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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가면 꼭 가보리라 다짐한 곳을 찾아갔다. 하라의 아내 조안 하라와 두 딸이 1996년 설립한 빅토르 하라 재단이다. 재단을 찾아가면서 묘한 설렘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이 둘러보지 않은 곳이리라는 생각에 약간 우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거야 스쳐지나가는 생각일 뿐, 그 처참했던 날들의 산 증인인 조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재단을 방문하기로 결정한 전날 밤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영국인인 그녀가 과연 남편을 처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땅에 살고 있을까. 재단을 찾아가면 나 같은 이방인을 어떻게 대할까. 물어보고 싶은 것을 다 물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었다.
재단은 뜻밖에도 브라질 광장에 있었다. 겉보기에도 초라하고 협소해 보이는 2층 건물인 데다가 입구에는 노숙자가 누워 있어서 왠지 마음이 찡했다. 흐르는 세월이 얼마나 무심하고 망각의 늪이 얼마나 깊은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우리 승리하리라」를 당당히 불렀다는 일화 역시 아스라한 전설로 변해버린 지금이니 빅토르 하라 재단이 잊혀지고 있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저 무심한 세월을 탓할 수밖에.....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도 없었다. 잠시 광장에 앉아 있자니 70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문을 여는 게 보였다.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재단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자신이 재단 자료실을 관리하는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재단 입구에는 빅토르 하라의 테이프와 CD, 조안 하라가 쓴 『끝나지 않은 노래』(An Unfinished Song)의 여러 나라 판본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하라와 관계된 공연 포스터들이 불어 있었다. 직원을 따라 먼저 자료실을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방에 책과 제본된 복사물이 어지러이 꽂혀 있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분량이었다. 책장 두 개 정도에 모든 자료가 다 들어가 있으니 분명 많은 양이 아니었지만, 한 사람의 노래꾼에 관한 자료가 이 정도라도 되니 빅토르 하라의 위상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자료실을 담당하고 있다는 할머니에게 조안 하라에 대해서 물었다. 산티아고에 거주한다면 인터뷰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할 작정으로 미리 선물도 준비해 간 터였다. 그 할머니는 왠지 그냥 고용된 직원이 아닌 것 같았다. 연배도 조안 하라와 비슷해 보였고, 빅토르 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문득 추모의 정을 내비쳤다. 조안에 대해서 묻자 뜻밖의 대답을 했다. 매일 재단으로 출근한다는 것이었다. 산티아고에 거주하는지 아닌지도 잘 몰랐지만 나이가 많아 매일 출군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 대답을 들은 뒤 불과 2,3분 후 자료실을 기웃거리는 할머니가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젊은 날의 사진으로만 보던 조안 하라였다. 엉겁결에 인사를 건네고 그녀를 따라 전시실로 갔다. 빅토르 하라가 생전에 쓰던 폰초와 그가 「선언문」(Manifiesto)이라는 노래서 ‘노동하는 기타’라고 칭했던 그 유명한 기타를 볼 수 있었다. 기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조안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게 된 것은 그 흥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여든이 다 된 나이였지만 아직 정정한 모습이었다. 파란 눈동자에는 젊은 날의 아름다움마저 엿보였다. 바로 빅토르 하라의 마음을 빼앗은 눈이다. 조안은 벨기에에 발레 공부를 하러 갔다가 칠레인과 결혼해 칠레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우연히 안무에 대해서 강의를 했을 때 빅토르 하라는 그 수업을 듣던 학생이었다. 연상의 유부녀였지만 하라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우아하게 춤추는 푸른 눈의 이국적인 여인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서울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시골 소년처럼. 조안이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에게 버림받고 집에 틀어박혀 눈물로 세월을 보낼 때 빅토르 하라는 용기를 내 꽃을 들고 찾아갔다. 훗날 두 사람을 인생의 동반자로 만든 방문이었다.
조안 하라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너무나 해맑았다. 정말 인상적이어서 아픈 과거를 떠올릴 만한 것을 선뜻 물어볼 수 없을 정도였다. 궁금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였으랴. 그러나 그녀에게는 낯선 이방인에 불과한 내 주제에 그저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아픈 과거를 더듬어보게 하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그래서 일상적인 덕담을 몇 마디 건네고 다만 빅토르 하라의 무덤 위치를 물었을 뿐이다. 모든 것을 그에게 직접 물어보리라 다짐하면서.....
재단을 물러나오면서도 조안 하라의 해맑은 모습이 여전히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 해맑은 슬픔 속에서 빅토르 하라의 「너를 기억해 아만다」(Terecuerdo Amanda)를 떠올렸다. 이 노래 속의 아만다는 비를 맞으면서도 애인을 만난다는 기쁨에 들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일하는 공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단 5분간의 만남을 뒤로 하고 작업장으로 떠난 아만다의 애인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너를 기억해, 아만다.
마누엘이 일하는 공장을 향해
비온 거리를
달려가던 너를.
활짝 핀 미소에 머리칼은 비에 젖었지만
상관하지 않았지.
넌 그를 만나러 가고 있었어.
