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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조돈희 이야기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격렬한 계급투쟁을 경험하면서 20년을 쉼 없이 달려온 노동자의 삶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비합법 정치조직운동을 비롯한 정치조직운동과 현장조직운동에 몰입하는 등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실현하기 위해 실천해왔던 현대중공업 조돈희 동지를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56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조돈희는 불안정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중학교를 마치고 노동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무허가 치과 의료행위를 하던 아버지는 문제가 생기면 이곳 저곳 도망 다녔고, 보따리 행상을 하셨던 어머니 역시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형편이 아니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장사꾼으로 키우려던 어머니의 소개로 동네 그릇가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해 제과점, 가구공장 등에서 10대 중반의 세월을 보낸다. 16살이던 70년 ‘서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서울로 올라와 눈썹과 가발을 만드는 공장과 어묵공장 등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자식들을 데리고 함께 다니시던 어머니가 ‘울산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얘기에 울산에 내려온 것이 75년이다. 한 살 차이였던 작은 형과 함께 공단에서 건설플랜트 현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여수, 포항, 구미 등 공단을 돌아다니면서 배관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77년 군에 입대하고 80년 제대 후 건설플랜트 공사현장을 돌며 배관 일을 하다가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81년 다시 울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군대 갔다 와서 두 달 정도 쉬었나? 서울서 일 좀 하다가... 여수를 다시 가서 1년 정도 있다가... 배운 게 그거라고 노가다 배관 일 좀 하다가...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가... 군대 갔다 와서 1년 정도 지났으니 나이도 스물다섯 정도 됐으니까 ‘취직을 해야 되겠다’ 생각을 했어. 그때 사우디 나가는 게 한참 바람이 불고 있었거든... 노가다 하는 사람이 ‘사우디 한 번 갔다 오면 돈 번다’ 그러더라고...

신문광고 보고 서류를 집어넣었지... 현대중공업 모집 광고가 동시에 실려 있었어... 묘하게 시험날짜가 비슷하게 맞춰졌어. 그것도 둘 다 울산에서 시험을 보는 거야. 현대건설에서는 중동 가는 일꾼들 모집하는 것이고, 하나는 현대중공업 시험인데 하루 간격이야. 둘 다 현대중공업 공장 안에서 시험을 본 거지. 근데 사우디 가는 건 시험이 어렵더라고. 그래서 떨어졌어. 현대중공업에 들어가는 건 시험이 쉬워서 합격을 했어.”

 

울산으로 내려오면서 당시 사귀던 여자와 동거를 하기 시작했고, 곧 딸을 낳은 후 정식 결혼을 하고 살기 시작한다.

 

“둘이서 쥐뿔도 가진 거 없이 살기 시작하니까 쪼들리기 시작하는 거야. 애 가지니까 입덧 시작하지... 월세 줘가면서 살아가지... 내가 벌어오는 건 많이 없지... 애 엄마가 헤프게 쓰는 것도 아니거든. 자기 옷 자기가 한 번 사 입어 본 사람이 아닌 거야. 버는 것도 많이 없지만, 쓰는 것도 많이 없는데 쪼들리더라고...

그래서 빚을 지기 시작하는데... 큰 빚을 지는 게 아니야. 10만원, 5만원이 없어서, 텔레비를 전당포에 맞기고... 직장 동료들한테 돈을 빌렸어도 꼭 이자를 받는 놈이 있어요. 5만원을 빌리면 한 달에 2부 3부 이자를 받고 그랬어. 그 이자 주는 것도 장난이 아니더라고...

살면서 그런 게 되게 고통스러웠던 거 같아. 그러다보니까 나는 잔소리 많이 하는 보수적인 남편이 된 거지... 벌어주는 것은 없으면서 다른 여자들 비교하면서 ‘왜 저축도 못하고 그렇게 사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애 엄마는 애 엄마대로 우울증에 걸리고, 관계가 악화되고, 이혼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87년이 터진 거야.”

 

87년 7월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노동자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조돈희는 그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87년이 터지니까 그냥 따라다닌 거지... 그때 애 엄마나 나나 그 분위기에 같이 휩쓸려 버렸어. 애 엄마도 가족들 모이는 대오에 같이 합류하면서 연행된 지도부 항의투쟁 이런데 가고, 항의하다가 다친 할머니 구출해서 지도부에 보고하고... 그렇게 같이 동조하고 그러면서 흐름을 탔지...

