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호텔리베라 박홍규 이야기

13년 연속으로 노조위원장을 장기집권 한 사람이 있다. 언뜻 부패한 노조관료의 이미지가 떠오를만한 그 13년의 역사는 법정관리 정리계획안 철회투쟁, 노조와해기업 인수저지투쟁,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127일 파업투쟁, 위장폐업에 맞선 619일 투쟁의 역사였다. 노조 내부의 철저한 민주성과 대전지역의 책임 있는 연대투쟁으로 만들어낸 투쟁들이었다. 호텔리베라 박홍규 동지를 만나 그 투쟁의 얘기를 들었다.

 

충남 논산에서 나고 자란 박홍규는 1년 재수 끝에 85년 한남대 화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학생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채 봉사동아리인 RCY(청소년적십자) 활동을 하고 있던 1학년 말 우연치 않게 학생운동을 접하게 된다.

 

“동아리생활하면서 우리 친구들이 ‘총학에 한번 도전해보자’한 것이 85년 12월 방학하기 전이예요. 지금 생각하면 민족 쪽에 가까운 의식들을 가진 친구들이었던 거 같아요. 우리는 아리랑이라고 모여서 ‘총학에 한번 도적해보자’ 해서 4명이 뜻이 맞은 거예요. 거기서 정-부(총학생회장후보-부학생회장후보) 이렇게 내고... 86년 초부터 선거준비를 시작한 거예요. 학내분규가 85년 86년 계속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86년 분규 때에는 화염병 던지면서 이런 거를 굉장히 자주하고 많이 했어요. 그런 거를 좀 해본 거고...”

 

그렇게 10개월 준비를 해서 총학선거에 도전했지만 떨어지고 2학년을 마치면서 박홍규를 포함해 선거를 준비했던 친구들은 모두 군대를 가게 된다.

군대를 마치고 90년 복학해서는 그동안 부족했던 학점을 채우느라 정신없는 기간을 보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위한 이런저런 고민이 있을 때 당시 막 생겨난 환경기사 자격증을 따 놓은 것이 이후 호텔리베라에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졸업을 앞둔 91년 12월 선배가 운영하는 화학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전기감전 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명백한 산재였지만 본인의 과실 때문이라고 생각한 박홍규는 어느 정도의 치료만 마치고 몰래 병원에서 도망 나오고 만다. 이후 취업을 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계속 취업시험을 치르지만 번번이 낙방하는 과정에서 아는 선배의 소개로 호텔리베라 대기기사로 입사하게 된다. 92년 7월의 일이다.

 

“그때 노동조합이 있었고... 제가 들어올 때 2대 선거를 하고 있었고... 옛날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 여기 노동조합이 있구나. 잘 들어왔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67만원을 준다던 월급이 받아보니까 43만원을 준 거예요. 그때 당시에 계약 이런 것도 없었고, 말만 듣고 입사했는데... 호텔은 성수기와 비수기가 뚜렷합니다. 여름이 비수기고, 제가 여름에 입사했는데... 그때는 입금체계가 기본금 플러스 봉사료라고 해서 팁으로 먹고 살아요. 그래서 67만원이 가장 좋을 때 기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반감이 굉장히 많이 생겼어요.

노동조합 선거를 하고 다음에 대의원선거를 할 때 팀별로 대의원 배정을 해요. 제가 호텔 리베라 시설과 인데 거기에 대의원 배정이 2명 있었어요. 저는 신참인데 ‘제가 대의원 한 번 해보겠다’고 자청해서 손을 든 거예요. 그래서 93년에 대의원을 했어요.”

 

호텔리베라는 87년 서울에 문을 열고 대전 유성에는 88년 문을 열었던 회사였다. 그리고 당시 시대분위기 속에 88년 서울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89년 유성에 지부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노총 소속 이었던 호텔리베라노조는 특별한 활동력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대학시절 잠시 총학생회선거에 도전했던 경험으로 두 번에 걸쳐 대의원활동을 하게 된 박홍규는 조합원 보다는 대표자들 중심으로 움직이는 노동조합 활동에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그래서 95년 10월 3기 임원선거에서 유성 지부장에 출마하게 된다.

