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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9회

 

 

1


‘아무도 모른다’라는 일본영화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본 영화였는데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영화입니다.
아빠가 서로 다른 네 명의 남매와 엄마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엄마가 짧은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새로운 동네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죠.
넷 중에 가장 큰애는 열 두 살이었는데 학교를 다니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막내는 다섯 살이었고요.
그렇게 버려진 네 남매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관찰하듯이 그린 영화였습니다.


엄마가 메모와 함께 약간의 돈을 생활비로 남겨두고 갑니다.
큰애가 그 돈을 맡아서 동생들을 보실피는데
어느날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돈을 쓰기 시작합니다.
외롭게 지내던 동생들은 오빠가 친구들과 함께 먹을 것을 잔득 사들고 오니까 좋아합니다.
친구들은 그렇게 며칠 동안 남매들의 집에서 먹고 놀지요.
그렇게 즐거운 며칠이 지나고 얼마되지 않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친구들은 더 이상 그 집을 찾지 않습니다.


이 영화 중에서 유독 이 부분이 가슴 깊숙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일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2


힘들게 투쟁하는 이들을 지켜보며 마음을 다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모았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모았고
마음이 시릴 때면 마음을 모았습니다.
투쟁의 파고가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하다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뤄진 이는 제 눈길을 피해버렸고
힘들게 버티던 이는 500cc 맥주잔으로 제 머리통을 박살냈고
가장 믿었던 이는 제 가슴에 칼을 꽂고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세상에서 떨어져 외롭게 발버둥치고 있을 때
제게 있는 유일한 자산인 책을 나눠준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모르는 사람들이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외로움이 뼈속에 인이 박힌 것처럼 단단히 자리잡고 있던 제게
세상에서 전해지는 신호들은 더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렇게 수 백 권의 책을 나눠주고 더 이상 나눠줄 책이 없어졌을 때
‘구속된 이들에게 책을 보내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세상으로 신호를 쏘아올렸지만
세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귀농을 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연락을 끓고 살았던 이들과 조심스럽게 교신을 시작했습니다.
수신이 아주 양호하지는 않았지만 반가워하는 이들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즐거운 마음에 농사 지으며 얻은 수확물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나의 행복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택배를 받은 분들은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다가 고맙다는 메시지가 한 두 번씩 건너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나마의 교신도 아주 뜸해져버렸습니다.

 

3


과거의 기억은 불쑥불쑥 나타나 자꾸 대화를 하자고 합니다.
걔랑 싸우는 건 말려드는 거고,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걔가 나를 괴롭히도록 놔둔채 그냥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러다보면 재미가 없어진 걔는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몇 년 전에 삶의 구렁텅이에서 발버둥치기를 그만두고 지쳐서 누워있을 때
주위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도와달라고, 한 번만 봐달라고 간절히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였습니다.
모두가 발버둥치고 있어서 제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그게 헬조선의 현실이라는 걸 알게됐지요.


가만히 제 삶을 돌아봤습니다.
저를 도와줬던 분들이 생각 외로 많습니다.
저는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의 고통이 그들에게 비수가 되고 있습니다.

 

4


마음을 다스리려고 정목스님의 방송을 자주 듣습니다.
정목스님의 얘기 중에 가장 가슴에 와닿는 한 마디는
“그들도 나처럼 삶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보왕삼매론을 듣는 명상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하는데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공덕을 배풀되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을 배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아직 이 정도 경지까지 이르지 못해서
나의 기억이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명상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명상과 함께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이 종이접기입니다.
종이접기를 하고 있으면 생각을 하나에 집중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이걸 받아들고 좋아할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이제 연말이 저멀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연말이면 괜히 마음이 설레지만 현실은 추웠습니다.
이번 연말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겠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종이접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추천 좀 해주실래요?

 

(장사익의 ‘이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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