87년 투쟁이 끝난 가을과 겨울 사이를 그냥 그 전 생활처럼... 87년 투쟁은 그냥 있던 거고, 이게 끝난 다음에는 다시 그 전과 같은 집안문제로 돌아간 거지... 약간의 임금인상이 됐다고 하나, 사실 별 차이가 없었다고.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를 하거나, 가정문제를 획기적으로 달라지거나 한 건 아닌 거 같아.”

 

현대중공업은 초기에 어용노조가 급조됐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곧 민주노조가 들어선다. 그러나 민주노조는 대대적인 탄압으로 곧 와해되고, 87년 12월 임원선거를 치러 3대 서태수 집행부가 들어선다. 서태수 위원장은 당선 직후 교통사고로 입원하게 되면서 노조는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된다.

조돈희는 이어 실시된 88년 2월 대의원선거에서 현장관리자의 지목과 반원들의 동의로 대의원에 선출되면서 노조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시대 분위기 속에 열정을 갖고 대의원 활동을 시작할 무렵 88년 4월 총선이 다가왔다. 현대중공업의 정몽준이 출마하자 그에 맞서 2대 수석부위원장으로 구속돼 있던 김진국이 노동자후보로 추대돼 노동자와 자본자간의 선거투쟁이 벌어진다.

 

“이때 총선 당신에 선거에 참여했던 힘은 되게 역동적이었던 거 같아. 나는 제3자적 입장에서 봤지만... 대중유세가 있었기 때문에 유세장에 참여하는 선거운동원들이 지금과 같이 표 받으러 다니는 선거운동 수준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계급 대 계급이 붙은 양상이었기 때문에 되게 역동적이었지...

이때 나는 대의원으로서 대의원 활동에 충실했는데... 나 같은 경우는 전투적 그룹과 달리 중도 합리주의적 성향이었어. 노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 성격이 그래서...

막 선거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편에서 임·단협이 진행되고 있었어. 그런데 임·단협을 진행하면서 직무대행 이 자식이 직권조인을 했어. 직권조인 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현장에 형성되고 그래서 나는 그런 거 가지고 문제제기 하고...

몇 몇 대의원들이 위원장 면회를 갔는데, 위원장이 ‘노조는 선거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그런데 구경 가고 싶더라고... 구경 가서 보니까 아주 뜨겁게... 감히 저 사람들하고 나 하고 섞이기 어려운 뜨거움을 느꼈어.”

 

직무대행의 직권조인에 맞서 직권조인 거부투쟁을 벌이던 중 조돈희는 위원장으로부터 고소·고발을 당하게 되고, 이어 128일 파업투쟁의 열기 속으로 빠져든다. 당시 역동적인 노조활동으로 인해 부인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88년 10월 이혼을 하게 된다.

 

“서태수가 복귀하겠다고 온 날 사실은 갇혀 버린 거지... 이 새끼가 직권조인 했다가 자기가 정상적으로 일하겠다고 퇴원하고 온 거야. 이날 사람들이 ‘니가 뭐하려 왔냐’ 사퇴하라고 빙 둘러싼 거야. 둘러싸서 위원장실에 앉혀 놓고 ‘사퇴 각서 써라’ 그러니까 ‘뭐라고 쓰면 되겠냐?’ 그래서 사람들이 초안을 써 가지고 ‘여기다 도장 찍어라’ 이런 분위기가 된 거야.

이때 둘러싸고 있는 인원 중에 내가 있으면서 ‘위원장님 머리 정상이십니까? 아직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말 때문에 고소·고발을 당한 거야. 사용자한테 고소·고발을 당한 것이 아니라 노조 위원장한테 7명인가 9명인가 고소·고발을 당해요. 이 사람들이 다 수배자가 된 거지... 수배자가 돼서 파업지도부하고 쭉 관계를 하다보니까 파업지도부로 쳐 준거야.”

 

88년 12월부터 시작된 파업투쟁은 장기화 돼 89년 3월 공권력이 투입되고, 이후 한 달 가량 격렬한 가두투쟁이 이어지며 막을 내린다. 그렇게 128일 파업투쟁 이후 조돈희는 첫 구속과 해고가 이어졌고, 89년 8월 복직을 이뤄내 현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시 89년 연말 임원선거에서 이영현 집행부가 들어서고 조돈희는 문화체육부장으로 상집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막 바로 90년 4월 골리앗투쟁이 이어진다.

