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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새날을 여는 정치연대 김종섭 이야기

신자유주의 광풍이 전국 곳곳을 휘젓고 있는 가운데 지역을 중심으로 왕성한 연대활동과 저항투쟁을 벌이고 있는 곳 중의 하나가 전북지역이다. 미군기지투쟁, 핵폐기장투쟁, 새만금투쟁 등 지역의 주요 현안투쟁들이 매우 굵직하게 있었고, 그 외에 크고 작은 사회운동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철저히 지역을 기반으로 대안운동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새날을 여는 정치연대’의 김종섭 동지를 만나 숨가쁜 활동과 고민의 얘기를 들었다.

 

전북 군산 출신은 김종섭은 군산 미군기지 주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 미군기지와 미군에 대한 기억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저희들이 겪었던 그 당시 미군문화라는 것은 PX물품 많이 나오고... 아무래도 미군기지 주변의 주민들이 미군기지 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리고 그게 웬만한 대기업 다니는 정도 수준이고 하다보니까 혜택을 많이 받는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동네 누나들 미군들 하고 같이 어울리면 ‘와~, 미국 가는 가 보다’하고 그랬죠.

그때 당시에 범죄문제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회나 공간이 전혀 없었어요. 미군부대 바로 앞은 유흥업소나 이런 것이 전혀 없었어요. 저희 동네는 원래 유흥업소를 만들려고 하다가 동네 주민들이 ‘애들 교육 때문에 안 된다’ 그래서 10km쯤 떨어진 곳에서 게네들이 유흥활동을 했어요.”

 

88년 원광대에 입학한 후 시대분위기 속에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하게 됐다. 이후 4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군 생활을 하던 중 뜻하지 않은 조직사건에 연류 돼기도 했다.

 

“김영삼 문민정부 들어서서... 아마 공안기관이 자신들의 입지와 밥줄 때문에 조직사건을 터뜨리는데... 아마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군대에 있는 사람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과거 노태우 정권시절 학생운동 경력을 중심으로 해서 국가보안법 위반 조직사건을 만들었어요.

저는 군대에서 병장이었는데... 군대에서 병장 정도면 ‘나가서 뭐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원래는 학교로 복학을 해야 되는데, 다시 학교를 안가고 사회생활을 할까 어쩔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국가보안법 사건 터지고 영창에 있으면서 ‘운동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후 특별한 조직적 실체가 없었던 조직사건 구속자들은 1심에서 풀려났고, 김종섭은 제대와 함께 다시 학교로 돌아와 1년 동안 학생운동을 지속한다. 그런 후 96년 지역운동을 시작하게 된 곳이 ‘전북 평화인권운동연대’였다. 인권운동에 대한 인식이 운동진영에서조차 높지 않았던 시절 평화인권운동연대는 평화운동과 인권운동과 정보통신운동이라는 다소 이질적 운동을 하나의 공간에서 실험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고향인 군산에서의 활동을 고민하게 된다.

 

“제가 천주교 신자였고, 전북평화인권연대 대표가 문규헌 신부님이었고, 제가 군산이 고향이고... 그래서 ‘군산 노동자의 집’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진로를 다시 잡았어요. 그때 당시에는 민주노총이 만들어져서 노동단체의 많은 역할들이 민주노총으로 넘어간 상태였고, 그 수준에서 노동단체라고 하는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사업을 중심으로... 그때 민주노총이 담지 못하는 노동운동에 대한 것을 ‘노동자의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했죠. 당시에 지역에서 유명한 기아특수강 해고자투쟁이 있었는데 그것도 함께 했고...”

 

군산에서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할 즈음 미군기지 관련한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미군기지에 대한 투쟁에 관여하게 된다.

 

“그 당시에 군산에 미군 범죄라든가 이런 것들이 갑자기 생겨났어요. 그리고 여론의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이 군산민항이었어요. 대한항공하고 아시아나항공이 군산 미군기지 안에 공항 활주로만 사용하는 건데, 그 활주로 사용료를 대폭 인상한 적이 있어요. 아주 터무니없는 액수로 인상을 했는데... ‘땅은 우리 땅이고, 그 활주로도 우리가 닦아 놨는데, 저거를 사용하는데 돈을 내야 되느냐. 너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것도 국가에 주는 것도 아니고 미군들에게 주면서 활주로 사용료를 내야 하느냐’ 이런 문제제기들이 지역사회에서 굉장히 비등했어요. 그게 군산 미군기지운동이 대중적으로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였거든요.

