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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계화도 주민 고은식 이야기

바다를 일터로 삼아서 살아오던 어부가 정부를 상대로 10년에 이르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쓰러지고 쓰러지면서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싸움이었다. 전북 부안 계화도에서 새만금 간척사업 저지를 위해 싸우고 있는 고은식 동지를 만나서 길고 힘겨운 싸움의 얘기를 들었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고은식은 공사장 막일꾼이었던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부안군 계화도에 들어온 66년(당시 3살) 이후 계화도에서 40년 넘게 살고 있다. 당시 부안에서 떨어져 있는 섬이었던 계화도는 63년부터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육지와 이어지게 된다. 고은식의 가족도 아버지가 계화도 간척장 일을 찾아오면서 계화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계화도는 그렇게 간척과 함께 육지와 연결되고 사람들이 늘어나서 현재는 농어촌 치고는 꽤많은 2000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으로 변하게 된다.

 

“저쪽 정읍 삼례에 있는 섬진강 댐을 막았어요. 그래서 수몰민들을 박정희 대통령이 여기 앞에 있는 집 하나하고 논 하나를 줘 가지고 강제이주 시켰어요. 그래서 계화도 인구가 반절은 그렇게 해서 들어온 사람이고, 반절은 원주민이고... 원주민들은 지금도 농사를 지을 줄 몰라요. 바다밖에 모르니까... 이주해 온 분들은 지금도 농사를 짓죠. 그분들은 완전히 산골짜기에서 온 거죠. 올 때는 진짜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분들이 지금은 다 부자 됐어요. 왜 그러냐 하면 그분들 얘기로는 여기오니까 사방이 돈으로 가득 찼더래요. 바다가 그만큼 돈벌이가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농비, 생활비, 교육비 이런 거 다 대고도 남아서 저축을 해요. 농사를 지으면 가을에 수확이 되잖아요. 그걸로 논 하나 더 사고... 계속 재산을 늘려갔어요. 그러니까 지금 논들 몇 개씩 다 가지고 있고... 올 때는 그 사람들이 설움도 많이 받고 그랬는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어. 여기는 바다가 절대적이니까 원주민들은 막연하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들 논도 있고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안정이 돼 있고...”

 

아버지는 공사장 일을 찾아 돌아다니시고 어머니는 바다에서 일을 하시면서 6남매를 키우셨다.

 

“내 어렸을 때는 바다에 조개나 뭐 이런 것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어요. 그때는 가격이 좀 쌌어.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가지고 돈으로 별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잡아다 먹는 정도... 그러니까 상당히 힘든 생활을 하긴 했어요. 여기서 고기 잡아가지고 자전거에 실어가지고 부안까지 가서 팔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고기가 엄청나게 많았어요.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 돼지. 상대적으로 가격이 안 돼서 사람들이 어업을 통해서 돈을 벌고 이런 것은 아니었어요. 먹고 살고 그런 거지. 그게 80년대 경제성장을 하면서 수요가 생기니까 그게 돈으로 좀 된 거죠.”

 

고은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계화도를 떠나지 못했다.

 

“대게는 다 떠나요. 제 초등학교 동창이 50명 정도 되는데, 여기서 사는 사람이 3명... 나는 떠나기가 싫더라고요. 한 번은 떠나봐야지 하고 서울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갔는데 3개월만에 돌아와 버렸어요. 나는 못 살겠더라고요.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그래야 되는데 부딪히는 것이 자신이 없었어요.”

 

삶의 터전이 바다인 계화도에서 고은식도 바다일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바지락 양식장에서 관리인 일을 하면서 벌이도 어는 정도 됐고, 결혼해서 자식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9년 동안 일을 해오던 91년 느닷없이 새만금 간척사업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고 고은식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게 얼마나 웃기는 거냐 하면... 내가 저기 있어서 알아요. 새만금이 노태우 대통령이 이렇게 하면서 처음에 여기 어민들이나 이런데다 한 게 아니었어요. 양식장 주인들, 이 사람들은 대게 이 지역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한테 통보를 해가지고 동의를 받은 거예요. 그 사람들은 91년 하기 전에 보상을 40% 받았어요. 법적으로 보상을 40% 받으면 법적인 보호를 못 받는데요. 그 안에 들어가서 누가 캐거나 그러면 그거를 말릴 수는 있어도 고발하거나 그런 법적인 보호를 못 받는데요. 그래서 나도 잘린 거죠.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것을 싹 잡아버리고, 양식장을 풀어버린 거죠.

