁니다. 남들이 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들이 이타성을 발휘하는 경우를 일반화해서 제도를 만든다면 사람들이 거기에 적응해서 서로 협력하는, 따뜻하면서도 생산성이 높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기적 인간이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죄수의 딜레마) 협력해를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난 10여년 제가 계속 몰두한 것도 바로 이 협력의 제도화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유치원에서 벌어진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서구에서는 수업이 끝났을 때 보통 부모나 대리인이 오지 않으면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지각하면 선생님들은 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계속 돌봐야 합니다. 이런 폐해를 없애려고 유치원에서 30분 늦으면 만원, 한시간 늦으면 2만원, 한시간 반이면 3만원 식으로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불행하게도 지각하는 부모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말하자면 벌금이 ‘면죄부’가 되어 버린 겁니다. 결국 이 제도는 실패로 끝났고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벌금이 없어지자 지각하는 부모는 더 늘어났습니다.  

이 벌금제도는 분명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전제로 만들어진 겁니다. 부모들은 이 제도에 맞춰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퇴근하지 못하는 선생님한테 대한 미안한 마음이 없어진 겁니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 제도를 만들 때 언제나 발생합니다. 정책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처벌 제도를 정교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사람들은 딱 처벌 받지 않을 정도까지만 행동하게 됩니다. 

아내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해온 내 일생은 주례로서 적절하지 않습니다. 해서 대부분 거절합니다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주례를 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기쁨에 달뜬 신혼부부에게 “서로 미안해 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부탁합니다. 아직도 남성 우위가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뜻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평등의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계약은 불완전합니다. 어찌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경우를 미리 써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계약서에 규정돼 있는 의무 이상은 절대로 하지 않는 부작용이 생기고 때로는 해석을 둘러싼 분쟁도 일어나게 됩니다. 수요일 밤새도록 일한 아내/남편에게 계약서대로 목요일 아침을 차리라고 요구하면 서운한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의 경우가 발생하면  ‘보복’을 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의 제도화라는 결혼이 온통 이기적 행동으로 가득 채워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평등의 계약이 필요합니다만 거기에 더해서 서로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계약서 이상의 좋은 결과를 낳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정책을 만드는 일이 그리 쉬울까요? 정책을 만들 때 우리는 제도를 약탈하는 사람(모든 제도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걸 악용할 방법도 언제나 찾아낼 수 있습니다)을 막으려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제도를 만들게 됩니다. 이제 사람들은 유치원 실험에서처럼 그 기준에 맞춰서 행동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죄수의 딜레마” 현상이 곳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각 개인은 최선의 합리적 선택을 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나쁜 결과를 얻게 되는 거죠. 

우리가 그동안 간단하게 살펴 본 인간의 본성, 또는 행위 동기에 대한 이해는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릅니다. 다음 호에는 당연히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행동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경제 행위, 즉 시장원리에 따른 행위부터 들춰 보고 서로 협력하는 사회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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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_"4대강은 살리고 아이들은 죽인다?" - 2010년 예산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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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4대강 살리고 아이들은 죽인다?


 


24분만에 통과된 예산, 재정적자는 어찌 될까?


지난 12월 31일 저녁 8시 39분, 김형오 국회의장은 예산안을 직권상정해서 불과 24분 만에 통과시켰다. 심재철 예결위원장은 속기사석 부근에서 보고를 했고, 반대토론을 신청한 박선영의원(자유선진당)은 마이크도 잡지 못했다. 예산부수법안이 법사위를 통과하기도 전에 예산안을 심사했으니 국회법 84조를 어긴 불법이고, 자기들이 의원총회를 하던 곳으로 회의장을 급히 변경시켰으니 한나라당은 예의 후안무치를 또 한번 과시했다. 이른바 “4대강 살리기”를 위해서 이런 날치기를 부추겼다는데 예산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예산안이 통과되자마자 7분만에 기자들에게 배포한 기획재정부의 “보도참고자료”와 예산안 Q&A의 친절한 설명부터 들어 보자. 두 자료 모두 맨 앞에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의 재정적자가 51조원으로 GDP의 5%였고 이 정도의 수준이면 외적 조건에 따라선 외환위기를 맞기 십상이다. 다음 그림을 보면 이명박 정부 들어 재정수지와 국가부채 문제가 급격히 악화됐다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PIC121900.gif 


