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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금호 이야기

대구라는 보수적 지역 속에서 장애인으로서의 힘겨움을 안고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권리를 투쟁 속에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장애인운동을 벌이기 척박한 지형에서 벌여왔던 치열한 모색은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만들어내고 있다.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노금호 집행위원장을 만나 힘겨우면서도 활기 넘치는 얘기를 들었다.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난 노금호는 4살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병원 치료를 계속 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가운데 7살 때 루게릭(근육무력증, 근육이 점차적으로 퇴화되는 근육장애) 진단을 받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는 신앙의 힘으로 고쳐보겠다고 경기도 포천에 있는 기도원으로 노금호를 보내게 된다.

 

“기도원에 있을 때는 신앙의 힘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초기 진단을 받았을 때는 ‘근육이 퇴화되는 속도가 빠를 수 있기 때문에 스무 살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그랬는데... 그거와는 다르게 기도원에서 6년 정도를 생활하면서 비장애인들과 성장속도가 다르지 않았고, 발육정도는 비장애인보다 더 좋은 편이었어요.

기도원이라고 하면 수용시설이라고 그래서 이미지가 좀 그런데 어린 시절이 불행하지 않았거든요. 그 기도원이 제가 나올 때쯤에 비리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어요. 그리고 또래집단이랑 같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서적인 면이나 이런 게 오히려 좋았어요.

거기서 일반학교를 다녔어요. 학교 내에서는 기도원 애들이 일종의 따돌림이나 이런 게 있기는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제외됐어요. 그때 당시 공부를 좀 잘했었고, 발육상태가 비장애인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었기 때문에... 기도원이라는 이미지는 그랬지만, 또래친구들이랑 그런 문제들은 없었거든요.”

 

노금호가 기도원에 들어가던 해 하나 뿐인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 잠시 포항으로 옮겨왔던 적을 제외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기도원 생활을 이어간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정서적으로 예민한 사춘기가 시작됐고, 기도원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빠져나가는 등 어수선한 상황에서 노금호는 다시 포항으로 돌아오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소위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잠시 방황을 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말부터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는 버릇이 생기다 보니까 그때부터 갑자기 몸의 퇴화가 심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좌절을 좀 했죠. 아무리 그래도 공부한다고 앉았는데 그렇게 급격하게 안 좋아질 줄 몰랐죠.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 어쨌든 중3때 대게가 공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어쨌든 점수 잘 받아서 좋은 고등학교 가야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고... 그러다보니까 중3때는 입시준비 때문에 그럭저럭 지냈죠. 그때 몸이 힘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웬만한 건 다했기 때문에... 자전거 타기 좀 힘들어지고, 장거리 걷는 게 좀 힘들어지고, 이런 거였지 아예 안 되고 그런 건 아니었거든요. 제가 반이 2층이었는데도 계단 올라가기 힘들긴 힘들었지만 많이 힘들지 않았고...

그래서 어쨌든 입시를 치고 고등학교를 갔는데 그때부터가 문제였죠. 고등학교 들어오니까 그때 4층이었어요. 몸도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공부도 해야 하고... 포항은 그때 입시 이런 게 굉장히 심했거든요. 그런 경쟁의식 플러스해서... 예전에 중학교 때 까분다고 때리고 그랬던 애들이 고등학교 오니까 자기도 덩치 커지고 하니까 도전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성격도 계속 거칠어지고... 몸으로 안 되니까 입이 거칠어지고... 그런 갈등이나 고민들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러면서 1학년 때 자살하려고 약도 먹고...”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방황을 거치면서 노금호는 자기 몸 상태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런 조건에서 비장애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에 매우 열성적으로 달라붙게 된다.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지만 수능에서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시험을 망치고 만다. 원하던 대학으로의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노금호는 부모님의 권유와 장애인이라는 현실 속에서 대구대 특수교육과를 지원해 입학하게 된다. 대구대는 특수교육이나 장애인 관련한 정책으로 잘 알려져 있었던 대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학 후 휠체어를 타기 시작한 노금호에게 몸으로 접해본 대학의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강의동 하나는 엘리베이터도 없고 경사로도 없었어요. 접근이 불가능해요. 거기서 교양과목은 강의를 제일 많이 하거든요. 실제로는 대구대학교가 특수교육과나 재활과학대나 사회복지 이런 걸로 먹고 사는데... 대명동 대구대는 투자를 별로 안 해요.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걸었어요. 걷기도 하고 친구들 도움도 조금 받고...”

