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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경제학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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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사랑의 경제학 (3) - 우리는 언제 천사가 되는가


제 잘못입니다. 1월호의 구체적인 게임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다양한 답변을 해 주셨지만 2월호의 추상적인 질문, “언제 인간은 이타적이 될까?”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사실 막연합니다. 제가 이 연재를 시작했을 때 밝힌 것 처럼 이 세상 그 누구도 ‘정답’을 모른다는 게 진실일 겁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이타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치지만 현실에서 는 그 주옥같은 교리들이 별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서로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얘기를 해나가야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난 10년 동안 학계에서 논의된 것들이 있지만 저 역시 전공이 아니라서 상당한 논쟁 끝에 합의에 이른 몇몇 결론들만 알 뿐입니다. 여전히 논의는 초보 단계라서 고백하건대 ‘이기적’, ‘이타적’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의조차 애매합니다(오직 분명한 건 경제학이 상정한 인간의 행동원리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이 없는 어머니 사랑”과 동네 단골 

우선 사랑하면 떠오르는 건 “가이 없는 어머니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행동은 실로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드라마에는 아귀같은 어머니들도 나오지만 보통 아이들에게 쏟는 정을 노후자금의 양과 비교하는 어머니는 없을 겁니다. 아버진 조금 덜 한 것 같지만 아마도 가족 관계가  대체로 그렇고 조금 범위를 넓히면 혈연관계에서도 이해타산을 넘어선 이타적 행위는 곧잘 일어납니다. 이렇게 발휘되는 이타성은 아마도 피가 섞인 정도가 적어질수록 줄어들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행위란 바로 우리의 유전자가 하는 이기적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이기적 유전자”) 그렇다 해도 인간의 차원에서 해석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잠깐, 남녀 간의 사랑에서 나타나는 선물 공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돈 한푼 없던 대학생 시절, 없는 솜씨로 직접 그림을 그려서 선물을 하기도 했습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고 내일 헤어지면 바로 남남인데 목숨까지 바치려는 그 열정은 도대체 뭘까요? 예의 유전자론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이기적 행위라고 하겠지만... 이 경우에는 사랑을 얻는 데서 오는 만족감(게임이론의 보수)이 무한대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에로스도 정답의 후보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에게 수천억원, 수조원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면 틀림없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질테니까요. 불행하게도 남녀 간의 사랑에 존재하는 독점성(이건 필연적인 걸까요?)은 제3자에게 어쩌면 그 이상의 좌절을 낳고 심지어 살인까지도 불러 일으키니 이 답에는 어떤 유보를 남겨 둬야할 것 같습니다. 

세번째로는 매일 만나고 또 내일도 만날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이기적 행위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직접적인 보복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왕따를 당할 가능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호에 잠깐 얘기한 게임이론 식으로 말하자면 무한 반복 게임(또는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게임)에서는 이타적 행위가 득이 됩니다. 현실의 예를 찾자면 단골이 그렇습니다. 요즘의 24시 영업점은 사실 익명의 시장거래에 가깝지만, 동네 구멍가게에서 매일 야채를 사러 오는 고객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죠. 오늘 들어온 생선에 문제가 있다면 뜨내기 손님에겐 모르는 척 팔지 모르지만 단골에게는 “오늘 건 물이 별로 좋지 않아. 내일 사, 아님 쇠고기를 사”라고 말할 겁니다. 이렇듯 신뢰에 기초한 장기 거래는 시장경제에서도 매우 효율적입니다. 최근 대규모 리콜 사태로 완전히 체면을 구겼지만 도요타의 경쟁력을 예찬할 때 이런 논의가 사용됐습니다. 