 

* 기획재정부 예산안 Q&A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정지출을 늘릴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재정적자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세계 최고의 속도로 재정적자가 증가한 탓을 미국발 위기에만 돌릴 수는 없다. 경제위기가 닥쳤는데도 작년에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 줬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번 세법을 바꾸면, 다시 개정하지 않는 한 그 효과가 매년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다음 표를 보면 2009년에 통과된 세제개편안에 따라 금년부터는

 

2008년 세제개편안 세수감소 효과 (단위: 조원)

 

 

2008 

 2009

 2010

 2011

 2012

 합계

전년 대비방식 

 5.5

 10.5

 13.3

 3.8

 0.4

 33.5

 기준년 대비방식 

 5.5

 12.4

 23.2

 24.6

 24.4

 90.2

* 국회예산정책처 2009

 


 

기준년 대비 25조원(GDP의 2.5%)내외로 매년 세수가 감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지난 두 정부 동안 거의 균형을 이뤘던 재정이 펑크날 수 밖에 없다(그림 참조).


금년에 정부가 예상하는 적자규모는 30조여원으로 금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든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세제개편안에 따라 줄어드는 세수는 작년 대비 13.3조원인데 적자규모는 오히려 20조원이나 감소했다. 그렇다면 지출을 바짝 죄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총지출(예산+기금)은 작년 301.8조원(추경예산 기준, 정부 발표는 본예산 기준인데 이건 눈속임이다)에서 금년 292.8조원으로 9조원 감소했다. 나머지는 세수를 증가시켜 메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항목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주먹구구요(금년에 명목으로 6.6%의 경제성장율을 기록할 거란다), 조삼모사(내년에 받을 세금을 미리 거둬 들인단다)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세출 9조원은 어디서 줄어들었을까?


줄어든 건 복지와 교육 예산이다


작년 추경예산과 대비해 볼 때 확연하게 줄어든 부문은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다. 액수로 5.7조원, -27.4%이다.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는지 기획재정부는 친절하게 내역을 설명했다. 작년에 본예산과 추경예산을 더해서 08년에 비해 무려 65%(8.2조원)을 늘렸는데 대부분 자금경색 완화를 위해 신용보증기금과 긴급경영지원 자금의 증액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기간 동안 평균 2% 미만으로 늘어나던 액수를 갑자기 30배 이상 증가시켰으니 패닉 상태를 벗어난 지금 액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하지만 현재 수준도 여전히 08에 비해 30% 가까이 늘어난 상태다.


다음으로 보아야 할 부분은 SOC, 즉 토목건설부문인데 액수로 25.5조원에서 25.1조원으로 4000억원(약 -1.6%)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분야 역시 참여정부 때 평균 2%남짓 늘어나던 예산을 작년에 무려 30% 이상 증가시킨 바 있다. 그리곤 위 분야와 달리 거의 감액되지 않았으니 여전히 우리는 토목건설에 목매고 있는 것이다.


교육예산도 줄어들었다. 작년 추경예산 39.2조원에서 금년 38.3조원으로 9000억원(약 -2.3%) 감소했다. 교육예산은 참여정부나 이명박정부나 똑같이 매년 9% 내외로 증가했는데 금년에는 오히려 쪼그라든 것이다. 사교육비는 매년 10% 이상 뛰고 있는데 공교육비는 기는 정도를 넘어 뒷걸음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금년 예산의 자랑은 복지분야이다. 금년 복지지출은 81.2조원으로 작년 본 예산(74.6조원)에 비해 6.6조원(8.9%) 증가했고 총지출 증가율의 세배에 가깝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Q&A의 두배가 훨씬 넘는 분량으로 이명박 정부의 “맞춤형 복지”를 계층별로 친절하게 홍보하고 있다. 이 정도면 가히 복지천국이다. 그러나 추경예산(복지분야 80.4조원)을 기준으로 하면 복지예산은 8000억원(1.0%) 증가했을 뿐이다. 더구나 복지지출에는 자연증가분이 있다. 연금을 받는 노령 인구가 늘어나면 복지 지출은 매년 자동적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으며 정부가 제아무리 줄이고 싶어 안달을 해도 결코 줄일 수 없다. 그 액수가 금년에 3조원이 넘는다. 또 보금자리주택 13만호 건설 관련 융자금도 복지예산에 포함시켰는데 그 액수는 2.6조원이다. 조금 싸게 빌려 줬다고 해서 원금과 이자 차액을 모두 예산에 포함시킨 것이다. 결국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서민들을 위해 정부가 새로 책정한 예산이 실제로는 5조원 가까이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가짓 수는 늘었는데 거기에 쓰일 예산은 오히려 줄어들었으니 화려한 홍보는 눈속임 아니면 언발에 오줌누기다.