90년 이때부터 용역이 들어가고... 91년 보상이 40%가 지급이 되면서... 그 40%가 지급될 때 여기 어민들은 아무 것도 지급이 안 돼고... 면허지, 돈 많은 사람들한테만 지급이 됐어요.”

 

그렇게 새만금 사업을 밀어붙이면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새로운 생계거리를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계화도를 떠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보상을 받고도 바다일을 계속 하게 되지만, 고은식은 일찍 다른 일에 손을 댄다.

 

“잘리고 나가지고 그동안에 모아둔 돈도 좀 있고, 91년에 보상을 받은 게 있었어요. 내가 1050만원을 받았어요. 생각에 ‘바다는 끝났는가 보다. 뭔가 다른 걸 해야 되지 않나’ 그러는데 딱히 여기서 할 게 없어요. 나가서 가게를 한다든지 사업을 한다든지 그러면 몰라도... 그럴 정도의 여력은 없는 거고... 사람들이 그때 개를 키우면 돈을 번다고 그래서 그것을 시작했어요. 그것도 10년이 넘게 했는데 빚만 엄청나게 지었지... 잘못 돼가지고... 만약에 새만금이 안 되가지고 내가 바다에 계속 다녔으면 안정된 생활을 했을 거예요. 그것 때문에 빚을 8천 정도...”

 

“시화호하고 새만금이 조금 다른 게... 시화호는 그렇게 보상을 받아서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서 알거지 됐는데... 여기 사람들은 아직은 바다가 있으니까 안 나가고 계속 정착을 한 거죠.

나 같은 경우는 여기서 개를 치운다고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은 계속 바다 일을 했어요. 아직 바다가 죽었거나 소득이 안 나오고 그런 거는 아니었고, 나 같은 경우는 일찍 판단해서 ‘바다쪽으로 가는 거보다는 이쪽으로 하는 게 좋은 거 아니냐’ 해서 바꾼 거였죠. 그런 사람이 별로 없었죠. 양식장 관련해서 잘린 사람들은 계속 바다 관련한 일을 한 거고...

배 같은 경우도 그래요. 배도 면허권 가진 배들이 그때 보상을 받았어요. 보상을 받게 되면 배를 폐선을 시켜야 돼요. 폐선을 시키고 다시 배를 산 거죠. 아직 바다가 있고 그냥 놀 수는 없잖아요. 배운 기술이 그건데...”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공사로 인해 새만금의 변화는 급속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공사에 따르는 갯벌과 어장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91년에 보상이 이루어졌는데... 맨손 어업보상이 모든 사람들한테 해당되는 거잖아요. 새만금 안에 전체 어민이 2만 몇 천 명인가 됐대요. 한 3분의 1정도 받았어요. 그것을 평균 나누면 한 사람이 받은 보상금은 600만원. 그게 여섯 등급으로 나눠가지고, 나 같은 경우는 1등급인데 1050만원, 적게는 200만원까지 받고 그랬어요. 91년에 그런 보상이 이뤄졌고...

이 공사가 그때부터 시작이 되 가지고 그렇게 하는데.. 처음에는 바다에 별 변화가 없었어요. 그게 5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람들이 ‘새만금 사업이 이런 문제가 생기는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죠. 고기가 적게 나오고, 물 흐름이나 이런 것들도 달라지고... 그때도 크게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았죠. 그러다가 8년 정도 되면서부터는 ‘이게 정말 우리한테 심각한 거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죠.

