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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서공단노조 박찬희 이야기

노동운동 내에서도 소외돼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한 공단을 거검으로 조직화시도를 하고 있는 곳이 있다. 50인 미만의 사업장들에서 이주노동자, 40~50대의 여성노동자, 50~60대의 남성노동자 등을 주로 대상으로 해야 하는 매우 지나한 이 활동에 대해 대구 성서공단노동조합 박찬희 동지를 만나서 얘기를 들었다.

 

대구에서 태어나서 자란 박찬희는 88년 경북대에 입학하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접하게 된다.

 

“그때 KAL기 사건에 대해 ‘군부정권이 지네 좋게 하기 위해서 악용했다’는 대자보가 시리즈로 붙여 있는 거를 보면서 ... 내가 뉴스 듣거나 이런 거랑은 확 다른 얘기를 하니까... ‘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어떻게 권력이 자기 좋자고 저런 것까지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그 대자보 때문에 학생 몇 명이 연행됐어요. 그것 때문에 4월 되자마자 동맹휴업을 막 조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 많이 얘기했었고...”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기도 하고, 각종 집회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시대 분위기를 접하며 대학생활을 하게 된 박찬희는 대학 2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NL이랑 PD랑 논쟁을 하는 대자보가 많이 붙어 있었어요. 2학년 때 문익환 목사랑 임수경 방북하고, 그와 동시에 현대중공업에서 100일 넘는 파업투쟁을 하고 있고... 한쪽은 ‘학생운동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를 해야 한다’ ‘방북해서 정세를 흐리고 있다’ 이걸 주장하는 대자보 쫙 나오고, 한쪽은 방북했던 비디오랑 문익환 목사 연설했던 비디오 틀어대면서 ‘민족적이고 자랑스러운 투사’라고 막 하고... 그걸 보면서 잘은 모르는데, 자연스럽게 이쪽(NL)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이쪽의 선배들도 많이 와서 설득을 했었는데, 내가 이미 사고가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소위 말해서 left그룹 중에 어느 한 군데를 들어갔던 거 같고... 그렇게 해서 그런 써클 활동도 하면서 주로는 학생회에서 활동을 했어요.”

 

학생회 활동을 하던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이 벌어지면서 그에 대한 연대투쟁을 벌였던 기억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도 많이 얘기 된다고 한다.

 

“그때 제일 기억하는 거는... 430투쟁이라고... 그때도 울산에서 현대중공업이 투쟁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하니까 학생운동의 임무는 여기에 충실하게 연대를 해야 하는 건데... 그렇다고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울산에 내려갈 수는 없으니까... ‘거기로 집중되는 병력을 분산시켜 줘야 된다. 시경의 철탑을 점거하자’ 그래서 동기 남학생들 다섯 명이 점거조로 해서 올라가고, 우리는 올라갈 때 ‘우~’ 해주고 도망가고...”

 

대학 4학년이 되던 91년은 말 그대로 격동의 한 해였다. 강경대에서 시작된 열사정국과 공안탄압으로 매우 격렬한 투쟁이 이어졌고, 그 투쟁의 패배 이후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정신적 충격이 학생운동 진영에 거대한 폭풍으로 몰아쳤다.

 

“그때부터 92년까지 학생운동을 하면서 대단히 힘들었어요. 그때 생각은 뭐였냐 하면... 학생운동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 거쳐 가는 곳... 학교 나가면 당연히 노동운동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당연한 수순에 대해서 ‘아니다’ 하는 시각을 던져주기 시작한 게 91년 이후예요.

91년까지는 그런 시각에 대해서 내 스스로 받기를 거부했어요. 노동운동을 하러 갔다던 선배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오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회주의가 망하니까 헤매고... 그러다보니까 나의 길을 안내해줘야 할 안내자들이 다 없는 거예요. 나는 당연히 언더라인이든 선배들이든 내가 노동운동으로 이전할 수 있도록 안내해줄줄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나도 ‘이걸 계속해야 되나?’하는 고민도 좀 있었죠. 그래도 생각을 해보니 ‘운동을 하는 게 내가 살아 있는 거 같다’ 그런 느낌이 들었고... ‘어떻든 운동하는 길을 선택해 봐야지’ 하면서 노동운동 할 수 있는 길을 찾았어요.”

