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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제주본부 고승남 이야기

고립된 섬, 저항의 역사와 보수성이 공존하는 곳, 신자유주의 공세가 가장 선도적으로 이뤄지는 곳, 노동운동의 토대 자체가 극도로 빈약한 곳, 그곳이 제주이다. 그곳에서 민주노총 간부를 하면서 가랑이 찢어지는 10년의 세월을 보낸 민주노총 제주본부의 고승남 동지를 만났다. 타 지역에 비해 역동적이지 않고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동력도 부족한 제주에서의 민주노조활동은 묵묵히 몸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었다.

 

제주도 대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고승남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시인이자 전교조 활동가였던 김수열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김수열 선생님이었습니다. 89년에 전교조가 만들어졌으니까 잘리기 직전이었죠. 그때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대학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접하는데 있어서 뭔가 영향을 줬던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이육사 시를 가르쳐주면서 자기는 시인 중에서 이육사를 가장 좋아한다는 등... 그러면서 기존의 시각과 다른 흐름이 있다는 것을 티 나지 않게 말씀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89년 제주대 법학과에 입학하고 법학과 학술학회를 통해 학생운동을 접하게 된다. 소위 언더그룹에서 정치학습도 하면서 활동하던 중 2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하게 된다.

 

“그때 당시는 제주대학교에서 NL-PD-ND 논쟁이 공개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많이 휩쓸렸고... 내가 군대 있을 때가 동유럽이 격변기였고... 군대 갔다 오니까 이른바 PD계열의 학생들이 학생정치조직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보적 삶을 실현하는 학생모임’이라고 학생정치조직이 만들어져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이후에 학생정치조직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4학년 때는 의장을 하고...”

 

학생운동의 기반도 작았지만, 졸업 이후 활동 공간이라는 것도 많지 않았던 시절 여러 고민 끝에 제주지역노동상담소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4학년이 되면 ‘졸업하면 뭐할까’ 하는 고민을 누구나 다 하는데... 그때 졸업할 당시에는 우리랑 교류했던 선배들은 당시 범도민회(제주도개발특별법 저지 범도민회) 상근 간사로 있었을 때였는데... 제주도에는 졸업하면서 현장이라고 할 만한 데가 거의 없어요. 그 당시에 노동조합도 광범위하게 있었던 때도 아니었고... 그러다가 나는 ‘상근 간사가 없는 곳에 가서 활동을 하겠다. 그게 역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상근 간사가 없었던 곳 중의 하나가 제주지역노동상담소가 있었습니다. 내가 96년 2월에 졸업을 했는데, 95년 12월에 노동상담소에 찾아가서 ‘일도 배우며 하고 싶다’고 해서 상담소에서 상근 간사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노동상담소는 노동운동의 기반 자체가 극도로 빈약한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라는 것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에도 지역적으로 상당히 한계가 있습니다. 제주도 같은 경우에는 2차 산업이 3% 정도 밖에 안 되고 1차 산업과 3차 산업이 주가 되는데... 그 당시만 해도 3차 산업은 주로 서비스산업 노동조합이 주된 거였고... 서비스산업이 노동조합운동으로 수렴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거였잖아요. 그런 지역적 환경 때문에 노동조합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그런 것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지역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조직된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 노동조합 만들어야 한다는 상담이 들어오면 조직하는 활동... 시기적으로 95년이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는 때였는데, 제주도에는 노동조합끼리의 연대조직이라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상담소의 역할 중의 하나가 민주노총의 지역조직을 태동시켜내는 것이었죠.

지금 와서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그때 당시에 저는 노동운동을 배우는 과정이었고, 그때 저의 역할이라기보다는 노동상담소의 역할이 그러했다는 거죠.”

 

그런 과정을 거쳐 타 지역보다 2년 정도 늦은 97년 4월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가 만들어지고 고승남은 지역본부 상근간부로 옮기게 된다. 혼자 상근간부를 하며 크고 작은 일들을 도맡아 해야 하는 기간이었다.