 

“현장에 대의원 하고 소위원 하는 사람들이 뭔가 새롭게 해야 하겠다는 욕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활동가들이 열심히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조합원들에게 노동가요 보급하는 거야. 그때 막 보급되던 노동가들이 테이프가 없으니까 문체부장한테 오는 거야. ‘노래 좀 만들어 달라’ ‘노래 하나 뽑아서 편집해 달라’... 편집 할 수 있는 건 편집을 하고, 없는 건 내가 직접 녹음기 갖다 놓고 기타 치면서 노래해서 원본 만들고, 이거 복사해서 현장에 밀어 넣고...

이런 와중에서 128일 투쟁의 지도부들이 항소심 공판에서 1심보다 더 높은 구형을 받아요. 그러면서 당선 돼서 얼마 되지 않은 집행부가 대의원대회 열어서 집단월차를 내고 법정 항의투쟁을 가고... 그것 때문에 새로운 집행부도 얼마 집행 하지도 못하고 바로 수배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서 골리앗투쟁의 시발점이 되지...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이 공권력에 의도적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새롭게 직대를 맡아야 할 부위원장들이 줄줄이 꽁무니를 빼 버리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당시 이갑용 사무장이 직무대행을 맡게 되면서 골리앗투쟁의 지도부가 되는데...

이때 임·단협을 앞당기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수석부위원장 소속이 조선5분과였어. 5분과에 있는 대의원 소위원들이 조합원들과 함께 노동조합 앞으로 항의하러 오고... 거기서 텐트농성을 벌여 버린 거지. 그렇게 밑에서부터 하니까 지도부도 같이 텐트농성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일정을 땡겨서 파업까지 확대돼 버린 그런 상황이 된 거지...

지도부가 미적미적 거리니까 밑에서부터 항의하고, 노동조합 앞에 자발적인 텐트농성을 벌이면서 노동조합을 압박하게 된 것이지. 그래서 이 지도부가 임·단투 일정을 팍팍 앞당기면서 파업상황까지 가버린 이런 상황이었지. 짧은 시기에 파업이 됐고, 공권력이 128일 때처럼 기다리지 않았지. 막 바로 쳐 버렸지.”

 

현대중공업 파업과 함께 막 바로 공권력이 투입됐고, 전노협의 전국총파업과 격렬한 가두투쟁이 이어진다. 지도부와 함께 골리앗크레인을 점거하고 16일간 버티다 내려오면서 두 번째 구속과 해고가 이어진다.

 

“골리앗투쟁 전에 국가보안법으로 들어와 있던 친구가 있어요. 그때 독방에 갇혀 있을 때 이 친구가 만능노트 갖고 수령론이 어쩌고 저쩌고... 북한에 대한 사상교육을 시켰는데... 별로 감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없었는데... 사람 중심의 철학, ‘운명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거지 누가 결정해 주지 않는다’ 이런 거... 그러면서 유일지도사상에 대한 게 딱 꽂혔던 거 같애...

‘공부 좀 해야 되겠다’ 해서 책을 보게 된 게 이런 저런 소설, 철학, 경제학, 노동해방문학 이런 걸 잡다하게 보기시작 했는데... 별로 들어오지는 않지만... 빵에 들어와 있던 운동권 친구들하고 국가구성체 논쟁에 대해서 묻고 답하고 대화하면서 사회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된 거 같애... 형 확정되고 공주교도소로 가서 북한에 갔었던 문규헌 신부를 만나고, 북한에 갔다 온 얘기들 듣고 자연스럽게 통일운동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

뭔가 ‘세포를 조직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출소 몇 개월 앞두고 계획을 한 거야. 현대중공업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친구들, 조직을 하고 싶은 친구들, ‘어느 부서에 누구, 어느 분과에 누구’ 이렇게 하면서... 빵에서 나와서 그 사람들을 일일이 만났어. 통일에 대한 필요성 이것이 현장에는 진짜 안 먹히데... 분소 밑에서 사람들 만나면 ‘통일은 해야 하고, 그래야 잘 살 수 있고’ 그런 얘기를 하면 다 공감을 하는 얘긴데, 그 얘기만 있고 일상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없으니까...