 

이런 저런 고민 속에 대학을 1년 더 다니던 92년 대구 지역의 한 택시노조 간사로 활동을 하게 되면서 노동운동으로 옮겨 오게 된다. 당시 한국노총 소속이었지만 민주적 성향의 집행부가 있던 사업장에 들어가 3년간 활동을 하게 된다.

 

“전택노련이라고 해가지고 전국적 연맹체가 있었고, 그것의 지역조직에서 단협을 먼저 체결을 해요. 그게 단사로 내려와서 단사에서는 세부적인 내용만 협상하는... 그러니까 지역적인 단협 체결할 때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때 제가 속해있던 단사를 중심으로 해서 한번 쎄게 밀어봤는데 완전히 아작 났어요.

제가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사장이 시킨 어용세력들한테 들려서 나오고... 1년 반 동안 그 회사에 다니면서 굉장히 힘들었는데... ‘저 가시나 들어내라’ 그래서... 여자라서 심하게 때리지는 못하고... 그거 몇 번 하다가... 힘의 관계가 안 되는 속에서 그나마 민주적으로 가자고 하는 사람들한테 나 때문에 못할 짓 시키는 것 같더라고... 내가 들어가면 계속 싸워야 하니까... 그래가 포기 했어요.”

 

20대 중반의 여성이 택시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초보니까 나를 가르쳐 줄 사람들이 없더라고요. 단체협약이나, 노동법이나, 그런 관계를 풀어가는 것 등에 대해 제게 지도해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게 부족했고... 내가 거기서 다 고민하자니 안 되겠고...

투쟁하는 와중에서도 그 투쟁에 나름대로 결합해서 지원해줬던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의 투쟁에 대한 지원이라는 게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내가 생각할 때는 너무 비민주적이고 그런 거예요. 사람들은 여기 있는데, 자기네들기리 막 앞장서서 깃발 꽂고 가는...

또 그런 고민도 많이 들었는데... 내가 배우고자 하는 노동자 계급의식이 아닌 거예요. 개판이에요. 맨날 포카 치고, 그러다가 회사 돈 빌려가지고 회사한테 발목 잡혀서 꼼작달싹도 못하고... 저 사람이 괜찮은 거 같아서 ‘노동조합에서 같이 일도 하고 얘기도 해요’ 그러면 다 발목이 잡혀 있는 거야. 그런 것만 있냐. 돈도 못 버는 사람들이 여자관계 복잡하고, 두 집 살림하고... 내가 여자라고 나 앞에서는 다 얘기는 안 하지만, ‘우리 노조의 간사는 여자 아니지? 이런 거 얘기해도 이해 좀 해’ 이러면서 얘기를 하는데... 나는 그래도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게 오히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니까 좋긴 좋았어요. 그러면서 ‘이게 무슨 역사의 주인이냐! 저런 사람들이 무슨 파업이야!’...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때는 대단히 심각한 고민이었어요. 한편으로는 현장에 갔던 사람들이 왜 되돌아오는 지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럼 모습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택시노동자들이거든요.

그러다가 마창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셨던 선배분이 대구노련(대구지역노동조합연합) 수련회를 하는데 오셔서 따라갔어요. 거기서 그 선배분이 말씀하시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정말 개차반이다. 우리가 한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로서의 노동자를 보고 하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아, 저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걸 견딜 수 있겠더라고요.

현장에서 어떤 나이 많은 아저씨하고 싸운 적도 있어요. 그분들이 보기에는 내가 나이도 어린 여자애지만 노동조합에 와서 활동을 하니까 함부로 하지 못하잖아요.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운동을 한다는 것 때문이거든요. 노동자들을 위해서 활동을 하는 사람이니까 뭔가는 자기들하고는 다르다는 거야. 나를 안 섞어주는 거죠. ‘너는 운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돈을 안 벌어도 그런 거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우리는 당장 돈 한 푼 안 벌면 힘들다. 집에 가서 책임을 져야 하는 가장이다. 너는 그렇지 않으니까 우리보고 투쟁하자고 쉽게 얘기할 수 있다’ 이게 논점이었어요. 개차반이인 거는 극복을 하겠는데, 이거에 대해서는 아직도 100%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때부터 이런 거 때문에 되게 많이 싸웠었거든요.”

 

이후 택시노동자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계속 택시노조와 관련한 활동을 계속했던 박찬희는 정치조직인 민중정치연합에도 가입해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조직활동에 대해서는 꽤 부정적이었다.