이나마 정부의 뜻대로 시행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위의 모든 수치가 내년 실질 경제성장율 4%(명목으로 6.6%)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치는 민간소비가 금년에 비해 3.6%나 늘어나고 설비투자 역시 두자릿 수 감소세에서 11.4% 증가로 급반전해야 한다(한은 2010년 경제전망). 금년 소비가 0.3% 증가를 달성한 것도 자동차 세제혜택 등 특수 요인에 의한 것이었는데 과연 사람들이 이제 살만 하다며 내구재 소비를 늘릴까? 세계의 불확실성이 여전한데도 기업인들은 갑자기 대대적 설비투자를 시작할까? 더구나 세계경제는 여전히 넘쳐나는 돈 밑에 도사린 폭탄들 위에 세워진 누각이고 우리 경제 역시 부동산 거품 위에 놓여 있다. 이번 날치기 사건을 부른 4대강 사업이란 강변을 개발하는 대규모 리조트 사업(보도자료에 정확히 “세계적인 수변공간 정비”, “수변공간 중심의 관광, 레저산업 활성화”라고 표현 돼 있다)으로 이야말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불러 온 주범이다. 제목이 틀렸다. 이번 예산은 강을 죽이고 우리 아이들도 죽일 것이다. 내가 틀리길 바란다.


덧글 : 그럼 서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할 생각은 아예 접고 빚을 줄여야 한다. 솔선수범! 나는 집 팔아 빚을 없앴고 전세로 들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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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경제 (2) - 상호적 인간?_정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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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사랑의 경제 (2) - 상호적 인간?

 


“잠정 결론” - 상호적 인간(homo reciprocity)

지난 호에 내 드린 문제들은 실험경제학/진화경제학에서는 수천번 되풀이됐고 이제 어느 정도 ‘잠정 결론’에 도달한 것들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소개한 책은 최정규 경북대교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입니다. 지난 대선의 결과 때문에, 혹은 실연 때문에 “역시 인간이라는 종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거나, 아니면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라고 믿고 싶은 분들은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최후통첩게임의 논리적 답은 1원(최소 단위)입니다. 이렇게 거슬러서 추론하는 겁니다. 다연이 처지에서 제안을 거부하면 아무 것도 손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승연이가 무정하게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지 않는 한, 제안을 받아 들이는 것이 무조건 이익입니다(경제학의 가정대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면). 그리고 승연이는 다연이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건 게임이론의 기본 가정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승연이는 1원을 제시해서 999원을 갖게 됩니다. 

실제 결과는 어땠을까요? 대부분의 제안자(승연이에 해당하는 사람들)는 400원에서 500원 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500원이 제일 많았고 250원 이하일 때는 응답자(다연이)가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대부분의 실험은 경제학과, 경영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고, 심지어 미국 최고 대학의 경제학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물론 평균 액수가 조금 낮아집니다. 하하). 이 게임을 반복해서 실시했을 때 초지일관 이기적으로 행동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이기적 행동은 1/4을 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첫번째 결과를 놓고도 해석은 구구합니다. 이 때문에 더 복잡한 실험이 행해졌는데 상대방을 다시는 볼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액수가 훨씬 커지더라도 (우리 월급의 세배쯤 되는 돈을 걸고 해도) 결과는 유사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17년 전 쯤이었습니다. 당시에 유학 가 있던 최정규교수가 사회경제학회의 피시 통신 게시판에 문제를 냈었죠. 그 때 제가 쓴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500원 이상이 제안되면 응답자(다연)는 무조건 받아들인다. 그러나 액수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이 나쁜 놈이...’하는 생각이 커질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제안자(승연)도 짐작할 수 있다. 자기도 무일푼이 되는 경우를 걱정하게 될 것이고 결국 500원보다 조금 낮은 액수를 부를 것이다. 그 차이는 자기가 제안자가 된 행운의 댓가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거죠. 실험의 결과를 거의 정확하게 맞췄지만 그건 곧 제가 경제학의 A,B,C도 모르는 비논리적 인간이라는 걸 증명한 겁니다ㅠㅠ. 

