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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인권운동연대 서창호 이야기

좌파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사회권을 중심으로 한 인권운동 벌인다는 것은 소위 구좌파운동과 신좌파운동을 넘나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역에서 대중과 호흡하고 대중이 주체화되는 운동을 끝임 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가 있다. 대구인권운동연대 서창호 상임활동가를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서창호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89년 전교조의 탄생이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고등학생운동을 접하게 된다.

 

“제가 고등학교 때 문학동아리에 있었어요. 거기에 지도교사가 전교조 선생님이었어요. 그 전교조 선생님이 가을 때쯤에 해직이 되셨어요. 협성고등학교인데... 거기는 고등학교 중학교 합치면 4개~5개가 모여 있는 곳이거든요. 전교조 문제 관련해서 학생회 차원에서 집회를 하기도 하고 많이 시끄러웠어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잘 모르고... 그랬는데 선생님 해직되고 나서 만나기도 하고 그러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거는 잘못됐다’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했던 거고...

그러면서 지역 청소년동아리도 가입하고, 거기도 왔다 갔다 하다가... 대학교 선배들이 청소년들을 상대로 하는 곳이었는데... 저는 깊숙이 관계는 안했고 왔다 갔다 하는 정도 수준이었는데...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는 밑바탕이 됐던 거죠.”

 

동아리 활동을 중심으로 하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회 활동을 하는 선배들과 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운동의 깊숙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92년 계명대에 입학하면서 운동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보아온 학생운동이 ‘자족적이다’라는 느낌과 학생운동을 넘어서 사회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93년부터 민주시민운동협의회에 가입해서 활동하게 된다.

 

“30대부터 시작해서 20대 학생도 있기도 하고, 5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민주시민학교라고 해서 1년에 두 차례 교육을 하고, 회원 가입을 해서, 지역 활동을 하고, 내부 풍물교실도 하고... 특정하게 자기 영역적인 활동 이런 건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저도 민주시민학교 교육을 받고, 나이도 어리고 열심히 하니까 자연스럽게 간사 일을 하게 됐죠.”

 

당시 좌파적 성향의 활동을 벌였던 민주시민운동협의회에는 정치조직 활동가들도 다수가 참여를 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자연스럽게 민중정치연합(민정련) 회원들과 교류하면서 민정련 활동을 하게 된다. 민정련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다양한 투쟁과 정치활동을 경험하게 되고, 조직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논쟁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중 96년 민정련이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와 통합하면서 내부 논쟁이 격화됐고, 서창호는 그 통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배우는 과정이었는데.. 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통상적으로 학생운동하게 되면 선배가 누구냐에 따라 자기가 규정될 수밖에 없고 거기서 활동의 전망을 만들어 나가기도 하는데... 저는 오히려 제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있어서는 지금 후회하지 않고, 지금 되돌아보면 제가 선택은 잘했다고 생각은 하는데...

아쉬운 것은, 제가 나이가 젊은 가운데 경험을 많이 했는데, 그 경험이라는 것이 내가 의도하지 않고 고공에서 객관적으로 놓여 있는 상황에서 내가 끼어들어가는... 결정적인 내 판단이기는 하였지만, 이것이 내가 스스로 기능하고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기 보다는 선택지로만 있었다는 거죠. 이런 점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어요.

그 당시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도 지역운동 속에 있기 때문에 지금도 만나고 그러는데... 저한테 경험적으로도 그렇지만 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고... 많은 부분이 저한테는 보이지 않는 자산으로 놓여 졌어요.”

 

민정련이 통합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면서 서창호는 정치운동과 다로 거리를 두고 있었던 ‘민주노동자의 집’을 통해서 새로운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민주노동자의 집 들어갔을 때 밑으로부터 박박 기는 이런 과정이었는데... 민주노동자의 집 활동하면서 ‘민정련 회원활동 했다’ 그러면 먹물이라든지 그런 이미지 때문에 별로 좋게 안 봐요. 저는 그런 먹물 기운을 빼는 요구를 받기도 했었죠. 어깨 힘도 빼고... 저로서는 찬물과 뜨거운 물에 오고가는 이런 과정 속에서 회원활동 하고 현장에 내려가고... 3년 동안 산업특례를 하는데, 그 당시에 전지협(전국지하철협의회) 투쟁하고 그랬었잖아요. 속을 불끈불끈 거리고, 현장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그러면서 제가 차분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었어요. 그런 부분들 속에서 대중조직이라는 것을 많이 배운 거 같아요. 현장노동자들의 정서라는 것과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놓여 져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도...”