91년 8월에 나와서 만난 친구들이 주사파들이 아니고, 노래마당에 들어와 있던 ‘국제사회주의자일동’ 친구들이야. 내가 노래마당 멤버였으니까 이 친구들이 바로 밀착해서 대화를 시작한 거야. 첫 대화가 뭐냐 하면 중국 천안문사태야. 이때 빵에서는 ‘반동들을 잘 분쇄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잘 모르지만 ‘북한도 사회주의고, 중국도 사회주읜데 사회주의에 대한 반란을 잘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토론을 제기하더라고... 그러면서 토론에서 깨지기 시작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사회주의 활동가들과 접촉하면서 의식적 활동가로 성장하면서 비합법 정치조직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92년 93년 경과하면서는 밖의 정치조직에 가입하는 과정이지. 92년에는 후보사원, 93년에 사원이 된 거지.

밖의 정치조직은 한 차례 분화가 돼 버려. 초창기 만났던 ‘국제사회주의자일동’으로 와 있었는데, 내가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과정을 자기네들끼리 평가 토론하면서 분화돼 버려. 선전과 조직화를 통해서 조직됐느냐(선조분파), 사상적 지도에 의해서 조직됐느냐(사지분파)로 논쟁을 하는데... 사지분파가 떨어져 나가고, 선조분파가 혁사노(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 투쟁 동맹)로... 그러면서 혁사노 맴버가 됐지.”

 

비합 정치활동을 하면서 현대중공업 활동가들을 규합해 ‘현대중공업 노동자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활동하면서 93년 다시 복직을 하게 된다. 복직 후 조선분소장으로 활동하다가 94년 3월 조합 조직쟁의실장으로 올라가자마자 혁사노 조직사건으로 세 번째 구속을 맞이한다.

 

“어떤 사람이나 그런 걸 경험한다는데... 조직사건 터지고 나면 절망에 휩싸이지... 일반 노동사건 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조사받는 과정도 제네들 압박에 의해서 되게 패배적으로 받고... 조사 끝나고 징역에 살면서 ‘제네들 손바닥 위에서 우리가 놀았다. 이래 갖고 무슨 혁명을 하냐?’ 그런 생각 들고... 조직 활동하기가 두렵고... 그래서 힘들었는데...

그때 궁금한 게 하나 있었어. 조직 사건 중에 주사파 조직인 구국전위 사건으로 들어오신 어르신들... 징역을 20년을 살고 나와서 또 다시 20년을 받고도 꿋꿋한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경험도 짧지... 나이도 많다고 하나 저 양반들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무슨 신념이 있어서 그럴 건데, 그 신념은 어디서 오는 건가?’ 이게 굉장히 궁금했어.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빵에서 1년을 보내고 나와서 나는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거든... 나중에 보니까 우리들의 조건이 변한 게 하나도 없더라. 여전히 싸움박질이고, 탄압 당하고, 자본의 통제 속에 갇혀 있고... 또 다시 활동할 수밖에 없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라는 거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95년 3월 만기출소 이후 세 번째 해고를 당한 후 현대중공업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시 조직을 개건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지만 내부 논쟁 등을 거치면서 조직은 이완돼 버린다.

 

“조직운영 논리 갖고 째진 건데.. 우리는 획일적이고 중앙집중적인 조직운영 논리나, 정세나 이런 것과 관련해서도 ‘보위능력도 없다. 보위하려다보니까 대중과 접촉면이 좁아진다’ ‘획일적 조직운영 논리는 우리가 건설하려는 소비에트 권력과 맞지 않다’ 그래서 ‘현장조직운동의 정치적 분화를 통한 당 건설’이라는 노선을 확정하고, 현장조직의 전국적 연대체 건설과 한편에 전국적 노동자투쟁동맹 건설이라는 두 가지 조직건설 노선을 채택하고... 각각의 세포들은 지역으로 나눠서 현장조직 속으로 배치하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각 현장조직의 대표로 만난다는 것이 된 거지. 이렇게 하기로 했는데, 워낙 소수가 된 거야.

게다가 나의 사적인 연애문제에 대한 실망 때문에 후배 활동가들이 떠나갔는데... 그래서 조직이 의도와 무관하게 이완돼버려.”

