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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5 – 극심한 트라우마와 사회시스템의 장벽

꼴통 동수의 세월호 증언 5 – 극심한 트라우마와 사회시스템의 장벽

 

김동수씨의 증언을 듣기 위한 다섯 번째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이날 모임에서는 제주로 돌아온 후 심리적 육체적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과정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습니다.


2014년 4월 17일 아침 9시에 진도 우수영항에서 제주행 배를 탄 김동수는 배안에서도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정한 상태로 있어야 했습니다. 특히 진도 부근 해상을 통과하면서 구명조끼를 비롯해 세월호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부유물들이 바다 위에 따다니는 모습을 보게 됐는데, 그로 인해 세월호에서의 상황들이 다시 떠올라 힘들었습니다.


12시 50분 제주에 도착했을 때 제주항에는 기자들과 함께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딸들이 울면서 아빠 품에 안겼지만 김동수의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습니다. “내 딸은 이렇게 내 품에 안겨있는데, 그곳에는...”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고, “아저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외치던 학생들의 모습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주에 도착해서 긴장이 다소 풀어지자 몸 곳곳이 아프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해져서 빨리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기자회견이 준비돼 있어서 가지회견을 하게 됩니다. 동료들이 “형은 꼭 기자회견을 해야한다”고 권유하는 속에 6명이 기자회견을 하고 김동수는 한국병원에 입원합니다.


병원에 입원을 하고도 너무 억울하고 어의가 없어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날 저녁 tv에서는 세월호 생존자인 김모씨가 출연해 “우리가 20여 명을 구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김모씨의 얼굴을 알고 있던 김동수는 너무 황당해서 인터뷰를 진행한 kbs에 연락했으나 담당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kbs제주로 연락해서 당시 상황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일간지에서 다뤄지면서 소위 ‘세월호 의인 논쟁’(누가 진짜 세월호 의인이냐는 식의 왜곡된 논쟁)으로 발전했고, 그로 인해 “보상금을 더 받아내기 위해 의인을 자처하는 거 아니냐”는 식의 얘기까지 듣게 됩니다.


다음날 몸이 너무 추워서 병원 근처에 있는 목욕탕을 찾았는데, 목욕탕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아직도 차가운데 있는데, 아저씨는 따뜻한 곳에 있네요”라는 환청이 들렸고, 이에 김동수는 급히 목욕탕을 나와야했습니다.


정신적 고통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구출과정에서 장시간 무리한 힘을 사용해서 어깨, 허리, 옆구리 등 몸 곳곳에 이상을 느꼈는데, 이후 팔과 무릎에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육체적 손상은 완전히 치료되지 못해 김동수는 아직도 어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제주도 경찰청 정보과 형사가 자주 찾아와 김동수의 상태를 살폈고, 어느날에는 목포해경 소속 경찰들이 조사를 하러 오기도 했습니다.
목포해경과의 조사과정에서도 김동수는 거침없이 해경들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말을 쏟아냈고, 그 얘기를 듣던 해경 간부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해경이 “김동수씨는 이준석 선장이 살인자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에 흥분한 김동수는 “이준석이 살인자면, 해경도 살인자고, 나도 살인자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당시 옆에 있던 친구는 “왜 이 사람을 피의자 취급하냐?”며 해경에게 거세게 항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김동수의 극심한 정신적 불안증상은 계속됐고, 제주시에 있는 정신과병원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의사는 일반환자를 대하듯이 통상적인 질문을 하면서 매뉴얼에 따른 문진을 계속 하자 화가 난 김동수가 “내가 300명이 죽는 걸 봤는데, 치료해줄 수 있습니까?”라고 의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의사를 뒤로 하고 김동수는 병원을 나와버립니다.
그 뒤로도 여러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그곳들에서도 모두 마찬가지로 통상적인 질문을 하고 약물치료만을 반복하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김동수는 병원에 대한 신뢰를 잃어갑니다.