 

“4명이 출마를 했는데, 그때 제가 가장 나이가 어렸어요. 그리고 신출내기였고... 세력도 없고... 그런데 사람들한테 대게 신선했던 모양이에요. 저는 ‘노동조합 사무실이 현장에 있다. 직접 달려 나가서 움직이는 역동성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겠다’ 그랬어요. 돈 몇 프로 올려주겠다 이런 공약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결선투표까지 가서 당선이 됐어요.”

 

젊은 폐기만으로 지부장에 당선된 후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간부를 인선하고 풍물패도 만들면서 의욕적인 노조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는 가장 강점이 어렸다는 것하고, 가장 신선했다는 거예요. 저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6년 동안의 사람들이 바뀌었으면 좋겠다’하는 것이 선거판을 뒤집는 거였어요. 그래서 간부 구성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웠었고... 전체적인 간부구성이 가장 젊은층, 그리고 회사 직급으로 거의 사원급들이 간부로 구성됐어요. 대표자중심에서 조합원중심으로는 못했지만 간부중심으로는 됐어요. 그때 간부들은 굉장히 열성적으로 활동을 했어요. 간부들이 서른 명 넘었거든요. 간부들도 많이 늘렸어요. 그때 한국노총 사업장에서 투쟁하는데 연대 다니고 그랬어요.”

 

지부장에 당선된 1년 후인 96년 연말 노동법개악에 맞선 민주노총 총파업이 벌어졌고, 당시 한국노총도 97년 초 총파업지침을 내리면서 처음으로 파업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노개투 총파업 때 97년 연초에 한국노총도 이틀 파업하라는 지침이 내려왔어요. 그때 우리는 ‘한다’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이거는 정부하고 싸우는 건데 우리 회사 문 닫을 일 있냐? 최소인원은 남기고 나가라’ 그랬어요. 고민하다가 간부회의 하니까 ‘최소인원 남기고 나가자’ 그러는 거예요. 그때 230~40명 조합원 있었는데, 업장에 한 두 사람만 빼고 2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다 나간 거예요. 최소인원을 남긴다는 노사협조주의적인 것은 있었지만, 그때 우리 딴에는 굉장히 컸던 거죠.”

 

우성그룹 소속이었던 호텔리베라는 96년 1월 우성그룹이 부도를 맞으면서 법정관리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당시 채권단은 유성호텔을 분리매각 하는 법정관리 정리계획안을 내놓았고, 이에 노조는 법정관리 정리계획안의 분리매각 저지투쟁을 벌이게 되고 채권단은 통합매각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

우성그룹 소속 10개 노조들과 공동투쟁도 벌이고,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을 상대로 활발한 투쟁을 벌이면서 정상화를 위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박홍규는 98년 10월 지부장에 다시 단독출마하면서 연임을 하기 시작했다(호텔리베라노조는 임원의 임기가 3년이다). 그리고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한국노총의 운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 그런 비판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호텔노조들(롯데호텔, 스위스 그랜드호텔, 하얏트호텔, 힐튼호텔, 해밀튼호텔, 리베라호텔 등)과 함께 민주관광연맹을 결성해 98년 말 민주노총에 가입하게 된다.

 

99년 호텔리베라를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나서면서 인수협상이 진행되는데 그 기업은 노조와해공작으로 악명을 날린 바가 있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미란다호텔은 인수한 후 노조를 와해시켰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70여 일간의 파업투쟁 끝에 무너졌던 이천 미란다호텔 노조를 방문해 얘기를 전해들은 호텔리베라노조는 인수거부투쟁을 벌이게 됐고, 이 투쟁으로 호텔리베라 인수가 무산되면서 법정관리기간은 더 길어진다.

 

다시 해를 넘긴 2000년 10월 신안그룹에서 인수의향서를 제출하면서 인수협상이 재개 되고, 노조는 고용관련 8대 요구안을 제시하면서 인수협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2000년 10월에 신안자본이 인수의향서를 제출했어요. 인수의향서는 서울 유성 합해서 807억 제시를 한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노조, 단협, 고용승계를 다 하겠다는 내용이 있었죠. 노동조합도 인수의향서를 보고 ‘그런 좋다. 한번 만나서 구체적으로 인수에 대한 거를 얘기해보자’ 그래서 본격적으로 신안하고 얘기를 하게 된 거예요.