보상 같지 않는 보상에 이미 발목이 매여 있어가지고 다른데다가 항의하거나 이럴 생각을 못내고 있었죠. 보상을 많이 받았으면 하는 생각들을 가졌어요. 그래서 전시관에서 집회도 한 적도 있고... 이게 막히고 나면 생존권보상으로 해서 논을 달라든지 이런 얘기들을 한 거였죠. 그런데 이미 ‘우리가 보상이라는 것을 받았기 때문에 공사에 대한 거는 얘기를 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관에다가 해봤던들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 이런 생각들이 있었죠. 그래서 ‘잘 봐달라’는 식의 것들을 했었어요.”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는 가운데 계화도 밖에서는 새만금 공사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빴던 계화도 주민들은 그런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공사가 굉장히 더디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원래 목표가 새만금사업이 2003년에 완공이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돈을 굉장히 많이 들이 부어야 돼요. 그런데 1년 예산이 1500억 정도 하는데 그것 갖고 공사를 한다는 것이 아주 천천히 나가는 거죠. 그리고 시화호가 96년에 막히고 98년에 문제가 생겼잖아요. 그때 환경단체들이 들고 일어나서 ‘새만금도 시화호가 될 거다’ 그러면서 99년에 문제제기를 하고, 그때 유종근 도지사가 승인을 하고, 민관공동조사단 꾸려서 조사를 하고 그러면서 2년간 공사가 중단이 돼 있었어요.”

 

2000년 새만금 반대활동을 하고 있던 ‘새만금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과의 만남은 계화도 주민들에게 새만금사업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는 계기가 됐다. 당시 청년회 총무였던 고은식 역시 새만금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새만금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달라붙게 된다.

 

“그러고 있었는데 2000년에 ‘새만금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을 만났어요. 계화리 청년회가 접촉을 가지면서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한 얘기는 ‘당신들이 사기를 당했다’라는 거예요. 처음에 노태우 대통령이 우리한테 새만금 청사진이나 이런 것들을 제시했을 때는 엄청난 것들이 있었어요. 70% 산업용지고 30% 농업용지라고 얘기한 거였죠. 우리도 새만금 사업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여기에 공장도 들어서고... 또 여기 계화도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다. 당신들이 지금 속고 있고 당신들 미래는 사기당한 거다. 알고 싶으면 올라가자’ 그래서 청년들이 버스 한 대를 대절해서 서울 종합청사를 갔어요. 거기 가서 농림부에도 가고 국무조정실에도 가고 그랬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농림부가 하는 농지 만드는 사업이지 그런 거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전에 조철권 지사가 ‘생존권 보상 차원으로 돈을 준다’고 각서를 써 준 게 있어요. 그것도 물어봤죠. ‘만약에 이게 농지가 되면 우리한테 무료로 주는 것이 있냐’고 그랬더니, 거기서 하는 얘기가 ‘도지사가 대통령보다 높냐? 자기 맘대로 주네 마네 할 권한이 있냐’고 그러는 거예요. 그때부터 ‘야, 이거 우리가 속고 있었구나. 정말 이대로 있으면 안 돼겠다’ ‘이제부터는 속지 말아야겠다. 바다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바다 지키는 일을 한 거였죠.

그때는 공사가 2년간 중단이 됐던 때여서 환경단체도 그랬고, 사회단체들도 그렇고... ‘새만금, 이제는 끝난 거다’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때 제일로 신나는 반대운동을 했던 때였어요. ‘이거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끝난 건데, 확실히 끝낼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이 있어가지고... 그때부터 서울 집회도 다니고, 도청도 가고, 많이 다녔죠. 그때는 우리가 보상이나 이런 것이 아니었고, 생활터전인 바다를 살려내라는 것이었으니까.”

 

공사가 중단된 후 활발한 반대운동이 벌어졌지만 정부는 2001년부터 순차개발이라는 형식으로 새만금 사업을 재개한다.

 

“2001년 5월 24일 정부가 순차개발 이라고 하면서 공사개재를 해요. 그때부터 환경단체 이런 단체들이 힘이 빠진 거예요. 끝날 줄 알았는데, 정부는 공사개재를 해버렸고... 우리도 넉아웃 됐어요. 그때부터는 정말 지루한 싸움을... 그전에는 정말 생기 넘치는 싸움을 했는데, 그때부터는 진을 빼는 싸움을 하는 거예요.