그런데 이 답은 이후에 상호성(reciprocity, 저는 이 개념이 관련된 다른 분야도 고려할 때는 호혜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이라는 인간 본성의 하나로 정식화됩니다. 인간은 남이 좋게 대하면 자신도 좋게 대하지만(“웃는 낯에 침 뱉으랴”) 상대방이 모욕을 주거나 넘어야 하지 않을 선을 넘을 때는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처벌을 한다는 게 (강한)상호성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비슷하죠? 또 칸트의 황금율(“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과도 통합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얘기를 넘어서는 거 같죠? 분명 그건 종교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하면 제 추론은 이렇게까지 확대 해석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자기도 무일푼이 되는 걸 막기 위해 500원에 가까운 액수를 제시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것도 결국 이기적 행위라는 겁니다. 독재자게임은 이런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 게임은 상대방이 거절도 못하니까 한 푼도 안 주는 게 논리적인 답입니다. 과연 게임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조건을 더 하느냐에 따라 액수는 달라졌지만 답은 언제나 플러스로 나왔고 500원도 꽤 많이 제시됐습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행복’에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뭔가 불행한 존재가 된다는 얘깁니다. 

인간은 실로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결투를 해서 결국 죽는 중세시대의 기사라든가, 화랑 관창처럼 자기 목숨을 바칠 수도 있고, 조국 해방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건 투사들이 있었고 촛불을 들고 줄기차게 광장으로 나섰던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이기적 인간(homo economicus)이라기 보다 상호적 인간(homo reciprocity)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공동체는 어떻게 운영될까?

공공재게임은 공동체의 운영에 시사점을 줍니다. 공공재는 주류 경제학에서 인정하는 대표적인 ‘시장실패’의 사례입니다.  흔히 드는 예는 국방이나 치안인데 공중파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덕여왕을 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도 아니고(비포화성), 내가 밉다고(또는 돈을 안 낸다고) 나만 못 보게 할 방법도 없습니다(비배제성). 지난 달에 문제로 낸 마을의 가로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이기적 인간이라면 난 가로등 없이도 잘 다닐 수 있다며 돈을 내지 않고 가로등 덕을 한 밤 중에 보려 할 겁니다. 이른바 무임승차자(free rider)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모두 그런 머리를 굴린다면 가로등은 세워질 수가 없겠죠. 그래서 주류 경제학자들도 공공재는 국가가 공급해야 한다고 한발 물러섰습니다. 하긴 신자유주의는 이런 논리를 넘어서 국가가 공공재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면 서비스가 나빠진다면서 다시 공공재를 시장에 맡기려고 합니다. 바로 이명박 정부가 지금 하는 정책들입니다. 

과연 게임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유명한 페르와 슈미트의 게임(1999)의 경우 첫 번째 실험에서, 우리 게임의 가정으로 하면 600원 쯤 나왔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이라면 한푼도 안 나와야 하는데 꽤 많은 돈이 나온 거죠. 평균으로 치면 1인당 120원, 즉 자기 재산의 3/5쯤 내 놓은 겁니다. 그럼 매칭펀드를 합쳐서 1200원을 돌려 주니까 1인당 평균 재산은 320(1200/5 + 400/5)원으로 불어납니다. 그런데 한푼도 안 낸 사람은 자기 돈 200원에 돌려받은 돈 240원(공공재의 이익)을 합쳐서 440원이 되고 200원 전부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내 놓은 ‘착한’ 사람은 240원만 쥐게 됩니다. 

