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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 반대 "강은 흘러야 한다"

친북인사 수경스님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13일 경기도 여주 신륵사로 향했다.

 

 새만금과 지리산 환경파괴를 삼보일배의 정진으로 막으셨던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수경스님은 현 정부의 '4대강사업은 mb정부의 녹색세탁'이라며 4대강 사업 반대를 위한 <여강선원>을 신륵사 앞마당에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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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경스님은 “대운하와 FTA, 광우병은 모두 우리와 자연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 아니냐"며 2008년 2월 한반도 대운하 건설에 반대해 종교인들과 103일간 4대강 순례를 했고, 지난해에는 mb정부의 개발 만능주의와 불통을 꾸짖고자 지리산 노고단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문규현, 정종훈 신부님과 53일간 오체투지를 진행했다.

 

 보수 민간단체인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는 수경스님의 이런 사회참여를 친북, 반국가행위라며 1차 명단에 스님의 이름을 올렸다. 

 


 강은 흘러야 한다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남한강 가에 위치한 신륵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천년고찰이다. 그러나 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던 금모래 은모래 백사상에서는 이미 모래 채취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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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모시는 사람들이 강을 모시는 것이 아닌 강을 모시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모신 <여강선원>대웅전은 세 평 남짓한 콘테이너 박스. 비록 협소한 <여강선원>이지만, 4대강 사업 반대가 특정 종교의 외침이 아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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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를 맡은 현각스님은 '<여강선원>은 이런 사태를 맡게 된 것을 참회하고 기도하는 선방이 될 것'이라며 "정부가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무모한 삽질을 멈추고 원래 모습 그대로 흐르게 될 것이란 희망을 갖는다"며 개원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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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시인은 격려의 말에서 "'아름다울 여(伃)'자를 쓴 '여강'이야말로 남한강의 꽃인데, 수중보를 만든다는 구실로 강이 조각조각 찢기는 것을 보니 '추한 모양 여'자 '여강'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며 정부뿐 아니라 이 사태를 손 놓고 바라보는 우리 모두 각성해야한다고 경고했다. <다시 여강에 서서>라는 격문을 준비한 박남준 시인도 사특하고 경박한 이명박 정부만을 탓하는 것은 아니라며 "여강, 낙동강 앞에 대한민국은 범죄자이며 죄악의 공조자입니다"라고 자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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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들의 기도가 탐욕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함부로 물길을 막고 땅을 파헤치는 일 없이 온 생명이 함께 즐거이 살게 하는 자유와 평화의 숨길이게 해주시옵소서. 오늘 우리들의 기도가 최선을 다한 사람의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게 해주시옵소서”라며 <생명을 위한 기도문>을 읽던 수경스님은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4대강 개발 사업으로 무참히 유린되고 있는 환경과 뭇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수행자로서 우리와 한 몸, 한 생명인 자연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었다.

 


 이재오와 이명박, 그리고 우리들에게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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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경)스님께서 바지 걷어 부치시고, 맨발로 썩은 영산강물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 보셨습니까? 영산강변에 널려있는 쓰레기더미를 보셨습니까? 저 영산강의 자갈 모래를 팔고, 민간투자를 더해서, 원래의 맑고 푸른 영산강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것이 대재앙이고 생명파괴입니까?"라며 끝장토론을 제안했던 이재오에게 고한다. 국회의원에 떨어진 것은 운명이나, 자연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천륜을 거스르는 일 임에도 강행하는 게 옳은 것인지. 

 

 바지 걷어 부치고 수돗물이 흐르는 청계천에 들어갔었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고한다. 4대강에 살아있는 물고기가 아닌 로봇물고기를 헤엄치게 만들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고한다. 4대강 사업으로 생태계가 파괴되면 결국 우리의 생명이 위협당한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눈 앞의 이익만을 쫓아 후대를 부끄럽게 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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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강선원>에 걸린 현수막 글귀

 

 사람들은 물뿐인 수로보다 모래밭과 여울이 있는 강을 더 원합니다.

 맑은 여울과 드넓은 백사장,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 숨 쉬는 4대강. 
 태초이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는 4대강은 그 자체로도 우리 삶에 크나 큰 선물입니다. 
 모든 땅과 물은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물과 바람은 나의 본체입니다. 
 강은 굽이치고 여울지며 상처받은 몸을 스스로 치유하고 물고기와 새들을 품에 안고 기르는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의 젖줄인 우리 강.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강을 보고서야 그것이 생명의 강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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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스님 칼럼(한겨레, 2008년 4월 18일) "생명의 강에 비친 우리네 탐욕 대운하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와 당시 운하 전도사를 자처했던 이재오 반박글 "대운하, 파괴 아닌 뱃길 복원"

http://blog.daum.net/bulyak/66?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bulyak%2F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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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의빨간장화_이갑용은 노동자다. 그렇다면 우리의 계급은?