이후 좀더 종합적인 치료를 위해 제주대학병원에 입원을 해서 여러 검사를 받게 되는데, 그곳에서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입원 2주 후 x-레이 촬영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30분이 지나도 부르지 않기에 직원에게 “왜 부르지 않느냐?”라고 했더니 직원이 성의없는 말투로 “판독중이니 기다리라”라고 댓구합니다. 이에 그동안 쌓였던 병원에 대한 불만과 불신 등이 폭발한 김돔수는 아주 거세게 항의를 하며 퇴원을 해버립니다.


사고 후 몇 개월이 지난 2014년 9월경 딸과 함께 여행을 하다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손이 덜덜덜 떨려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울먹이는 딸과 함께 김동수는 급히 병원 응급실로 실려왔지만, 병원측에서는 “입원수속을 하기에 시간이 늦었고 담당 과장도 자리에 없다”며 입원을 거부합니다. 이에 격분한 김동수가 “이렇게 아픈데 입원도 하지 못하게 하면 어쩌란 말이냐!”며 매우 거칠게 항의를 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들이 쌓이며 김동수는 분노조절장애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나중에 안산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치료하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산을 찾게 됩니다.
그곳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희생자 가족들도 만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고, 트라우마센터를 방문하게도 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수집한 김동수는 제주도청을 찾아가 “우리도 많이 힘들고 상태가 심각하다. 트라우마센터처럼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요구를 합니다.


10월경 안산에서 지원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려와 만남을 갖고 “단원고 희생자들을 중심으로 416대책위가 만들어졌으니 화물기사분들도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지만 김동수는 “화물기사들은 보상문제가 우선 시급하게 해결되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식들을 잃은 유족들 앞에서 돈얘기를 한다는 건 서로가 힘든 일인 것 같다. 지금은 따로 가고 나중에 진상규명을 요구할 때 같이 가자”고 대답합니다. 이후에도 다시 416대책위측에서 함께 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런 문제로 화물기사들은 같이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생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 4천만원을 확보했는데 그를 둘러싼 논쟁도 벌어집니다.
제주도에서는 예산집행을 위해 법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김동수는 “별도의 법인을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생존자들에게 직접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도 화물기사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갈라지게 됩니다.


나중에 화물기사들이 도 지원금을 나눠서 수령했는데, 김동수는 진상규명과 치료 등을 위해 수시로 서울을 왔다갔다하면서 얼마되지 않는 지원금을 다쓰게 됩니다. 이에 화물기사 동료가 자신들의 몫을 김동수에게 추가로 지급할 수 없냐고 도에 요청을 했지만 제주도의 답변은 “규정상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차원으로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방안이 발표되고 언론에 보도가 됐는데, 이 사실을 알고 관계기관을 찾아 지원을 요청했지만 “아직 공문이 내려오지 않아서 해줄 수 없다”는 담당 공무원의 답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의사상자 신청을 받는 과정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하는 과정에서 지정병원을 구하지 못한 김동수는 제주와 서울에서 병원을 수소문합니다. 생존자들이 많이 찾는 병원에서는 사람이 많아서 어렵다는 답변을 들어 수소문 끝에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고 증빙자료를 만들어 관련기관에 제출합니다.
그런데 다른 해당자보다 김동수의 판정기준이 약하게 책정된 사실을 알고 해당병원을 찾아 정정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담당의사가 마치 때쓰는 아이를 대하듯이 “이게 억울해서 오셨구나”라고 대답해 김동수와 가족들은 또 다시 격렬한 항의를 하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2015년 6월 18일 김동수는 의사상자 판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의사상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것이 소정액의 상금, 본인 의료급여 지원, 고등학생까지의 자녀 학용품지원 등이 전부였습니다. 김동수씨의 아내 김형숙씨는 “공무원은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각종 지원과 혜택이 이뤄지는데, 국가가 나서지 않는 일을 나서서 한 민간인에게는 겨우 이런 대접을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고 이후 1년여 기간의 얘기를 풀어놓은 김동수씨는 “병원이든 관공서든 모든 것이 안되는 것 투성이였다. 거기에 맞서 싸우는 게 너무 힘들었고, 그 때문에 생긴 상처들이 더 컸다”며 이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관료적이고 경직되어 있는지를 토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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