돈을 많이 낸 사람은 화가 날 것이고(아주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만족할까요? 하하) 돈을 적게 낸 사람은, 어쩌면 속으로 자신의 똑똑함을 자화자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을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요? 횟수가 거듭될수록 사람들이 내는 돈은 점점 적어집니다. 돈 안 낸 사람을 처벌할 방법이 없으니 나도 돈 안 내서 응징(비록 자해일지라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나도 이기적으로 행동하자며 따라 한 것일수도 있겠죠. 결국 10번째 게임을 반복하면 70% 이상이 한푼도 안 내고, 나머지도 아주 소액을 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경제학이 예측하는 바와 비슷해진 거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게임에 무임승차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붙이면 각자 내는 액수가 오히려 늘어나거나 거의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처음 게임에서 돈을 적게 낸 것은 응징의 의미가 컸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번 달 질문은 어쩌면 더 간단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일까요, 아니면 이타적일까요? 또 우리는 어떨 때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어떨 땐 헐크처럼 정반대의 인간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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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_정태인

 * 이번 주 피디저널에 실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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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게르니카 



내 공부방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인민 전선(공화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에 대공습이 있었다. 아비규환을 이렇듯 절절하게 표현하는 예술가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공포에 질려 초점을 잃은 눈들이 사면팔방에 불안을 전염시키고 있다. ‘입체파’의 기법이 한껏 효과를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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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세계경제는 말 그대로 공포에 떨었다. 끝없이 솟아오르던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바벨탑은 마비됐고 이미 갈갈이 찢어진 세계가 불통의 언어로 대립하는 일만 남은 것으로 보였다. 30년대 대공황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것 처럼... 

다행히 인류는 1930년대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 전 세계의 중앙은행이 달러와 자국 통화를 대대적으로 쏟아 부어서 패닉이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막았고 동시에 재정 지출을 늘렸다. 1년 만에 세계는 패닉에서 “불안 속의 낙관”으로 돌아섰다. 아니, 한국에선 낙관이 흘러넘치고 있다. 코 앞에 내외의 위기가 닥쳐 있는데도 7% 경제성장을 내걸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치매걸린 노인처럼 또 다시 토건의 성장신화를 외치고 있다(임기 말에는 기어코 7%를 달성한단다). 

과연 그럴까? 내년 5% 내외의 성장을 예측하고 있는 정부나 민간기관은 모두 3% 정도의 세계경제전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불행히도 붕괴 직전의 바벨탑은 설계가 변경되지 않았다.  대형금융기관이 위험한 투자를 감행해서 성공하면 이익을 챙기고 실패하면 납세자가 손실을 떠안는 “대마불사”의 구조는 여전하다. 위험 분산의 묘약으로 믿었던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도 구체화되지 못한 채, 상업용 부동산이나 자동차 대출 등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똑같은 성격의 폭탄들이 과잉 유동성 밑에 숨어 있다. 더구나 더 장기적이고 더 풀기 어려운 글로벌 불균형 역시 아무런 대책 없이 지금도 부풀어 오르고 있다. 또한 세계경제가 현재의 예측대로 순조롭게 돌아 간다면 지금 같은 유가나 원자재 가격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먹잇감을 찾는 과잉 유동성이 원자재 선물시장으로 몰려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의 낙관적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라는 형식이 큰 몫을 했다. 작년 4/4분기와 금년 1/4분기가 워낙 나빴기 때문에 정부의 온갖 정책이 다 쏟아진 금년 2/4분기와 3/4분기의 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선 건 당연하다(이른바 기저 효과). 그러나 지난 3분기 동안, 즉 봄, 여름, 가을 동안의 경제성장율은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여전히 -1.8%에 머무르고 있다(한은 3/4분기 국민소득(잠정), 12.4). 민간소비는 -1.5%, 설비투자는 -15.5%였고 내수 전체로 -6.8%였으니 서민들의 체감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수출감소(-5.3%)보다 수입감소(-13.2%)가 더 커서 GDP의 폭락을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 내년에 어떻게 갑자기 4.6%(한국은행, 2010년 경제전망, 12.11)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일까? 민간소비가 금년에 비해 3.6%나 늘어나고 설비투자 역시 두자릿 수 감소세에서 11.4% 증가로 급반전할 것이라는 예측이 그 비밀이다. 금년 소비가 이 정도에 머무른 것도 자동차 세제혜택 등 특수 요인에 의한 것이었는데 과연 사람들이 이제 살만 하다며 내구재 소비를 늘릴까? 세계의 불확실성이 여전한데도 기업인들은 갑자기 대대적 설비투자를 시작할까? 불행히도 중장기 기대의 급반전은 케인스의 용어로 “확률관계 0”에 가깝다. 