 "이갑용이 누군데? 아,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다구? 그리고 이번에 책을 냈고? "

 

 내일이 인터뷰라는데, 이. 갑. 용 이름 석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일단 책부터 샀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란 책 제목 위 '골리앗 전사 이갑용의 노동운동 이야기'라는 부제를 보면서 '내가 아는 골리앗은 용산에서 본 철거민들의 투쟁 망루인데, 노동 운동가라며 골리앗은 뭐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난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또 이.갑.용 이란 사람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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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성공회대 느티나무 앞에서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 이갑용'을 처음 만났다. 동그란 얼굴에 단단한 체격, 50을 넘긴 그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역사학자 한홍구와는 술 친구라고 하더니, 그의 노동운동 이야기는 역사학자의 연구실에서 많은 역사책에 둘러쌓인 채 집필되었다. 그렇게 2년 간 다듬어진 책<길은 복잡하지 않다>를 한울노동문제 연구소장 하종강은 노동운동 사료로의 가치가 있다고 평했다.  

 

 20대 마도로스의 꿈을 접고 사번 8407669를 받아 현대중공업 7급 노동자가 된 이갑용은 그의 말대로 정말 짐승처럼 일했다. 특전사 출신의 경비들에게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이고 감시받으면서.

 

 -말로는 날마다 '우리는 한가족'이라고 하면서 회사는 '가족'인 노동자들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정해진 작업복에 안전화로 군인을 만들어서 출퇴근 시켰다. 이건 '가족'이 아니라 '군대'였다. p33

 

 후에 민주노조가 생긴 후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터트린 불만은 임금인상이 아닌, 두발자유였다고 한다. 그렇게 자본은 일터를 군대화시켜 노동자들을 복종과 충성에 따른 산업전사, 산업역군으로 만들고, 관리직에게 잘 보이는 사람들만 성과급을 올려 노동자 자신이 다른 노동자를 배신하는 노노경쟁으로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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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민주화 바람은 울산에도 불어닥쳤다. 회사는 전 직원 야간 근무 명령을 내려가며 노동자들을 공장 안에 가두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해 7월 5일. 현대 엔진을 중심으로 현대 그룹 내 노동조합이 처음 결성되자, 현대 중공업은 한국노총의 지시에 따라 7월 21일 어용노조를 만든다. 뜻밖의 어용노조 출현에 당황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11인 대책위'를 중심으로 어용노조를 퇴진시키고, 민주노조 초대 위원장을 선출해 거리로 거리로 나갔다. 그러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노동자들의 차량 방화 사건을 시작으로 9월 초 울산 시청과 회사 총무부 사무실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한다. 이를 빌미로 경찰은 대의원과 간부를 구속한다. 그렇게 1987년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역사는 6월 항쟁과는 달리, 3개월에 걸친 노동자 대투쟁을 그저 구전으로만 남긴다.

 

 이갑용과의 인터뷰 중 1987년 당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들었다.

 

 "이명박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어요. 87년 우리가 처음으로 노조 만들어서 회사하고 싸웠어. 정주영까지 다 합의된 거예요. 현대그룹사 임원들 50명이 단상에 섰고, 자축하는 날인데, 합의됐다고 같이 만세 부르려고 했는데 우리 식대로 진행했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는데 50명 중에 유일하게 손을 흔드는(팔뚝질) 한 놈이 있는 거야, 우리하고 같이. 저게 누구지 했는데 그게 이명박인 거야. 현대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그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서 이명박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다니까. 그런 형태로 이 사람이 살아왔던 거죠. 아무도 안 하는데 혼자서 팔뚝질할 정도면 소신 있는 것 아니냐, 우리 편 아니냐고 착각했었다니까. 현대건설 사장했던 시절인데 현대중공업 와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그때가 벌써 20년 전이니까 40대에 뛰어난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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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곳곳에 일명 매뉴얼, 노조가 사측과 마주 앉았을 때의 지침을 따로 적어 놓았다. 1989년 현대 중공업이 128일 간의 파업에 들어간 부분에 "협상의 기술"이 적혀있는데, 12개의 지침 끝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한미 FTA 협상의 수석 대표였던 김종훈은 TV에 나와서 "나는 책임자인 대통령에게 협상을 타결하라는 명령만 받았다. 협상을 결렬시켜도 된다는 명령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 타결 명령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걸 양보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권을 위임받은 게 아니라, 무조건 타결하고 오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인데, 미국 측에서 이 조항을 양보 안하면 결렬을 선언하니 이쩔 수 없이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p68

 

 협상의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대한민국 최고의 협상가 김종훈 수석대표는 그렇게 광우병 쇠고기를 들여왔고, 여중생들은 2008년 5월 "미친 교육. 집워 치워!"와 "미친 소. 너나 먹어"를 외치며 청계천에서 촛불을 들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반정부 시위대가 처음으로 청와대 앞까지 진격한 5월 31일. 투쟁의 달인 이갑용도 역사학자 한홍구와 경찰에 연행돼 닭장 투어를 했다. 