‘노동자의 집’이라는 공간이 성당 안에 있는데, 그 성당의 주임신부님이 문정현 신부님이예요. 그때 제가 신부님에게 ‘노동운동문제도 있지만, 지역사회에 현안도 있으니까 적극적으로 한 번 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해서 같이 군산 민항 활주로 인상 반대투쟁을 했어요.

그러면서 군산 미군기지에 대한 제반 문제점을 많이 알게 됐어요. 그리고 제가 태어났던 고향이 군산 미군기지 바로 주변이고, 부모님도 사시고... 굉장히 화가 많이 났어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정치적 이유도 있는 거고, 그 안과 주변의 피해사례나 이런 것들이 직접적으로 조사하고 드러나면서, 내 삶의 기반과 환경이 거기여서 그런지 몰라도, 거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관심을 많이 기울였어요. 본격적으로 ‘군산미군기지 우리 땅 찾기 시민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을 했어요.”

 

그렇게 2년 동안 미군기지 앞에서 지속적인 투쟁을 벌여 군산 미군기지문제는 주요한 지역투쟁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 10여 명 규모로 시작된 미군기지 앞 집회는 2년 후 100~200명 규모로 커지기도 했다. 또 지역주민들의 심각한 소음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군산시를 압박해 소음피해 조사를 위한 사업비를 책정하고, 녹색연합과 함께 조사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활발한 지역 투쟁을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상경하면서 숨 가쁜 활동이 이어진다.

 

“현장에서 군산 미군기지를 상대로 하는 투쟁도 중요하지만, 더 큰 운동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있어서 저하고 신부님하고 또 한 분하고 같이 서울로 갔어요. 서울로 가서 한미주둔군지원협정 개정투쟁을 광범위하게 해야겠다 싶어서.... 한편으로는 ‘전국미군기지단체협의회’도 있어서 거기에 계속 얘기하다가 아예 짐을 싸들고 가버렸죠. 2년 동안 서울에서 500개 단체정도 모인 ‘SOFA 개정 국민행동’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고 활동했어요.

서울 가서 단체 만들고 3개월쯤 지나서 한강에 독극물을 흘린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미군문제가 한국 사회에 공론화됐던 중요한 계기가 됐어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왜 그러냐하면, 잘 모르는데 어린 나이에 혼자서 기자들에게 다 브리핑을 해야 하고... 실무적인 것은 제가 다 하고...

당시에 SOFA개정을 목표로 두고 미 대사관 옆에서 처음으로 집회를 시도를 했죠. 서울 사람들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200m 제한을 한다고 그러다고요. 처음에 집회를 하는데 대사관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게 어딨냐’고 그러면서 대사관 앞으로 가버렸어요. 저하고 신부님하고 지역에서 올라오신 분들하고 ‘잡아갈라면 잡아가라’ 그러면서 널려놓고 그냥 해버렸죠. 그렇게 하다가 열린시민공원으로 진출을 계속하고 그 공간을 따낸 거예요. 엄청 뚜드려 맞았어요. 경찰들한테 정말 많이 맞았어요. 민감해서... 끝까지 그 자리를 사수하려고 계속 시도를 했었고... 지금은 정기적인 집회나 농성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힘겨운 투쟁이 이어지던 중 매향리 미군 폭격장 문제를 접하게 되면서 투쟁은 매향리로 이어졌다.

 

“SOFA가 어느 정도 한계 속에 개정이 되고 하는 흐름에서 이슈가 하강곡선을 긋고 내려갔을 때 매향리 대책위 관계자를 집회공간에서 뵙게 됐죠. 저도 소음피해에 대해서는 조금 알기 때문에 ‘정말 심각하겠다’ 싶었어요. 저하고 신부님하고 몇 명이 매향리에 갔어요. 거기 가서 보니까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다음에 서울에 있는 SOFA개정국민행동 대표자들하고 학생들하고 같이 현장방문을 했죠.