 

98년 ‘민주노동자의 집’은 ‘대구노동교육협회’라는 단체와 현장연대로 통합을 하게 된다.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에 집중했던 현장연대에서 서창호는 비정규직사업 담당을 맡아 활동을 하게 된다. 특히, 2001년과 2002년에는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의 투쟁에 적극 결합하면서 구속이 되기도 했다.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한 지역노동단체로서의 현장연대는 2002년부터 조직위상과 전망에 대한 내부 논쟁이 불붙게 된다.

 

“현장연대가 기본적 문제의식이 노동자들이 업종별로 단사별로 투쟁하는데 직접 결합하는 일상적 노동단체의 틀이었거든요. 나름대로 열심히는 했었습니다. 대구는 상대적으로 규모 있는 사업장은 적고, 상대적으로 성서공단에 있는 100명 미만의 중소·영세사업장 사업장이 많습니다. 성서공단에서 100명이라카면 규모가 큰 겁니다. 여러 가지 투쟁도 많이 하고... 국제정공이라든지... 동원금속이라든지... 지원도 하고 그랬었는데...

현장연대가 ‘노동자에 연대하고 노동자의 미래를 열어간다’는 단체였는데... 신자유주의 국면 속에서 노동단체로서의 자기위상일 따름이지 신자유주의 반대전선을 하는데 있어서 전면적이지 못한 점이 논란됐어요. 노동자운동의 한 축으로서는 기능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양태가 총체적 사회문제로 드러나는데 있어서 자기 역할이라는 것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들... 총연맹이 산업별로 재편되면서 노동단체로서 가지는 자기 위상이 애매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있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도 좌파라고 하면서 건강하다고 하지만, 스스로 줄 세우기식에 길들여져 있는 관성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들이 많았다는 거죠. 그러면서 현장연대가 현장연대 회원이나 현장연대 상근자만의 사업이 아니고 지역 내에서 여성, 환경, 인권, 비정규직노동 이런 다양한 영역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서 자기 역할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논쟁을 내부적으로 1년 반 이상 하게 됐죠.”

 

그런 논쟁 속에 현장연대는 해산을 하고 지역의 여러 활동가들과 함께 민중행동을 조직하게 된다.

 

“2003년 현장연대를 정리하고 민중행동으로 가는 과정에서 현장연대 상근자 8명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된 거죠. 민중행동의 상근자로 한 명 가기도 하고, 성서공단 노동조합으로 세 명이 가고, ‘노동자의 눈’에 두 분이 활동을 하고, 저는 비정규직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건설노조에 들어가고, 한 명은 서울 활동으로 옮겨가고...

중소영세사업장에 노동조합을 만들기는 쉬워도 지키는 게 쉽지 않은 거죠. 투쟁 자체가 패배적으로 가다보니까 단위 사업장뿐만 아니라 성서공단 내에 있는 현장에 엄청 영향이 미쳐요. 노동조합 안 만들락하니까... 성서공단이 점점 커질 거라는 건 자명한 건데... 성서공단을 둘러싼 현장노동자들이 정규직이지만 50인 미만 영세사업장이라서 비정규직이랑 똑 같죠. 그런 점에서 잔업, 야간, 특근 이런 거 밥 먹듯이 하는데 해봐야 2교대 해도 150만원도 안돼요. 자신의 노동조건을 어떻게 확장하고, 기본적인 삶의 문제에 있어서 이분들에게 자신의 권리의식을 어떻게 스스로 제기할거냐. 그런데 있어서 단지 노동조합 조직하기 위해서 한 두 명 투입해서 현장 조직하고 이러는 거는 너무 원칙적이다. 성서공단을 두고 성서공단의 노동자를 직접 조직하고, 끝임 없이 사업을 하고, 교육을 하고, 선전을 하고... 성서공단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과 성서지역의 주민들과 같이 소통하면서 지역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이 필요하겠다 해서 성서공단 노동조합을 만들었죠.

그와 별도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해서 교육과 영상활동을 하는 ‘노동자의 눈’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성서FM방송국이 된 거죠.”