 

 1995년 민주노총이 탄생하고,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 시키면서 전 국민의 65%가 노동자 총 파업을 지지. 해방 이후 가장 큰 총 파업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를 넘겨 파업 20일이 넘어가면서 현대 자동차 노조가 현장 노동자들의 동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표했고, 민주노총은 전면파업이 아닌 수요파업으로 투쟁강도를 조정한다. 이는 연맹과 지도부가 지도력을 갖추지 못하고 대기업 노조에 흔들리게 되는 선례가 됐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이갑용은 진단했다. 철저하게 계급 싸움이 되어야 할 노동운동이 정치 싸움처럼 명문만을 앞세운 결과였다.

 

 "노동조합을 만든 목적과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모여서 뭉치라는 것을 경험과 내용 토대로 법으로 만들어놓은 건데, 이게 자꾸 깨지고 있는 거예요. 대중 조직의 역할과 임무가 몇 사람 보호하려고 하면 관변단체 만들면 되지. 민주노총은 그렇게 하는 조직이 아닌데. 그 싸움의 근흉을 언제 없앴냐 하면 지난 10년 정권 사이에서 힘을 다 없애버린 거예요. 시민단체까지 다 정부 편으로 만들어서 민주노총이 싸우려고 하면 왜 싸우냐고 했던 그게 다시 다 화살이 돌아오고 있는 거라고.(중략) 싸우려는 투쟁 의지가 다 꺾여버린 거예요. 한나라당이니까 다시 싸우러 나가자. 그런데 한나라당 바꾸면 뭐할 건데, 바꾸고 나면 너희들이 해 줄 게 뭐가 있는데, 이게 없는 거예요. 이게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인데 민주당은 알 리가 없고.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들이 이걸 찾아내서 끌고 가야 되는데 못하고 있어요. 중심에 노동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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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쟁의 달인이자 협상의 달인인 이갑용은 현대 중공업 노동자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을 거쳐 울산 동구 구청장을 지냈다. 자신의 계급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알고 있는 이갑용은 이제는 적당히 곰삭은 홍어가 됐다. 그런 그가 얘기하는 협상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대가리 박고 아무 생각 없이 감옥 순서 정해서 무조건 1년에서 3년 사이에 50명 만들어서 가자는 거야,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종로집회 한번 받고 가고. 실업자 1000인데 감옥 줄줄이 갔다오는 거 하자는 거야. 그 중에 나도 시켜주고. 그렇게 가는 거 아니면 극복이 안 되는데. 민주노총 건드리지 말자, 감옥가면 처리도 안 되고. 타협도 하자. 저쪽에서 타협이 들어와야  되는데 (오히려) 우리가 매번 타협하러 가는 거야. 힘이 없는 상태에서는 타협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조항을 만들어서 일부러 넣었던 것도 힘이야. 협상은 힘이야."

 

 그의 말에 코웃음이 나는가?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스스로 생각해 보라. 우리의 계급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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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의 빨간장화_2010년 보신각 타종행사

어릴 적 12월 31일이 되면 부랴부랴 집을 청소하고 목욕을 했다. 그리고 당시 착한 어린이는 9시에 자야 한다는 맹목적 계도에도 불구하고 365일 중 12월 31일은 하루 만큼은 까만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이유는 해가 바뀌는 찰라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렇게 새해 맞이의 경건함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쇠와 나무가 만들어내는 깊은 울림. '33번이 맞나?' 한 번 두 번 세기도 하고, '저 많은 사람들은 이 시간에 어떻게 집에 가지?'하는 걱정과 함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들지 않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앞날에 대한 다짐이 가슴 속에서부터 마구 마구 올라왔다. 

 

 그러나 이런 경건함이, 또한 반성과 후회, 각오와 다짐에 대한 울림들이 2009년부터 사라졌다. KBS의 왜곡된 타종행사 진행과 풍선조차 시위물품이라며 축제의 한마당에 찬 물을 끼얹는 현 정부의 그릇된 태도 때문이었다.

 

 이에 2009년 1월 한 시청자가 방송통신위원회에 시청자들의 알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며 민원을 냈고, 여기에 방통위는 '동 프로그램에서 제작진이 고의적으로 방송을 왜곡, 과장할 의도는 없었다고 판단되나, 비록 쇼.오락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동 프로그램처럼 시사성이 포함된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향후 제작시 사실성과 객관성 등에 있어 보다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고 조치함'이라는 답변했다.

