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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55회 – 봄날의 대화들

 

 

 

1

 

읽는 라디오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성민입니다.

 

봄이 돼서 가장 좋은 것은

일을 할 때 햇볕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겁니다.

생기가 왕성하게 돌아오는 식물들 속에서

저 역시 광합성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흠뻑 빠져듭니다.

사랑이도 기분이 좋은지 하우스에 들어오면 나가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렇게 낮 시간을 보내고 나면 밤이 편안해집니다.

이른 새벽에 잠이 깨는 일이 사라지고

꿈자리도 한결 부드러워집니다.

그에 덩달아 일어나서 하는 명상과 요가도 즐거워집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면서

앞으로 해야 될 일들에 대한 계획을 세우다보면

마음이 살짝 앞서가곤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앞서가면

이것저것 부족한 것들도 보이고

그 틈으로 걱정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앞서가는 마음을 불러 세워서

지금의 햇볕을 더 즐기라고 얘기해줍니다.

 

수확을 앞두고 노랗게 익은 감귤나무와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잡초들과

여유롭게 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랑이와

모두 친구가 돼서

편안하게 햇볕을 즐깁니다.

 

 

2

 

하우스에서 일을 하다가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제 마음 속의 성민이가 찾아왔습니다.

 

 

마음 속의 성민이 : 날씨 좋지?

 

성민이 : 그래, 너무 좋다. 너도 나와서 이 햇볕을 즐겨봐.

 

마음 속의 성민이 : 그럴까, 아~ 좋다.

 

성민이 : ...

 

마음 속의 성민이 : 야.

 

성민이 : 응?

 

마음 속의 성민이 :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편안하지 않냐?

 

성민이 : 응.

 

마음 속의 성민이 : 우크라이나 사람들이나 산불 이재민들에게도 이 햇볕이 가닿겠지?

 

성민이 : ...

 

마음 속의 성민이 : 그 사람들에게도 이 햇볕이 편안하게 느껴질까?

 

성민이 : 야, 돌려서 말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얘기를 해.

 

마음 속의 성민이 : 아니, 방송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너는 여기서 이렇게 편안하게 일광욕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행복하냐?

 

성민이 : 내 몸은 여기 있으니 지금 이곳에서 일을 하다가 쉬고 있는 것이고, 우크라이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나름 마음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뭐가 문제야?

 

마음 속의 성민이 : 뭐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이렇게 햇볕을 즐기고 있으니까 행복하냐고?

 

성민이 : 방금 전까지 행복했었는데, 니 얘기 듣고 나서 불편해졌어.

 

마음 속의 성민이 : 그래서 불쾌해?

 

성민이 : 불쾌한 건 아니고... 나의 행복이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뜻이야. 니 말 때문에 기분 상했다는 뜻도 아니고.

 

마음 속의 성민이 : 고뇌하는 지식인이냐?

 

성민이 : 음... 현실은 다른 조건에 안주하면서 관념으로만 연대한다는 뜻이야?

 

마음 속의 성민이 : 그렇게 생각해?

 

성민이 : 야.

 

마음 속의 성민이 : 응?

 

성민이 : 오늘 얘기 여기까지만 하자.

 

마음 속의 성민이 : 왜, 불편해서?

 

성민이 : 어. 그렇다고 너의 질문을 피하려는 건 아니야.

 

마음 속의 성민이 : 얘기를 중간에 끊어버리고는 피하는 게 아니라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흥~ 알았다. 혼자서 햇볕 많이 즐기세요. 저는 갑니다.

 

 

마음 속의 성민이가 사라지고 난 후

옆에 있는 사랑이를 가만히 쓰다듬어줬습니다.

 

 

3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되다가 비가 내리더니 주말에는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방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인터넷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멍하니 인터넷에 빠져서 무료함을 달래다가 오래 전에 제가 썼던 글들을 보게 됐습니다.

열정이 넘치는 글들을 읽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가더군요.

그래서 가장 열정적이었던 30대 중반의 저를 찾아갔습니다.

 

 

성민이 : 안녕, 반가워.

 

예전의 성민이 : 아, 예, 안녕하세요.

 

성민이 : 웬 존댓말?

 

예전의 성민이 : 아니... 나이가 좀 있어서...

 

성민이 : 너 그런 거 별로 안 따지잖아. 그리고 나는 미래의 너일 뿐인데.

 

예전의 성민이 : 그래도 좀... 미래의 나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성민이 : 알았어, 너 편한대로 해. 그런데 내가 너한테 말 놓으면 꼰대가 되는 거냐?

 

예전의 성민이 : 아니... 뭐... 그럴 필요는...

 

성민이 : 왜 이렇게 버벅대?