 

“저는 단체라든가 정치지향적인 조직에서는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대중조직에서 활동을 계속 하고 싶었어요. 정치지향적인 이런 조직은 시간만 나면 조직논쟁을 해요. 민정련(민중정치연합)은 가지 싫었던 게 ‘이렇게 만들어야 된다’ ‘저렇게 만들어야 된다’ 그러면서 시간만 나면 논쟁을 해요. 내가 봤을 때는 사상누각인... 대중은 여기 있는데, 그와 아무 상관없는 논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정치조직들은 이합집산 하는 게 속성이다. 그 이합집산을 할 때 마다 저 논쟁을 해야 된다. 그 논쟁을 하기에는 내 인생의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대중조직은 한때는 어용 쪽으로 기울고 이렇게 오르락내리락은 하지만 조직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거든요. 이 조직을 어떻게 민주화할 거냐 하는 논쟁은 하지만, 부수고 이런 논쟁은 안 하거든요. 그래서 대중조직에서 활동하는 게 훨씬 좋다는 생각을 했죠.”

 

95년 전노협이 민주노총으로 전환하고, 96년 3월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가 만들어지면서 민주노총 간부 활동을 4년간 하게 된다. 99년 12월 전국에서 최초로 민주노총 지역본부장 직선제가 실시돼 3팀의 후보가 출마하게 된다. 박찬희는 자신이 지지했던 후보가 떨어지면서 민주노총 간부 활동을 정리한다. 그리고 집중하게 된 곳이 성서공단이다.

 

“규모가 작은 노조 몇 개가 노개투 이후에 성서에서 만들어지는데... 지금은 이 회사들이 다 폐업해서 없습니다. 그런 노조들 투쟁하는데 결합해서 지원하기도 하고... 그때부터 성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죠.

그때 그 노조들이 다 금속연맹이었는데, 그때 금속연맹이 산별노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한참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전노협 시절이나 민주노총 와서도 산별노조 전환은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당연하다고생각하고 있다가 금속에서 산별을 추진하는 과정을 보면서 의심이 드는 거죠.

전노협 시절이나 민주노총 와서도 성서공단에 노동조합이 별로 없었습니다. 성서공단은 조그만 회사들 밖에 없고... 주름잡는 회사가 없는 거죠. 민주노조라고 할 수 있는 데는 없고, 나름 등치가 있는 회사들은 다 한국노총이에요. 민주노총 사업장이라는 데는 50명~100명씩 되는 데서 만들었다가 다 깨지고... 오래 가면 4~5년 짧게 가면 2~3년 이예요. 그 투쟁마다 사장을 응징한다던지 하는 성과는 있었지만, 노조는 남아있질 않는 거예요. 사업장 단위로 노조가 생겼을 때에 일정 규모 이상이 돼야 노조가 유지가 된다는 거죠. 그 일정 규모라는 게 제가 경험적으로 느끼기에는 100단위 이상 이예요. 100은 넘어가야 전임 한 명이라도 요구할 수 있어요. 그 이하는 자본이 못 버텨요. 그러니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꿈꿀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산별노조는 미조직노동자를 조직하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정작 하는 꼬라지는 조직돼 있는 데끼리 통합해서 덩치 키우겠다는 것이고... 그렇게 덩치를 키워서는 관료로 있는 사람들의 교섭력은 커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미조직노동자들한테는 눈꼽만큼도 눈길을 돌리지 않고... 그때부터 이 성서공단의 노조들이 생존해 나가려면 지역노조가 맞지 않나 생각을 했어요.”

 

성서공단에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면서 지역일반노조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면서 2002년 세 명의 지역 활동가가 성서공단을 상대로 본격적인 조직화를 하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막 바로 성서공단노동조합을 만들게 된다.

 

“부산지역 일반노조가 제조업 영세사업장에 착목해서 하기는 했는데, 이미 산업적 상황이 서비스업이나 이런 쪽에서 비정규직이 많이 양산되는 상황이다 보니까 그런 쪽으로 투쟁의 중심이 이동되더라고요. 시설이라든가 이런 데는 관공서를 상대로 하거나... 영세사업장 하고 그 지점에서 다른 거예요. 영세사업장 사장은 내빼거나 감옥가거나 그런데, 이런 데는 없어지지는 않는 거예요. 내빼는 거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좀 다르다’ 그리고 ‘영세사업장이 더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지역노조로 확 넓혀 놓으면 분명히 그쪽의 싸움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고... 당연히 투쟁의 요구가 있으면 거기 쫓아가야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 일은 또 신경을 못 쓰게 된다. 부산지역일반노조를 통해서 우리가 그런 점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동지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잘 하고 있지만...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한 번도 안 됐다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가면 또 안 된다는 거죠. 그러면 끝까지 여기에 한 번 물고 늘어져 보자는 거죠. 그래서 대구지역 일반노조라는 식으로 넓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공단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해요.”