물론 이들 기관의 예측이 조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현재의 수치들을 과거의 모형에 넣어서 나온 결과이고, 그것은 최근의 호전 기미를 단순 연장했다는 걸 의미한다. 정말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면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체계적으로 부동산 거품을 빼는 일이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4대강 등 토목건설에 목을 매달고, 반면 가장 효율적인 장기 투자인 교육과 의료 등 복지의 비중은 줄이고 있다. 게르니카의 공포는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  

잉그릿드 버그만의 청순한 미소는 스페인 내전 속에서 피어났다(“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게르니카의 바스크 지역에서는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몬드라곤 협동조합이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경쟁과 독선이 아닌, 협동과 사랑이 우리의 희망이다. 또 다시 뉴타운과 특목고 등 나와 내 가족만은 성공할 수 있다는 맹신의 주문에서 빠져 나올 때 비로소 우리 아이들을 게르니카의 공포로부터 구할 수 있다. 
***

다 못 쓴 얘기.  나이 50줄에 들어서서 그럴까?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내가 세상에 진 빚을 생각한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진 그 수 없는 빚들... 이제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을 다 접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진 빚부터 남은 생애까지 갚아야겠다. 그래도 못 갚을 것이 너무나 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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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경제 (1) - 인간은 이기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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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 이 글은 작은책 1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이 글에 나온 실험에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실제로 돈을(심지어 실제로 1000만원쯤 주고 한 실험도 있습니다) 가질 수 있는 상태에서 나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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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경제 (1) - 인간은 이기적일까? 



1

늘 하는 소리라 아무런 감흥도 없겠지만, 올해도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특히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큰 일이라서 앞 날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세계금융위기)이 벌어지는 가운데, 너무나 뻔하게 망조의 정책만 펴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려니 그야말로 눈 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하여 지난 1년간 어떤 때는 상당히 긴 호흡의 글을 연재하고(예컨대 석달에 걸쳐 ‘연재’된 스웨덴 모델) 또 어쩔 수 없이 짧은 호흡의 현실 분석을 싣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들쑥 날쑥한 글을 써서 죄송할 뿐입니다. 

또 이미 사멸하고 있는 경제학인데도 뭔가 어렵다는 이유로(단순히 수학을 많이 쓴다는 데서 비롯된 관념일텐데) ‘진실’을 독점한 듯 제 생각을 일방적으로 고지하는 짓을 자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서 금년에는 열두달 내내 특별한 경제 이론이나 통계에 관한 지식이 필요 없는 얘기, 아니 오히려 그런 ‘쓸모없는’ 지식이나 선입관 없이 맨 눈으로 내 주위의 평범한 일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저는 매달 기본적인 문제와 기존의 답만 던지고 여러분의 비판이나 의견을 모아서 다음 달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소통’을 실천해 보려는 거죠. 작은책의 게시판이나 하종강선생님의 홈페이지(hadream.com)에 있는 제 방에서, 그리고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토론을 하려 합니다.

2.

