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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지적재산권

건강과 지적재산권

양희진
지적재산권 연구회

인류가 의약개발에 쏟아 부은 돈은 실로 막대하다. 그 성과도 대단하여 19세기말까지 숱한  생명을 앗아갔던 천연두, 콜레라, 디프테리아 같은 무서운 전염병들은 이제 지구상에서 흔치 않은 질병이 됐다. 오랫동안 가망이  없던 성병 등 각종 감염질환도 이제는 항생제를 써서 고칠 수 있다. 단 돈만 있다면 말이다.
기술의 발전을 단지 찬양하는데 그치는 사람들은 치료약의 개발자 편에서 그들을 대변한다. 마치 당장이라도 모든 불치병이 세상에서 사라질 듯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연구개발에 더 많은 돈을 지원하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어디엔가 치료약이 있다고 해서 그 질병에 걸린 사람들 모두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있는 것은 아니다. 먹을 것도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판국인데, 약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과 고통은  아주 쉽게 외면 당한다. '가진 것의 차이'를 '살아갈 권리의 차이'로 인정하는 사회가 아닌가. 이런 차별적인 사회구조는 차별적 제도들을 양산한다.  이로 인해 불평등은 더욱 공고해지며, 부수기 어려운 장벽이 된다. 이런 제도들 가운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적재산권 제도이다. 지적재산권 제도가 '가진 자'나 '잘 사는 나라'를 위한 수단이라는 비판이 최근에 더욱 활발해 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태국을  중심으로 불거져나온 의약과 관련된  지적재산권 문제를 다뤄보려고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태국의 사례는 지적재산권이라는 무역의  신무기가 '잘 사는 나라'(미국)의 '가진  자'(제약회사의 자본가)를 위해 어떻게 이용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의약의 지적정보 독점과 관련된 미국의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한다. 이는 미국 내에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의약, 아니 '생명'을 두고 벌어질 수밖에 없는 갈등의 뿌리를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미국의 무역 무기 - 지적재산권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에이즈 치료약에 관련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 문제의 핵심에는 지적재산권을 이용해서 자국의 기업을 보호하려는 미국의 무역정책이 숨어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태국은 모두 에이즈의 확산이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국가들이다. 남아공의 경우 에이즈 감염자가 360만명(총인구의 16%)에 이르며, 임산부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고 군인 가운데에는 45% 이상이 감염자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얼마 전 움베키 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새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에이즈 문제 해결이 꼽혔을 정도이다. 태국도 만만치 않은 에이즈 퇴치 고민에  빠져있다. 에이즈에 감염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그들 부모의 사망 후 데려다 보호하는 전문 고아원이 있을 정도다. 지난 5월 태국 보건부는 에이즈에 감염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고아의 숫자가 2000년경에는 1997년의 4만4천4백69명의 2배인  8만6천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두 나라는 에이즈 감염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도 공통점이 더 있다. 양국 모두 에이즈 치료에 쓸 의약품이 부족해서 제대로 치료도 못받고 죽는 사람이 허다한 상황이며, 이런 상황은 미국의 무역 압력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있다.
남아공의 경우 평균 연간 수입은 2,600달러인데 반해 에이즈 치료에  매달 드는 비용은 약 1,000달러 정도다. 환자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돈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큰돈이다. 남아공 정부는 치료약 값을 낮추기 위한 방편으로 올해초 의약법을 개정했다. 그 개정안 내용에는 의약품의 병행수입 및 강제실시권 허용에 대한 규정이 들어있었다.
미국은 병행수입 및 강제실시권을 허용한 남아공의 의약법 제15(c)조가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의 지적재산권 측면에 관한 일반협정(TRIPs)'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병행수입(parallel import)이란 특허권을 가진 제약업자에게서 정식 루트로 약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어떤 루트를 통해 그보다 더 싼값으로 수입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제약회사들은 각 나라마다 가격을 차별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제3국에서 수입해 오는 것이 수입자 입장에서 유리할 수 있다(상자기사 1 참조).
  강제실시권(compulsory license)이란 어떤 특허를 특허권이 없는 자가 사용하려고 할 때 몇 가지  요건을 만족하면 적절한 로열티를 특허권자에게 주는 조건으로 각국 특허청 또는 법원에서 그에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상자기사 2 참조). 특허권자만이 아니라 제3자도 제조 판매할 수  있다면, 특허권자에게 일정한 로열티를 지불하더라도 의약품의 가격이 현재보다 낮아질 것이다. 더구나 로열티도 법원을 통해 결정하기 때문에 액수가 그리  커질 위험은 없다. 남아공에서는 에이즈 치료약에 대한 강제실시권을 허용하면 약품 가격이 75~90%까지 내려갈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미국 무역회사가 주도하는 국제제약업계는 남아공의  이 개정법이 헌법의 규정에  위배된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미정부관리들은 제약회사들과 함께 무역 제재조치로 남아공을 위협했다. 미제약업계는 미정부 무역관리들을 상대로 각 회사의 에이즈약 특허권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며 로비를 벌여왔다. 제약회사들은  연구 개발에 계속 투자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이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약품 하나를 개발하는데 드는 비용만도 10억 달러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의약 개발을 위해서  특허권 등의 지적재산권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항변한다.  그 결과 남아공의 개정된 의약법은 아직 발효되지 못하고 있다.
태국에 대한 미국의 압력도 만만치 않다. 6년전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태국은 의약품의 병행수입을 금지했다. 이번에는 강제실시권에 대해 미국이 통상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태국의 보석과 목재에 대한  미국내 관세를 낮춰주겠다며 그 대가로 의약의 강제실시권 제도를 철회하라는 게 미국의 요구이다. 원래 태국 정부는 항HIV제인 디다노신(didanosine){{) 디다노신의 한달치 약값은 166달러에 이르지만, 97년 7월 이후로 태국의 하루 최저 임금은  4.5달러에 머물러 있다. 하루치 약  값이 태국의 평균 일당을 넘는 셈이다. 이 약은 미국의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사가 독점판매하고 있지만 특허권은 미국 정부  가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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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하려고 했었다. 에이즈 환자들에게 AZT(아지도티미딘, 에이즈 치료약의 일종)와 디다노신의 병용 치료를 제공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태국 정부는 다다노신의 강제실시권 사용을 보류한 상태다.