 

2001년 대학에 들어가서 말 그대로 신나게 놀고 있던 그 즈음은 에바다 학교 비리척결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대구대 운동권 산실이 사범대였죠. 그 안에서도 특수교육과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들어올 때쯤에는 거의 다 없어졌어요. 그렇긴 하지만 특수교육과라고 하는 특수한 그런 상황들 때문에 장애인운동과 연결은 있어왔고... 그나마 저희 때는 그것도 끊겨가던 시점이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에바다 투쟁이나 이런 관련된 내용들을 새내기들에게 전달하고 했었죠. 그때 처음으로 에바다 투쟁 비디오를 봤죠. 그때 그 비디오를 봤을 때는 운동적인 고민보다는 ‘장애인들 인생이 왜 이럴까’ 그런 것이 있었고...”

 

대학 1학년 여름방학 중인 2001년 여름 전국특수교육과연합회 수련회 참가하게 된 노금호는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여름방학 때 전국특수교육과연합회에서 수련회를 하게 됐는데 전국에서 400명 가까이가 모이게 됐어요. 거기에 프로그램이 강의도 있고, 공동체 프로그램도 있고... 흔히 운동권들이 하는 그런 것들을 하더라고요.

그때 운동에 대한 고민을 처음으로 하게 되는 계기가 됐던 사람을 만나게 되죠. 제가 기도원 생활도 하고 그러면서 동정의 대상이었던 뇌성마비... 제가 뇌성마비분들 얕잡아보고 하기도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400명 되는 앞에서 강의를 하는 거예요. 강의를 하는 게 어눌하고 그런 게 아니라 내용도 정당하고... 사람들 끌어당기고 하는 거 보면서 그때 뭔가 홀린 듯한 느낌이었죠. 그리고 공동체 활동이나 이런 것도 하고, 에바다학교 권오일 선생님이나 이런 분도 그 때 처음 알게 되고... 그러면서 장애인운동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알게 됐죠. 그러면서 좋게 생각했죠.

그리고 저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라 교회 다니고 그러면서 뭔가 정제해야 되고 그런 금욕주의 같은 것들이 강했었는데... 전특연 수련회에서 술도 처음 배우면서 뭔가 해방감이랄까 그런 걸 많이 느꼈죠. 운동적인 건 아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인간상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들이 돼는... 개인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슬프거나 그래도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물론 분노에 대한 것은 거칠게 나왔지만, 웬만하면 가리고 그랬었는데... 1학년 여름방학 때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억눌렸던 것을 풀어내는 것을 경험했죠.”

 

대구 대명동과 경북 경산에 각각 캠퍼스가 있었던 대구는 2001년 하반기 대명동 캠퍼스를 경산으로 옮기게 된다. 그러면서 노금호도 경산으로 옮겨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 대명동과 달리 캠퍼스도 넓고 장애인들이 많았던 경산에서 너무도 열악한 교육환경을 접하면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경산으로 옮겨 기숙사에서 처음 만났던 형 중의 한 명이 정말 중증 뇌성마비장애인이었는데... 대구대가 그나마 장애인들이 학업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장애인 룸메이트를 비장애인학생을 배치하여 장애인학생들의 생활을 도와주게 했는데... 이것이 학내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대다수 장애인학생들과 같은 방을 배정받은 학생들은 특히 룸메이트가 중증장애인일 경우 룸메이트를 ‘못 하겠다’하고 나가버리곤 했어요. 그 형 도 룸메이트가 같이 생활하기 싫다고 나가버린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돼서 당황스럽더라고요. 장애인한테 잘 한다는 대학인줄 알았는데...아무런 지원제도도 없고, 또한 문제발생시 장애학생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 등... 형들이 학교 다니면서 힘들었던 얘기 듣게 되고... 그 사람들 모습 보니까 안타깝더라고요.

막상 학교 다녀보니까 휠체어 타고 다니는데 많이 힘들더라고요. 동아리방에 엘리베이터가 없고 그래서 동아리를 들라고 그래도 안 되기도 하고... 각 건물마다 편의시설 안 돼 있는 것도 많이 있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편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같은 과 동기이자 룸메이트인 동기 형과 문제의식을 같이 갖게 되고 둘이서 토론을 많이 했죠. ‘이게 뭐냐. 특수교육을 대표하는 학교가 도대체 뭐 이 모양이냐’ 그러면서 ‘안 되겠다. 학교에 문제제기라도 해보자’ 했어요. 그런데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래도 형이 ‘뭐라도 하자’ 그래서... 둘이서 나름의 문제의식을 담은 내용의 전단지를 만들어서 학교에 뿌렸죠.

