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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4 – 사고 직후 진도에서의 첫날

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4 – 사고 직후 진도에서의 첫날

 


김동수씨의 네 번째 증언 자리가 있었습니다.
이날은 세월호에서 진도로 옮겨진 후의 상황들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습니다.
세월호 사고 당시를 얘기할 때는 비교적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김동수씨는
진도 상황을 얘기하면서는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며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을 보여줬습니다.


세월호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까지 구조활동을 벌이고 탈출한 김동수는 해경 123정으로 옮겨집니다. 30여 명의 세월호 직원과 승객들이 있던 그곳에서 신원파악이 이뤄진 후 다시 어선으로 옮겨타고 팽목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김동수는 학생들을 비롯한 다른 생존자들이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자신의 휴대폰을 건냈습니다.


그렇게 30분 가량을 배로 이동해서 팽목항에서 도착해 배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부상자들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당시 팽목항에는 부상자들을 이송하기 위한 구급차만이 아니라 생존자들을 후송하기 위한 버스도 준비돼 있는 등 비교적 준비가 잘 돼있었다고 합니다.
그 상황을 얘기하면 김동수씨는 “해경이나 해수부 공무원들이 무책임하게 하고 있는데, 그때 내가 배에서 내려서 기자들에게 배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얘기했더라면 구조가 더 활발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많이 된다”며 강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팽목항에서 진도군청 공무원들의 안내로 버스를 타서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12시 30분경 진도체육관에 도착해보니 구호품과 담요, 깔개 등이 준비돼 있었고, 한쪽으로는 상황실이 마련되 있는 등 생존자들을 위한 준비는 비교적 잘 갖춰져있는 상태였습니다.
진도체육관에 도착해보니 앞쪽 무대 중앙에 해수부 공무원들이 몇 명 서 있는 것이 보여 김동수는 그들에게 달려가 “지금 세월호 안에 200~300명 정도가 남아있다. 빨리 이들을 구해야 한다”며 절박한 상황을 얘기했지만 해수부 공무원들은 김동수를 피해 밖으로 빠져나가버렸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30여 명의 생존자들이 넋이 나간 상태로 모여 앉아 있는데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다가오자 김동수는 세월호의 상황을 절절하게 얘기합니다.
그러던 중 1시 40분 경 급하게 연락을 받고 진도로 내려온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들이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진도체육관은 통곡소리와 함께 매우 어수선해집니다. 또 이어서 버스를 타고 도착한 부모들까지 200~300명이 모여들자 김동수씨를 비롯한 화물기사들은 그들을 피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다시 일부의 가족들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오자 또 그들을 피해 체육관 뒤쪽으로 도망치듯이 가야했습니다.
그 당시에 왜 그렇게 가족들을 피했냐는 질문에 대해 김동수씨는 “이유야 어쨌든 우리는 살아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 가족들은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는데... 그 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가 직접 봤는데... 그게 미안했다”며 당시 심정을 얘기했습니다.


이후 진도체육관 안의 상황을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미 해수부 공무원들은 빠져나가버린 상황에서 엄한 진도군청 공무원들만 가족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김동수씨가 마이크를 잡고 “지금도 세월호 안에는 200~300명이 남아 있다. 해경들은 그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빨리 가서 구조해야 한다”며 상황을 얘기했습니다.
마침 그때 진도체육관 안에서 생중계를 하던 방송사의 카메라에 김동수의 마이크 잡은 모습이 잡혔는데, 잠시 후 그 모습을 tv로 지켜본 큰 형이 전화가 왔습니다. 큰 형은 “니네 큰 딸이 공무원시험 준비하는데, 니가 그렇게 앞에서 나서면 나중에 딸에게 짐이 된다. 나서자마라”는 말을 해서 김동수의 가슴에 큰 상처를 안겨줍니다.


그 이후 가족들은 자식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정신이 없고, 대표를 뽑아야 한다느니 하면서 많이 어수선했지만, 김동수는 자신이 그 상황에서 더 나설수 없어서 그냥 한쪽 구석에 가만히 있어야했습니다.
세월호 안에서의 상황보다 진도체육관에서의 상황이 더 힘들고 처참해서 김동수는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고만 싶었습니다. 그래서 진도군청 공무원들에게 “제주도 내려갈 여비를 좀 마련해달라”고 부탁해서 동료 화물기사들과 함께 저녁 7시 30분에 진도체육관을 나오게됩니다.


김동수와 동료들은 진도-제주간 배편이 있는 우수영항으로 이동해서 근처 모텔에 숙소를 잡고 그날 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화물기사들은 화주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화주들은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하고는 화물기사에게 전화를 해서 화물의 안전과 보상에 대한 문제를 얘기했던 것입니다. 김동수의 화주는 자신의 화물보다는 김동수의 상태를 걱정해줘서 다행이었지만, 지옥에서 빠져나와 그런 전화에 시달린 화물기사들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샌 후 다음날 아침 9시 제주행 배를 타게 됩니다.


세월호 사고 당시와 진도에서의 상황까지의 얘기를 마친 김동수씨는 사람들을 더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함께 말못하는 두려움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배가 90도로 기울어진 후에 완전히 넘거가는 상황까지의 기억이 없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게된 후 그 충격이 너무 꺼서 그런 것 같다. 2~3분 정도일 것 같은데, 그때 사려져 버린 기억이 다시 살아나면 더 큰 악몽으로 덮쳐올텐데 그게 제일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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