시민들의 대응

태국과 남아공의 시민단체들은 미국의 통상압력의 비윤리성에  대해 폭로하고 국제적 연대망을 구축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TV 외신뉴스에서 보도된 바와 같이 남아공 국민들이 에이즈약에 대한 미국의 통상압력에 항의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이와 같은 속사정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비정부기구(NGO)들도 미국  정부와 미국의 제약업계를  비난하고 나섰다. '국경없는  의사회(Doctors Without Borders)'는 강제실시권을 통해 가난한 국가의 국민들이  에이즈약을 더 싼값으로 얻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제실시권을 사용하기만 하면 에이즈를 세상에서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제실시권 사용이 에이즈로부터 가난한 환자들을 구해내기 위해 취해야 하는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장하듯 남아공의 의약법이 TRIPs협정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연합의 여러 나라가 의약품에 대한 병행수입을 시행하고 있으며, 그 규모도 상당하다. 또한 일본, 뉴질랜드, 호주의 대법원과 심지어 미국의 대법원에서도 병행수입을 인정하는 판결이 최근 내려진 바 있다. 병행수입을 인정한 유럽재판소의 판례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미국회에 미국무부가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TRIPs 협정하에서는 병행수입과 관련된 분쟁이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절차의 대상은 아니다"라는 미정부 변호인단의 의견이 실려있다.
강제실시권도 마찬가지다. 미국 정부는 여러 가지 목적으로 강제실시권을 활용하고 있다.  남아공은 지금까지 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권을 한번도 활용한 적이 없지만, 미국은  지난 3년 동안에만도 여러 차례 강제실시권을  허락했다. 예를 들면 98년에 미법무부는 유명한 생명공학회사인 몬산토의 생명공학특허에 대해  150개 이상의 강제실시권을 획득했다. 또한 미연방 법원은 최근 인텔사의 강제실시권 허락을  명령했고, 미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관련해서도 강제실시권 허락을 고려하고 있다.
WTO/TRIPs 31조에서도 각 회원국은 특허권자의 허가 없이도 제3자에 의한 사용(강제실시) 또는 공공의 비상업적  목적을 위한 사용(정부 사용)을 허가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미국은 현행 TRIPs협정하에서는 전혀 조약위반이 아닌 사항을  두고 쌍무협상테이블을 통해 상대국가를 억압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지적재산권 전략과 공중 보건

약값이 비싸다는 문제가 비단 가난한 나라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내에서도 미국 정부의 국내외 지적재산권 관련 정책을 비난하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활발하다. 대표적인 단체가 랄프 네이더라는 미국의 유명한 소비자 운동가가 이끄는 '기술에 관한 소비자 프로젝트(Consumer Project on Technology)'다. 이 단체는 지적재산권 남용을 막기 위한 제도적 수단으로서 강제실시권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강제실시권을  이용해서 같은 약을 동시에 여러 제조업자가 생산하게 되면 서로 경쟁이 되어 자연히 약 값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사례는 이 단체가 미국내 의약기술 독점의 폐해와 지적재산권 남용 사례를 고발한 보고서에서 언급한  것이다. 임상시험 데이타의 독점적 권리 인정과 신약보호라는 미국의 특수한 제도를 통해 특허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보건기술의 독점권을 유지하는 미국의 지적재산보호 전략을 보여준다.