처음에는 매일 했는데 일주일 정도 하니까 너무 빡센 거예요. 사비 털어서 하니까 돈도 많이 들고... 마스터 이런 게 없으니까 복사를 해야 해요. 장당 40원 하니까, 1주일 해보니까 둘이 개인 당 5만원 넘게 나가는 거예요. ‘야, 이거 감당 안 된다’ 그래서 ‘1주일에 한 번 하자’ 그랬는데 1주일에 한 번도 빡센 거예요. 그리고 매주 내용을 생산한다는 거 자체가 힘든 거잖아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자’ 그러면서 정착이 됐죠. 내용도 서로 토론하고 하면서 만들고...”

 

그런 활동이 눈에 띄어 한 선배가 장애인인권동아리를 만들자고 제안해왔고 룸메이트 형과 함께 셋이서 동아리를 만들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모집 공고를 붙이니 10명의 장애인들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중심으로 동아리 활동이 시작됐다.

 

“동아리 활동은 제 문제의식 때문에 했던 거지...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과에서 술 먹고 친구들하고 노는 게 더 좋았었고...

장애인 학생들 모여서 하다보니까 힘들었던 게 많았어요. 우선 구성원 대다수가 장애인이다 보니 같이 모여서 술 한잔하기 위해 술집에 들어가기도 힘들었고, 모임을 하기 위한 장소 물색하는 등 물리적 환경이 문제가 있었고, 또 그 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대다수 구성원들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요. 6시에 모이자 그러면 8시에 모이고... 남들 다 기다리는데 밥 먹고 와버리고... 몇 번 약속을 지키자고 결의했는데 어기는 건 다반사고... 뭔 사업을 하자고 했는데, 하는 건 나하고 몇 명 안 되는 거예요. 좀 황당했죠. 그리고 초기에 함께 동아리를 만들어가자고 했던 선배와 동기 형은 개별적인 사정으로 동아리 일에 소원하고, 그래서 거의 저 혼자 동아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 했죠. 그러면서 ‘하기 싫다’ 이런 생각도 있었어요. 2학년 1학기 때는 형식적으로 많이 했죠.”

 

2학년 2학기가 되면서 동아리다운 체계를 갖추자고 논의한 결과 동아리 회장으로 선출됐고, 그 후 우선적으로 동아리 방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열성적인 노력의 결과 다음해인 2003년에는 안정적인 동아리 공간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노금호의 열정과 달리 동아리 사람들은 좀처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면서 정말 힘들었죠. ‘왜 이 사람들이 이럴까? 나랑 별로 다른 사람도 아닐낀데’ 그런 의문점이 들었죠. 그러다가 함께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누나한데, 그 누나도 장애인인데, ‘왜 그럴까’ 물어보고... 그러면서 돌이켜보니 그 사람들하고는 내 의무감 때문에 ‘하자’라고만 하면서 막 땡기려고만 했었지,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의 상황이나 이런 걸 들으려고 하지 않았죠.

물어보니까... 장애인들이 살아온 삶이 경쟁사회나 이런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또한 처음부터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지만 계속적으로 동정과 시해 그리고 배제로 인해서 자신의 결정권이 박탈당하면서 체내화 된 일상적인 무기력함, 그리고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동기부여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스스로 동기부여 해서 뭔가 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고...

‘그런 것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게 얘기 되면서 ‘아, 그렇구나’ 하는 걸 내가 알게 됐죠. 그러면서 ‘내가 너무 속도 위주로 해왔구나. 그런 거보다는 이들에게 동기부여하고 그들의 결정들이 비록 어설프더라도 존중하면서 동아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렇게 장애인 대중을 상대로 한 활동방식에서 우월감 같은 것을 걷어낸 후 동아리 활동은 좀 더 탄력을 받게 된다. 3학년이 돼서는 장애인들로만 구성된 활동이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비장애인 후배들을 동아리로 조직하면서 동아리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장애인운동에 대한 고민도 많아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학생운동 하는 이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학생운동을 접하면서 한 선배의 제안으로 사범대 학생회선거를 같이 준비하게 됐고, 2003년 연말 학생회 선거에서 당선이 되면서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된다.