 

“우리가 여기 성서공단노조라고 간판을 달고 있기 때문에 여기 아파트에 경비하는 아저씨들도 상담을 오시고, 지하철 2호선 공사할 때에는 공사하시는 분들도 상담을 오시고... 매번 오지는 않지만 가끔 우리가 주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벋어난 상담들이 와요. 그러면 기초상담을 하고 노동조합으로 연결시킬 데가 있으면 그쪽으로 연결시켜 드리고...

포인트는 제조업 영세사업장이다. 제조업 영세사업장에 대해서 크게 의미를 둬서가 아니라 노동운동이라는 틀 안에서 소외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고민의 중심으로 만들어보자는 취지인 거고...”

 

성서공단을 기반으로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영세사업장을 착목하다보니까 그때까지 잘 못 보던 이주노동자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먼저, 상담부터 시작했죠. 코리안은 어느 정도 상담해주고 ‘이런 거는 이렇게 이렇게 스스로 하세요’ 하는 게 되는데, 이주는 스스로 안 되잖아요. 전권을 위임받아 내가 해야 되는 기라. 그래서 해결해주니까 이게 폭발적인기라. 너무 많이 찾아오는 기라. 혼자 감당이 안 되는 거야.

이주노동자들을 보면 모든 것이 사각지대잖아요. 우리가 이주노동자들을 위해서 뭐를 함께 할까 고민하다가 무료진료실하고 한글교실을 하는데, 지역의 자원을 끌어 모으는 거죠. 무료진료실 같은 경우에는 ‘인도주의 실천을 위한 의사협의회’나 나름대로 인맥을 통해서 아는 의사들한테 부탁도 하고 그러니까 모아지데요.

학교 가서 포스터 붙이고 자원활동가들 모으니까 자원활동가들이 오데요. 운동권 학생들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봉사적인 마인드로 오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여기는 봉사하는 데가 아니거든요’ 그래요. 그러면서 조끔 지나면 그런 사람들은 가요. ‘여기서 지향하는 게 그래요? 그것도 내가 인정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요만큼 이니까 나는 요만큼만 여기에 할께요’ 이렇게 우리를 인정하고 자기도 인정해달라는 사람도 있죠. 그런 사람이 오히려 오래가요. 자원활동 온 사람이 전격적으로 운동하게 되는 경우도 한 두 케이스 있는데...

한글교실 하다보니까 학생들뿐 아니라 직장인들도 오고... 일요일 되면 이주노동자들이 한글 배우겠다고 오고... 그렇게 때로 많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주노동자들한테 인맥을 타고 소문이 나면 쫙 와요.”

 

영세사업장들이 즐비한 곳에서 조직화 한다는 것은 조직화하기 매우 어려운 노동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영세사업장을 보니까 심각한 게, 이주노동자들이 있고, 여성노동자들이 있고, 노령노동자들이 있고... 이 사람들이 조직되기 진짜 어려운 사람들인 기라. 건장하고 힘 쎄고 혈기왕성하고 문제의식 많은 젊은 남성노동자라면 찌르면 터지기라고 할 텐데... 여기는 찔러도 터지지도 않는... 인내하고, 차별받고 그런 것을 운명처럼 생각하는 것이 자기 내부화 되어 있는 그런 노동자들...”

 

“활동하는 내용이 그렇다보니까 어느 사업장을 타겟으로 해서 여기 조직하자는 식이 아니고, 그냥 공단 전체에다가 선전물 몇 천 장씩 뿌리고, 아니면 포스터를 밤새도록 갖다 도배를 하고, 아니면 밤새도록 프랭카드 갖다 걸고...”

 

조직화의 어려움은 재정적 어려움을 동반하기도 했다.