노동조합이 그때 노조승계, 단협승계, 고용승계 이런 거를 더 구체적으로 해서 ‘고용관련 8대 요구안’이라고 제시를 했어요. ‘인수 전에 합의해라’고 제시를 했는데, 그룹에서 ‘인수의향서에 노조승계, 고용승계, 단협승계 다 해준다고 그랬는데 그거를 굳이 그렇게 합의해야 되냐? 못한다’ 이렇게 나와서... 그들이 인수의향서 제출을 하고 구체적으로 인수절차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채권확인을 하기 위해서 실사를 하잖아요. ‘니네 이거 합의하지 않으면 실사 틀어막는다’ 그러면서 싸움이 시작된 거예요. 틀어막고 못 들어오게 저지하고... 그래서 실사를 못했어요. 그 투쟁을 하고 8대 요구안은 합의를 끌어냈죠.”

 

그렇게 오랜 법정관리 기간 끝에 신안그룹에 인수되면서 호텔레베라노조는 힘겨운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다.

 

“2001년 1월에 완전히 인수한 거예요. 본격적으로 경영권까지 행사를 하고 오너가 된 거죠. 그때 얘네들이 태도가 변하는 거예요. 8대 요구안이 지쳐지지 않고, 단협이 지켜지지 않고...

설날에는 노동조합과 선물을 협의를 해서 지급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얘들이 일방적으로 선물을 내려 보낸 거예요. 자본의 본거지가 전남 신안인데... 신안에서 홀홀단신 올라와서 자수성가해서 성공한 얘인데... 그 지역 특산물을 사줘야 하는데... 그걸 일방적으로 푼 거예요. ‘이건 안 된다. 포장해!’ 그래서 화물차를 불렀는데 명절 목전이라 따불을 줬어요. 본사 앞으로 보내버린 거예요. 유성에서 보내고, 서울도 보내 버리고... 그러면서 신안 박순석 회장하고 붙은 거예요.”

 

노조와 회사측과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노조는 공세적으로 투쟁을 준비했다.

 

“8대 합의안이 지켜지지 않고... 그때 당시 비정규직이 23명이 있었는데 ‘23명 다 정규직 해라’ 그래가지고 교섭에 맞물려서 투쟁을 준비한 거죠. 교섭도 잘 안 풀렸고... 그래서 2001년 6월 21일 첫 파업을 하게 된 거죠. 그때 정확하게 7일 파업을 했어요. 우리는 조합원들이 거의 100% 참여를 했고, 한두 명 눈치보고 빠진 애들 다 제명해버렸고... 현장 마비되고 7일 만에 얘들이 손을 들었어요. ‘23명 비정규직을 21명 정규직 시켜주겠다’ 임금인상 8.6% 인가 그랬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IMF 후폭풍이 있었어요. 상당히 많은 인상률을 보이면서 타결을 했어요.”

 

2001년 파업투쟁 승리 이후 다시 임원선거가 돌아왔다. 두 번에 걸쳐 연속으로 6년 동안 지부장을 했던 박홍규는 더 계속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불출마 뜻을 비쳤지만 간부들이 완강하게 출마를 요구했다. 이에 임원후보 등록을 앞두고 잠적하는 일까지 있었지만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간부들에 의해 다시 지부장 후보로 등록돼 버린다. 그렇게 3번째 임기를 맞이한 것이다.

다시 지부장에 당선된 후 2002년을 맞이하면서 노조는 투쟁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다. 회사의 태도는 변화가 없는데 2002년 월드컵 분위기 속에 파업투쟁을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2001년 승리를 해서 들어와 보니까 여전히 오야지 스타일 이예요. 돈은 주는데 찜찜하게 주는 거예요. 2002년 월드컵이 있었는데, 대전 월드컵 경기장의 본부호텔이었거든요. 외국에서 많이 오고 그랬는데... 2002년 파업을 하냐 마냐 하고 간부들이 치열하게 논쟁이 붙은 거예요. 서울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워낙 큰 호텔이 많았기 때문에... 유성이 할거냐 말거냐... 치열하게 논쟁이 붙었어요. 본부호텔이라는 게 부담스러운 게 있었어요.