 

 방통위의 말대로라면 타종 행사는 그 고유의 의미를 상실한 채, 편집이 난무하는 쇼.오락 프로그램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또한 사실성과 객관성에 있어서의 주의 권고는 그나마 다시 KBS가 타종행사를 맡게 될 경우에만 적용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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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2010년의 타종행사는 어떻게 방송 되었을까?

 

 먼저, 오랫동안 타종행사를 주관해 오던 KBS가 아닌 서울시 소유의 교통방송인 tbs가 주관을 맡았다.
 KBS는 우아한 음악회 중간에 보신각의 전면이 아닌 후면에서 생중계로 현장을 연결했을 뿐이다. 결국 KBS에는 방통위가 말한 주의 권고를 지킬 '향후 제작'에 대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둘째, 33번의 울림은 북 소리에 묻혔다. 
 사실 2009년과는 달리 2010년 타종행사 현장은 현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2009년에 당한 바(?) 있어서인지 종이 울리는 33번의 시간 동안 앞의 3번을 제외하고는 현란한 북소리로 종소리를 덮어버렸다. 따라서 주관 방송사가 오디오를 덧씌워가며 사실성에 충실할 필요 없이 기획단계에서부터 철저히 대비했다. 

 

 셋째, 대한민국 5천만 명이 함께 하는 타종행사를 서울시의 관치행사로 전락시켰다.  
 한 나라의 대표방송국이 아닌 시 소유의 방송사가 주관사였던 것도 그렇거니와, 타종이 끝나자마자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계 디자인 도시, 서울' 선포식을 그 자리에서 진행했다. 2010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오시장의 자리 굳히기 시도는 사고의 위험이 높은 광화문 광장에서의 보드 대회 개최에 이어 겨울철 철거민들을 내쫓는 잔임함까지 더해져 관치행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2010년 1월 1일 광화문과 종로 일대 타종행사를 함께 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은 7만 여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신각을 중심으로 도로의 절반은 경찰이 차지했고, 그나마 철통같은 경찰의 경호를 뚫고 보신각 정면에 자리한 시민의 숫자는 어림잡아 만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어릴 적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던 송구영신에 대한 경건함은 2009년과 2010년을 지내면서 이렇게 변질되고 왜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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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한 마디>>

보신각 정면에 서 있던 경찰복장의 "POSS(public order security service)"의 정체는?

1) 행사장 경호원

2) 경찰

3) 경찰 고용 사설 경호원

4) force와 발음이 유사한 정체 불명의 집단 

 


2008년 타종행사 민원에 대한 방통위의 답>>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359611

 

오버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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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TV 대표는 정태인이다

 -이제 괜찮은거야?

-목 디스크래요, 지속적으로 관리 해줘야 한대요.

-(하품) 아, 졸리다.

-못 주무셨어요?

-응.

-왜요?

-우울증.

 

   한 달만에 칼라TV 대표, 정태인 선생님을 만나 주고 받은 첫 대화다. 목 디스크란 말도, 우울증이란 말도 우리는 별 일 아니란 듯 그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책꽂이에 색깔있는 책 몇 권 꼽아주세요.

-왜?

-방이 너무 하애서 선생님이 더 까맣게 나오실 것 같은데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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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한 시간 정도 진행된 폴리뉴스와의 인터뷰를 연구실 한 켠에서 지켜보았다.

 

   사모님이 직접 꾸며주셨다는 연구실은 까무잡잡한 그와 대비되는 하얀색이었다. 거기에 책장과 책상 곳곳에 쌓인 하얀 종이들까지. 조금은 낯선 분위기였다. 그나마 가장 친근하게 느껴진 물건이 검은 핸드폰과 담배.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그는 달짝지근한 커피와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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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직 못 봤는데?

-아니, 나 말고 방송 잘하는 이해영 있잖아.

-아이고, 그래 몇 시?

-알았어.

 

   한 방송사가 다급하게 그와의 생방송 전화 인터뷰 약속을 잡는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친히 대한민국을 방문해 한미 FTA의 조속한 추진과 그랜드 바겐의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선생님, 온 김에 저희도 breaking 한 번 해보게 빨리 보고 한 말씀 해주세요.

-뭐, 인터뷰 하겠다고?

-인터뷰라기보다는 그냥 논평이요. 우리도 칼라TV 대표 논평, 이런 거 고정 프로로 할까요?

-에이...혼자 말하는 게 얼마나 재미없는데, 대충 물어봐. 그럼 답해줄게. 먼저, 뭐라고 말했나 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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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을 찡그리며 인터넷을 뒤적이는 그.

   경제학을 다루는 사람들 중 최고의 학식을 가졌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야인이다.

 

-시간은 얼마큼? 원하는대로 말해주지. 

-10분, 5분? 5분이 좋겠다. 5분이요, 선생님. 

 

 

 

 

그는 정확히 5분을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려고 한 나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반 FTA 전도사 정태인의 답은 편집 없는 5분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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