 

“재정은 여전히 심각하고요. 조합원이 시작할 때 5명에서 지금은 50명~60명 되는데, 그 정도 인원으로 노동조합 선전물 찍기도 어렵고요. 노동조합 치고는 참 희한하게 거의 전적으로 후원금에 의존하죠.

세 명이 상근을 해도, 처음에 상근비는 20만원 받고, 조금씩 조금씩 올려서 지금은 50만원까지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얼마 되지 않는 조합원이지만 전체 조합원의 70% 가량이 이주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노조 사업 중에서 이주노동자사업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많이 오는 이주노동자들 중에서 조합원이 되는 이주노동자들이 생겼고... 그 이주조합원들이 지금은 30~40명 정도 있어요. 그것도 들락날락은 많아요. 우리 조합원 하다가 강제추방 되는 조합원도 있고, 세월이 5~6년 되다보니 정들었던 친구들이 잡혀가는 것도 있고...

국적은 좀 다양하거든요. 그런 조합원들을 놓고 현장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해야 될까 고민했어요. 아무래도 언어는 굉장한 장벽이더라고요. 이주노동자들 내에서의 소통도 한국말인 거예요. 한국말 아는 만큼 소통되는 거야.

이주노동자들이 주야 맞교대를 많이 하고, 평일에 모이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래서 일요일에 모이고... 일요일이 한 달에 4~5번 있는데, 이 친구들도 자기 개인 생활이 있는 거잖아요. 자기 친구도 만나야 되고 하는데, 일요일마다 노조에 나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모이고 이러다보니까 다양하게 만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이주현장위원회를 따로 안 만든다는 거였는데, 언어적인 장벽이 너무 크고... 그래서 이주현장위원회를 따로 만들었고, 국가별로 모이거나 소통하는 것은 그 안에서 이뤄지고...”

 

2007년 매직쉐프라는 공장에 다니던 50대 노동자 11명이 노조로 상담을 왔고, 노조 가입과 함께 투쟁이 준비됐다. 그 과정에서 회사측의 탄압으로 5명이 탈퇴를 해 6명이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민주노총에서 나온 모범 단협 150가지 조항을 50 몇 개로 빡 줄여가 회사에 던지고 단협 하자고 그랬죠. 회사야 당연히 ‘조합원 6명뿐인데 뭐 할라고 하냐?’ 이러다가 ‘벌써 5~6년 전에 베트남으로 이전했어야 되는 걸 그나마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 임금 조금 올려달라고 하고, 근로조건 개선시켜달라고 하면 회사 안 한다. 바로 간다’ 그러는 회사예요.

오십 넘은 여섯 명 아저씨들이 열심히 싸워서 파업도 하고... 이틀인가 4시간 파업을 두 번 했어요. 그것도 금요일 홈에버 앞에 집회하는 날 맞춰가지고... 1주일에 한 번씩 4시간 파업을 두 번 했죠. 그거 딱 하고 나니까 직장폐쇄 해 버리는 기라. 우리 조합원 있는 부서만 딱 폐쇄 해뿐 기라. 그러니까 자동빵으로 바로 텐트농성 들어가고... 안 할 수 없는 기라. 현장에서 밀려나오니까.

어차피 그런 상황은 올지도 모를 것이다라는 건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직장폐쇄 할 줄 우리도 몰랐고... 그래서 투쟁전술도 천천히 할 수 있는 거 하면서 결의를 높여가면서... 여섯 명이니까 흩어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텐트농성 하자고 결의하기까지 1주일 걸렸어요.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한 아저씨 말이 ‘우리가 할라믄 다브락지게 하자. 안 할라믄 여기서 손 털든가’ 그래서 다브락지게 하는 쪽으로 결의가 모아져가 텐트 딱 치고 한 달쯤 텐트농성을 했어요. 교섭도 처음에는 안 하다가 이렇게 저렇게 시도하고...”

 

요구안을 만들고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매직쉐프조합원과 노조간부들은 무수한 토론을 벌이며 의견을 모아가야 했다.

 

“우리 아저씨들은 이 회사에서 20년씩 일 했는 기능공들이예요. 나름 기능공인데 10년 동안 월급이 한 번도 안 올랐는 기라. IMF 전에 한 번 오르고, 그 후로 한 번도 안 올랐는 기라. 있던 상여금도 없어져뿔고. 그러니카네 실질적으로 임금 삭감 됐잖아요. 최저임금 받는 이주노동자나 아줌마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이 해마다 쬐끔 쬐끔씩 올라온 거야. 그러다보니까 나름 기능공인 이 아저씨들 하고 그 사람들 하고 별 차이가 안 나는 거예요. ‘정말 우리는 10년 동안 헛 살았구나’ 이게 가슴에 사무쳐서 노동조합도 할 수 있었던 건데...