두가지 사례 - 고쉐병 치료약과 항암제

세레다제(Ceredase)는 고쉐병 치료제인 알글루세라제(alglucerase)의 상표명이다. 고쉐병은 중요한  체내 효소의 생산과 관련된 유전적인 대사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병이다. 고쉐병은 혈액  성분을 변화시키고, 간과 지라를 붓게 하고, 뼈를 부식시키고, 통증을 일으키는 심각한 질병이다.  본래 세레다제는 미정부의 지원으로  터프트대학 연구팀이 개발했다. 이 약의 초기 인체 사용 임상시험이 성공한 후, 터프트대학 연구센터의 연구자들은 연구소를 패쇄하고, 젠자임(Genzyme)이라는 새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곤 알글루세라제를 시험하기 위한 NIH와의 터프트대학 연구센터의 계약을 젠자임으로 이전했다. 이 사기업은 남은 임상시험을 마무리지었고, 약을 시장에 내놓았다.
세레다제가 특허받은 약은 아니었지만, 젠자임은 미국 희귀신약보호법(U.S. Orphan Drug Act)의 보호로 미국에서 수년간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젠자임이 추정하기로는 세레다제를 필요로 하는 환자의 잠정적인 수는 세계적으로 5천명뿐이며, 젠자임은 이들 가운데 단지 1/3만을 치료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96년 젠자임은 세레다제의 판매약이 2억640만 달러라고 발표했다. 이 해에  1년간 치료의 평균 비용은 환자 1인당 15만 달러가 넘는 것이었다. 치료 첫해가 가장 비싸다. 어떤 환자의 경우에는 50만 달러를 웃돈다.
젠자임은 미국 희귀신약보호법의 보호아래 수년간 시장 독점을 즐기면서 다른 회사의 시장진입을 지연시키기 위해, 이 약을 좀더 개선한 많은 발명에 대해 (그 약이나 제조 방법) 특허를 받으려고 한다. 세레다제의  높은 가격은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세레다제는 생산비용이 많이 드는 약이기는 하지만  그 제조 비용보다 훨씬 비싸게 값이 책정되어 있다.
젠자임은 개인 보험회사나 정부의 공공지원계획 등 제3자로부터 대신 돈을 받는데 상당히 적극적이지만, 고쉐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환자들이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이거나 보험을 유지하는데 곤란한 지경에 처해있다. 아래는 미국회에서 카렌 구쓰가 증언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심한 만성 질병으로 고생하며 살았던 사람이 젠자임의 약인 세레다제로 인해 몸이 좋아진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치료 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마약중독자처럼 우리는 우리 건강보험을 다 써버리게 될 것입니다. 직업을 그만두고, 배우자와 이혼을 해서라도  우리가 메디 케이드 (Medicaid)를 받아야 하는 궁핍한 사람이라고 외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동안에 젠자임과 같은 회사들은 유례없이 많은 이익을 챙기고 있 습니다. (중략) 젠자임과 NIH에 있는 젠자임의 일당들은 휴머니티에 대한 최악의 범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존엄성을 빼앗고 자 유롭고 독립적이고 생산적인 사회 일원이 될 능력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한 조각의 인간다움마저도 남김없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것입니 다.