월드컵과 노사모

종교라든가, 코스프레 동호회라든가 하는 공동체에서도 이타성은 빛을 발합니다.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우리는 종종 냉정하게 행동합니다. 그가 싫어서라기 보다 모르기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또는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냉정이야말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전제입니다. 그러나 끼리 끼리 모이면 곧잘 협조적인 행위를 합니다. 최근 오바마를 당선시킨 힘이나 그 원조격인 노사모의 힘을 생각해 보십시오.  집단에 속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 뿐 아니라 자기 내부의 창의력이 고양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꽤 많은 경우에 협조는 경제적으로도 우수한 성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이타적인 집단의 크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집단 내부에서는 서로를 돕기 위한 경쟁, 또는 전체의 가치(목표)를 향한 경쟁이 일어나고 최선으로 보이는 행위는 곧잘 모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지극히 이타적인 집단이 바깥의 집단과 싸우기 위해 대단히 비이성적인 양태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즉 외부의 적 때문에 내부의 협력, 이타성이 고양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부의 협력은 외부와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월드컵 축구의 경험도 있지만 남북한의 지배자들은 서로를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내부의 독재를 합리화하기도 했습니다. 종교간 전쟁이 가장 잔인한 살육을 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죠.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협력적 행위, 또는 이타적 행위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건 현실을 잘 이해하게 되어서(게임의 그 구조를 잘 이해하게 되어서) 그럴 수도 있고, 토론과정에서 공동의 가치, 또는 의무감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 호에 소개한 공공재 게임 중간에 토론 기회를 가지면 기부 액수는 현저하게 늘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작은책 독자라면 이타성이 발휘될 조건을 잘 살펴서 서로 충분히 토론한 후 특정한 제도를 만든다면 훨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실 겁니다. 예. 바로 그게 다음 달 주제입니다. 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 물질적으로 못 살 때보다 지금 더 사는 게 훨씬 더 팍팍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제도나 분위기가  이기적인 사람에게 훨씬 더 유리하게 변했다는 것도 들 수 있을 겁니다. 돈을 제외한 어떤 가치도 그저 립서비스일 뿐 실제로는 돈 많은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존중받는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가난한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 뿐 아니라 자식에게도 그냥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인 걸 뿌리치지 못하거나 사랑에 목 매달다 생활이 흐트러지는 사람은 ‘쿨하지 못한 찌질이’일 뿐입니다. 부동산투기나 주식투기로 돈 번 사람, 사교육을 시켜서 아이를 일류대학에 보낸 부모를 겉으론 비아냥거려도 속으론 하냥 부러워 하지 않나요? 이타성이 존중받는 제도란 어떤 걸까요? 그렇지만 위에서 든 아주 간단한 이타성의 예조차 사회적 제도로 번역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역시 “대화가 필요해!”
 


사랑의 경제학 (4) - 협력의 제도화 

  
이타성? 질투?

지난 호에 인간이 이타성을 발휘하는 경우로 혈연(어머니의 사랑), 무한히 반복되는 행위(동네단골), 남녀 간의 사랑, 이해공동체 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질투나 시기의 가능성 때문에 유보를 해 뒀었죠. 협력의 제도화를 얘기하기에 앞서서 이 문제에 관해 잠깐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최정규교수는 “이타적 인간의 출현”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최정규박사가 말하는 이타주의자는 바로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라는 지인의 글을 보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썼습니다. 아랍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전사들이야말로 이타적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사랑에 수반되는 질투나 시기까지 고려하면 도대체 ‘이타적’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런 혼란의 진앙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경제학에서 정의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물질적 이익만 추구한다는 점에서 스크루지 영감을 떠올리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찌질한’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쿨’한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동안 소개한 게임에서 드러나는 인간은 남의 행복을 고려하고(약한 상호성), 심지어 손해를 보더라도 이기적 인간을 응징하기도 합니다(강한 상호성). 즉 우리는 남을 생각하고, 그 남의 눈에 비친 나를 생각하는 사람,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닌 어떤 사람을 총칭해서 ‘이타적 인간’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러니까 보통 의미의 ‘이타적 인간’만 여기에 속하는 게 아니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 하는” 사람들도 포함되는 거죠. 즉 이타적 인간이라기 보다 사타적(思他的)인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우리 안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금방 수긍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측은지심’이라고 설파한 마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반면  질투로 숨이 막히는 상황도 모두 경험했을 겁니다(그런 경험이 없는 분은 행복한 걸까요? 아니면 불행한 걸까요?^^). 어느 쪽이든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아닌거죠. 