그런데 ‘우리가 단 여섯 명 뿐이지만, 성서공단노조의 취지는 이러이러 하기 때문에 여섯 명만을 위한 단협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이 사업장 전체의 다른 노동자들한테도 적용되는 단협을 요구하고, 그 다음이 이 단협이 우리 성서공단에 있는 다른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에게도 쟁점이 될 수 있는 거를 해야 지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거를 일치 볼 때까지 시간이 참 많이 걸렸어요. 투쟁하기까지 10개월 정도가 걸렸거든요. 이 10개월의 과정 동안에도 그 내용이 100%는 안 돼요. 100%는 안 되지만 투쟁할 수 있는 만큼 조금 조금씩...

그러면서 했던 것이 ‘최저임금 위반하는 걸 우리가 나서서 합시다’ 그러니까 ‘뭐, 아줌마들 노조에 들어오지도 않고... 내 노조 들어갔다 하니카네 도로 모르는 척 하고... 현장에서 뭐 얘기했다하면 쪼로록 회사 쫓아가 일러바치는데... 뭐 할라꼬 우리가 하노?’ 그래요. ‘그게 아니고 예. 그래도 우리가 지금은 그렇게 갈라져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진짜 이기는 거는 노동조합에 같이 가입해서 같이 하는 게 이기는 거 아입니꺼?’ 이 얘기가 일치되기가 어려웠어요.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들 중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도 있단 말이에요. ‘누구 누구 누구 불법체륜데, 출입국 가가 신고해 버리자. 출입국 가가 신고하면 사장 벌금내제?’ 그러는 거예요. 사장을 응징하고 싶은데 우리 힘이 미약하니 편법으로 생각한다는 게 이주노동자를 이용해서 사장 좀 타격주면 안 되겠냐는 거예요. 계속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좋자고 이주노동자를 희생 삼아서는 안 된다’ 그래요. 또 다르게 미운 거예요. ‘우리는 투쟁하자고 이카는데, 저거는 잔업 다하고 철야까지 다 해가 월급 우리보다 더 많이 가져가고... 이래가 되나? 뭐 할라고 우리가 가들 봐줘야 하노? 불법인데 저거 나라 보내 뿔믄 되지...’ 그러고... ‘그런 방법 쓰지 말고 정당당당한 우리 방법 써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같이 근로조건이 향상되어 질 수 있도록 하는 기 우리가 노조 하는 이유 아닙니까?’ 이렇게 계속 해야 돼요. 조금만 옆으로 벋어나면 바로 다른 버전으로 또 얘기해요.”

 

그런 토론 과정을 통해 토요유급화(2008년부터 20인 이상 사업장에 주5일제가 시행됨에 따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실질적인 임금삭감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토요유급화 요구는 중요한 요구였다), 임금인상, 정년 60세 보장, 전 직원 상여금 원상회복 등의 요구를 핵심으로 삼고 투쟁을 벌였다. 결국 토요유급화를 제외하고, 전 직원 임금 10만원 인상과 상여금 원상회복, 정년 59세 등의 내용으로 단협을 체결하게 된다. 이는 성서공단노조가 만들어진 후 처음으로 단협을 체결한 경우였다.

 

