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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0일 시청광장에는 경찰에게는 시민도, 기자도, 국회의원도 안중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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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그리고 노무현

 

정태인(경제평론가)


아마 이 글이 실리는 날이 그의 3주기일 것이다. 허세욱. 그는 한미 FTA 협상 타결을 코 앞에 둔 2007년 4월 1일, 회담장소인 하이야트 호텔 앞에서 “한미 FTA 폐기하라”를 외치며 분신했고 4월 15일 운명했다. 나는 그가 분신하기 직전까지 하이야트 호텔에 있었고,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던 문성현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분신 소식을 들었다. 순간 불길한 직감, “아.. 그일지도 모른다”.

그해 3월인가, 부산에서 연달아 두 건의 강연을 마치고 허겁지겁 비행기로 올라와 중앙대에서 또 한번 했으니 내 몸은 말 그대로 파김치였다. 택시 한 대가 스르르 와서 섰고 자신을 택시노련 소속이라고 밝힌 초로의 기사는 극구 택시비를 받지 않았다. “저 같은 사람도 인사는 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노동당 관악협의회가 개최한 강연에서 그는 질의 응답 시간에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이 말이 나에겐 그의 유언이 되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또 한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미 FTA가 구국의 결단이라고 굳게 믿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협정이 추진된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2005년 말이었다(난 5월에 비서관을 그만 둔 상태였다). 부랴 부랴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지만 그를 직접 만난 건 2006년 3월 중순, 이미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한 뒤 한 달여 흐른 때였다. 대통령 생각의 핵심은 “중국이 제조업에서 우리를 곧 따라 잡는다. 그러므로 한미 FTA를 통해 우리의 서비스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한미 FTA의 본질은 한국의 법과 제도를 미국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건 미국도 공언한 바이고,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한미 FTA 관련 청와대 1호 브리핑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낡은 일본식 제도를 버리고 미국식으로 나라를 바꾸는 것이 한미 FTA의 목표다”. 

2008년 말 바로 그 미국에서 대공황 이후 최대의 금융위기가 발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식 의료제도를 바꾸느라 사투를 시작했다. 내로라 하는 미국 서비스산업의 실체가 눈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그런 제도를 한국에 전격적으로 도입하고 또한 아무리 부작용이 심해도 되돌아 갈 길을 끊어 버리는 게 한미 FTA의 핵심이니 노무현 전 대통령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게다. 최근에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봉하마을로 한덕수, 조윤제 등 과거의 경제참모들을 불렀다. 아뿔싸, 한미 FTA의 국내 총 책임자, 그리고 이른바 ‘선진통상국가론’의 최초 제안자를 불렀으니 그들이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국과 월스트리트는 건재할 겁니다”. 

그 전인지 아니면 후인지 모르지만 2008년 1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간 협정을 체결한 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우리 경제와 금융제도 전반에 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라며 “한미 FTA 안에도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고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고쳐야 할 것”이라며 사실상 재협상을 요구했다. 그렇다. 원래 청와대의 뜻대로 2006년 말에 비준까지 완료됐다면 2007년에 월스트리트산 파생상품이 물밀듯 들어왔을 것이고 미국발 경제위기의 쓰나미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삼켜버렸을 것이다. 

이제 이명박 정부의 주미대사가 된 한덕수는 얼마 전, 자동차 부문 재협상이 필요하다는 말을 슬쩍 흘렸다. 그렇다. 분명 오바마 정부는 자동차 시장 추가개방, 또는 별도의 자동차협정을 통해 미국 자동차의 한국 시장 점유율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어떤 용어로 치장하더라도 사실상 재협상은 불가피하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노 전대통령의 말씀대로 모든 부문에 걸쳐 한미 FTA 협정을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특히 그의 죽음으로 기사회생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야말로 그의 유지를 앞장서 실천해야 한다. 하다 못해 한미 FTA 재검토가 왜 야권 단일화의 전제조건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허세욱과 노무현, 그들이 생을 마감한 이 아름다운 봄날에 나는 두 분의 죽음이 우리 역사에 나란히 빛나게 할 방도를 궁리한다. 꽃들이 눈부시다. 침침한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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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 피디저널에 실릴 글입니다. 


--- 아래 글은 위키백과에서 ---

허세욱(1953년 5월 9일 경기도 안성 ~ 2007년 4월 15일 서울 영등포구)은 대한민국의 택시 기사·노동운동가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2007년에는 민주노동당 서울시지구당 대의원을 지냈다. 시민단체 활동으로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2007년 4월 1일 한미FTA에 반대하여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 호텔 정문 부근에서 분신하였다.

 

 

유서

다음은 4월 1일에 공개된 유서 내용이다.