 

본격적인 비정규직운동을 하기 위해 건설노조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많은 한계를 경험하게 됐다.

 

“건설현장이 원시적이었거든요. 많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파업이란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소속감도 별로 없고, 조합원 규모도 미미하고, 기본적으로 임금체불도 상시적으로 있고... 이런 구조 속에서 조합원들 만나고, 참쯤에 선전물이나 포스터도 돌리고, 같이 밥도 먹고 그랬는데... 그 당시 대구지역에 건설현장이 50군데였어요. 50군데 현장을 하루에 많이 다니면 4~5군데예요. 그러니까 현장활동이라는 게 정말 쉽지 않는 거예요. 주로 나이가 50대 60대 이런 분들이고... 그 당시 건설노조에 공안탄압이 들어왔어요. 거기에 4~5달 정도 올인 하게 된 거죠.

제가 건설노조 일을 1년 반 정도 하다가 그만뒀어요. 나름대로 비정규직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을 했는데... 건설노조가 독특한 것은 생각을 했었지만... 일반 사업장과 많이 다른 것에 실망도 조금 하기도 하고... 원채 조합원들이 모래 같아서... 대의원들 보면 임금체불문제 해결하면 조합비를 3~4달 내다가 빠지고... 한편으로는 전망도 잘 안 보이고... 건설노조 집행부가 조합주의적인 운동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활동을 보인 거죠. 여기는 원채 할배들이다 보니까 반여성주의적인 거하고, 군대문화가 엄청 나거든요. 특히 포항건설노조 보면 완전히 군대라예. 그런데서 적응도 안 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조합원이 확대된다한들 조직만 늘어날 뿐이지 내부의 조직문화 자체가 상당히 전근대적인 모습을 벋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실망도 했고... 좌파라는 사람들도 그런 문제의식이 별로 없고... 저는 건설노조 운영방식을 이렇게 해봐야 되지 않느냐 하면서 내부 논쟁을 좀 했죠. ‘니가 건설현장을 몰라서 그래’ ‘아직도 먹물 티 내냐’ 그러는 거예요.”

 

건설노조 활동을 그만두고 지역에서 새로운 운동을 고민하던 서창호는 사회권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2004년 봄 ‘공감 대구인권모임’을 구성해 지역 인권활동을 모색한다. 그러나 새로운 운동을 벌이기 위해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해 1년 동안 부동산 중개업 일을 배우면서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되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2005년 대구인권운동연대를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2005년 4월에 이 사무실을 개소를 했거든요. 그러면서 ‘공감 대구인원모임’에서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로 명칭을 바꾸면서 정식 출범을 하게 된 건데...

사회권이라는 것이 좀 추상적이에요.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이라고 하지만, ‘내가 무엇을 가지고 대중들을 만날까’ 하는 생각도 좀 하고... 인권단체들 연대도 하면서 다른 단체들 가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고민 들었던 게 ‘이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들 하는데, 피케팅이나 기자회견 이런데 익숙해져 있고, 대중들하고 만나는 걸 못 봤다’는 거죠.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자기 권리의식을 확장하는 것이 인권운동의 역할인 건데...

어떤 인권단체 활동가는 ‘인권운동은 어쩔 수 없이 대중과 만나기는 힘든 것이 아니냐. 새롭게 권리운동을 확장해야 하기 때문에 깃발을 들어야 하는... 문제의식을 확장해야 하기 때문에 의제 중심으로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대중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인권단체가 발전되겠냐는 거죠.

그래서 그 당시에 고민을 하면서 저는 신용불량자 문제를 주목하게 됐어요. 2003~2004년 신용카드 대란 사태가 터지면서 금융채무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전면화 됐죠. 300만~400만 그러면서... 경제적 활동하는 사람에 중에서 열에 두 세 명 이상은 신용불량자로 살아가는데... 신자유주의 극단으로 이런 문제가 드러나는데, 이런 사람들에 대한 권리운동을 하는 데를 못 봤다는 거죠.

저로서는 ‘대중을 만날 수 있는 유력한 매개다. 준비만 제대로 하면 대중이 올 거다. 그 속에서 소통하고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을 했어요. 사회구조적 문제 속에서 금융채무 문제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구조적으로 양산되는 것인데,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타날 거라고 봤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준비과정을 거쳐 2005년 8월부터 파산학교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파산학교를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이 사람들을 구체로 만들기 위해 ‘금융피해자인권모임 좋은모임회’를 만들기도 하고, 전국적 네트워크도 만들어 갔다.

