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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비정규직이예요?”

“전태일은 비정규직이예요?”

 

비정규직의 마음으로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다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어우러져 술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노동자대회에 참가할거냐’고 물었더니, ‘노동자대회가 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을 하고, 그를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노동자대회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서 진지한 얼굴로 저에게 물었습니다.

“전태일은 비정규직이예요?”

띵~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에 맞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면서 저항했던 ‘노동자 전태일’에게 35년이 지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전태일이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고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마음으로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었습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 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런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아버지께서는 매일 폭음을 하시고, 방세를 못 준 어머니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동생은 방학책 값, 밀린 기성회비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고 아침마다 울면서 어머니의 지친 마음을 괴롭힐 땐, 나는 하루가 또 돌아온다는 것이 무서웠다.

 

전태일 평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 이어지는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힘겹고 암울합니다. 불안정한 재단사 일을 하면서 근근이 먹고 살아가는 아버지,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 속에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어머니, 배우고 싶다는 소박한 꿈마저 무참히 짓밟혀 버리고 벋어나기 어려운 가난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야 했던 전태일과 그 동생들. 정말 진저리 쳐지는 그 삶을 전태일은 살아갔습니다.

 

전태일 보다 네 살 많은 우리 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타기 시작했고, 전태일과 나이가 같은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할머니와 함께 밭일을 하면서 힘겨운 나날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의 어린 시절 역시 전태일의 어린 시절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른이 되어 자식을 낳고 살아가기 위해 아버지는 택시와 화물차와 용달차 운전수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야 했고,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수시로 일본을 넘나들면서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벋어날 길 없는 가난, 실직에 처하면 계속되는 아버지의 자학적인 폭음과 폭력, 때만 되면 일본으로 돈 벌러 가는 어머니의 부재. 나의 어린 시절 역시 전태일의 어린 시절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전태일의 자식들이 다시 자식들을 낳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새로운 신분 속에 더욱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야 하고, 30년 전 이주노동자의 자녀들이 새로운 이주노동자와 함께 살아가고 있고, 가난과 폭력의 이중 굴레 속에 살아가야 했던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그 딸들은 광범위하게 성이 상품화되고 빈곤이 집중되는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에게만은 벋어나게 하고 싶었던 전태일의 삶을, 자식들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의 삶을, 다음 세대에게만은 이어주고 싶지 않은 우리의 삶을, 다음 세대들이 어른이 되어 자식을 낳고 살아갈 때는 정말 달라져야 하는데...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 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주린 창자를 안고 온종일 시달린 몸으로 다리를 휘청거리며 미아리까지 걸어가면 밤 12시 통금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당도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 밤 한 시나 두 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감동스럽게 얘기하는 대목이 굶주리면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어린 시다들을 위해 전태일이 자신의 버스값을 털어서 풀빵을 사 준다는 얘기입니다. 저 역시 전태일 평전을 몇 번을 읽으면서도 이 대목에서는 항상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연말이면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 하면서 모금함에 몇 푼 넣어주는 동정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을 쥐어짜서 얻은 수익금으로 기업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각종 장학사업이나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기만적 행위는 더더욱 아닙니다. 시다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에서 어린 시다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온정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버스값으로 풀빵을 사 준다한들 고된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어린 시다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전태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차라리 걸어가는 일이 있어도 시다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에 전태일의 마음속에는 항상 어린 시다들이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주위에서 이런 전태일을 많이 봅니다.

힘겹게 투쟁하는 해고자들에게 명절이면 얼마라도 쥐어주기 위해 평소에 잘 하지 않는 특근을 하는 이도 있고, 보너스가 나오면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쓰지 않고 전액을 비정규직들에게 쥐어주는 이도 있고, 라면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버스비가 없으면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도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쥐어주는 이도 있고, 1년이 넘게 거리로 쫓겨나와 재정이 어려우면서도 다른 투쟁사업장을 찾아갈 때면 꼭 지원금을 들고 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쥐어주는 몇 푼의 돈들이 어떻게 마련된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이 돈을 받아드는 이들 역시 마음속에 뜨거운 동지애를 간직합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힘겨움에 지쳐 쓰러지지 않고 버티면서 더욱 치열하게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단사로서의 생활이 길어지면서부터 그는 어느샌가 피곤해서 견디지 못하는 어린 시다들을 일찍 집에 보내주고 밤늦도록 혼자 작업장에 남아 시다가 할 일을 대신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하루는 그날 역시 몸이 아픈 아이가 있어서 모두 먼저 내보내고 혼자 남아 작업장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업주에게 그만 들켜버렸다. 업주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어서 태일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기업주가 불쾌한 낯빛으로 "재단사는 재단사가 할 일만 하지 왜 시다들의 일까지 참견하느냐? 자꾸 그러면 시다들의 버릇이 나빠진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 업주가 다시 밤늦게 작업장에 올라가 보니 여전히 태일이 혼자 남아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제 일껏 주의를 주었는데도 왜 또 마음대로 일찍 내보냈느냐?"