 

예전의 성민이 : 어... 뭐.... 그건 그렇고 무슨 이유로?

 

성민이 : 그래 알았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니가 썼던 글들을 읽다보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서... 너는 고통 받는 민중과 함께 아파하며 하나가 돼야 한다고 했잖아. 그럴 때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생겨난다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도 단련이 된다고.

 

예전의 성민이 :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천하고 있죠. 왜요? 혹시 나이가 드니까 생각이 달라졌어요?

 

성민이 : 글쎄, 나이가 들어서 생각이 달라졌다기 보다는... 뭐랄까, 삶의 조건이 달라지니까 고민이 많아졌다고 할까?

 

예전의 성민이 : 그게 그거 아닌가? 지금은 배고프지도 외롭지도 아프지도 않은가 봐요? 살만해요?

 

성민이 : 야, 그렇게 거칠게 훅 들어와 버리면 얘기가 좀 거시기 해지는데...

 

예전의 성민이 : 제가 너무 직설적이었죠, 죄송해요.

 

성민이 : 아니다, 그게 니 매력인건데. 그래 그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하지 뭐. 사실 지금 나는 편안하게 잘 살고 있어. 예전처럼 라면으로 적당히 배 채우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면서 노화증상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는 있지만 특별히 아픈 곳도 없고, 외롭기야 하지만 그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상관은 없고... 큰 욕심 없이 혼자서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어. 그런데 열정적인 너의 모습을 보니까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예전의 성민이 : 그래서 뭘 어쩌라고요?

 

성민이 : 아니... 뭘 어떻게 해달라는 게 아니고...

 

예전의 성민이 : 혹시 생각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철없어서 세상을 삐딱하게 봤는데 나이 들고 보니까 세상이 그렇지만 않더라, 뭐 이런 식이로요.

 

성민이 : 아니야, 그렇진 않아. 나는 아직도 너를 지지하고 응원해. 단지 지금의 내가 과거의 너처럼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없을 뿐인 거야.

 

예전의 성민이 : 민중이 고통스럽게 발버둥치고 있을 때 예전에는 그 손을 잡고 같이 발버둥쳤다면 이제는 그저 옆에서 측은한 마음으로 안타까워한다는 건가요?

 

성민이 : 음... 그런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네.

 

예전의 성민이 : 그러면 그냥 그렇게 사세요. 저랑 서있는 위치가 달라진 거잖아요. ‘서있는 위치’ 즉 입장(立場)이 다른 거잖아요.

 

성민이 : ....

 

예전의 성민이 : 제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라면 그럴 수 있으세요?

 

성민이 : 솔직히 말하면, 자신 없어.

 

예전의 성민이 : 그러면 그곳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세요. 저랑 생각이 다르다면 저랑 싸우시고요, 저랑 생각이 비슷하다면 저를 응원해주시고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관심이 없다면 그냥 관심 끄시고요.

 

성민이 : 미안한데, 나를 위해서 조금만 배려해 줄 수 없을까?

 

예전의 성민이 : 무슨 배려를 어떻게요? 이 고통 받는 이들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건지를 알잖아요? 그런 저한테 무슨 배려를 원하시는 거죠? 이 절박함 속에서 발버둥치는 이들을 위해 나름 편안하게 살아가시는 분이 배려를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요?

 

성민이 : 그렇지, 니가 나를 배려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배려해줘야 하는 거지.

 

예전의 성민이 : 제 얘기가 너무 직설적이라서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성민이 : 아니야, 그렇게 날카롭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예전의 성민이 : 더 하실 얘기 없으시면 그만 가볼게요.

 

성민이 : 어, 그래, 고맙다.

 

 

예전의 저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서 솔직히 마음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전의 저와 비교해서 지금의 제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예전의 성민이가 날카롭게 찔러댔던 상처를 들춰봤더니 그것들이 보이더군요.

 

‘자기 호흡으로 뭔가를 열정적으로 하는 것’

‘고통 받는 이들과 같이 아파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

‘서로를 배려하면서 즐거워하는 것’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

 

 

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사는 동네의 어느 집 모습입니다.

길가에 돌담으로 만들어진 화단이 있고

그 뒤로 밭을 구분하는 돌담이 있고

다시 뒤로 집을 구분하는 돌담이 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세 개의 돌담이 층층이 쌓여있지만

갑갑하거나 불편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이곳의 돌담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을 아무렇게나 대강 쌓은 듯하고

중간에 구멍도 쑹쑹 나있고

어른 허리 높이로 그리 높지도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위압감을 주지도 않고

태풍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고

시야를 막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고 포근합니다.

 

이런 곳에 살면

그곳에 맞게 살아야합니다.

편안하고 포근하게.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의 ‘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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