망국적 한미FTA 폐지하자.

굴욕 졸속 반민주적 협상을 중지하라.

나는 이 나라의 민중을 구한다는 생각이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비열한 반통일적인 단체는 각성하고 우월주의적 생각을 버려라.

졸속 밀실적인 협상 내용을 명백히 공개 홍보하기 전에 체결하지 마라. 우리나라 법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은 곧 술책이다.

의정부 여중생을 우롱하듯 감투쓰고 죽이고 두번 죽이지마라 여중생의 한을 풀자.

토론을 강조하면서 실제로 평택기지이전, 한미FTA 토론한 적 없다. 숭고한 민중을 우롱하지 마라.

실제로 4대 선결조건, 투자자 정부제소건, 비위반제소권 합의해주고 의제도 없는 쌀을 연막전술로 펴서 쇠고기 수입하지 마라. 언론을 오도하고 국민을 우롱하지 마라.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은 싫다. 나는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다. 저 멀리 가서도 묵묵히 꾸준히 민주노총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민주택시 조합원 2007.4.1 허세욱 드림.

15일에는 두 번재 유서가 공개되었다.

한독식구
나를 대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읍니다.

나는 절대로 위에 설려고 하지 안았읍니다.

모금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전부 비정규직이니까.

동지들에게 부탁(나를 아는 동지)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전국에 있는 미군기지에 뿌려서 밤새도록 미국놈들 괴롭히게 해주십시요. 효순미선 한을 갚고. 돈 벌금은 내돈으로 부탁.

20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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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노간지.

SG104362.JPG

국민장을 끝내고 수원 연화장으로 떠나가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운구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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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시청광장에는 경찰에게는 시민도, 기자도, 국회의원도 안중에 없었다

5월 29일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거행됐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국민들 마음 속에 자리잡은 '노무현'이란 울림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인간 '노무현'이던, 정치인 '노무현'이던 상관없이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나라의 위정자들에게 국민들은 큰 분노와 함께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지난달 29일 저녁부터 30일 오전 5시 30분경까지 시민들은 다시 찾은 서울광장에서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아울러 현 정부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고, 소통이 부재된 이 나라를 국민들이 힘을 모아 국민의 목소리를 정부에 일깨워주고자 자유발언과 함께 논의가 이뤄졌다.

마치 작년 여름을 관통했던 '촛불'이 다시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작년에도 그랬듯 경찰은 동틀 무렵이 되자 평화로운 거리와 시청광장 그리고 대한문에 마련된 분향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경찰들은 30일 새벽 5시쯤 헬멧을 쓰고, 방패를 들어 시민들을 거리에서 몰아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5시 30분이 되자 방패 앞에 있던 20여명의 시민들을 순식간에 길가로 몰아내고 그 넓은 대로를 가득 메운 채 시청광장을 향해 진격했다.

시청광장 입구에 다다르자 시청광장에 있던 시민들은 화들짝 놀라며 밀물이 빠지 듯 광장 밖으로 빠져나갔고, 무대 위에서 자고 있던 일부 시민들은 어쩔줄 몰라 허둥지둥거렸으며, 기자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경찰이 시청광장을 진압하는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채 안 되는 듯 했고, 일부 경찰은 시청광장으로 들어오지 않고 대한문 앞 분향소로 이동해 분향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시민들이 빠져나간 그 넓은 광장은 순식간에 경찰버스로 둘어싸여졌으며 남아 있던 몇 명의 시민은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광장에서 나가라고 하느냐?"며 따져 물었지만 경찰들은 이내 항의하던 시민을 연행했고, 그 연행을 막기 위해 나선 시민을 폭행에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현장을 취재하던 민중의소리 기자를 밀쳐 쓰러트려 놓고서는 집단 폭행을 가하기도 했고, 무대에서 부상자를 취재하던 OBS 카메라 기자를 밀쳐내고, 끝까지 취재를 하던 YTN 기자를 "내려가라"고 소리치고 윽박질렀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기자들이 항의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실제로 취재하던 나를 팔꿈치로 치고 가길래 "왜 기자를 때리느냐?"고 바로 항의하자 "내가 언제 그랬냐?"며 정색을 하기도 했다.

한 시민은 경찰의 폭생과정에서 안경을 잃어버려 기자들과 시민들에게 안경을 찾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했고, 경찰의 폭력에 정신을 잃었던 60대로 보이는 시민은 구급차가 도착할 때 쯤 의식이 돌아왔다.

시민들과 끝까지 남아있었던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현장 책임자가 누구냐?"며 현장에 있던 경찰간부들에게 따져 물었지만 그들은 "나는 모른다"로 일관하며 자리를 피하기 급급했다.