 

“학생회에 들어갔는데, 초기에 같이 준비하는 과정이랑 실제로 실현하는 과정이 다르더라고요. 한총련 하방간부가 내려오고, 하방간부가 계속적으로 사업을 제안하는 거예요. 지역의 일정을 막 얘기해 주는 거예요. 투쟁일정 막 얘기해주고... 그런데 우리는 학교 안에 학생회 일정이 있고, 학내 문제를 해결하는 게 1차 과제인데... 그리고 사회운동이나 이런데 연계도 별로 없는 상황이고... 이거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모든 게 집중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2학년이었던 2002년 평택에 있는 에바다학교로 직접 가서 투쟁에 결합하기도 하고, 장애인대학생 교육권 확보를 위한 무장애대학교 만들기 등 전국적인 네트워크 활동, 2003년 연말 학내에서 발생한 장애인성폭력사건해결을 위한 활동 등을 하면서 장애인운동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장애인성폭력사건에 해결해 가면서 대학측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투쟁을 경험하면서 투쟁에 대한 경험도 쌓기 시작한다.

 

“박경석 동지를 알게 됐어요. 장애학생 성폭력 대응체 하면서 겨울방학에 전국의 대학교 돌고 장애인운동 하는 데도 돌아다녔거든요. 그렇게 인맥을 알게 되면서... 학생회 때 4월 20일 장애인의 날 관련 행사를 하는데 경석이형 강사로 부르고... 경석이형한테 제안을 했죠. ‘내가 장애운동을 하고 싶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제대로 배우고 싶다. 이동권연대에 사회복지실습을 하면 어떻겠느냐’ 그러니까 ‘그렇다면 해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여름방학 되자마자 무작정 짐 싸들고 서울로 올라갔죠.

처음에 정립회관에 가게 됐죠. 한창 투쟁 중이었어요. 처음에 정립회관에 갔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생짜가 있으니까 별로 관심도 안 가져 주시고 뻘쭘 하더라고요. 그때 교육권연대가 국가인권위에서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활동경력도 있고 해서 교육권 연대 투쟁에 결합해서 투쟁을 같이 했죠. 그러면서 교육권 투쟁이나 부모운동에 대한 것을 알게 됐고...

교육권 투쟁 끝나기 전까지는 정립투쟁이 있을 때 정립회관에 갔었는데 정립회관 투쟁을 하면서 충격이었죠. 제가 3학년 때 대구에 DPI(장애인연맹)가 만들어졌거든요. 그때 ‘DPI가 세계적인 조직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체계와 장애운동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알고 있었고, 중앙에서 내리꽂는 방식이 아니라 각 지역의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DPI 잘 모르니까 그리고 선배들이 같이 하자고 하니 지역DPI 발기에 같이 했죠. 그런데 그 DPI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서울의 조직들이 정립회관 투쟁에서는 완전히 개판인 거예요. 완전 나쁜 놈들인 거예요. 그러면서 완전 충격이었죠. 용역깡패들 투입시켜서 노조원들 때려 패고... 저도 같이 하다가 두들겨 맞고... 분노가 절정에 이르렀죠.

어쨌든 서울 실습기간 중에 교육권 투쟁과 정립투쟁을 같이 결합하면서 현재도 열심히 장애인운동 하는 사람들 다 만나게 됐죠. 만나면서 운동일반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게 됐고, 장판(장애인운동판)의 흐름에 대한 것도 많이 알게 됐고...

그 투쟁을 하다가 방학이 다 지나가서 다시 대구에 내려왔어요. 나름대로 운동에 대한 원칙이나 이런 것을 고민하면서 내려왔죠.”

 

졸업을 앞두고 본격적인 장애인운동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조직이었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역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2004년에 DPI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게 됐고... 그리고 2004년에 박경석 동지나 이동권연대를 필두로 해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체인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을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고, 그 내용까지 제가 받고 내려온 거죠. 처음에는 제안 받았던 것은 ‘장애학생들을 조직해 달라’라는 것예요. ‘그건 좀 아니다. 내가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무슨 학생운동이냐’ 그러면서 있었어요.

지역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막상 지역에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 장애인교육권연대 상근을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는데, 그것도 좀 고민스러웠었고... 그러고 있는데 지역의 한 동지가 저한테 와서 ‘전장연 지역조직을 만들려고 한다. 니가 같이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의 원래 고민이 지역운동 하고 싶었고, 지역에 전장연 깃발도 꽂고 싶기도 했었고...

