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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전쟁과 김개남

1894년 농민전쟁 지도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인가. 전봉준(1855~1895) 이름을 먼저 꼽을 것이다. 1차 농민전쟁 때 녹두장군 전봉준이 총대장이었고 그를 중심으로 연구도 집중되었으니 그럴만하다. 그 다음 떠오르는 인물은? 전봉준 못지 않은 최고 지도자가 김개남(1853~1894)이었으며, 손화중(1861~1895)을 포함하여 3대 지도자로 꼽는다.
농민전쟁 지도자들 가운데 김개남이 가장 비타협의 반봉건 강경노선을 폈다. 직접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농민군 동원력도 뛰어났다. 제1차 농민전쟁으로 전주성을 점령한 뒤 집강소 시기에 남원은 요즘으로 말하면 민중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김개남의 농민군이 틀어쥐고 있었다.
김개남이 남원에 웅거하고 있을 때 전봉준과 손화중이 남원에 모여 나눈 이야기를 통해 3대 지도자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전봉준 : "시세를 보니 왜와 청이 싸워 한쪽이 이기게 되면 반드시 군사를 옮겨 우리를 칠 것이다. 우리 무리가 많기는 하나 오합이어서 쉽게 무너질 것이어서 끝내 뜻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귀화를 핑계해서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다가 천천히 그 변화를 살펴보자."
김개남 : "대중이 한번 흩어지면 다시 규합하기가 어렵다."
손화중 : "우리들이 기의한 지 거의 반 년이 되어 비록 한 도가 호응했지만 이름난 사족이 따르지 않고 재물있는 자가 따르지 않고 선비가 따르지 않는다. 서로 접장이라 부르는 자는 어리석고 천한 무리로 화 만들기를 즐기고 도둑을 일삼는 무리뿐이다. 인심의 향배를 징험해보니 일이 반드시 성공치 못할 것이다. 사방에 흩어져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
전봉준은 강온 양면의 전술 구사와 정치 협상, 각 지역 농민 연합군을 통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에 비해 김개남은 비타협의 강경함과 일관된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봉준이 흥선대원군과 정치적 제휴를 한데 비해 김개남은 흥선 대원군의 밀사를 묶어놓고 죽이려했으며, 현직 수령들도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칼로 쳤다.
지도자들의 정치 성향은 개인의 인식과 태도 뿐 아니라 소속된 대중의 성격에 영향을 받는다.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대중의 투쟁에 영향을 미치며, 대중도 자기들의 요구와 의지를 제대로 반영할 지도자를 만들어낸다. 전봉준 관할의 전라우도는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남의 땅일 망정 농번기 때 농사를 지을 땅이 있는 농민군이 중심이었고, 손화중의 농민군은 동학조직의 영향이 컸다. 반면 김개남 농민군에는 도망나온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부대가 있었다. 백두대간의 중심 산인 지리산 자락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이들은 농번기가 되어도 돌아갈 땅도 없었다. 농민전쟁 기간 천민부대는 양반 사족의 갓을 찢어버리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상전을 묶어 주리를 틀고 곤장을 치며 신분제와 지주제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표현하였다.
김개남은 그 해 12월 2일 옛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왔다. '대역무도죄인'은 서울로 압송해 정식 재판 절차를 거쳐야 했으나 그는 원한 많은 자들의 압력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바로 처형당했다. 그가 잡혀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그 많던 군대 어데 두고 짚둥우리가 웬말이냐"는 노랫가락으로 안타까움을 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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