 

90년대 중반부터 대공장을 중심으로 현장활동가조직인 현장조직들이 만들어지면서 현대중공업에서도 95년 ‘현중 전진하는 노동자회’가 만들어져 조돈희는 연대사업부장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96년부터 현장조직의 전국적 연대체 건설을 위한 논의가 이어져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전국회의)가 만들어지면서 현장조직운동에 정열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현장조직대표자회의 차원에서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지역을 조직하고, 가능하면 투쟁하는 사업장에 가서 회의를 하고... 이때 개인도 조직하기 위해서 노력했거든... 대공장 조직들이 금속을 뛰어넘어서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했던 거거든. ‘개별 인자들은 지역으로 묶어서 조직을 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그렇게 운동을 했으나 넓게 조직화 하는 데는 실패를 했고...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나름대로 의미를 가졌었던 것은 두 가지로 기억되는데...

하나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다시 들어가고 (정리해고제와 근로파견법) 합의해주는 과정에 대해서 공동으로 대응한 거, 그래서 이쪽을 지지하는 좌파사람들한테 뜬 거고...

그 다음에 의미 있었던 거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기아자동차 구조조정투쟁 때 전국적 토론회를 개최했을 때, 진짜 많이 왔거든. 큰 강당이 빼곡하게 차여서 들어설 자리가 없어서 문 밖에서 보고... 이때 뭐를 정립했느냐 하면, 회사살리기 논리에 반대해서 노동자살리기라는 압축된 표현을 정립해서 우리의 이데올로기화 한 것. 그때 기아자동차에서 분신하고 그랬을 때 우리가 가서 연대투쟁 한 것,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저지투쟁 때 성당에 집중했던 것, 한라중공업 파업투쟁 할 때 가서 집중 한 것...

99년 금속연맹 위원장 출마할 때, 서울지하철은 금속연맹 선건데도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지지서명하고 성금 보내고, 화섬(화학·섬유)쪽에서도 지지하는 것이 있었고... 현장조직대표자회의운동에 대한 관심이 전 산업으로 확산돼 버렸고... 얘기 들어보니까 많은 동지들이 그거를 확대시키는 노력을 했더라고... 현장조작대표자회의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거를 대공장 현장조직운동으로만 해석을 하다보니까 이거를 지지하는 주변의 넓은 풀을 조직화하기 위한 계획이 소홀했던 거 같애. 그래서 더 넓게 결합시키지 못한 측면이 있기는 한데... 2000년대 들어서 그 운동에 결합하든 안했든 많은 단위들이 그 운동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라는 것을 전 산업에서 확대시켰던 거 아니냐고 나는 보지.”

 

“내가 집중한 것은 현장조직운동이 선진활동가들만의 투사집단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자발적으로 현장에서 투쟁하면서 그들 스스로 운동의 주체가 되게 하는... 현장권력이라는 것이 ‘현장에서 우리가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현장의 투쟁을 경험했던 이런 동지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어서 현장에서 자기 문제를 스스로 투쟁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나는 정치라고 보니까... 그 운동을 현장조직운동을 통해서 확대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것이 실패했다 하는 것은... 그 운동의 맹아를 현장조직들이 창출시켜내지 못했다는 거지. 노동조합 권력으로 지지받으면서 진출했는데, 노동조합을 집행하면서는 비판적 평가를 받으면서 현장조직운동의 실패로 귀결되는... 단 한 군데에서만이라도 자발적인 그런 운동을 실현했더라면 그 운동은 더 확산되고 의미 있는 운동으로 확대됐을 거라고 봐.”

 

격렬한 투쟁 속에서도 현장이 무너지기 시작한 현대중공업은 95년부터 무쟁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래도 민주노조를 유지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현장은 점점 어려워만 가는 속에 96년 연말 노동법 개악에 맞선 전국적 총파업이 일어나면서 현대중공업노조는 마지막 사활을 건 투쟁이 진행된다.

 

“95년부터 무쟁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경영전략에 의해서 자본이 통제를 하게 된 상황, 특히 대의원이 사측에 의해서 2/3가 장악된 상황, 더불어 운영위원회가 어용에 의해서 2/3가 장악된 상황에서 임·단협에 의한 쟁의행위 가결은 되지 않는 상황이지. 그 상황에서 당시 윤재건 위원장은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니 조직되지 않아서 무쟁의 타결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조건에서 95년 연말 김임식 집행부가 들어섰고... 김임식 집행부에서도 쟁의행위가 안 되는 상황... 이때 김임식 집행부 스타일이 설득 이런 거 보다는 쳐내는 스타일... 대의원대회를 노동조합 앞마당에서 개최해서 자리마다 이름 다 써 붙여서 안 오면 조합원 다 볼 수 있게... 이런 식인 거지.