앞으로 1년간 주제는 “사랑의 경제”입니다. ‘네모난 세모’처럼 들리시죠? 경제야말로 사랑이라는 낱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경제 생활에도 사랑은 적용됩니다. 예컨대 아이들에게 학비와 용돈으로 500만원을 줄 때 우리는 언젠가 이자까지 쳐서 정확히 돌려 받겠다고 마음먹지 않습니다. 또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는 부모에게 돌려 주겠다고 마음 먹는 것 같지도 않고, 나아가서 고마워 할 일도 아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래와는 전혀 다른 거죠. 물론 경제학자들은 그 돈을 지출하지 않아서 아이들이 잘 못 됐을 때 더 들어갈 비용(기회비용)을 계산한 결과라고 가르칠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의 기대는 우리들에 대한 보상보다는 우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손자들)에게 비슷하게 하는 것일텐데 이건 경제학의 등가교환과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자기 새끼니까, 조금 더 넓혀서 친족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작년에 세계가 위기의 구렁텅이로 급전직하하고 있을 때 아마도 가장 걱정을 많이 한 곳 중 하나가 구세군었을 겁니다. 그러나 모금액은 2007년보다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다소 비싸도 공정무역 커피를 찾는 ‘착한 소비’도 이런 이타적 행위에 속합니다. 이미 눈치 챈 분도 있겠지만 작년 초에 제가 썼던 ‘세박자 경제론’ 중 풀뿌리 경제(학문 용어로는 사회경제, social economy)는 이렇게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의 속성에 기초합니다. 만일 세상이 전부 사랑으로 가득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때  신나서 일하니까 오히려 생산성도 올라가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후대를 사랑하는 당연한 마음이라면 자연을 더 잘 가꿔야 하고(최소한 그대로 남겨둬야 하고), 또 내 이웃들도 잘 살 수 있도록(최소한 범죄를 저지를만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분배에 훨씬 더 신경쓰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모두 행복해질텐데 왜 날로 세상은 각박해지기만 할까요? ‘사랑의 경제는 원래 불가능한 걸까요?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서 그런 세상은 올 수 없다는 답이 떠오를 겁니다. 실제로 경제학이라는 논리체계는 완벽하게 이기적인 인간을 전제로 구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이기적 인간’이 더 유리하도록 사회경제 제도를 만들어내고 학교에서, 또 가정에서 이기심을 훈련시킵니다. 말로는 ‘협동’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지만 협동하는 능력을 완벽하게 말살하고 경쟁만을 몸에 아로새기는 우리의 교육체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인간은 원래 이기적일까요, 아니면 우리 스스로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걸까요? 분명 세상이 변한다는 말 속에는 이런 학습과정이 들어 있습니다. 제 초등학교 시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래, 아니면 배부른 돼지가 될래?”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친구들은 대부분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소크라테스 쪽에 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 질문을 지금 아이들에게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또 여러분의 솔직한 대답은 어떻습니까? 

3. 

꽤 많은 경제학자들이(물론 전체로 보면 극소수이지만) 이런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특히 게임이론과 실험경제학, 진화경제학을 활용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기적 인간을 가정한 게임의 논리적 답(즉 이기적 인간이라는 가정하에서 도달한 가장 합리적인 행위)과 실제의 실험의 결과가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중 세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최후통첩게임이라고 알려진 겁니다. 하늘에서 1000원이 뚝 떨어졌습니다(또는 제가 줬다고 해도 좋습니다). 승연(제 큰 딸 이름입니다)이가 다연(둘째입니다)이에게 이 중 얼마를 제시합니다. 예컨대 100원을 준다고 할 때 다연이가 “언니 고마워”하고 받으면 이 게임은 끝납니다. 승연이가 900원, 다연이가 100원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런데 만일 다연이가 어떤 이유로든 “싫어”라고 하면 하느님이(또는 옆에서 보던 제가) 1000원을 회수합니다.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 데 대한 벌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승연이와 다연이가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이라면 승연이가 얼마를 주겠다고 하는 게 답일까요? 다연이는 또 얼마를 받을 때 만족할까요? 여러분이라면 얼마를 제시하겠습니까?

둘째는 독재자 게임입니다(게임 이름이 다 거시기하죠?). 최후통첩게임과 다 같은데 이번에는 다연이가 거절할 권한이 없습니다. 승연이가 200원을 주겠다고 하면 다연이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대로 분배가 결정됩니다. 이 게임의 논리적 답은 얼마일까요? 또 여러분이 이 게임을 한다면 얼마를 제시하겠습니까?

셋째는 공공재게임이라고 알려진 겁니다. 5명(10명도 좋고 100명도 좋습니다만)에게 200원씩을 줍니다. 각각 얼마씩 내 놓으면 그 돈은 모두를 위해서, 예를 들어 가로등을 세우는 데 쓰입니다. 요즘 정부가 흔히 지자체에 제시하는 매칭펀드 정책처럼 사람들이 내 놓은 액수만큼 돈을 불려줍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300원을 내 놓으면 300원을 더 붙여서 600원이 됩니다. 공공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그리고 나서 5명에게 똑같이(위 예에서는 120원씩) 나눠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얼마씩 내놓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사랑의 경제’를 만들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우리가 활발하게 토론할 수록 사랑의 경제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서 다음 달에 함께 ‘정답’을 찾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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