특히 정립회관 투쟁에 대해 대구DPI가 취하는 태도를 보면서 지역에서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함께 장애운동을 했던 선배들의 모습에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장연 활동을 하게 된 것은 대구DPI가 정립회관 투쟁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장애인 동지들을 ‘노조의 사주 받은 사람’들로 치부하고, ‘장애인이 운영하는 복지관은 운영에 있어 비민주적인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라는 논리를 옹호할 뿐 아니라, 그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를 생산하는 데 앞장서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결국 장애는 사회의 모순으로 인해서 기인된 것인데 사회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데 장애인의 삶의 현실이 해결될 건가... 그런 고민들이 모아지면서 올바른 장애운동이 지역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한번 용기내서 내가 해보자 라고 생각했고, 대구지역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했죠.”

 

그러나 장애인이 사회로 나온다는 것은 생각 외로 많은 현실적 고민이 필요하다. 특히 장애인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주거, 이동, 생계 등의 문제는 매우 힘겨운 현실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금호는 지역 장애인활동을 제안했던 동지에게 주거공간의 마련과 활동 및 생활을 지원해줄 수 있는 도우미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고 1년을 더 학교에 남게 된다. 그러면서 학교 후배들을 지원하고 졸업 이후 지역 장애인활동을 같이할 동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졸업 시점이 다가올 즈음 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한 조건을 집안의 도움 없이 마련하는 것이 힘들어 졌다. 어쩔 수 없이 집안의 도움으로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하고 장애인 활동을 같이하기로 한 동지와 함께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활동 초기에 비장애인 활동가가 같이 생활하고 있었지만, 생활보조는 물론이고 지역활동을 위한 진척은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 사람들은 나만큼 절박하지 않구나”라고 느낀 노금호는 직접 지역 장애인단체들을 만나면서 지역 장애인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한다.

세 명의 동지가 모여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열고 장애인지역공동체(장지공), 근육장애인협회, 밝은내일회, 대구DPI 등의 장애인단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2006년 4월 20일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 투쟁을 조직한다.

하지만 장애인운동단체로서의 조직과 투쟁경험이 없는 이들 단체들은 조직력과 실천력을 만들어내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해 4·20투쟁은 요구안을 마련하는 것 이상의 투쟁을 조직하지 못한다.

그 즈음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보조인 제도화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흐름을 이어 대구에서도 그 투쟁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역 간담회를 열어 지역차원의 활동보조인제도화투쟁을 결의하게 된다. 2006년 5월 18일 대구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장애인들의 대중투쟁이 벌어진다.

 

“그때 서울 동지들 연락해서 ‘함께 이 투쟁을 적극 지원해야한다’ 그래서 서울에서 많이 왔어요. 버스와 봉고로 2~3대 왔거든요. 그리고 대구대학교 후배들 50명을 쫙 끌어당겼죠. 시청이 놀랬던 거죠. 장애인들 투쟁에서 이렇게 조직화된 투쟁은 처음이니까. 그리고 밝은내일회, 근육장애인협회, 장지공도 다 놀란 거예요. 집회라는 것을 그렇게 갖춰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투쟁 전 회의할 때 조직체계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를 해도 제대로 투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 집행국의 필요성도 모르고 그러다보니 안 갖춰졌어요. 그런데 본격적으로 투쟁에 돌입을 하자, 이 단체들이 조직체계를 정비하지 않으면 힘들겠구나 하는 의식들을 보기에 ‘이때 해야 되겠다’ 싶어서 당일 판 다 깔고 회의할 때 집행체계를 다 갖췄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투쟁이 시작됐죠.

처음 투쟁 돌입할 때, 시청에서는 때 쓰면 뭔가 던져주고 정리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던 거예요. 처음에는 고압적인 자세로 오다가, 그 다음에는 좀 달래다가,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쌩까는 거예요. 그러면서 과격한 투쟁을 좀 박았죠.

그 투쟁 시작할 때 장애인부모회가 결합을 했어요. 부모회 회장님도 의지가 있었어요. 당장은 제대로 결합이 안 됐고... 그때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대구시장 후보가 부모회 요구안에 대해 성의 없이 답을 했어요. 그런 거와 더불어서 비하발언을 하고, 그러면서 갑자기 부모회도 불이 붙고... 피크가 5월 31일 선거 전후로 해서 김범일 시장후보 멱살도 잡고 그랬어요. 선거캠프도 작살내고... 한나라당사 있는 수성구 16차선을 다 막고 투쟁도 했어요. 투쟁대오가 부모회가 좀 됐고, 학생들도 좀 붙었고, 우리쪽도 한 번 모이면 30명 정도는 됐으니까... 그러니까 한나라당 긴장하고 난리가 났었죠.