결국 나중에 찾아낸 남대문경찰서장은 이 의원이 "당신이 현장 책임자냐?"는 질문에 끝내 답을 하지 않았고, 이 의원은 "당신이 지시한 거냐? 아니면 서울시경에서 지시한 거냐?"며 따져 물었지만 그 질문에도 역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의원이 "상황 보고하라"고 지시하자 "카메라가 많아서... 카메라 치우면 얘기하겠다"고 답변했다. 언론에 꿀리는 것이 있지 않았고, 만약 경찰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는 소신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남대문경찰서장은 부하직원들이 몸으로 이 의원과 보좌진 그리고 기자들을 막아주는 사이 줄행랑을 쳐 경찰들 속으로 사라졌다.

이 의원은 "거기 서"라며 명령했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기 바빴다. 게다가 한 경찰(나를 팔꿈치로 때린)은 "국회의원이면 다야"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기도 했다.

5월 30일 새벽 고인을 추모하는 분향소는 쑥대밭이 됐고, 그 건너편에 있는 서울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만든 시청광장에는 시민도, 기자도, 국회의원도 없었다.

오로지 경찰들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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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광장으로 가는 인도 벽에 가지런히 놓인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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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민이 서울광장 한 쪽에는 용산 희생자를 위한 분향소에 예를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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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에서 마련한 공간에 시민들이 촛불을 밝혀두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당은 달라도 예를 표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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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만에 다시 든 '촛불'. 시민들은 평화롭게 촛불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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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시민이 도로 한복판에 놓아둔 촛불 너머로 전경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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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5시경 전경들은 헬맷을 쓰고, 장비를 갖추며 곧 있을 진압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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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들 앞에 놓은 노란 풍선들.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마음이었지만 경찰들은 무참히 풍선을 터트리고는 진압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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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도에 있던 시민 20여명과 기자들을 방패로 밀어내는 전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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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무전을 주고 받으며 서울광장의 시민들을 분산시키기 위해 경력을 이동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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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이 서울광장 입구에 진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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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은 순식간에 서울광장 주변을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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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을 몰아내고 서울광장을 점거한 경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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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광장에는 소수의 시민들과 기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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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시청광장에서 나가라는 말에 항의하던 한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항의해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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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또 다른 시민 한 명을 연행하려고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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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강제연행을 막고자 경찰에게 달려들고 있다. 경찰 오른쪽에 보이는 중년 신사는 결국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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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시민을 연행하려 하자 주위에 있던 여성들이 달려들어 경찰을 제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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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한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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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진압 현장을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를 손을 들어 막으려는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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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의 강제해산을 막으려다 부상을 당한 60대로 보이는 시민. 이 시민은 의식을 잃었다가 구급차가 도착할 때 쯤 의식을 찾아 병원에 이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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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당한 시민을 무대 위에서 촬영하던 OBS 카메라 기자를 경찰들이 밀쳐 무대 아래로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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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당한 시민을 취재하던 YTN 촬영기자를 경찰이 "내려가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YTN 촬영기자는 "찍고 내려가겠다"며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촬영을 한 후에 무대 단상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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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과 취재기자들을 채증하는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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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의 보좌진이 경찰에게 "현장책임자가 누구냐?"며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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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간부는 이정희 의원 보좌진의 물음에 "난 아니다", "잘 모르겠다"를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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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희 의원이 "현장 진압에 대해 보고하라"고 남대문경찰서장에게 명령했지만 서장은 "카메라를 치우면 얘기하겠다"고 대답하고는 계속되는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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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남대문경찰서장은 이 의원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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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의원과 보좌진 그리고 기자들이 자리를 피하는 남대문경찰서장을 에워싸고 질문을 하는 중간에도 경찰은 이 의원과 주변 사람들을 채증했다. 이 의원은 "카메라 치우세요"라며 명령했지만 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채증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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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경찰서장은 부하 경찰들의 엄호를 받으며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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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의원과 취재진들로부터 도망친 남대문경찰서장은 경찰들 사이로 몸을 숨겼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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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경찰서장이 도망치자 어이없어 하며 화가 난 이정희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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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여경들이 나타났다. 당시 서울광장에 있던 여성은 이 의원 혼자였다. 여차하면 여성인 이정희 의원도 광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여경들이 동원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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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희 의원이 현장에서 기자들에게 간단하게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 의원은 "(추모제가) 어제까지는 합법이고 오늘부터는 불법이냐?"며 강제진압을 한 경찰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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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분향소를 강제로 철거한 이른 아침에도 시민들은 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했다. 분향소 주변이 매우 어지럽혀 있는 것으로 철거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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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막은 철거됐지만 남아 있는 집기로 분향소는 다시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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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에도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천막 사진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사진/기사 = 락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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