그를, 그를, 그를, 그를.
그는 산맥으로 떠났어.
그는 남에게 아무런 해도 입힌 적이 없는데.
그는 산맥으로 떠났어.
그리고 단 5분 만에 산산조각 나버렸지.
일터로 돌아가라는 사이렌이 울린 뒤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않았어, 마누엘 역시.
너를 기억해, 아만다.
마누엘이 일하는 공장으로
비온 거리를
달려가던 너를.
이 노래 속의 아만다 같은 해맑은 모습이던 조안 하라는 쿠데타가 일어난 그날 국립기술대학으로 출근을 강행한 빅토르 하라의 뒷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만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못 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했을까?
빅토르 하라는 1930년대 어느 가나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힘든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찢어지는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마저 포기한 아버지는 점점 술주정꾼이 되어갔고, 술에 취해 아내와 자식들에게 손찌검을 하곤 했다. 그런 고단한 삶 속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한줄기 빛이요 오아시스였다. 아버지와 달리 글을 깨친 어머니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하라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는 1944년 수도 산티아고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보고 싶었고, 또 나날이 난폭해지는 남편이 환경이 바뀌면 나아질까 막연히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음악은 하라에게는 부차적인 일이었다. 그저 일상의 고단함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처였을 뿐이다. 처음 하라 가족이 산티아고로 이주했을 때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기에 아들을 제대로 보살펴줄 수 없었다. 그때 하라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이 이웃에게 배운 기타였다. 또한 음악은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한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노래를 잘 불러서 농촌에 살던 시절 인근 경조사에 불려다녔다고 한다. 하라의 음악적 재능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리라. 아무튼 합창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민속음악 채집에 나서기도 하고, 친구가 활동하는 쿤쿠멘이라는 그룹이 음반을 녹음할 때 한두 곡씩 자기 노래를 부리기도 했지만 하라는 자신의 음악활동에 대해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대신 연극을 택해서, 1965년경에는 칠레에서 가장 촉망받는 연출가로 꼽혀 해외 연극제에도 몇 차례 초대받았다. 그리고 이후 국립기술대학 연극교수로 임용되어 어느 정도 안락한 삶도 보장받는다.
그러나 하라의 주위를 맴돌기만 하던 음악은 마침내 운명이 되었으니, 1957년 비올레타 파라와 만난 것이다. 시원치 않은 음악인을 보면 당장 때려치라는 독설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가 하라에게는 적극적으로 음악에 매진할 것을 권해서 오히려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1961년 쿤쿠멘과 함께한 유럽 순회공연도 하라가 음악에 한 발 더 발을 담그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예술감독 자격으로 따라갔지만, 순회공연 중 구 소련에서 보컬을 맡은 가수 한 사람이 병이 나는 바람에 대신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음악인으로서의 보람을 느꼈다.
그의 연극 인생의 정점이기도 했던 1965년은 빅토르 하라의 새로운 음악 인생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파라 남매의 요청으로 파라 페냐에서 가끔 기타를 잡았고, 이때부터 노래꾼으로서의 하라의 자질이 입소문을 통해 퍼져나갔던 것이다. 파라 페냐의 예기치 않은 대성공으로 산티아고는 물론 지방에서도 많은 페냐가 생겨났다. 그리고 파라 페냐에서 명성을 얻은 하라는 초대손님으로 이곳저곳의 페냐를 돌아다니면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런 와중에 알게 된 킬라파윤이나 인티 이이마니 같은 대학생 그룹에게 하라의 조언은 소중한 것이었다.
1969년 역시 하라에게는 인생의 분기점이 된 해였다. 제1회 칠레 누에바 칸시온 페스티벌에서 「어느 농민에게 바치는 탄원의 기도」(Plegaria a un labrador)라는 노래로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영광이 아니었다. 비올레타 파라에서 파라 페냐의 음악인들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음악적 흐름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음악적 흐름에 대회임을 본떠 누에바 칸시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대회를 계기로 누에바 칸시온의 선도자로 공인받은 하라는 1969년 바로 그해에 당분간 음악에 전념하리라 결심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음악이 자신의 운명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 하라는 그 운명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고 있었으리라.
빅토르 하라에게 드리워진 운명의 굴레는 ‘혁명’이라는 두 글자였다. 연극인으로 쿠바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체 게바라를 만났고, 훗날 볼리비아에서의 그의 죽음에 통분했던 하라는 1970년의 대선이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 수립이라는 첼레식 혁명의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연극보다는 음악이 민중에게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이유로 연극을 잠시 뒷전으로 돌렸다. 하라 인생의 마지막 몇 년간 그의 삶과 노래는 역사와 함께했다. 아옌데 선거유세 지원을 위해 전국을 누비고, 민중연합 정권이 탄생한 후에는 홍보 사절로 라틴아메리카 각국을 돌아다녔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네루다의 귀국 환영 행사를 총지휘하고, 빈민촌 주민들의 애환과 수탈의 역사를 음악으로 만들었다. CIA의 배후 지원을 업고 트럭업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물류 대란이 일어났을 때 하라는 자원봉사자들과 더불어 직접 밀가루를 등에 지고 날랐다. 그리고 그 고단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짬이 나면 기타를 들고 작업장을 누비며 동료들에게 힘을 복돋아주었다.