그렇게 투쟁하고 나서 분위기가 우리한테 좋아졌어요. 그때쯤에 갑자기 밝은내일회가 투쟁요구안을 번복하고 무작정 자기네 센터를 지원하라는 요구안을 넣어야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이거 안 되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얼마나 황당해요. 과정상만 보더라도 투쟁 시작부터 요구안을 만든 것도 아니고, 투쟁이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자기단체 이권을 요구하는 것이... 또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대표자회의나 전체회의를 하면서 ‘이것은 요구의 정당성을 떠나서 과정상 현재로는 적절하지 않기에 이번 투쟁에는 없던 것으로 한다’고 밝은내일회를 제외하고 모든 대표자들이 의견은 모았죠. 그러자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현재 투쟁에서 빠지겠다고 하고...

더욱 황당한 것은 전장연에서 서울 활동가 한 명을 대구지역 투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파견했는데, 같이 고생한 동지를 자신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온갖 망언과 폭행 등... 그러니까 “서울사람은 서울 가라, 대구지역 투쟁이니 대구사람들끼리 투쟁해야 된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들과, 그리고 그 동지의 얼굴에 음료수를 뿌리는 등의 행태들을 보이더군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대에서 나가더군요...

그런데 충격적인 사건은 나름 운동의 방향성은 다르지만 합리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근장협과 대구DPI가 후발로 연대에서 자진탈퇴하고 밝은내일회와 함께 발을 맞춰 가더라구요..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내용이 ‘서울 사람은 서울 가라. 전장연은 서울 가라. 노금호는 각성하고 퇴진해라’ 이러는 거예요. 그리고 불을 지른다느니 이런 얘기도 있었어요.

1~2주 정도는 긴장의 연속이었죠. 참 어이가 없었죠. 아무튼 그러면서 우리투쟁의 정당성은 더욱 높아졌고, 연대체 차원에서는 결속이 높아져 더욱 강도 높은 투쟁을 전개해 갔죠.. 그러나 연대체가 분리된 소식을 접한 대구시는 태도는 겉으로는 중립적인 태도인 척하면서 시간을 계속 끌었죠. 그러다가 대구 투쟁보다는 좀 늦게 시작한 인천에서 투쟁의 성과물이 나오고... 전국에서 집중해서 투쟁을 모아내면서 결국 6월 29일 43일의 투쟁의 종지부를 찍는 성과물을 얻었죠.”

 

이런 투쟁을 통해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는 전장연 지역조직으로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함께했던 장애인부모회,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인지역공동체, 사회당 대구시당, 민주노동당 대구시당, 대구인권운동연대, 대학생사람연대, 대구대학교장애인학생교육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대/장/교/연) 등을 중심으로 대구장차연 조직이 운영된다.

이런 조직적 기반을 바탕으로 2007년 들어서 다시 활동보조인서비스제도화 투쟁과 장애인이동권 투쟁을 중심으로 투쟁을 조직한다.

 

이동권 관련된 투쟁은 이동보장법이 재정되면서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시행계획들이 건교부에서 내려왔어요. 문제는 지자체가 건교부 시행계획을 거의 다 받아 안지 않는 거예요. 대구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받아 안게 하기 위한 투쟁을 했었고, 활동보조 관련된 투쟁은 2006년 피와 눈물로 만들어낸 투쟁의 성과가 보건복지부 지침으로 인해서 망가지는 것을 막아내는 투쟁이었죠.

2007년 투쟁은 2006년과 다르게 경찰이고 시청이고 강경대응 하는 거예요. 2006년 투쟁은 시청에서 하는데 경찰들이 모르니까 어떻게 하질 못하는 거예요. 2007년에는 천막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안 되는 거예요. 2006년처럼 노숙투쟁, 천막투쟁 하려고 그랬는데 안 돼서 노숙을 했는데 노숙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게릴라식 투쟁을 많이 했죠. 2006년에는 대규모로 해서 박는 투쟁이 중심이었다면, 2007년에는 투쟁전술 자체를 다변화시켜서 민원청원투쟁이나 기습으로 시청에 들어가서 시청 점거하는 투쟁이나 이런 것들을 해서 6월 정도에 또 다시 성과를 얻어냈죠. 활동보조시간 확대와 서울 다음으로 ‘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에 관한 조례안’도 만들어냈고...”

