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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와 사이비기자

관료와 사이비기자
- 故 김남주 시인의 ‘관료주의’를 읽다


인터넷신문 기자를 하고 있는 저는 자타가 인정하는 사이비기자입니다.

기자라는 사람이 헝클어진 몰골로 날씨가 더우면 반바지를 입고 나타나고, 폼도 나지 않는 조그만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카메라 조작법도 잘 모르고,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의 얘기만 쓰고, 기사 중에 오타가 수시로 나오고, 간혹 술 먹으면서 인터뷰도 하고, 자기 입으로 “나는 사이비기자다”라고 떠벌리고 다니고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정말 기자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경찰이나 경비들도 저를 기자로 보지 않고 막 대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힘겹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취재하기 위해서 찾아가면 처음에는 ‘기자님’이라고 깍듯하게 ‘님’자를 붙여가면서 자신들의 억울함과 정당함을 마구 얘기합니다. 그러다 그 노동자들을 자주 찾아가게 되면서 안면이 트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님’자는 사라지고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농성장에서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그러면서 농담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 다음부터는 “사이비기자 또 왔네”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냅니다. 그렇게 사이비기자가 되면 자신들의 속 깊은 얘기들도 주저 없이 하게 되고, 간혹 눈물을 흘리면서 한 많은 얘기들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래도 직업이 기자인지라 관료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신생 인터넷신문 기자라서 지체 높은 관료들은 만나지 못하지만, 취재를 하다보면 시청이나 구청의 높으신 분들과 접촉을 하게 되고, 간혹 식사를 하는 자리에 끼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어색함과 역겨움이라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제 몰골과 행동이 노동자들과 친숙해서 어떤 관료들은 제가 기자가 아니라 노조관계자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나 노동계 출신이라고 강조하는 관료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애써 강조하다가 본론에 들어가면 관료로서의 모습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서 기자만 아니라면 욕지거리라도 해주고 싶을 때가 정말 많습니다.
관료라는 것이 행정관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조관료들도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평소 안면도 있고 그래서 언행이 더 관료스럽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이비기자가 가장 취재하기 어려운 것이 이런 노조관료들을 대상으로 할 때입니다. 뭐 하나 취재하려면 담당자를 찾아서 한참을 빙빙 돌아야 하고, 애써 담당자를 만나면 아주 형식적인 대답만을 들어야 합니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의 힘겨움에 대해서 얘기하면 ‘누구는 뭐가 문제고 누구는 또 뭐가 문제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얘기만 듣다보면 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참아야 합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주로 취재하다보니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과 자주 접합니다. 경찰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고, 경비들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고, 용역업체와 충돌하는 경우고 있고, 관리자들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무수한 폭행과 폭언을 생생하게 지켜봅니다.
그런 상황일수록 잘나가는 프로기자들은 잘 나타나지 않고, 저와 같은 사이비기자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나, 경비나, 용역업체나, 관리자들은 사아비기자의 카메라에 매우 민감합니다. 잘나가는 프로기자들은 그들의 든든한 권력의 힘으로든, 철저한 프로정신으로든 그 상황에서 과감하게 카메라를 들이대겠지만, 원래 겁이 많은 저는 쫄아서 카메라를 자신 있게 들이대지 못합니다. 그런 날이면 기사를 쓰고 난 후 혼자 술을 먹으면서 제 스스로를 한탄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이비기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투쟁하는 대중과 함께 할 때는 겁이 나기는 하지만, 대중의 힘으로 경찰이나 경비나 용역업체나 관리자들의 폭력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투쟁하는 대중을 지켜보아야 하는 상황에서 저는 그 언저리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투쟁하는 대중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지만 심장의 박동을 같이 맞출 수 없습니다. 투쟁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같이 구호를 외칠 수 없습니다. 투쟁하는 대중의 고통에 안타까워 할 수는 있지만 같이 고통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故 김남주 시인의 ‘관료주의’라는 시를 읽습니다.

“나는 이리가 되어
관료주의를
물어뜯고 싶다“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이렇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관료주의의 겉과 속을
그것은 씹으면 이빨이 쑥쑥 들어가는 짐승의 물컹물컹한 속살이 아니다
그것은 물어뜯으면 창호지처럼 북북 짖어지는 가죽도 아니다
바늘 끝으로 쿡쿡 질러대도 피 한 발울 나오지 않는 그것은
철가면의 이마박이고 아무리 울려대도 그것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마귀할멈의 눈구멍이다
아니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관료주의는
가스에 철판을 대고 발가락 끝에서 머리 끝가지
무쇠로 조립된 몰인격의 로봇이다
우향우 하면 후로 돌고
좌향좌 하면 조로 돌고 거기 서 하면 짐승처럼 서버리는
군대식 복종에 길들여진 노예다
아니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관료주의는
기계다 기계의 톱니바퀴다 기름만 칠하면
봉급이란 이름의 기름만 칠해주면 기계의 주인이 누구이건
쪽발이건 코쟁이건 그들의 하수인 도개정권이건
밤이고 낮이고 쉴새없이 불평없이 돌고 도는 기계이다
노동자의 나라 소비에트 동맹의 시민으로서 마야코프스키는
당연하게도 이렇게 으르렁거렸어야 했다
“나는 망치가 되어
관료주의를
두들겨패고 싶다.“


이 불타는 투혼을 국가권력의 관료에게만 향할 수 있을까요?
이 불타는 투혼을 자본권력의 관료에게만 향할 수 있을까요?
이 불타는 투혼을 노조권력의 관료에게만 향할 수 있을까요?
이 불타는 투혼을 사이비기자인 저 자신에게도 향해봅니다.

빌어먹을! 사이비기자를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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