‘이런데 관심을 가져야 된다. 동네가 무슨 폭격장도 아니고 이런 데가 세상이 어딨냐’ 그래서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감으로 들이밀었고, 대표자들도 현장을 보고 굉장히 놀라셨고... 공교롭게 그때 미군 포탄이 마을 민가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어요. 그거하고 때가 맞아버린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베이스캠프 치고, 거기서 계속 범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거기서 6개월 정도 싸웠어요. 그러면서 그것도 사회적 공론화가 많이 되고 그랬고... 그러면서 효순이 미선이로 넘어가는 거예요.”

 

2001년~2002년을 그렇게 정신없는 투쟁을 벌이면서 주한미군 문제가 주요한 사회적 이슈가 됐고, 국민들이 주한미군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 성과를 인정하면서 ‘SOFA개정 국민행동’이 해산하자 다시 지역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새만금사업 저지투쟁에 막 바로 결합하게 된다.

성직자들의 3보1배로 새만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단체들과 농성을 벌이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또 한편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대책위 활동에 참여하면서 지역에서의 연대운동 또한 의욕적으로 진행하게 된다.

활발한 지역활동을 벌이는 속에 민주노총 전북본부에서 대외협력부장으로 활동 제안이 왔고,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의 결합을 위한 시도를 할 즈음 2003년 부안 핵폐기장 저지투쟁이 거대하게 떠오르게 됐다. 민주노총 간부로서 부안 핵폐기장 저지투쟁에 결합하며 활동은 벌인 후 부안 투쟁이 승리하고 나서 얼마 후 나타난 것이 2004년 군산 핵폐기장 유지신청이었다.

 

“부안은 주민투쟁을 통해 승리하는 투쟁이었고, 군산은 쫄딱 망하는 투쟁이었거든요.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70년대 투쟁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탄압 자체는 교묘하게 폭압적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역 방송에서 ‘핵폐기장 꼭 해야 된다’고 계속 나오고, 궐기대회하면 2만 3만 관제데모 하듯이 나오고... 아예 초토화 시키는 거죠.

부안과 달리 군산은 사전에 굉장히 치밀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했어요.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굉장히 이득이 있고’... 지역은 경제발전에 대한 보편적 기대심리가 확대돼 있었고... 부안도 마찬가지였는데, 부안보다도 10배 강도로 했어요. 부안은 무조건 지정해 놓고 하려고 하다가 부딪친 측면이 있었지만, 여기는 아주 세련되게 갔고, 경주와 경쟁을 붙이는 식으로 갔어요. ‘경주는 적극적으로 한다’ 그러면서 ‘우리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핵폐기장 유치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엄청난 물리적 탄압이 있어요. 게내들도 새만금 하면서 단련된 사람들의 힘이 있어요. 진짜 단결을 잘해요.

거기에서 3개월 정도 베이스캠프 차리고 먹고 자고 하는 건데... 그땐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 87년 이후 쌓아왔던 민주적 성과들이 점차적으로 후퇴되는 과정이었는데... 핵폐기장 투쟁을 보면서 룰이나 이런 것들도 전혀 배제된 새로운 세상을 본 거예요. 적들은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탄압을 하겠구나... 정신적으로 공황장애까지 걸릴 정도로 폭압적이었기 때문에...”

 

군산 핵폐기장 투쟁은 경주로 핵폐기장 유치가 결정남으로서 끝났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 활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역은 계급투쟁이 시작되는 시·공간의 의미가 있다. 단순히 중앙의 사업을 지역에서 집행하는 집행기관이 아니다. 계급투쟁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갖고 모든 정치운동이나 운동들이 지역이라는 곳에서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변혁운동가들의 기본적인 고민이어야 되지 않느냐... 지역이 엄청나게 신자유주의 기반이 되고 있어요. 신자유주의라는 게 지역에서는 개발이데올로기로 나타나고 있거든요. 이것을 착목을 하고, 대중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이 지역에서 시작 돼야 해요.”

 

수 년 동안을 각종 대책위 활동과 지역투쟁에 집행해오면서 연대운동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그런 고민 중의 하나가 지역에서 저항주체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그런 활동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해 2006년 ‘새날을 여는 정치연대(새여정)’가 출범하게 된다.