‘어디 집회 한 번 같다 오자’ 그러면은 요, 갔다 와서 3개월 동안은 완전히 초상집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갈 때는 사람들한테 설득시키고 이런 것이 정말 중요해서 사람들한테 필요하다고 해서 가잖아요. 사실 갔다 와봐야 바뀌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가 뭣 때문에 갔다 오냐’ 이런 것들 때문에 서로가 싸우고 그래요. 그런 것들이 거의 3개월 정도 가요. 3개월 정도 하나가 또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고 그래서 가고...”

 

새만금싸움이 쉽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싸움의 주체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계화도 여성들이다. 그렇게 지루하면서도 끈질긴 싸움이 다시 시작된다.

 

“순차개발 하면서 공사재개가 되니까 청년들도 다 나가떨어지고... 그러면서 마을총회를 했어요. 마을총회를 하니까 ‘이제는 우리가 할 일 다 했다. 우리가 해서 관을 이겨 먹을 일도 아니고, 그동안 했던 역량을 통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때 나온 얘기는 선착장 얘기도 있었고, 대체어장 얘기도 있었고... ‘이런 것들을 주로 해가지고 반대싸움을 해야 된다’ 이렇게 마을총회에서는 했었고... 난 그게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그래 갖고는 3개월 정도 침묵의 시간이 흘렀어요.

‘새만금을 지키는 부안사람들’ 사무실도 부안에서 계화도로 왔었어요. 그런데 ‘부안사람들’도 완전히 넉아웃 되가지고 셔터를 다 내려놨었어요. 그게 3개월간 셔터를 내려놓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있는데, 지나가던 여자분들이 그런 걸 보고 굉장히 마음이 안 좋았던 가 봐요. 나를 보고 ‘왜 사무실을 닫아놓느냐’고 답답하니까 다른 건 안 해도 좋으니까 사무실을 열어 놓으래요. 그래서 열어놨어요. 열어 놓으니까 발길들이 오가게 됐어요. 그때부터는 청년회나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 여성분들이 오는 거예요. 싸움을 하면 남자들은 주둥이만 있고, 실제로 싸우는 건 여자들이 싸워요.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여성중심의 싸움을 했어요. 신나는 싸움은 청년회 중심으로 했었고, 진을 빼는 싸움은 여성분들이 한 거예요.”

 

절망 속에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반대활동이 모색되는 가운데 2002년 침체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이 모색된다.

 

“사무실 열고 아주머니들이 모이면서 조금씩 힘이 생겨서 2001년 가을에 바닷길 걷기도 했어요.

2001년에 공사재개를 하면서 석재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해창산을 헐어서 가는 거예요. 순차개발 하기시작한지 1년 되는 2002년 5월 24일 그걸 저지하자 그래서... 사람들 보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어요. 이건 굉장히 비밀로 해야 하니까... ‘부안사람들’ 하고 계화도 청년 몇 사람 하고 비밀리에 모였어요. 이건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되잖아요. 거기서 부안사람들 대표가 하는 얘기가 ‘우리가 그것을 하면 갈비 몇 대 부러지고, 빙신되는 경우도 있고, 개 끌리듯이 끌려내려 온다. 이걸 각오하고 자진해서 할 사람만 나오라’고 한 거였어요. 거기에서 나온 사람이 4명이 나왔어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다른 데서 사람이 왔어요. 최후에 안 되면 벼랑에 매달려야 되고, 그런 전문가들이 오고... 다 해서 11명 정도가 됐는데... 거기서 시간이나 날짜 이런 것들을 잡은 거였어요. 잡은 것이 5월 24일 이었어요.

점심 때 공사하던 사람들이 점심 먹으로 간 사이에 우리가 현수막이나 이런 거 들고 올라 간 거였어요. 식사 끝나고 잡업인부들이 보니까 몇 명 안 되는 놈들이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막 올라오더라고요. 올라오는데 전부 다 ‘드디어 때가 됐다’ 그랬어요. 벼랑에 매달릴 사람들은 줄 묶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얻어터지다 끌려내려 가는 그런 거죠.