탁솔과 건강 등록 자료

탁솔(Taxol)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항암제다. 이 약은 미국립보건원(NIH)에서 개발했으며, 미식품의약국(FDA)의 시장판매 승인을 받기 위한 모든 임상 시험도 NIH가 지원했다. 미정부에서는 NIH대신 탁솔을  생산할 민간도급자를 고용했다가, NIH가 임상시험을 완료할 무렵 탁솔을 시판할 민간회사로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BMS)을 선택했다.
  BMS는 그 도급자로부터 1mg당 약 0.25달러를 주고 탁솔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당시보다 생산비용이 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BMS는 탁솔 1mg당 6달러 이상의 값을 매기고 있다. 마진율이 23배가 넘는다. 탁솔 치료의 전과정은 5만 달러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의 일부  병원에서는 가난한 환자에게  탁솔을 주지  않을 것이다.
BMS 보고서에 따르면 탁솔의 1996년 전세계  매출액은 8억1천300만 달러다. 탁솔의 매출은 라틴아메리카  등 해외에서도 늘어나고 있다.
  탁솔은 특허되지 않았지만 BMS는 NIH의 임상시험 자료를 독점함으로써 이  약의 시장판매 승인을 얻어냈다. 미국에서 FDA는 의약 승인 절차에 사용된 건강 등록 자료에 대해 특별한 독점을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탁솔을 제조할 수 있는 회사라고 해도 그것의 효능과 안정성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독자적인 임상시험 데이터를 제출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그 약을 판매할 수 없다. 이런 데이터를 얻는데는 대개 여러 해가 소요되며, 이것은 시장진입의 효과적인 장벽이 된다.
건강 등록 자료의 처리는 나라마다 다르다. OECD 국가 중 많은 나라가 건강 등록 자료에 대해 미국과  비슷하거나 더 긴 기간 동안 배타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일부 나라는 그렇지 않다. 이번에 미국의 통상압력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남아공의 경우에도 임상시험에 대한 보호가 적절치 않다는 미국의 불만을 듣고 있다. 남아공에 대한 미국 301조 보고서는 "남아공의 의약법은 보건부장관이 강제실시권을 허용하고 병행수입을 허가할 수 있는 '잘못된'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식으로 특허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다. (중략) 비공개 임상시험 데이터를 제대로 보호치 않고 있다"고 지적되어 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와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분란을 일으켰었다. 아르헨티나는 건강  등록 자료를 기밀로 처리함으로써 보호한다. 미국은 아르헨티나의 비밀 정책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미국이 반대하는 것은 FDA 또는 이와 유사한 기관의 결정에 따라서 기업들에게 약품 판매 허가를 주는 것이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정책이 TRIPs 제39.3조를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조항은 각 국이 불공정한 상업적 사용으로부터 그러한 자료를 보호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무역 관료들은 외국의 규제기관에서 미국 FDA나 다른 규제 기관들의 결정에 관련된 공공 정보를 기준으로 의약 판매 허가를 내주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한  의약이 시장에 진입한 후 처음 5년  이상은 한 회사가 시장 판매 승인을 얻기 위해서 자체적인 임상 시험 및 연구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이것은 시장 진입의 엄청난 장벽이 된다. 새로운 진입자가 이미 다된 과학적 연구를 반복하기 위해서 매우 소모적이고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얼마전 아르헨티나에 무역 제재를 가했다. 그 제재는 부분적으로 이 분쟁과 관련되어 있다. 각국의 NGO들은 미국의 조치가 라틴아메리카와 다른 나라에서 특허받지 않은 탁솔을 BMS가 판매할 수 있게 보호하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미국이 탁솔  판매에 대한 시장 진입 장벽을 세우는데  성공한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암 환자들은 탁솔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맺음말을 대신해서

지적재산권 제도가 순전히 자본을 살찌우고 독점을 강화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연구개발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특허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기술에 관한 소비자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제임스 러브의 분석에 따르면 미제약회사에서 정부에 내는 세금과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개발 비용을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더  크다고 한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93개의  신약에 대해 거둬들인 세금은 300만 달러인데 반해, 같은 기간 동안 미국립보건원(NIH)은 58종 약품을 인체사용  임상시험하는데 1,610만 달러를 지원했다. 무려 세금의 5배가 넘는 돈이 제약회사로 지원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연구개발 촉진을 위해 특허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쉐병  치료약과 항암제 탁솔의 사례는 지적 노동의 충분한 대가를 넘어선 보상이 기업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남아공과 태국의 사례는 본질적으로 지적재산권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남아공이나 태국에 대한 미국의 주장은 지적재산권 관련 조약 자체가 악날하다기 보다는 조약을 빙자한 협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글이  TRIPs협정에 대해 우호적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TRIPs협정도 강제실시권 허락 조건 등을 매우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어 협정의 체결당시에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우려를 자아냈었다. 남아공이 세계보건기구(WHO)에게 의약품에 대한 지적재산권 보호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계속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TRIPs협정의 기본 취지가 미국의  지적재산권 강화 정책의 취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중의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은 앞으로 더 자주 각국 특허법과 TRIPs협정 등의 국제 조약에 대해 맞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소비자단체인 '기술에 관한 소비자 프로젝트'가 지적재산권 남용에 반대하며 싸워나가는 것은 더 큰 싸움의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태국과 남아공의 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지적재산권 강화, 특허권 강화 논리의 이면을 들여다 보자. 잔뜩 점잔뺀 말투로 자신의 탐욕스러움을 둘러대기 바쁜 자본이 그 뒤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용어해설:

1 병행 수입
외국기업의 상품이 국내로 수입되는 경로중에는 외국기업이 국내 자회사나 총대리점을 통하여 수입하는 경우 등 제조판매원인 외국기업이 예정하고 있었던 수입루트도 있으나, 이와 달리 소위 정규의 수입루트를 통하지 아니하고 다른 경로로  수입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수입루트 가운데 특히 외국 기업이 해외에서 판매한 상품을 현지에서 구입하여 대리점 등을 거치지 아니하고  직접 국내로 수입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병행수입이라 부른다. 동일한 상품이지만 해외에서의 판매가격이 국내 판매가격보다 싼 경우 즉, 내외가격차가 존재하는 상품의  경우, 병행수입품이 정규의 수입품보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제조판매원인 외국기업이나 국내 총대리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병행수입품은 커다란 위협이 된다. 복수의 국가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중에는 각국의 물가수준, 소득수준 또는 소비자의 행동양식에 맞추어 최대의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각국마다 서로 다른 가격정책을 채용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만일 저렴한 병행수입품이 국내로 유통됨으로써 정규루트로 수입된 상품의 가격을 낮출 수 밖에 없다면  그와 같은 가격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저렴한 병행수입품이 다수 유통되면 지금까지 고가로 판매함으로써 유지되어 왔던 상품의 브랜드 이미지가 붕괴되어 단순한 가격하락에 그치지 아니하는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외국기업과 국내에서의 총괄판매계약을 쳬결한 총대리점은 가격하락  문제이외에 자신을 통한 상품의 판매량이 현저히 감소하게 되는 등 병행수입의 저지에 독자적 이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경우 특허권 혹은 상표권 등의 지적재산권이 병행수입품의 수입저지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일이 있다. 외국 기업이 자사의 상품에 관하여 대한민국 내에서 지적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에 이 지적재산권에 기하여 병행수입품의  수입이나 국내에서의 판매행위를 금지하고자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와 같은 권리행사를 인정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지적재산권에 기한 병행수입금지의 허부(許否) 문제이다. 이 문제는 종래 상표권과 관련하여 주로 논의되어 왔고 최근 관세법에 병행수입이 허용되는 기준이 정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특허권에  기한 병행수입 금지가 허용될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WTO/TRIPs 제6조에는 지적재산권의 소진의 문제를 국내법에 위임하는 취지의 규정을 두고 있다.
( 강성배 변리사, '특허제품의 병행수입에 관한 소고', 35기 수습변리사 논문집, 특허청 발행 )

   2 강제실시권
강제실시권(强制實施權)이란 특허권자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재정이나 심판 등의 행정처분에 의해  특허발명을 실시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실시권을 말한다. 강제실시권은 나라마다 규정이 다르지만, 대개  특허발명이 정당한 이유없이 계속해서 실시되지 않을 경우나 공익적인 이유로 필요한 경우에 주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 국방상 필요한 경우 (2) 특허발명이 정당한 이유없이 실시되지 않을 때 (3)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4) 공공의 이익을 위해 비영리적으로 특허발명을 실시할 필요가 있을 때 (5) 불공정한 거래행위를 시정하기 위해서 특허청장의 재정(裁定)에 의해 강제실시권을 설정할 수 있도록 특허법에 규정하고 있다.
강제실시권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허법에서 규정된 '실시(實施)'의 정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특허가 어떤 물건에 관한 것이라면, 이 물건을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양도·대여 또는 수입하거나 그  물건의 양도 또는 대여의 청약(양도 또는 대여를 위한 전시를 포함)을 하는 행위가 모두 실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국내에서 일정기간 이상 불실시된다고 하는 것은 수입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특허권 행사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고 할  수 있다. 이는 94년 4월15일 확정된 '지적재산권의 무역관련측면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에도 규정되어 있어서 나라마다 이 규정은 대개 유사할 것이다.
그러나 남아공이나 태국의 강제실시권 이용을 반대하고 있는 미국조차도 미독점금지법(Antitrust Act)을 위반한 기업에 대해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수백 개의  강제실시권을 허락했었다. 특히 다국적기업의  매수합병이 가져올 독점강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엔 사례를 찾기 어렵다.
( 이기수 등, 지적재산권법, pp. 41-48, 1996, 한빛지적소유권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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