2000년 롯데호텔을 비롯한 호텔3사 투쟁을 연대하러 많이 다녔었거든요. 그때 남북정상회담 하는 속에 투쟁을 하는 걸 보니까 ‘그거 별로 안좋더라’ 이런 생각이 저도 있었고... 간부들도 상당수가 ‘이번 한 해만 참아보자’ 그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붙었어야 된다 싶어요. 한 번 쉬니까 기간이 길어져버리고 밀리거든요.”

 

2002년 한 해를 무분규로 보낸 영향은 2003년 정리해고를 포함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나타났다.

 

“2003년 임단협 기간이었는데, 얘들이 2002년 준비해서 2003년 ‘노동조합 깨겠다’ 작정을 하고 덤빈 거예요. 그게 2003년 파업투쟁인데... 2003년 8월 3일 조합원 90% 정도가 파업에 동참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얘들이 준비를 해서 2001년에 비해서는 10% 정도가 떨어져 나간 거예요. 그때 당시 서울이 8월 2일 하루 먼저 들어갔고, 유성은 부분적으로 업장폐쇄를 한 거예요. 그게 128일 파업투쟁을 하게 된 거예요. 파업대오가 서울이 170여 명, 유성이 190여 명 그랬어요.

그러다가 한 달이 넘으면서 서울에서 후유증이 굉장히 심했어요. 유성은 어렵다고 해서 포기를 한 거 같고... 서울에만 집중적으로 회유와 협박을 했고... 우리가 여기서 투쟁할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서울로 상경을 많이 했고... 투쟁이 50일 60일 되면서 서울 대오가 점차 현장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서울 대오가 90일 넘으면서 40여 대오 빼고 다 복귀를 해버린 거예요.”

 

2003년 이전의 투쟁들도 쉬운 투쟁은 아니었지만 그룹차원에서 작정하고 달려들었던 2003년 투쟁은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선 투쟁이었다. 그 힘겨운 투쟁을 벌이기에는 단단한 조직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단위노조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려웠다. 또한 장기간의 파업투쟁은 내부 조직력을 계속 유지시켜내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가 열사정국 때였어요. 우리가 강고하게 조합원 대오들이 흔들림 없이 투쟁을 하니까 민주노총 지역본부 사무실을 여기로 옮겨 버렸어요. 호텔 앞쪽에 천막을 세 동인가 네 동을 쳐서 사무실을 옮겨 버렸어요. 굉장히 의지를 가진 거죠. 우리도 굉장히 탄력을 받은 거죠. 100일을 투쟁하는데 90% 참가하는 조합원 중에 99일째 딱 2명 이탈하고 한 명도 이탈을 안 했거든요.

우리 로비에 대전과 충북지역까지 금속대오가 700대오가 올 정도로... 그리고 유성 시가지를 약 800대오가 시가행진을 하면서 ‘호텔리베라 정상화’를 얘기할 정도로 지역도 우리 투쟁에 올인 했어요. 그때 지역의 연대는 대단했어요. 군량미(쌀)가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로... 우리가 초기에 한 번 쌀을 사다 먹고 그 다음에 한 번도 쌀을 사다 먹지 않았어요.

그때 우리도 투쟁조직을 9개조로 운영했어요. 이게 2001년에 만들어져서 2003년 파업투쟁에 그대로 이어지고, 2004 폐업투쟁에도 그대로 갔어요. 지금도 사람들 그대로 모임을 하고 있어요. ‘노동조합 아니면 안 돼!’ 이런 것들이 조합원들 머리에 다 박혀서... 노동조합이 그 개개인에 대해서 끈끈한 것이 굉장히 강해요. 여기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사수대 포함해서 한 조당 평균 20여 명 되는 9개조를 완벽하게 운영을 하고... 여기서 철저하게 조별토론을 통해서 문제점이나 조별 안건이나 이런 것들을 모으고... 이 토론들을 꾸준히 했어요. 조별 문제제기를 안건으로 만들고 전체토론을 하고, 이게 전체토론의 내용이 아니다 그러면 전체투표 하고... 본인이 어떤 날 한마디를 하더라도 이게 전체토론 시간에 나오는... ‘내가 뱉으면 이게 실제 이뤄지는구나’하는 것을 굉장히 모범적으로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지역의 동지들이 투쟁경험이 있는 동지들이 많아요. 이 동지들이 교육을 계속 붙어주는 거예요. 전국의 내노라하는 강사들 계속 붙여주고...”