 

“대책위로 나타나는 형태로 연대운동을 했던 시기가 있어요. 전국적으로 다 같은 시기적 국면을 갖고 있는데... 단체가 연대해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주체를 좀 더 발굴해서 그들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건데... 잘못된 연대운동 방식이 뭐냐 하면, 많은 단체가 함께 한다는 상징성 빼고는 실제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거죠. 그런 한계가 있는 거고... 그것이 한 시기에서는 성과가 있지만, 지금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와 같은 연대사업 방식은 없어져야 된다는 거죠. 운동도 새로 만들고, 주민이 됐든 집단이 됐든 새로운 인식과 마인드로 무장을 시켜나가는 운동이 병행이 돼야 된다는 것이 새연정 출범에 녹아 있어요.”

 

새여정은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들이 모여 서로 공유하면서 사업들을 벌여가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활동가 스스로 새롭게 주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농민쪽은 없고... 노동은 지역본부, 연맹 활동가, 현장 활동가... 사회운동은 인권활동가, 미군기지 활동가, 여성운동 활동가, 빈곤운동 활동가, 학생도 있고... 하려고 하는 민중운동 주체는 거의 다 있는 거고... 노동쪽은 아무래도 좀 많고...

노동운동을 어떻게 사회변혁적으로 변화시킬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하죠. 현 시기에서 노동운동으로서의 역할이 뭐냐? 예를 들어 공공노조다 그러면 공공노조에 있는 여성조합원들은 여성운동 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주요한 역할이에요. 맨날 위원장이 하라는 대로 집회가라면 집회가고 이런 게 아니고 자기운동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주체화과정 아니냐는 거죠.

그것도 노동운동 동지들 스스로만 판단하라고 하면 못해요. 다른 여타의 활동가들이 서로 소통하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면서 여성주의나 노동운동의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고... 이런 것들이 새여정 안에서 활동가들의 스펙트럼이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교차되는 측면이 있죠.

아무래도 그것을 하나의 안으로 만들고 노선을 만들 때는 굉장히 힘들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그렇게 훈련돼야지 해요. 그렇게 훈련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새로운 주체가 안 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서 대중들한테 새로운 주체가 되라고 요구하는 거는 말도 안 되는 거죠.”

 

무수한 대책위 활동과 지역연대투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정파문제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특히, 김종섭은 전북현장연대 대표를 맡던 2003년 좌파 조직들과 함께 전국활동가조직으로 통합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했지만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다. 또 ‘새날을 여는 정치연대’는 전북지역에서 전북현장연대와 노동자의 힘이라는 두 개의 정파조직을 중심으로 통합해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 속에 정파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남달랐다.

 

“어떤 정파가 뭐가 어떻다 하는 거는 구시대적 논쟁이라는 거죠. 민노당이건 뭐건 문제 있는 건 저희도 무지하게 뭐라고 해요. 하지만 저 정파가 저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조직하자는 식으로는 절대 얘기하지 않죠. 우리 담론 중심으로 조직하는 거고, 운동을 만들어 나가는 거지...

다른 지역가면 그런 게 많아요.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말을 못해요. 정파끼리 모여서 얘기를 하면 ‘좆도 없는데 뭔 놈의 모가지에 저렇게 힘을 주고 얘기를 할까. 십시일반 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생각이 들어요. 굉장히 이상한 운동풍토고... 그런 방식을 후세대 운동가들에게 남겨줘야 하는지... 그러니까 운동적 관료주의라는 것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고... 현재의 우리가 어떤 생각과 어떤 문화와 어떤 태도를 갖고 운동을 하는가 하는 것이 현실에서 대안사회운동을 하는 건데... 그런 사람들이 해봤자 대안사회는 관료주의 사회가 된다는 거예요.”

 

전북지역의 연대운동이 활발한 것에는 정파적으로 제단하기 어려운 대중적 강제력이 있음을 김종섭은 강조했다.

 

“전북지역은 지역적 특성이 연대운동 자체가 잘되는 곳이에요. 지역에서 일어나는 워낙 굵직굵직한 사안들이 많아서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중적 강제력이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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