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사랑의 경제 (2) - 상호적 인간?_정태인

정태인.jpg

 

 

정태인(경제평론가)

 

 

사랑의 경제 (2) - 상호적 인간?

 


“잠정 결론” - 상호적 인간(homo reciprocity)

지난 호에 내 드린 문제들은 실험경제학/진화경제학에서는 수천번 되풀이됐고 이제 어느 정도 ‘잠정 결론’에 도달한 것들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소개한 책은 최정규 경북대교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입니다. 지난 대선의 결과 때문에, 혹은 실연 때문에 “역시 인간이라는 종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거나, 아니면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라고 믿고 싶은 분들은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최후통첩게임의 논리적 답은 1원(최소 단위)입니다. 이렇게 거슬러서 추론하는 겁니다. 다연이 처지에서 제안을 거부하면 아무 것도 손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승연이가 무정하게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지 않는 한, 제안을 받아 들이는 것이 무조건 이익입니다(경제학의 가정대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면). 그리고 승연이는 다연이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건 게임이론의 기본 가정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승연이는 1원을 제시해서 999원을 갖게 됩니다. 

실제 결과는 어땠을까요? 대부분의 제안자(승연이에 해당하는 사람들)는 400원에서 500원 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500원이 제일 많았고 250원 이하일 때는 응답자(다연이)가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대부분의 실험은 경제학과, 경영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고, 심지어 미국 최고 대학의 경제학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물론 평균 액수가 조금 낮아집니다. 하하). 이 게임을 반복해서 실시했을 때 초지일관 이기적으로 행동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이기적 행동은 1/4을 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첫번째 결과를 놓고도 해석은 구구합니다. 이 때문에 더 복잡한 실험이 행해졌는데 상대방을 다시는 볼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액수가 훨씬 커지더라도 (우리 월급의 세배쯤 되는 돈을 걸고 해도) 결과는 유사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17년 전 쯤이었습니다. 당시에 유학 가 있던 최정규교수가 사회경제학회의 피시 통신 게시판에 문제를 냈었죠. 그 때 제가 쓴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500원 이상이 제안되면 응답자(다연)는 무조건 받아들인다. 그러나 액수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이 나쁜 놈이...’하는 생각이 커질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제안자(승연)도 짐작할 수 있다. 자기도 무일푼이 되는 경우를 걱정하게 될 것이고 결국 500원보다 조금 낮은 액수를 부를 것이다. 그 차이는 자기가 제안자가 된 행운의 댓가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거죠. 실험의 결과를 거의 정확하게 맞췄지만 그건 곧 제가 경제학의 A,B,C도 모르는 비논리적 인간이라는 걸 증명한 겁니다ㅠㅠ. 

그런데 이 답은 이후에 상호성(reciprocity, 저는 이 개념이 관련된 다른 분야도 고려할 때는 호혜성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이라는 인간 본성의 하나로 정식화됩니다. 인간은 남이 좋게 대하면 자신도 좋게 대하지만(“웃는 낯에 침 뱉으랴”) 상대방이 모욕을 주거나 넘어야 하지 않을 선을 넘을 때는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처벌을 한다는 게 (강한)상호성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비슷하죠? 또 칸트의 황금율(“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과도 통합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얘기를 넘어서는 거 같죠? 분명 그건 종교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하면 제 추론은 이렇게까지 확대 해석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자기도 무일푼이 되는 걸 막기 위해 500원에 가까운 액수를 제시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것도 결국 이기적 행위라는 겁니다. 독재자게임은 이런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 게임은 상대방이 거절도 못하니까 한 푼도 안 주는 게 논리적인 답입니다. 과연 게임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조건을 더 하느냐에 따라 액수는 달라졌지만 답은 언제나 플러스로 나왔고 500원도 꽤 많이 제시됐습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행복’에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뭔가 불행한 존재가 된다는 얘깁니다. 

인간은 실로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결투를 해서 결국 죽는 중세시대의 기사라든가, 화랑 관창처럼 자기 목숨을 바칠 수도 있고, 조국 해방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건 투사들이 있었고 촛불을 들고 줄기차게 광장으로 나섰던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이기적 인간(homo economicus)이라기 보다 상호적 인간(homo reciprocity)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공동체는 어떻게 운영될까?

공공재게임은 공동체의 운영에 시사점을 줍니다. 공공재는 주류 경제학에서 인정하는 대표적인 ‘시장실패’의 사례입니다.  흔히 드는 예는 국방이나 치안인데 공중파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덕여왕을 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도 아니고(비포화성), 내가 밉다고(또는 돈을 안 낸다고) 나만 못 보게 할 방법도 없습니다(비배제성). 지난 달에 문제로 낸 마을의 가로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이기적 인간이라면 난 가로등 없이도 잘 다닐 수 있다며 돈을 내지 않고 가로등 덕을 한 밤 중에 보려 할 겁니다. 이른바 무임승차자(free rider)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모두 그런 머리를 굴린다면 가로등은 세워질 수가 없겠죠. 그래서 주류 경제학자들도 공공재는 국가가 공급해야 한다고 한발 물러섰습니다. 하긴 신자유주의는 이런 논리를 넘어서 국가가 공공재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면 서비스가 나빠진다면서 다시 공공재를 시장에 맡기려고 합니다. 바로 이명박 정부가 지금 하는 정책들입니다. 

과연 게임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유명한 페르와 슈미트의 게임(1999)의 경우 첫 번째 실험에서, 우리 게임의 가정으로 하면 600원 쯤 나왔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이라면 한푼도 안 나와야 하는데 꽤 많은 돈이 나온 거죠. 평균으로 치면 1인당 120원, 즉 자기 재산의 3/5쯤 내 놓은 겁니다. 그럼 매칭펀드를 합쳐서 1200원을 돌려 주니까 1인당 평균 재산은 320(1200/5 + 400/5)원으로 불어납니다. 그런데 한푼도 안 낸 사람은 자기 돈 200원에 돌려받은 돈 240원(공공재의 이익)을 합쳐서 440원이 되고 200원 전부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내 놓은 ‘착한’ 사람은 240원만 쥐게 됩니다. 

돈을 많이 낸 사람은 화가 날 것이고(아주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만족할까요? 하하) 돈을 적게 낸 사람은, 어쩌면 속으로 자신의 똑똑함을 자화자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게임을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요? 횟수가 거듭될수록 사람들이 내는 돈은 점점 적어집니다. 돈 안 낸 사람을 처벌할 방법이 없으니 나도 돈 안 내서 응징(비록 자해일지라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나도 이기적으로 행동하자며 따라 한 것일수도 있겠죠. 결국 10번째 게임을 반복하면 70% 이상이 한푼도 안 내고, 나머지도 아주 소액을 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경제학이 예측하는 바와 비슷해진 거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게임에 무임승차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붙이면 각자 내는 액수가 오히려 늘어나거나 거의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처음 게임에서 돈을 적게 낸 것은 응징의 의미가 컸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번 달 질문은 어쩌면 더 간단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일까요, 아니면 이타적일까요? 또 우리는 어떨 때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어떨 땐 헐크처럼 정반대의 인간이 될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