그렇게 있는데... 해창산 바로 옆에 새만금 반대하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에서 컨테이너 치고 그렇게 하는 데가 있어요. 거기에 문규헌 신부님이 전주에서 노인네들을 5월도 되고 하니까 효도 차원에서 관광 도느라고 두 차를 싣고 온 거예요. 근데 거기에 차를 세웠어요. 그래서 두 차에서 사람들이 우루루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올라오는 사람들한테 ‘야, 너히들 이제 다 죽었다. 우리 계화도에서 다 회의하고 1차로 저 사람들이 왔는데, 지금 또 출발해서 오고 있다’ 이러니까 올라오던 애들이 다 내려가 버린 거예요. 그날부터 공사 다 중단돼 버린 거죠.

그래가지고는 걔네들 다 내려가 버리고, 우리가 거기에 있다는 거 아니까 계화도 사람들이 온 거예요. 와서 보고 회의도 하고, 여자들이 바다가는 시간 빼고는 와서 농성장 차리고 있고, 밥도 해가지고 오고, 바다 안갈 때는 전부다 트럭에 타 가지고 와서는 거기서 죽치고 있고... 그래서 싸움을 한 거였죠.

길게 가면 우리가 지칠 수밖에 없잖아요. 한 달을 했어요. 걔네들도 온갖 방법을 다 쓰더라고요. 용역도 오고... 거기서 하다가 개 끌리듯이 끌려 내려오고 천막도 강제철거 되고 그랬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하는 게 매달리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밤 12시에 몰래 올라가서 태경이라고 녹색연합에 있었던 친군데 50m 넘는 절벽에 1주일간 있었어요.”

 

2002년 해창산 투쟁으로 힘을 모았던 계화도 주민들은 다시 침체에 빠진다. 그러나 여성들을 중심으로 느슨하게나마 논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2003년 새만금을 반대하는 종교인 3명이 부안에서 서울까지 3보1배를 하는 것이 계기가 돼서 다시 새만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03년 3월에 3보1배때도 여성분들이 청년회를 자극하는 거죠. ‘성직자들이 저렇게 애 쓰는데 우리는 뭐하는 거냐’ 그렇게 하고... 그래서 ‘뭐 합시다’ 그러면 끌고 나가는 건 청년회 몫이었는데 그렇게 하는 거는 여성들이 다 만드는 거죠.”

 

“2003년 성직자들 3보1배 그것도, 성직자들 3보1배 하니까 전국적으로 다시 달아오르고 기대를 많이 가졌거든요. 우리도 그런 것에 많이 기대를 갖고 했는데... 결국 3보1배가 가져온 것은 4공구가 막히는 그런 것이 돼 버렸어요. 왜 그러냐 하면... 3공구는 막히고 4공구는 트여 있었어요. 거기가 만경강 물줄기가 빠져나가는 곳인데... 4공구라는 것이 우리는 새만금의 숨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국적으로 새만금의 여론이 고조되고 그러니까 농림부가 그런 전국의 여론을 막아 버리기 위해서 4공구를 보름 만에 막았어요. 밤낮없이 들어부어 가지고 막아 버린 거예요. ‘어차피 거긴 막혀 버렸으니까 공사를 가야 한다’ 이런 논리가 성립되는 거라니까요. 4공구가 그렇게 막아 버렸죠. 그러니까 3보1배 때 가졌던 기대와 이런 것들이 더 큰 좌절과 실망으로 우리한테 온 거죠.

그리고 또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 져 가지고 잠깐 공사가 중단된 적이 있어요. 2003년 9월이었어요. 그것도 보강공사 하면서 공사재개가 돼 버렸어요. 그런 것들 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상처를 입는 거죠.”

 

쉽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리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갈 수 있었던 힘에는 계화도 여성주민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자 했던 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신뢰가 있었다.

 

“우리는 새만금 구신(귀신)이라고 그러는데... 서울이나 이런데서 새만금 때문에 같이 와서 하시는 분들... 여성분들이 그 분들 보시는 게 굉장히 마음이 안 좋은 거예요. 왜 그러냐하면 내 자식도 저런 자식 있는데, 자기네한테 이득 되고 이런 거 아무 것도 없는데 시간 내고 와서 하는 게... 해창산 때도 와서 끌려 다니고 그런 것들을 보는 그분들 마음이 굉장히 그런가 보더라고요. 남자들하고 여성분들이 그분들 보는 마음이 다른가 보더라고요. 그분들 접촉하고 그러면서 힘이 나고 그런 거였죠.”