그런 과정에서 노개투(노동법개악저지투쟁)가 터진 거지. 노개투가 터지면서 우리는 해고자 중심으로 밖에서 순회투쟁 하고, 전해투(전국해고자 원직복직투쟁위원회) 차원에서 노개위(노사관계개혁위원회) 항의방문 하고... 현중 상황에서는 임·단협은 무쟁의로 끝났으나, 민노노총 결의에 의한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 결의 찬반투표’ 총회는 집요하게 조직했어. 정문 앞에 투표함 갖다 놓고 조직하고... 이때는 이상하게 조합원 총회 참여율이 90%가 넘어갔고, 가결율이 78%나 됐지.

거 참, 희한하더구만... 파업지침을 딱 때리니까 파업이 돼 버린 거야. 6천 명이 오토바이 끌고 밖으로 나왔고... 바로 다음날 사측이 가동하니까 1천5백 대오로 팍 줄고... 이때부터는 ‘우리는 나가지 말고 공장에서 파업을 사수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했는데, 밖에서는 ‘나와야 된다’고 그래서 두 번째 날도 나갔지. 우리는 나가고 공장은 돌아가고... 그 다음날도 최대한 모아서 나가려고 했으나 잘 모아지지 않으니까 몇 백 명 정도가 3일째 나갔고...

4일째 되던 날 밖으로 안 나가고 공장에 150대오가 남았어. 공장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자고 그래서 밤새도록 바리케이트를 설치했어. 문이 여섯 갠데 주요 도로 입구에 바리케이트를 다 설치했어. ‘다음날 아침 출근 시간에 주요 정문 앞에서 몸으로 다 막는다’ 해서 바리케이트틀 쌓고 출근로를 사람이 다 막은 거야. 인원이 많지 않잖아.

아침 일찍 이 사실을 알고 관리자들이 쫙 도열해가지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그 가운데로 집어넣는 상황이 된 것이지. 출근하는 사람들은 보니까 눈치가 있잖아. 파업 대오는 얼마 안 되지, 관리자들은 엄청나게 많지... 우리는 몸으로 틀어막다가 뚫려 버린 거야. 관리자들은 밀어 붙이고, 출근 하는 사람들은 관리자들이 보니까 출근해야겠다는 아우성... 파업지도부 보다는 이미 힘이 우위에 서버린 사측으로 기울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거지. 그 상황에서 우리는 현수막 뜯기고 드러누워서 출근대오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오토바이 꽉 밀리고 빵빵 거리고 난리치니까 다리 타 넘고 지나가는 상황이 연출됐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감을 얻은 관리자들이 ‘이 새끼, 뜯어’ 이러면서 질질 끌려오거나 허탈해서 오거나 그러면서 모여. 모이니까 집행부 포함해서 50~60명밖에 안 돼. 복면 쓰고 있었는데, 회사 관리자들이 몰려들어서 복면 벗기고 사진기 들이대면서 찍고...”

 

현장조직운동에 집중하던 99년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던 정치조직인 ‘노동자의 힘’에 참여하며 정치조직활동을 다시 이어간다.

 

“99년에 혁사노 운동은 소멸하고 있었고... 나는 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새롭게 전국적 정치조직이 만들어지고 있었어. 나는 ‘이게 전국적 투사동맹이라는 조직노선과 비슷한데 이거 개입해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했지만 그런 논의를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지. 나는 나 혼자 그런 차원에서 노힘(노동자의 힘)에 결합한 거야. 노힘 내에서는 ‘전국현장조직운동을 통한 평의회운동’ 이런 거는 관철 안 되고... 그러나 정치적으로 지향하는 권력의 문제는 같은 맥락이 있으니까 계속 하는 거지.”

 

2000년대 들어서면서 현장조직운동은 점차 활력을 잃기 시작했고, 진로를 위한 논의가 이어지지만 지루한 논쟁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현장조직운동의 정신을 평의회운동으로 이어가려고 노력해보지만 이것 역시 잘 되지 않았다.