성서공단노조는 현장위원회를 중심으로 조합원들이 활동하는데 이주현장위원회, 매직쉐프현장위원회, 들풀현장위원회가 있다. 그중 이주현장위원회가 인원이 가장 많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으로서의 일상 활동을 벌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몇 년 전에 이주노동자가 과로사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노동조합이 달려들고 그러니까 산재처리 받고... 이주노동자들이 주축이 돼서 투쟁을 하면서 단협에 가까운 노사협약서까지 만들어냈어요. 그런데 그 회사도 야반도주를 해서 이주노동자들을 그 투쟁을 위해 계속 모아놓기는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조합원으로 있으면서 다른 회사로 취직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케이스는 있는데... 이주노동자들이 신분적인 제약이나 이런 것들 속에서 현장투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거는 고민이고...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강제단속이나 강제추방에 대응하는 연간투쟁이 있어요. 단속 때 되면 사무실에 농성 깔고 이렇게 투쟁하는 것도 있고, 출입국관리사무소 앞에서 가서 같이 집회하고, 우리는 단속 뜨면 공단에 순찰 나가고...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상 활동은 무료치료실이나 한글교실 같은 거를 이주조합원들이 토요일 저녁이나 시간을 내어서 홍보하고, 이주 친구들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서 선전하고 그런 활동들 해요. 내부적으로는 조합원들을 위한 체육대회, 수련회, 소풍, 송년회 정도를 하는데, 이거를 쭉 소통해서 모아내는 거를 1년에 4번 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5월에 메이데이 투쟁 하고, 8월에는 고용허가제가 시행되는 날이어서 그에 대해 폭로하는 활동을 하고, 12월에는 세계이주노동자의 날 투쟁하고...”

 

이주현장위원회나 매직쉐프현장위원회와 달리 한 사업장에 한 명씩 있는 조합원들이 모여 있는 들풀현장위원회는 활동 자체가 가장 고민스러운 곳이다.

 

“들풀현장위원회는 제일 갑갑해요. 몇 명 되지는 않는데 띄엄띄엄 현장은 다 다르지... 2주에 한 번씩 모임을 하는데, 일하는 타이밍이 달라서 힘들어요. 어느 놈 주간하고, 어느 놈 야간 해 뿔면...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반은 일 한다고 안 나오고 반만 오면 술 한 잔 먹기가 다반사고...

그렇지만 여기도 일상적인 활동들은 같이 공유하고 같이 토론하고... 그리고 노조에 연대사업이 많습니다. 각종 공대위에 끼여가 활동도 하고 그러니까 그런 것도 공유하기도 하고... 좀 되면 교육도 잡아서 한 번씩 할 때가 있고...

들풀현장위원회는 제일 갑갑하고, 제일 부침이 많고, 잘 안 돌아가고 그렇지만, 생명은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공단지역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역을 대상으로 한 활동도 벌이게 된다. 성서공단노동조합이 만들어질 때부터 주요한 사업과제 중의 하나로 삼았던 것이 ‘노조 친화적 지역사회 만들기’였다.

 

“지역사업은 혼자 하기가 너무 버겁기 때문에 금속노조도 끌어 들이고, 이 지역에 있는 전교조도 끌어 들이고, 공무원노조도 끌어 들이고, ‘좋은 친구들’이라는 문화패도 끌어 들이고... 일상사업 하려면 문화적인 측면이 중요하기 때문에 ‘좋은 친구들’이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좋은 친구들’이 이런 취지에 동감하기 때문에 이 사업할 때 거의 올인 해 주거든요. 이렇게 해서 ‘성서지역 노동자 주민 기본권 보장을 위한 공대위’라는 조직이 하나 만들어져 있어요. 거기에서 ‘올해는 신문도 한 번 만들어보자’ 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24시간 중에 공장에서 12시간을 보낸다면 나머지 12시간은 지역에서 보내는데, 지금까지 노동조합은 공장에 있는 12시간은 착목했는지 모르지만, 그 나머지 재생산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12시간에 대해서는 착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걸 해보자는 취지도 있었죠.

그래서 하는 사업 중의 하나가 월 1회 공단을 대상으로 한 선전사업이 있고... ‘좋은 친구들’ 하고 몇 년째 하는 사업이 있는데... 여기는 영세사업장들이다 보니까 공장 안에 식당이 없고 조금 큰 공장에 식당이 있으면 인근 공장들이 그 식당을 같이 이용해요. 그런 특성이 있다 보니까 점심시간에 그런 식당이 있는 길에 가가지고 전 피고, 노래 부르고, 선전물 돌리고... 그걸 ‘밥 한 술 뜨고 노래 한 자락 듣고’라는 거리공연이라고 우리가 해요. 로고송도 만들었어요. 매주 수요일 1시간씩 하는데 그것도 빡 쎄요. 1년에 석 달, 길 때는 넉 달 정도는 매주 수요일 날 거리공연 하고... 그러면은 분위기는 좋아요.