1973년 9월 11일 비극의 날이 밝았을 때 하라는 심상치 않은 동태를 느끼고 아침부터 부인 조안과 함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결연히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그날은 그가 몸담고 있던 국립기술대학 행사에 아옌데가 와서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정변으로 인해 그 행사가 거행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동료 및 학생들과의 연대, 나아가 대학과 노동자 간의 연대로 이 위기 국면을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쿠데타군이 내린 통행금지령으로 거리는 적막하기 짝이 없었는데도 국립기술대학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대통령궁이 있는 시내를 관통해야 했지만 이미 쿠데타군에 의해 도로가 차단되어 남쪽으로 멀리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군인들과 탱크 그리고 총소리와 폭발음들 때문에 빅토르 하라는 초조하게 차를 몰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향해서.....
하라가 국립기술대학에 도착했을 때 대학 방송국은 쿠데타군이 장악한 뒤였고 학교 전체가 사실상 포위되어 있었다. 국립기술대학은 교수들부터 학생들까지 온통 빨갱이라고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600여 명의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들었지만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멀리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비행기들이 보였을 때 모두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게다가 집에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대학 주변에서도 총성이 끊이지 않아서 거리로 나서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던 데다가 학교를 포위한 군인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사살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망을 곱씹으며 그 밤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빅토르 하라는 기타를 잡고 또다시 노래를 불렀다. 암혹의 시대에 한 가닥 희망을 심어주고자 했으리라.
날이 밝을 무렵 쿠데타 군의 탱크가 무차별 발포하며 대학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전날 총장이 직접 나서서 통금이 해제되면 자진해산하고 귀가하겠다고 군인들에게 약속했지만 그사이 일행을 모두 체로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던 것이다. 교수와 학생들은 구타와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근처에 있는 복싱 경기장인 칠레 스타디움으로 끌려갔다. 하라는 정체가 탄로나지 않도록 신분증을 버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칠레 스타디움 입구에서 그를 알아본 장교에게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따로 수용되었다. 다음날 빅토르 하라가 지하 고문실에 끌려갔다가 후에 동료들 품에 다시 안겼을 때는 이미 걷기 힘들 정도로 망신창이가 된 다음이었다. 칠레 스타디움 전체가 생지옥이었다. 음식도 물도 주지 않고 계속되는 고문, 수시로 쏘아대는 기관총, 확성기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거친 위협 등, 집단적 광기 앞에 칠레 스타디움에 수용된 수천 명의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무력감은 깊어만 갔다. 결국 관중석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람이 나오고 이성을 잃고 발악하다 기관총 세례에 쓰러지는 사람도 생겼다.
하라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는 의연함을 과시했지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문실에 끌려갔다 돌아온 그 다음날인 9월 14일 다소 정신을 차린 그는 동료들에게 연필과 종이를 구해 무엇인가를 적시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칠레 스타디움」(Estadio Chile)이라는, 그가 만든 마지막 노랫말이 탄생했다. 그것은 아비규환의 기록이었다. 심지어 유년 시절의 끔찍한 기억까지 되살아났던 모양이다. 이웃집에 산파가 오면 이윽고 출산의 진통을 겪는 산모가 지르는 비명에 소름끼쳐하던 그 기억, 하라는 쿠데타군을 보고 어릴 적의 산파를 떠올렸다.
우리들 중 여섯이
별나라로 사라졌지.
한 명이 죽고, 한 명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맞았지.
한 인간을 그렇게 때리는 것이 가능할까?
다른 네 명은 스스로
모든 두려움을 밀쳐버리고자 했지.
한 명은 허공으로 뛰어내리고,
또 다른 한 명은 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그러나 그들 모두 죽음을 똑똑히 응시했다네.
파시즘의 얼굴이 자아내는 이 공포를 보라!
파시스트들은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는 듯
교묘하고 정확하게 계획을 실행하네.
그들에게 피는 메달이고
학살은 영웅적 행동이지.
신이시여! 이곳이 당신이 만든 세상입니까?
경이로운 7일간의 일이 이것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 네 개의 벽에는
멈춰진 숫자만이 하나 있네.
천천히 더 많은 죽음을 원할 테지.
그러나 갑자기 의식이 요동치더니
맥박 없는 이 물결과
타이프라이터 소리와
한껏 온화한 산타 얼굴을 한
군인들이 바라보네.
여러 동료들이 이 노랫말을 외우고 종이쪽지에 베끼는 사이 하라의 운명은 갑자기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는 국립운동장으로 이송되기 시작한 다른 동료들로부터 격리되었다. 이후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9월 16일 이른 아침 산티아고 교외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4년 전 제1회 칠레 누에바 칸시온 페스티벌에서 영광의 대상을 받았던 바로 그 칠레 스타디움에서 즉결처분을 받은 뒤 거리에 버려진 것이다.
-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우석균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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