협력의 제도화 

그런데 우리 사회는, 특히 경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전제로 짜여져 있습니다. 물론 기나긴 인류 역사를 보면 기껏 300년이라는 지극히 짧은 기간만 그런 냉혈한(쿨한 인간)을 표준 인간형으로 상정한 겁니다. 또 “사랑의 경제학(1)에서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얘기를 했습니다만 지난 40년 동안만 봐도 요즘에 이르러 ‘쿨한 인간’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눈 밝은 독자는 이미 눈치챘겠지만 인간이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측면도 있는 겁니다. 즉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화’가 작용하는 겁니다. 남들이 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들이 이타성을 발휘하는 경우를 일반화해서 제도를 만든다면 사람들이 거기에 적응해서 서로 협력하는, 따뜻하면서도 생산성이 높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기적 인간이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죄수의 딜레마) 협력해를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난 10여년 제가 계속 몰두한 것도 바로 이 협력의 제도화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유치원에서 벌어진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서구에서는 수업이 끝났을 때 보통 부모나 대리인이 오지 않으면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지각하면 선생님들은 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계속 돌봐야 합니다. 이런 폐해를 없애려고 유치원에서 30분 늦으면 만원, 한시간 늦으면 2만원, 한시간 반이면 3만원 식으로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불행하게도 지각하는 부모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말하자면 벌금이 ‘면죄부’가 되어 버린 겁니다. 결국 이 제도는 실패로 끝났고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벌금이 없어지자 지각하는 부모는 더 늘어났습니다.  

이 벌금제도는 분명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전제로 만들어진 겁니다. 부모들은 이 제도에 맞춰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퇴근하지 못하는 선생님한테 대한 미안한 마음이 없어진 겁니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 제도를 만들 때 언제나 발생합니다. 정책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처벌 제도를 정교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사람들은 딱 처벌 받지 않을 정도까지만 행동하게 됩니다. 

아내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해온 내 일생은 주례로서 적절하지 않습니다. 해서 대부분 거절합니다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주례를 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기쁨에 달뜬 신혼부부에게 “서로 미안해 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부탁합니다. 아직도 남성 우위가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뜻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평등의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계약은 불완전합니다. 어찌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경우를 미리 써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계약서에 규정돼 있는 의무 이상은 절대로 하지 않는 부작용이 생기고 때로는 해석을 둘러싼 분쟁도 일어나게 됩니다. 수요일 밤새도록 일한 아내/남편에게 계약서대로 목요일 아침을 차리라고 요구하면 서운한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의 경우가 발생하면  ‘보복’을 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의 제도화라는 결혼이 온통 이기적 행동으로 가득 채워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평등의 계약이 필요합니다만 거기에 더해서 서로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계약서 이상의 좋은 결과를 낳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정책을 만드는 일이 그리 쉬울까요? 정책을 만들 때 우리는 제도를 약탈하는 사람(모든 제도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걸 악용할 방법도 언제나 찾아낼 수 있습니다)을 막으려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제도를 만들게 됩니다. 이제 사람들은 유치원 실험에서처럼 그 기준에 맞춰서 행동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죄수의 딜레마” 현상이 곳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각 개인은 최선의 합리적 선택을 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나쁜 결과를 얻게 되는 거죠. 

우리가 그동안 간단하게 살펴 본 인간의 본성, 또는 행위 동기에 대한 이해는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릅니다. 다음 호에는 당연히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행동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경제 행위, 즉 시장원리에 따른 행위부터 들춰 보고 서로 협력하는 사회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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