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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25회

 

 

어느덧 연말이 됐습니다.
연말이라고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만
2017년이 두 주 남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네요.


‘연말인데 무슨 얘기로 방송을 할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순간 몇 년 전에 썼던 글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찾아서 다시 읽었더니
그때의 기분이 아주 생생하게 살아나더군요.


저를 그렇게 괴롭혔던 무거운 기억들을 세월에 흘려보냈는데
그래서 지금은 너무도 편안하고 행복한데
흘려보냈던 무거운 기억들을 다시 건져올린 겁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행복이 오래 이어지려면
나로 인해 상처입었던 이들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상처입었던 기억들도 되살려내서
쓰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 과정이
자기연민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연민이 되도록...


그래서 오늘 방송은 그때의 글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Black Dawn의 ‘My Silent Cry’)

 

 

 

 

1


설을 앞두고 울산에서 부고가 전해졌다.
해고자 생활 10년을 버티면서 복직의 끈을 놓지 않고 싸워왔던 그는
나이 오십도 되지 않아서
자살도 사고도 아닌 병으로 죽고 말았다.
‘질긴 놈이 먼저 죽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멍해졌다.


당장 울산으로 가야하는데 망설여졌다.
내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
만나서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든 사람들이
죽은 이보다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를 망설이다가
망설이고만 있는 시간이 더 힘들어서 울산으로 향했다.


무수한 이들과 악수를 하면서도 긴장했다.
웃으면서 술을 먹으면서도 긴장했다.
그렇게 긴장 속에 밤은 깊어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떠난 영안실에서
죽은 이의 웃는 사진 앞에서 3백배를 했다.
풀린 다리를 지탱하기 어려워 자리에 누우니 긴장도 풀렸다.


조금 떨어진 옆에 모르는 여자가 자고 있었다.
그의 손을 만지려고 내 손을 뻗다가 들켜 버렸다.
새벽 일찍 영안실을 빠져나와서 제주도로 도망쳐버렸다.
지친 몸과 자괴감 속에 아무 생각 없이 설을 보내고 누워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몇 년 전 내 심장에 칼을 꽂았던 이의 술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워서 화를 내고 말았다.


통제되지 않는 채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내 자신이 무섭고
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들추어 딱지를 때내는 게 무서워서
휴대폰을 해지해버렸다.
세상을 향해 남아 있던 또 하나의 문을 닫아버렸다.

 

2


고통스럽게 혼자서 발버둥 치던 지난 몇 년 동안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소설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내 상처를 쓰다듬고
내가 상처 줬던 이들을 돌아봤다.
그러면서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쓴 글을 통해서 나를 안아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나만큼 힘들게 버티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을 안아주고 싶어졌다.
내 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맨땅에 헤딩을 했다.
무작정 출판사로 메일을 보내서 책을 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


6개월 동안 무수한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진보적인 출판사는 거의 다 시도해봤고
문학 관련 출판사도 여러 군데 시도해봤지만
단 한 군데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출판시장의 현실을 조금은 알게 됐다.
권력화 된 거대 출판사들은 그들의 카르텔 외부의 시도는 단호히 거부했다.
중소 규모 출판사들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들의 영역만을 관리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진보의 가치는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일 뿐이었다.


대중의 자발성과 창조성에 대한 찬양은
전문가들의 입과 글로 나왔을 때 상품이 될 수 있지만
나처럼 허접한 이들이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은
냉혹하게 거부됐다.


대중민주주의니
다중지성이니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니
이런 것들은
버려져서 배고픈 개들에게 주면
영양가는 없지만 달콤해서 잘 먹을 거다.

 

 
3


벌어 놓은 돈도 없이
갑자기 고향에 내려와서
몇 년 동안 빈둥거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우습게 본다.
워낙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어서
웬만한 것은 그냥 견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동생과 매제도 은근히 나를 우습게 대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기대고 있는 곳이 가족이라서
참고 지내다가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즐거운 자리를 가지던 날
술기운에 성질을 한 번 부려버렸다.


그 효과는 막 바로 나타났다.
부모님을 빼고는 웬만해서 나와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명절에는 모두가 모여서 밥을 같이 먹지만 술은 사라졌다.


이제,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이 술을 먹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4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투쟁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그렇게 전해지는 소식을 통해 마음으로만 그 투쟁을 지지하는 가운데
긴장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많이 불편해졌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강정마을로 찾아갔다.
아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 불쑥 찾아가서 뭐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투쟁과 긴장감 속에 지쳐있는 그들 앞에서
들쑥날쑥 하는 내 자신을 붙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중의 고통을 호흡하면서 차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행동은 거침없었다.


결국
제주지역 활동가들에게는 ‘육지에서 놀아봤다고 잘난 척 하는 놈’으로
타지역 활동가들에게는 ‘텃새부리는 섬 놈’으로 찍혀서
튕겨 나와 버렸다.


이후에도 해군기지 반대투쟁은 계속 되고 있고
나는 집회나 참석하면서 그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5


하루에도 몇 번 씩 깊은 호흡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속에서도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있었다.


나보다 더 힘들게 높은 담장 안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책을 보내기 시작하고
그들의 따뜻한 편지를 받아들고 몇 번을 다시 읽으면서
마음이 움직였다.
세상에는 이런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책이 점점 줄어들어서
2~3권씩 보내던 것을 1권으로 줄여야 했고
그것도 힘들어져서
미결수는 포기하고 기결수에게만 보내야 했다.
그 마저도 힘들어져서
블로그에 글을 올려서 도와달라고 호소해봤다.
2011년을 마무리 하는 연말에
그들에게 작은 책 한 권씩이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결국 보내지 못했다.


나에게 책이 많이 있을 때
그 책을 나눠주겠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줬지만
그 책이 다 떨어져서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와중에 하나 둘씩 출소하는 이들도 생겼다.
그렇게 출소한 이들도
더 이상 나를 찾지 않는다.


세상살이라는 게 이런 것이라는 걸 알지만...

 


6


내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세상은 점점 촘촘하게 나를 죄어 온다.

 
2011년이 끝나가고 있다.
그렇게 나이는 한 살 더 많아졌고
몸무게는 10kg쯤 빠졌고
영혼은 0.1g쯤 증발해버렸다.


잘가라,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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