 

어느 정도 조직력도 갖춘 대구 장차연은 당사자 투쟁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타 지역이나 다른 부분의 현안에도 적극 연대를 했다.

 

“내부적으로는 내부 결속력을 완결성 있게 조직되고 있고, 이 힘을 가지고 부산이나 다른 지역투쟁에 같이 결합하고... 각 지역에 지원투쟁을 많이 했죠. 대구하면 전장연 내에서는 조직력이 알려졌죠.

또 2007년에 주요했던 거는... 전장연의 기초가 사회적 모순의 문제를 같이 대응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역의 투쟁 사안들..노숙인 쉼터 비리사건 등을 같이 대응했어요. 그것도 적극적으로 지역 장차연 조직들이 같이 결합했고... 노숙인 투쟁은 되게 열악한 거잖아요. 그래서 구청투쟁 할 때 저희가 다 결합해서 투쟁 박아주고 이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장차연 조직이 없으면 시민사회 관련한 투쟁을 못 한다’ 할 정도로 결합을 많이 했죠. 그러면서 지역 내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어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투쟁 속에서 조직이 만들어지고 조직력을 키워오는 과정에서 장애인 스스로의 주체화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하고 있다.

 

“장애인분들이 강의식 교육이나 문서를 바라보고 세미나 하는 형식은 잘 안 되기 때문에 우선 투쟁과정에서 공유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는 게 1차입니다. ‘그들의 결정권이나 이런 걸 존중해서 최대한 공유한다’ ‘투쟁 과정에서 교육하자’는 게 기본이었고...

그것만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어쨌든 강좌사업을 진행했어요. 2008년 1월에 장애해방학교라는 것을 했고... 괜찮게 조직됐고요. 각 단위마다 열약하지만 세미나 구조가 갖춰져 있고요.

그리고 회의가 주요한 세미나 공간인거 같아요. 회의 때 요구안 얘기하다보면 관련된 얘기 안 할 수 없고, 그래서 회의시간에 웬만한 거는 교육되는 것도 있었고요.”

 

대구지역에서 어느 정도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곳은 민주노총과 전장연 정도이다. 조직력과 역사적 경험의 차이도 크지만 이 두 조직 간의 연대와 교류는 아직 많이 미약하다.

 

“민주노총은 저희가 투쟁하면 간부 중심으로 결합하는 거고요. 2007년 투쟁하면서 성서노동조합 이주노동자쪽을 알게 됐고, 그러면서 그쪽이랑 소통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주노동자분들 같은 경우는 조직적으로 결합하기에 힘든 부분이 있지만... 저희가 투쟁할 때도 30명 정도가 지원하러 오신 적이 있었고, 그때 지원금도 주셨고요. 저희도 마찬가지로 지역에 이주노동자 관련한 투쟁이나 공대위나 그런데 참여해서 같이 투쟁을 지원하고 있어요. 약자들 간의 관계들이 있는 거 같아요.

공공노조나 공무원노조 같은 데가 있기는 한데 아직까지는 긴밀하게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고요... 지역에 청암노조라서 해서 사회복지시설 관련된 노동조합은 저희가 투쟁할 때 많이 지원했었거든요. 그래서 4·20투쟁 때도 조직적으로 많이 결합해줬고...”

 

의욕적으로 지역에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해보겠다고 나와 투쟁을 벌인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성과들이 쌓기고 있다. 그러면서 지역 활동에 대한 나름대로의 구상이 넓어지고 있다.

 

“작년까지는 우리 조직이 지역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냈던 과정이었고... 조직이라는 게 일정정도 성장하면 관성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한 투쟁의 과제도 만들어내야 되고... 그전에는 양을 늘리는 사업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내부 질적인 과제, 교육사업도 제대로 다시 진행하고 싶고...

아직까지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장애인 단체들도 있습니다. 노동단체들도 조직을 해야 될 거 같고... 장차연이 지역에서 기반을 갖고 조직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1차적인 목표고요...

개별 단체들은 개별 단체대로 아직까지도 재정적인 거나 이런 게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완성시키기 위한 활동들을 주요하게 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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