 

“‘금융채무 사회책임 네트워크’라고 해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도 만들어졌거든요. 2006년 1월에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에 파산학교를 하고 있었던 데가 부산파산지원연대, 대구인권운동연대,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 있는 파산학교가 다였어요. 이게 정부기관이라든지 금융자본가에 대응을 하려면 전국적인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 있는 거죠. 그래서 월 1회 전국모임을 계속 하고 있어요. 전국네트워크와 그리고 각 지역별 당사자모임이 동시적으로 제기된 거죠.”

 

금융채무자 문제를 중심사업으로 진행하면서도 대구지역의 사회권 문제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안에 대한 결합도 활발하게 진행한다. 처음에 혼자 상근하면서 시작한 활동은 상근자가 4명으로 늘었지만 감당해야 할 일들은 많아져갔다.

 

“아직도 운동사회 조차도 금융채무 문제에 대해서는 생소하기도 하고, 잘 모르기도 하고... 저는 인권의 문제로서 접근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이 권리운동을 확장시키기도 하고... 그래서 인권운동연대가 중요한 사업으로서 금융피해자사업을 하고 있는 거고...

그런 연장에서 대구지역의 여러 가지 사회적 권리운동을 같이 하고 있어요. 주거권 문제, 건강권 문제, 노동권 문제....

노동권 문제는 최근에 ‘비정규직 철폐 공대위’를 결성하게 됐거든요.

간병인 문제가 의료공공성 문제와 연결되는데... 의료보험 민영화 얘기도 나오고, 선택진료제 얘기도 나오기도 하고... 7월 1일부터 요양원 요양사들이 간병서비스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있어서 졸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경북대학교 간병인공대위를 의료공대위로 전환했어요. 공공연맹 의료연대의 당위적인 얘기였던 의료공공성 얘기를 의료공대위에서 어떻게 맞물려 갈 거냐 하면서 의료연대 경북대병원지부와 같이 얘기하고 있어요.

재건축 재개발문제와 관련해서 ‘올바른 도시 재건축을 위한 주거권연대’가 꾸려져서 활동하고 있고... 장애운동 하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고... 이주노동자사업... 상근자가 4명인데 상당히 과부하가 걸려 있는 상태예요.”

 

2005년 8월부터 매주 실시하고 있는 파산학교는 2008년 2월까지 100회가 넘게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400명 넘는 이들이 파산을 신청했고, 그중에 230여 명이 면책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계속되는 고민은 어떻게 이들은 주체로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파산학교는 상담중심으로 하는 건데... 지금 회원들이 400명 정도 됐지만 고정적으로 모이는 인원은 40~50명 고정돼 있어요. 왔던 사람들이 안 오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오기도 하고... 이런 과정이 반복 되는데... 오는 사람들은 너무 급해서 오는 거고, 저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생각해요. 그리고 면책 받고 나서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대부분 그럴거다고 봐요. 이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정말 대중인데... 우리는 대중들한테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문제의식을 부여해주려고 할 따름이지...

저는 ‘다섯 명 중의 한 명, 열 명 중의 한 명이라도 이런 것을 자기문제화 해서 할 수 있으면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거고... 그래서 제가 주요하게 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사업이 있어요.

하나는 상조회인데... 상조회는 불가피하다고 봐요. 상조회가 토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이 성격을 건너뛰고 대중투쟁 한다는 것은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이 불가피하지만 이 성격이 운동으로서 올곧게 자리매김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주말농장모임을 올 봄에 하거든요. 다른 형제들한테 못했던 얘기들도 이런 자리에서는 편하게 하죠. 그런 점에서 이게 양날의 칼이 되는 거죠. 자칫 잘못하면, 면책 받고 나서 뒤도 돌아보기 싫은, 기억하고 쉽지 않은 과거가 될 수 있는 거고... 잘만 되면 ‘내가 새출발을 하는데 있어서 이처럼 편한 공간이 없다’는 애정이 있을 수 있고... 그런 것이 혼재돼 있다는 거죠.