 

“민주노총이라는 조직구조 자체가 총연맹의 흐름을 갖고 지역조직으로서 따라가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죠. 결과적으로는 그 주된 흐름이 민주노총의 지역활동이라는 것에 일정정도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금 와서는 평가를 하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거를 같이 공유하고 토론하고 이럴만한 상황도 안됐었고, 상근활동도 혼자 하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다보니까 여유가 없었죠.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임·단협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대부분이었는데, 제주도 같은 경우는 단위 사업장에서 임·단협을 하고 파업을 하는 데가 거의 없어요. 지금도 보면, 제주본부에 소속된 단위가 50개라고 하면 제주도 자체에서 임·단협을 하는 데는 10군데도 안됩니다. 대부분 본조가 육지에 있고, 여기는 본조의 지부나 지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자동차, 한통(한국통신), 사보(사회보험노조)... 다 그렇습니다. 본조에서 파업한다고 그러면 좀 하다가 올라가 버리고...”

 

제주지역은 전교조와 KT 같은 전국단위 노조의 지부(또는 지회)로 조직된 경우가 다수이고, 호텔과 대학과 병원 등의 사업장이 주로 조직돼 있지만 이들 사업장 역시 50명 정도 규모의 크지 않은 사업장들이다. 그런 지역적 특수성에서 민주노총 지역본부는 할 일이 많지만 성과들이 축적되기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런 속에서도 크고 작은 투쟁들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중 가장 힘겨웠고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던 투쟁 중의 하나가 2002년 한라병원 파업투쟁이었다.

 

“한라병원투쟁이 민주노총 만들어진 이후에 제주지역에서 가장 크게 벌어졌던 투쟁입니다.

처음에 조합원이 70명 정도였는데 전부 정규직이었습니다. 비정규직이 들어왔지만 별로 그렇게 개념을 잡지 않은... 고용에 대한 심각성도 없었고... 병원이라는 곳이기 때문에 정규직 비정규직 임금차이가 많이 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단협을 하는데... 실질적으로 파업을 하게 된 주원인은 계약직의 고용안정 문제였습니다. ‘계약직이 점점 늘어나버리면 노동조합 조직력이 약해진다’는 원론적인 이런 것도 있었지만... 같은 학교 나온 선후배 관계들인데 ‘선배들이 계속 이렇게 있을 거냐. 싸워야 될 거 아니냐’ 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문제를 위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선 경우죠. 이것이 부각돼야 되는데, 한라병원 사례하면 그것은 부각되지 않고 ‘용역깡패 와서 이래 했다’ ‘물대포 쏘우면서 우린 투쟁했다’ 이런 것만 부각돼 버렸어요.

사용자측에서 대응을 무식하게 한 점도 작용을 했죠. 조합원 전부를 해고시켜 버리고, 용역 오고, 거기에 비혼자들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싸움이 되는 거잖아요. 타협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런 것이 300일 동안 파업한 원동력이 됐던 겁니다.

처음에는 정규직들이 (조합원도 아닌) 비정규직 문제로 싸웠죠. 투쟁 40~50일 정도 될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면서 커졌죠. 그 당시 전체 종업원이 300명 정도 되는데, 비정규직이 100명 정도 있었고, 정규직이 200명 정도 있었고... 파업 시작할 때 조합원이 70명 정도 있었는데, 전부 정규직이었고... 파업 중에 비정규직이 30명 정도 가입하고, 나중에 붙은 사람도 비정규직도 있었지만 정규직도 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게 많은데... 조합원과 조합원 가족에 대한 손해배상... 지금은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쇼킹한 일이었죠.”

 

장기간 진행된 한라병원 투쟁은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역량이 최대한 집중하면서 노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연맹 중심성 보다는 지역본부 중심성이 강했던 제주지역의 특성상 연맹과 지역본부간의 유기적 결합은 매우 원활했고, 결국 지역의 동력으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런 과정들 속에 미조직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를 고민하기 시작해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결정으로 제주지역일반노조가 2004년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고승남은 민주노총 간부이자 일반노조 사무국장으로 이중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일반노조가 04년에 만들어지는데... 04년에는 3명이 만들었는데... 그 당시에 민주노총 제주본부의 상근자가 늘었으니까 제주본부 상근자 2명하고, 밖에 있는 노동자 1명하고 해서 만들었습니다.