 

법정 공방을 중심으로 2004년이 흘렀다. 그리고 2005년 1심 판결에서 주민들에게 다소 유리한 판결이 나왔지만 2심과 대법원에서 그 판결은 뒤집어 진다.

 

“2005년에 1심 판결이 우리한테 유리하게 나오고 하니까 그런 것들을 기대하고 그랬는데 그게 또 안 되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안고 하면서 사람들을 모아내고 그런 것들이 굉장히 힘든 부분이 있었죠.”

 

그렇게 암울한 상황에서 다시 투쟁을 모아낸 것은 여성들이었고, 그를 계기로 대규모의 물막이공사 저지투쟁이 조직됐다.

 

“2005년에는 숨을 못 쉬었어요. 그때는 우리들도 완전히 가라 앉아 있을 때였어요. 이미 ‘새만금은 끝났다’ 그러면서... 환경단체도 공사중단이나 이런 것보다는 막은 이후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숨이 막히는 거예요. TV만 틀면 연일 ‘2006년 4월 23일이면 막는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모든 힘이 다 떨어져 버려서...

그래갖고는 계속 끙끙 앓고 앓고 하다가 여성분들이 10월에 모여서 나온 얘기가 ‘우리 청와대에 1인 시위를 해보자’ 그런 거예요. 그래서 10월 말에 시작해서 12월 19일까진가 했어요. 여기서 거기 갈라면 5시에 일어나야 하고... 그때가 겨울이라서 춥기도 하고... 그걸 할 때는 경비나 이런 것들 본인 부담하면서 하기도 했거든요.

그것을 하면서 마지막 물막이 싸움의 시초가 거기서 만들어진 거였어요. 1인 시위를 하니까 청년회에서도 그걸 알게 됐죠. 그래서 모여 갖고 ‘우리도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했어요. 우선은 재정지원을 해주자 해서 돈을 줬어요. 청년회에서도 자원을 받아서 1인 시위 할 수 있는 사람 했고... 그러면서 지역 안에 암울했던 생각들이 깨어났죠. 다 끝났다고 하는데 그걸 하니까...

그러니까 문규헌 신부님도 오고 서울에서 단체들도 왔다갔다 하고... 그러니까 우리가 오는 사람들한테 ‘우리가 마지막 물막이 싸움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아직 다 막히지도 않았는데 끝났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이런 얘기들을 막 해서... 그걸 통해서 마지막 물막이 싸움을 하기 위해서 서울에서는 단체들이 ‘새만금 국민회의’를 만들었어요.

여기서는 계화도 청년회도 그렇고, 계화도 전체 분위기도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저거 막혀 버리면 끝난다’ 그랬어요. 그런데 ‘물막이 싸움은 마지막 싸움이기 때문에 굉장히 큰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연안대책위를 만들기로 했죠. 그때까지 연안대책위가 한 번도 안 만들어졌었어요. 군산 김제 부안 이렇게... 그렇게 만들라고 만들라고 해도 안됐는데... 대책위 필요성을 느끼고 두 달 정도를 계속 돌아다녔어요. 어민들 만나서 얘기하고... 그래서 연안대책위도 구성되고... 이게 다 여성들의 힘이었죠.

2005년 12월에 구체적으로 만들려고 사람들을 모았는데 논의가 제대로 안 돼서, 모아졌다 흩어지고 모아졌다 흩어지고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2006년 2월에 위원장도 만들어지면서 임원구성이 되고 그러면서 대책위가 만들어졌어요. 거기서 내 역할은 사무국장을 보필하는 거였어요.

2월 16일 도청에서 출범식을 하기 위해서 집회신고를 하려고 경찰서에 갔는데 정보과 경찰들이 ‘몇 명이나 모일 거 같아요’ 그러면서 비웃더라고요. ‘지들이 힘도 다 빠지고 이빨 다 빠졌는데 해봐야 뭘 하겠냐’ 이렇게 생각을 한 거겠죠. 그런데 실제 16일 모인 인원이 2천 명이 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별로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부터 외압이 들어오고 회유가 들어오고...”