"죄송합니다. 며칠 전 밤일하고 난 뒤부터 하도 피곤해 하길래 애처로워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애들 일할 만큼 제가 대신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마음해로 해! 주인 말 안 듣고 그렇게 제멋대로 하는 재단사하고는 나도 같이 일할 수 없으니 내일부터는 나올 필요 없네..."

업주와 재단사 사이에 이런 따위 말다툼이 몇 번 오가고 나서 그는 간단하게 해고당해버렸다.

원래 업주는 태일을 곱게 보지 않았다. 재단사가 미싱사와 시다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생각해주는 것이 업주에게 이로울 리 없었던 것이다. 그저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 하는 종업원이 업주에게는 가장 반가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놈의 재단사는 어찌된 셈인지 아무 때고 시다가 좀 아프기만 하면 약방에 데려간다고 자리를 비우기 일쑤고, 애들에게 밤일 좀 시키려고 하면 번번이 낯을 찌푸리고 하니... 그러던 판에 때마침 적절한 트집거리가 생겼으니 업주는 이때다 하고 그를 내쫓았던 것이다.

해고당한 사실 자체는 태일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평화시장에서 그 정도의 재단기술이 있으면 일자리는 아무데서나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바닥에서는 최소한의 인정을 베푸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가 처음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때의 일을 생각했다. 그때 그는 재단사로서 약한 직공들을 돕고, 불쌍한 '시다'들에게 잘해주자고 마음먹었던 것이 아닌가? 주인이 자신에게 차마 그것마저도 못 하게 막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여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자신이 이제껏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시장에 시다로 들어와서 재단사라는 현장관리자의 직책으로까지 올라갔던 전태일은 항상 시다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사장의 비위만 잘 맞추면 편하게 일할 수 있고, 돈도 어느 정도는 벌 수 있었던 것이 재단사라는 위치였지만, 전태일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어린 시다들의 고통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주어지는 현장관리자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게 되었고,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지는 역할을 거부하는 전태일에게는 가차 없는 해고가 이어지는 것이 ‘최소한의 인정을 베푸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현실’이었습니다.

 

여기서야 저는 ‘전태일은 비정규직이예요?’라고 물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구두딱이와 신문팔이 등 날품팔이를 하다가, 시다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평화시장에 들어와서, 재단사라는 현장관리자까지 올라왔던 전태일은 ‘비정규직의 고통을 가슴속에 묻어놓고 함께 아파했던 노동자’였습니다.

재단사라고 하더라도 평화시장 노동자로서 크게 다를 바 없는 노동자였던 전태일은 자본이 쳐 놓은 구분과 관리체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목적의식적인 활동가의 도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학습을 통해 현실을 이론적으로 파악한 것도 아닌 전태일에게 그런 힘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은 시다들의 아픔이 전태일의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2년쯤 전에 ‘다모’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상처를 입은 여자 주인공에게 “아프나? 나도 아프다”라고 했던 대사가 유명했습니다.

계속되는 구조조정의 광풍 속에서 현장은 점차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 구조조정은 끝을 모르게 진행되고 있고, 늘어나는 비정규직의 고통과 함께 정규직의 노동강도는 높아만 지고 있고, 현장은 자본에 의해 완전히 잠식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노동자들이 몸이 망가지면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이 발행하기도 합니다.

대중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노동조합 간부들은, 현장활동가들은 그 고통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가슴에 손을 얻고 진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활동가들은 대중의 고통에 둔감할까요?

대중이 고통스러워하는데 활동가가 관심이 없으면 대중은 활동가를 찾지 않습니다. 대중이 고통스러워하는데 활동가가 안타까워하기만 하면 대중은 활동가를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대중이 고통스러우면 함께 그 고통을 느껴야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투쟁에 나섭니다.

 

전태일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많이 아픕니다. 여러분들도 아프십니까?”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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