만들게 된 취지는 다른 데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데... 제주 같은 경우는 5인 미만 사업장이 제주도 전체 사업장의 90%가 넘어요. 그러다보니까 그 5명으로 노동조합 만드는 게 솔직히 안 돼요. 인맥으로 얽힌 문제도 있고... 그러나보니까 ‘제주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뭐냐’ 그런 고민 속에서 일단 일반노조 만들어서 노동조합 가입시키고, 가입시키는 속에서 필요하면 조직도 만들고, 안 그러면 개별적으로 가입만 시키고... 그러면 일반적인 노동조합 활동은 되니까...”

 

상근역량을 두기 어려운 조건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현장을 조직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4년 여의 기간을 달려온 결과 성과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조합원들도 시립예술단, 쓰레기 소각장, 아파트 경비, 건재상 등 10여 개 업체에서 다양하게 조직돼 있다.

 

“만들면 그야말로 정신없는 거죠. 단체협약하고, 개별교섭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것에 개입해서 풀어주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다반사죠.

우리는 ‘업종과 규모와 정규직 비정규직을 떠나서 일반노동조합은 하나의 노동조합이다. 우리는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은 많이 강조를 하죠. 교육할 때도 강조하고, 투쟁할 때도 강조하고... 어떤 한 사업장에서 문제가 생겨서 가면 다른 사업장도 같이 가서 싸워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이제는 조합원도 그렇고 간부들도 그렇고 ‘일반노동조합은 같은 조합원이구나’ ‘사업장이 달라도 다른 노동조합이 아니야’ 하는 것은 조금 생겼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서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런 쪽으로 유도도 하고...

크게 싸우든 적게 싸우든 성과를 남기니까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죠. 그걸로 조직을 끌고 가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이 경험되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거죠.”

 

노동조합 조직체계문제에서 지역일반노조와 산별노조와의 관계는 정리돼야 할 문제들이 많다. 이에 대해 고승남은 지역중심성을 강조했다.

 

“일반노조를 만들 때 지역본부에서 결의해서 만들었고, 그 다음부터는 제주지역일반노동조합는 민주노총으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는 겁니다. 민주노총에서 돈 받는 사람이 일반노조 일 하는 것을 인정해주고, 가서 나름대로 교육도 하고... 그런데 만약에 민주노총 상근자로서가 아니라 일반노동조합 상근자로서 일을 했다면 굉장히 부딪히는 일들이 많았을 거 같아요. 예를 들면 ‘대산별로 가야하는데 왜 일반노조를 만드느냐’ 이런 논쟁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런 논쟁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총연맹차원에서도 시급하게 논의되고, 일반노동조합 내부에서도 논의되고 해야 되는 건데...

전국의 일반노조 중에서 공공서비스노동조합으로 결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반노동조합들이 예산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 때문에 한계에 부딪힌 거죠.

저는 산별과 지역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해서 논쟁이 됐으면 좋겠는데...

지역에서 하다보니까 지역중심으로 묶어서 활동 하는 것이 재미도 있고, 유익한 점도 많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산별로 하는 것보다는 싸우는데도 용이한 점이 있더라고요. 제가 일반노조의 사무국장이기 때문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주에서 산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저는 그런 고민을 하는데... 일반노동조합이 일정 정도 크기가 되면 산별로 보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려면 일반노동조합의 자생력이란 것은 고민을 하지 말아야 되고, 그러려면 민주노총이나 산별에서의 전략적 투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활동가들에 대한 활동비는 줘야 하니까... 그렇지 않으려면 산별이 지역체계로 전환을 하든가...”