 

“4월 24일이면 걔네들이 공식적으로 방조제를 다 막아버린다고 한 날이에요. 그러면 우리도 법적인 것이라든지 호소한다든지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들어주지 않으니까 우리도 이제는 물리적으로 공사를 막을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이 새로 만든 대책위의 가장 큰 목적이었어요. 3월에 전시관에서 집회도 하면서 실제로 어선들이 떠 가지고 공사를 몇 시간 중단시킨 게 있어요. 중단시켰을 때 위원장이 잡혀가 버린 거예요. 그래가지고 갈팡질팡하고... 이미 사람들 사기나 이런 게 다 떨어져 버려서 안 되더라고요.”

 

당시 대책위 사무국장이 갑작스럽게 그만두면서 고은식은 사무국장을 이어받게 되고, 마지막에 대책위원장이 구속된 이후 대책위원장을 할 사람이 없어서 대책위원장 직무대행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대책위 활동은 급속히 협상흐름으로 변하게 된다. 주민들도 투쟁으로 돌파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속에 협상을 통한 보상을 원하게 됐고, 그런 주민들의 심리를 이용해 지역 인사들을 만나면서 논의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이런 흐름은 환경단체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연대기구의 참여도 거부하며 독자적으로 진행됐고, 그런 협상 흐름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대책위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2006년 4월 19일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4월 26일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서 실리적 보상에 대한 결과도 없이 대책위 활동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 이후에는 정말 힘들어요. 사람들도 이제 끝났다는 생각들... 이제는 근본적인 얘기보다는 10원이라도 나한테 득이 오는 것을 현실적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정말 힘들어요. 그래도 방조제 막히기 전에는 공사 중단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려고 했던 것은 지역공동체에 대한 것을 할려고 했었는데... 그게 힘들더라고요.

지금 어떻게 보면 어정쩡해서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여기서 힘들면 떠날 사람들 다 떠나고 떠나지도 못하는 이런 분들을 또 어떤 생각을 할까? 그 정도 되면 이제 실체를 다 알기 때문에... 우리한테 주는 보상이나 이런 것도 허구라는 거, 결국에는 우리가 살 수 있는 거는 우리가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알거 아니냐는 거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치르기들’ 이거든요. 여기 방언인데 아무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그 사람들과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은 있어요.”

 

2000년부터 청년회 총무로서 새만금 반대투쟁에 결합하게 된 고은식은 그 이후 새만금 반대투쟁에 매우 열성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빚만 쌓인 개장사는 정리하고 새만금 투쟁에 전업적으로 매달린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에는 묵묵히 남편의 일을 지원했던 부인이 있었기 가능했다. 남편이 투쟁에 집중하면서 생계활동을 부인이 바다 일을 하면서 책임져야 했다. 그런 부인이 방조제 공사가 끝나고 얼마 후 바다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방조제가 막히면서 이걸 털 수 있는 계기는 재앙이 있어야 된다고 나도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히고 재앙이 제일 먼저 나한테 닥쳤어. 4월에 막히고 7월 12일 우리 각시가 바다에서 죽었어요.”

 

마지막까지 바다를 살리고자 했던 사람들은 끈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갯벌배움터 그레’였다.

 

“‘부안사람들’은 상당히 힘이 약화되고, ‘새만금 생명평화모임’으로 이름도 바꾸고... 그것을 하면서 ‘우리가 반대를 하는데 우리 스스로가 깊어지지 않으면 안 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화도의 문화라든지 계화도 주민들에게 바다에 대한 인식과 이런 것들을 심어주고 그럴 필요가 있다 싶은 생각들이 있었죠. 그리고 ‘부안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없어지니까 대외적으로 새만금의 잘못된 것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알려내는 그런 역할을 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2005년 12월이에요.”

 

방조제 공사는 끝났지만 새만금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레를 중심으로 다시 의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 논의 속에 2007년 체험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래도 뭔가 바뀌어야 해겠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뭔가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랬는데, 막힌 후로부터는 그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름으로 뭔가 해서 알려내고 사람들을 받아내야 하고... 그래서 체험프로그램이나 이런 걸 2007년에 했어요. 실제로 생계가 힘든 분들을 위해서 체험프로그램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그리고 ‘관은 크고 강하고 나는 너무나 약하다’는 이런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자기 스스로는 정말 아무것도 안할라 그래요. 나는 오로지 돈 버는 일만 하려고 그러지... 지역을 가꾸어 내고 우리 스스로가 관에 의지하지 말고... 힘든 것들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돈이라도 내고 뭔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런 것들도 바꿔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작년에 체험프로그램을 했어요.”