 

“노힘을 그렇게 가게 해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잘 안 됐고, 노힘을 비판하며 현장조직운동의 정신을 발전해갈려고 하는 다른 정파들과도 같이 했으나 이미 그 토대는 무너져 버려서 정파들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상황인 것이고... 나는 내가 직접 실천하면서 그 맹아를 창출해 보려고 했으나 나에게는 공장이라는 토대가 없는 것이고, 지역에 대한 운동 마인드가 없다 보니까 그것 내가 못한 것이지. 내가 스스로 실천하면서 ‘평의회 운동의 모델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만들지 못하니까 평의회운동에 대한 주장도 겪여 버린 것이지.”

 

현장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도 민주노조를 유지하고 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2002년 당시 노조 사무국장의 비리사건으로 집행부가 중도사퇴하면서 민주노조의 명맥이 끊기게 된다. 그리고 그해 연말 새롭게 들어선 집행부에 의해 현대중공업 해고자들을 청산하기 위한 노사합의안이 통과되면서 해고자들의 농성투쟁이 이어지지만 결국 다수의 해고자들이 복직활동을 포기하고 현대중공업 활동을 정리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4명의 해고자만이 노사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조돈희는 그런 전반적 과정 속에서 현장에 대한 개입력이 점점 적어지고, 지역에서 해고자활동을 이어간다.

 

“울해협(울산지역해고자협의회)의 토대가 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현해협)인데... 현해협의 출발은 민주노조운동을 추동시키는 역할을 했어. 그리고 90년대 초반은 민주노조운동을 정착시키고, 현장과 지역에서의 비제도권 선진노동자운동이라는 점에서 출발이 다른 지역과 다른 것 같애. 그 정신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고... 최근에 새롭게 형성된 해고자 동지들은 자신의 복직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복직문제보다는 노동자들에 대한 투쟁연대인 거 같애. 그런 것이 울해협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이고...

그리고 울해협은 민주노총 지역본부와 너무 각을 세우려 하지 않고, 너무 정파적이지 않아요. 국민파가 보면 정파적일지 모르지만, 실제 울해협은 정파적이지 않거든... 양산가서 노선적 입장이 다른 데서도 연대하고... 그런데 전해투는 되게 정치주의적인 게 강했어요. 정파세력들이 전해투에 개입하면서 정파화 시키려고 했던 시도... 그것이 전해투의 정치주의적 시도로 나갔던 것이 있다면, 울산지역 해고자운동은 대중운동을 추동시키려고 했던 마인드와 투쟁하는 곳에는 해고자가 다 간다는 것이 울해협의 살아있는 정신인 거 같애.”

 

2006년 현대중공업노동자운동연대를 조직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현장 안과 밖이 함께 어우러지는 활동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사업장 민주활동가들의 연대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고, 울산지역에서는 다양한 지역연대투쟁에 결합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 정치조직운동, 현장조직운동 등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대중권력’을 지향하고 있는 조돈희는 아래로부터의 주체성과 조직운동이 결합했을 때 운동이 확산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주체성을 되게 강조해. 그런 의미에서 2007년 울산 동구지역에 있는 울산과학대 투쟁에는 각 개인들이 주체적으로 결합을 했어요. 그런데, 그것의 한계가 뭐냐 하면... 조직적 주체성은 없더라... 조직들이 주체적으로 결의해서 오는 문제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우리의 운동을 어떻게 확산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가 논의가 안 되는 거야. 그러다 보니까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은 좋은데, 조직적이라는 의미에서는 한계가 있더라 이거야. 그야말로 개별화된 자발성이지. 그래서 그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내기는 했는데... 자발적 연대운동이라는 것이 ‘내가 가서 자발적으로 하면 되지...’ 이런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해.”

 

“현장조직대표자회의로 모였던 의식적 분자들은 이 운동을 어떻게 확산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거야. 확대시키는데 실패했지만, 고민을 했다는 것이고... 이 개별적으로 모인 사람들은 운동의 방식이 달라서 그런지 몰라도, 조직적 질로서의 논의를 하지 못했다는 거야. 이 사람들이 모여서 ‘이 투쟁이 이기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자’하는 논의는 했으 돼, 이들이 모인 운동적 의미를 심화시키지 못했다는 거야. 난 그래서 조직적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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