여름 되면 아파트 단지 안에 공원에서 저녁에 공연을 해요. 저녁 7시부터 9시 사이에, 길면 두 시간 갈 때도 있지만, 1시간 반 정도 해서 공연을 하는데... 노래 공연을 할 때도 있고, 돈이 되면 연극을 하기도 하는데... 지역의 문화역량들 다 끌어 모아가... 그게 2001년부터 했어요. 여기에서 노동조합 하기 전부터 그 공연을 했죠. 노동자 관점의 이야기를 주민의 공간에서 펼쳐내는 그런 수요공연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요. 올해는 노래자랑을 한 번 시도해보려고 하는데...”

 

공단으로 대상으로 6년의 노력을 벌이면서 가장 고민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활동가의 재생산과 재정문제이다.

 

“무지하게 재생산이 고민이에요. 활동비를 많이 지급하는 것도 아니고... 단적으로 얘기하면, 활동가들의 자기희생에 기반 해서 유지 운영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만 해가지고 5년 6년 버티고 있는 것도 장하긴 한데, 그 장하다는 것만으로 운동을 잘 한다고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고... 후원해주시는 사람들한테도 묻지마 후원을 요구하고... ‘요구와 조건이 있으면 안 받는다’고 돈 받는 주제에 꼬장꼬장하고...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커 나오는 활동가한테 ‘야, 여기 와서 활동해. 생활은 책임져 줄게’ 이렇게 할 수 있는 수준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시에서 주겠다는 지원금을 받을 수도 없고... 사실, 이주노동자 사업하고 이러니까 사회사업적인 성격이 있으니까 시에서는 돈을 줄라고 그래요. 돈 주는 이유는 우리가 활동하는 성과를 지네 그걸로 포장하고 싶겠죠. 그리고 우리가 조그만 서류 작성하면 사회복지공동모금회니 무슨 재단이니 이런데서 돈 받을 수도 있어요. 시에서 돈 받는 거는 이 새끼들 의도가 그렇잖아요? 재단이나 이런데서 돈 받는 것도 아산재단이나 이런 덴데 어떻게 우리가 아산재단에서 돈을 받겠어요? 차라리 굶어죽지...

그런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활동가의 재생산이나 이런 거는 무지하게 있는데, 그렇다고 해가 그런 데에 어떤 왕도가 있질 않아요. 그렇다고 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원칙이 너무 경직돼 있고, 너무 꼬장꼬장 한 거 아이가? 그런 거는 조금 유연해도 된다 아이가?’ 그래서 ‘유연’하는 순간에 망가질 것 같으면 아예 안 하는 게 났고... 망가지지 않겠다고 자신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강제해 들어오는 유·무형의 내면화되는 거... 그것뿐만 아니라 지난번에 FTA반대투쟁 씨게 하니까 ‘시민단체들 돈 끊는다’는 소리부터 먼저 하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너무 경직돼 있나?’ 하고 자문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은 해요. 자문하면서 스스로 반성하는 거는 필요한데...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바꿔야 될 걸로 생각되지는 않아요.”

 

이주노동자의 노동조합으로 조직화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운동에 대한 의미를 정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노동운동 안에 이주노동자운동에 대한 철학과 인식이 넓게 자리 잡고 있지는 안다고 보거든요. 우리가 민주노총 지역본부에 파견하는 대의원이 두 명이라가 한 명을 반드시 이주노동자를 대의원으로 뽑아서 가거든요. 가서 분위기 보면 ‘와~아~’ 이런 분위기고... 신기한 무엇을 보는 듯한... 그게 운동 전체의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노조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이주노동자운동이 대한민국의 노동운동 속에서 차지하는 자기 역할이나 의미를 한 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게 있어요. 자족적인 정리가 아니라 널리 이야기 될 수 있는... 그런 게 우리도 안하면 어찌 되겠노 싶어요.”

 

노동자층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쉽게 전망이 만들어지지 않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박찬희에게 희망은 바로 그 현실 자체였다.

 

“‘우리가 해도 안 되는데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반성이나 회의도 들어요. 그런 반성이나 평가를 하기 위한 사업들을 조금 조금씩 배치 해 보죠. 활동하는 우리들은 우리 활동하는 거에 매몰 되가 잘 못 볼 수 있으니까, 주변에서 평가를 들어보기도 하고...

제가 가지는 그 반문에 제가 대답하는 거는 ‘정말 어렵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됐을 때는 그게 바로 혁명이다’는 생각을 해요. ‘ 그 일어나는 순간에 나는 같이 있을란다. 딴 데 가지고 않고 계속 있다가...’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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