 

기나긴 투쟁 과정에서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들과의 결합은 중요한 점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단체는 죽일 놈들이다. 자기네들한테 좋은 뭐가 있으면 왔다가 그렇지 않으면 가 버린다’ 그러는데, 나는 여기 주민으로서 생각이 ‘우리는 그러면 그 사람들보다 뭘 얼마나 했냐’ 그런 거예요. 다 나름대로 할 수 있을 만큼의 일들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인정을 해야 한다고 싶어요. ‘너는 이러니까 나쁜 놈이요’ 그러면 ‘그럼 너는 뭐냐’... 사실은 나도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어쩌면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했고, 어떤 일이 있으면 다시 만나고 얘기를 해서 설득하고 같이 갈 문제인거지 ‘너는 이래서 아니야’ 하고 쳐낼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실제 형식으로 보여지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 있어요. 보면 알아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보면 ‘단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될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이 들고... 단체들이 할 수 있는 거, 어민들이 할 수 있는 거는 ‘할 수 있는 만큼 밖에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서로 이해하고 서로 애썼다고 가야지... 특히나 뭐가 잘못되면 더 크게 가잖아요.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새만금에 대해서는 부안군에서도 계화도를 제외하고는 다수가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에 따른 갈등이 많았다. 특히 2003년부터 부안군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벌어진 핵폐기장 반대투쟁에서 계화도 주민들은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핵폐기장은 부안군에서 거의 다 반대를 해요. 그런데 새만금은 찬성을 해요. 그런데 우리 계화도는 새만금을 반대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집회나 이런데 가기가 힘들어. 왜 그러냐 하면, 하나는 너무 부럽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만금 얘기를 해야 하는데 못하는 거예요. 그런 갈등들이 많았어요.

핵폐기장 할 때는 집행위에서 ‘계화도가 참여율이 저조하다’ 그러고, 우리 입장에서는 가기가 그런 게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 계화도 사람들이 핵폐기장을 찬성하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러면서 계화도는 계화도 데로 힘든 것들이 있었고...

내가 새만금 하면서 제일 긴장했었던 게 주민투표 할 때였어요. 2004년 2월에 부안군 전체에 핵폐기장 주민투표를 했어요. 여기 투표율이 저조해버리면 계화도는 외톨이로 갈 수 밖에 없어요. 집회나 이런 건 참여를 안했어도 핵폐기장에 대한 반대나 이런 건 보여줘야 되거든요. 만약에 투표율이 저조했다 그러면 부안 안에서 새만금이 더 힘들어질 수 있잖아요. 다행히 투표율도 높았고, 반대율도 높았어요. 그러니까 다른 데서 말을 못했지...”

 

기나긴 투쟁 속에서 계화도 주민들은 많은 상처도 입었고 실망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계화도 주민들은 새만금 반대투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걸 생존권으로 싸웠어요. 싸우면서 내 속에 들어오는 것들이 바다나 이런 것들에 대한 고마움이나 귀함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돼 있어요. 그렇게 생각이 바뀐 분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가 10년 동안 한 것이 아무 의미가 없고 이런 것보다는, 우리가 힘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살기 어려우니까 택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들... 새만금 반대로 싸웠던 것에 대해서 나쁘다거나 이런 얘기는 절대 안 해요.”

 

고은식 역시 투쟁을 통해 삶을 새롭게 보게 됐다고 말한다.

 

“‘나만의 삶’ ‘내 생존권’ 이런 것들이 반대싸움하면서 여러 사람들 만나고 사람들 마음을 모아내고 이런 일들을 하다보니까 귀함을 알아가는 거 같아요. 실제로 전에는 몰랐던 아픔들이나 이런 것들도 보여 지는 것 같고... 우리가 삶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도 보여 지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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