 

민주노총이 전국적 조직체계를 갖추고 산별노조로의 전환들이 이뤄지면서 노조운동은 전국적 통일성을 갖춰나가게 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면서 정치운동도 역시 중앙과 지역의 시기적 차이가 없어진다.

 

“전국적인 상황에서 제가 피부로 느끼기에는... 2000년 들어가기 전에는 출발이 2년 정도 늦었기 때문에 육지부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 2년 정도 늦게 나왔는데, 요즘은 거의 비슷해요. 그것은 어찌됐든 산별과 민주노동당의 영향, 인터넷의 영향이죠.”

 

타 지역보다 1년 늦은 2001년 만들어진 민주노동당 제주도당에서도 민주노총 제주본부의 역할은 중요했다. 그러나 그동안 당과 노조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라는 거대한 대중조직을 등에 업으려고 그들이 원하는 것에 주목한 것이 사실이고, 민주노총은 현실적으로 얻어야 될 것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해서는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쉬운 길을 가려고 했던 거죠. 싸우는 것보다는 요구하는 게 편하잖아요. 서로 편한 길 가는 거죠. 서로 용인하면서...”

 

민주노총 제주본부는 제주지역에서 높은 조직력을 갖고 있으면서 지역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비노동 영역에 대한 개입은 상층연대 이상이 아니라고 고승남은 얘기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가장 먼저 실험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곳이 제주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들은 주요한 현실투쟁이다. 하지만 그에 맞선 투쟁들도 패배의 연속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은 신자유주의 실험무대라는 측면에서 일찍부터 이야기 해온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반대’라고 내걸지 않아도 내용은 그것인 거죠.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주국제자유도시 조성에 대한 특별법, 특별자치도 특별법 등을 중심으로 끝임 없이 대결해 온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속 밀린 거죠. 밀린 가장 큰 이유는 전반적인 경기침체라든지 양극화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심각해지면서 다수를 차지하는 못사는 사람들이 ‘개발이라도 좋다.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냐’ 이러는데... 그런 것을 해결해줄 능력도 없고 담론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그러다보니까 질 수 밖에 없는 거죠.

전국적인 상황도 마찬가지고, 이명박이 압도적인 득표로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지금은 신자유주의 실험도 해보기 전에 특화가 아니라 일반화가 돼버리니까... 제주도라고 해서 그거에 대한 인센티브를 받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이제는 전국화 돼니까...

아쉬운 건 그런 흐름들이 본질에 대해서 폭로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그러면서 이 싸움에서 조그만 것이든 큰 것이든 이기고... 그런 것을 못했던 거죠. 실력이 없으니까... 이기지 못하니까 우리는 약화되는 것이고...

싸움은 많이 했는데 할 때마다 지더라고요. 싸움을 안 한 건 아닌데... 싸울 때마다 지니까 싸우자고 하는 것도 갑갑한 상황이 돼버리는... 뭘 갖고 싸워야 될지 모르겠어요. 의제든 뭐든... 앞으로는 이기는 싸움을 조직해야죠. 구체적으로 이기는 싸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이기는 싸움을 하면서 모아나가는...”

 

제주지역은 고립된 섬이어서 지역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 공동체성은 보수적 측면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 활동가들에게는 이중적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은 하나 있어요. 음흉함이 없어진다는 거, 이른바 자기검열이 된다는 거죠. 항상 맹심(조심)해야 되니까. 룸싸롱을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에 다 드러날텐데... 또 하나는 그것이 비타협적인 투쟁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존재합니다. 장단점이 있어요.”

 

고승남은 2008년 민주노총 간부활동을 정리하고 지역일반노조 상근간부로 옮겨가게 된다. 나이 사십을 앞두고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금은 내 스스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워낙 강렬해서 생계문제와 같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감수해버리지 뭐’하는 생각이 있어요. 어려움은 있겠죠. 그 어려움보다는 내가 변해야 된다는 게 더 커요.

매너리즘이라고 표현해도 좋고 뭐라고 표현해도 좋은데... 이게 나도 그렇고 민주노총도 그렇고 서로 제 살 깎아먹는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받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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