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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5회 – 나는 판타지세계 속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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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아서 사붓사붓 산책을 나섰는데 바닷가까지 가게 됐습니다.

해안도로 옆에 조그만 정자가 있고 그 안에는 누군가 갖다놓은 의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진으로 담기에는 좋은 그림이 되지만 막상 저 자리에 앉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낮 기온이 조금 뜨거웠고 바다가 너무 편안해보여서 부담스러움을 누르고 살며시 정자 안 의자에 앉아봤습니다.

 

 

성민이 : 아~ 오래간만에 바다 보니까 좋다!

 

내 안의 성민이 : 나도 좋다!

 

성민이 : 사랑이라도 데려올걸 그랬나? 혼자 보기에는 조금 아까운데...

 

내 안의 성민이 : 내가 같이 있잖아.

 

성민이 : 응, 그래. 너라도 같이 있으니까 좋네.

 

 

 

바다가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안의 성민이 : 추석에 왜 어머니한테 가지 않았어?

 

성민이 : 갑자기 뜬금없이 왜 그걸 물어?

 

내 안의 성민이 : 그냥.

 

성민이 : 추석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 있나? 내 스타일이 그렇잖아. 평소에 자주 찾아가는데...

 

내 안의 성민이 : 추석 전날 어머니가 오라고 했잖아.

 

성민이 : ......

 

내 안의 성민이 : 어머니가 괜히 의지하고 그러는 게 싫어서 그런 거지?

 

성민이 :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 안의 성민이 : 너 새벽에 명상할 때는 ‘외롭고 힘든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며 살게 하소서’라며 매일 주문을 외우잖아.

 

성민이 : ......

 

내 안의 성민이 : 전라도인가 어디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분이 가끔 전화를 하면 받지도 안잖아.

 

성민이 : 야, 그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 도움이 될까 해서 이것저것 노력했던 거 너도 알잖아. 그런데 뜬금없이 전화해서는 관념적인 얘기들만 주절주절 늘어놓으니까... 그 분 사는 상황도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내 안의 성민이 : 성격 좋고 이해심 많고 포근한 사람은 니가 아니라도 주위에 사람이 많아. 성격 더럽고 시야도 좁고 날카로운 사람은 주위에 사람이 거의 없지. 몇 년 전에 너도 그랬잖아.

 

성민이 : 그렇지. 머릿속으로는 자비로운 삶을 생각하면서 막상 현실에서는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찾고 있으니...

 

내 안의 성민이 : 그런 사람들이 너와 코드가 맞지 않다면 너와 코드가 맞는 사람을 찾을 게 아니라 니 코드를 바꿔야하는 거 아니야?

 

성민이 : 휴~ 그 말이 맞기는 한데...

 

내 안의 성민이 : 성민아, 세상에 쉽게 이뤄지는 건 별로 없어. 조금씩 노력하면서 얻어지는 거지, 그치?

 

 

내 안의 성민이랑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도

바다는 짤랑짤랑 잔물결을 만들어내면서 주위를 가만히 감싸 안고 있었습니다.

잠시 일렁였던 제 마음도 다시 짤랑이는 잔물결에 맞춰 편안해졌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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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나무에 새순이 기지개를 켜면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봄과 여름에 왕성하게 올라왔던 순들도 늠름하게 자랐고

감귤도 어느 정도 다 커져서

서서히 겨울 준비를 해야 할 때인데도

아직 힘이 넘친다는 걸 보여주려는 건지

새순을 또 뽑아내고 있습니다.

이제 바쁜 일도 거의 끝난 하우스 안에서

싱싱한 새순을 보며

제 마음속에도 새순을 뽑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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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뿌려놓은 씨와 모종들이 왕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발아가 제대로 안 됐고

어떤 것은 물이 부족해서 죽기도 했고

어떤 것은 어린잎에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잘 자라고 있네요.

한 달 후부터 조금씩 수확해서 먹을 수 있을 것 기대하니 마음이 풍성해지는데

사실 다 자라서 풍성한 결실을 맺을 때보다

지금처럼 매일매일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맛이 더 즐겁습니다.

밝고 활기 넘치는 10대들처럼 그 에너지를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tv를 커면 관심도 재미도 없는 아시안게임 중계가 채널을 도배합니다.

몇 개 채널을 돌려야 다른 방송이 나오는데 여기는 나랑 상관없는 이의 단식과 구속여부에 대해서 생난리입니다.

또 다시 채널을 돌리면 해외여행 가서 흥청망청 놀거나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재끼기 바쁩니다.

너무도 재미없는 딴 나라 얘기들이어서 tv를 끄고 인터넷으로 들어가 봅니다.

다양한 영상이 넘쳐나는데 술 쳐 먹고 해롱해롱 하며 떠들고, 자기들만 아는 얘기로 수다 떨며 낄낄거리다가 상대 약점을 후벼 파느라 정신이 없고, 별다른 맥락 없이 옷을 풀어헤치려 용을 쓰고, 쓸데없는 지식들을 늘어놓고 자랑하느라 열을 올립니다.

유튜브가 너무 정신없어서 머리를 식히려 ott로 들어가면 온통 초능력자와 범죄자와 복수에 대한 얘기들뿐입니다.

 

이런저런 고민들이나 잡념들을 날려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기에는 좋을까 싶기도 하지만

온통 그런 것들만 넘쳐나고 있는 판이어서

그 속에 빠져있으면 오히려 잡념들만 더 늘어날 뿐입니다.

 

tv와 인터넷을 다 끄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사랑이가 슬금슬금 다가와

쓰다듬어달라고 머리를 들이밉니다.

사랑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창밖을 보니

하늘은 청명하고

쑥쑥 자라는 어린 모종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어쩌면 tv와 인터넷 속의 세상이 현실이고 이곳이 판타지세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조와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그런지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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