또 하나는 자기과제가 명확하게 제출해져야 한다고 보거든요. 그런 점에 있어서는 면책 이후의 사회적 차별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대부분 파산은 면책될 건데, ‘면책되고 나서 어떠한 존재조건이 될 거냐’에 대한 인식교육을 하는 거... 특수기록코드가 7년 동안 은행연합회에 남아요. 그거는 법적인 근거가 없어요. 그리고 면책 이후에 신용등급 10등급 됩니다. 보통 신용불량자가 6등급부터 9등급 사이거든요. 그리고 서울보증보험에서 취업보증을 안 서줘요. 이런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 자기과제를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런 것을 계속 환기시키면서 면책 이후의 사회적 차별에 어떻게 함께 갈 거냐를 고민해요.”

 

인권운동의 영역은 매우 넓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상근 활동가들이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헌신적으로 활동을 하지만 자칫 백화점식으로 나열되는 사업이 될 수 있다.

 

“인권운동 자체가 고유하게 자기 성격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상근자 조직으로 가면 정책사업, 피케팅, 기자회견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런 것이 지역의 요구와 맞물리게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그런 것을 외면할 수 없는 거고...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게 그런 문제의식이거든요. 대중과 호흡하고 대중 속에서 강제 받지 못하게 되면 이게 붕붕 떠다니고, 1년 지나고 2년 지나면 아무 것도 없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다만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이 중요한 사업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사회권 운동과 맞물렸을 때 중요하게 드러나는데, 아직 그렇게까지는 안 되고 있어요. 하나의 영역으로서 새롭게 제기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거죠. 이것이 하나의 정형화된 인권운동의 조직화된 모습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 부족함이지만... 그러려고 노력을 해요.

그렇기는 하지만, 다양한 사회적 권리운동에 인권운동연대가 책임 있게 결합하고 활동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희들이 참여하는 대책위나 연대체가 9개가 돼요. 이름만 거는 게 아니고 직접 책임 있게 하거든요. 사실은 제 업무의 70% 정도가 대책위 활동이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는데, 고민이 돼요. 최근 들어서 상담을 못하고 있거든요. 이래되면 회원들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그런 측면에서 고민스러운 게 있어요.”

 

서창호는 15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좌파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활동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과거의 활동과 지금의 활동은 계급성이라는 측면에서 방점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구좌파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저희 인권운동연대가 거시기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현장의 문제에 전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이런 사람들이 인권문제나 여성권 문제에 대해 얘기를 하면 기본적인 개념이 없을 거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보이거든요. 이 분들하고 기본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권운동 하는 사람 입장으로 봤을 때 인권운동이라는 것이 뒤치다꺼리 운동이거든요. 사건이 터지면 그때 가는 거예요. 물론 계획이나 이런 게 있기는 하지만, 직접 조직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인권운동이 어떻게 한국사회를 재해석하고 정치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전무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점에 있어서 인권운동은 이제 강제 받을 수밖에 없다라는 거죠. 그런 데에 있어서 인권운동이 둔감했고... 한국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책임 있는 발언들을 인권단체가 이제는 해야 된다고 봐요.

기본권운동이 계급운동과 직접 관계가 있거든요. 반신자유주의 반자본주의 운동 속에서 어떻게 사회적 역할을 할 거냐에서 환경이나 여성이나 인권이나 노동운동이 서로간의 소통이 없었다는 거죠. 그런 점에 소위 말하는 ‘계급적 좌파’운동 하는 사람들도 자기반성이 필요하도 봐요. 당위적인 수사로만 그쳤던 점을 어떻게 자기도 재조직할 거냐라는 자기과제도 있다는 거죠.

나는 그런데 있어서 양자가 반성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고 봐요.”

 

이제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인권운동연대 활동이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한 고민도 많아지고 있다.

 

“여전히도 인권운동연대 좋은모임회 회원들이 맨버쉽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맨버쉽을 강화하는 사업이 필요한데... 나는 금융피해자들이 자기과제로 주체화시키는 데 있어서 하나의 전형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겠다고 생각하거든요. 내부적으로는 이 분들을 주체화시켜내는 것이 있고, 사회적으로는 이것이 인권의 영역으로서 시민권을 얻는 것이 저한테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지역 내에서 인권운동단체로서 주요하게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사업을 쳐내는 데만 급급했거든요. 앞으로도 쳐내야 되겠지만, 인권운동연대의 색깔과 내용으로서 지역 내에서 제대로 드러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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