 

대전지역을 중심으로 완강하게 버티면서 노사 간에 합의가 도출될 즈음 의외의 지점에서 내부 논란이 발생하면서 투쟁전선은 급속히 무너진다.

 

“그때 서비스연맹에 교섭권을 위임했는데 여기서 적극적인 책임교섭이 이뤄지지 않았고... 그전에 유성하고 서울하고 내부적으로 이완되기 시작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 점이 나는 결정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데...

파업투쟁을 하면서 교섭이 붙었어요. 교섭을 하면서 민·형사상의 문제 등 이런 것들 다 합의를 하고 딱 한 가지가 남았어요. 봉사료, 팁제도를 96년~97년에 기본급화 시키는 안정적인 임금체계로 바꿔놓고 있었어요. 성수기에 잉여분을 모아 놓았다가 상반기와 하반기에 안정적으로 나눠주기로 합의를 해놓고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서울이 장사가 잘 될 때예요. 봉사료 잉여분을 서울은 조합원 1인당 100만 원 정도 돌아갈 때고, 유성은 약 10만 원 정도 돌아갈 때예요. 서울은 비정규직이 많았어요. 비정규직에게 이거를 나눠줬을 때는 그만큼 정규직에게 돌아가는 게 적어지죠. 그때만 해도 정규직에게만 나눠주는 걸로 있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회사에서 걸고 넘어온 게 ‘이거 비정규직에게도 다 나눠주자’는 건데, 우리는 나눠주더라도 몇 만원 차이가 안 났거든요. 그리고 투쟁에 이겼고 타결점이라고 봤던 건데... 그때 당시 본조 박동민 위원장도 타결점이라고 봤는데... 서울 내부에서 ‘이거를 비정규직에게 왜 나눠주냐’는 것이, 우려를 하기는 했었는데, 실질적인 쟁점이 붙어버린 거예요. 그때 나는 ‘합의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논쟁이 붙을 때 유성으로 내려왔어요. 서울에서 간부들이 논쟁이 붙었는데 ‘무산됐다. 합의 안 하기로 했다’ 그래서 회사 최종안을 안 받았어요.

그 이후로 회사가 ‘이렇게 했는데도 합의를 하지 않는다’하면서 파괴공작을 막 하기 시작했고, 서울이 급속하게 무너져 내렸고... 그렇게 하면서 100일 넘고 그러면서 조직력이 40여 대오에서 2003년 12월이 지나면서 23명이 남았어요.

그래서 결국 결심을 하게 된 게 교섭권을 지부에 달라는 거였어요. 그때 서비스연맹에 교섭권을 위임하고 있었는데, 연맹에서 투쟁과 교섭을 책임지는 형태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박동민 본조 위원장을 만나서 ‘교섭권을 지역본부에 맡겨야 될 거 같다. 지금 지역본부 사무실이 유성 리베라에 와 있고, 지역 동지들이 완강하게 연대투쟁 하고 있고... 연맹만 믿고 있을 사안이 아니다. 교섭권을 줘라’ 그러니까 고심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연맹 위원장 동의 받고, 본조 위원장 동의 받고, 나는 지역본부에 교섭권을 위임했죠.

유성은 그렇게 하면서 바로 노동청 중재 들어간 거예요. 그렇게 하고 20여 일만에 합의하고 끝났고... 서울은 위원장하고 7명만 남고 거의 다 떠나고... 그런 결과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저는 이런 얘기를 하지만 ‘그때 니네가 조직력이 있었으니까 니네가 완강하게만 버텨줬으면 서울도 같이 살았다’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죠.”

 

2003년 파업투쟁의 후유증은 컸다. 본조인 서울은 노조조직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박동민 본조 위원장이 노조활동을 정리하며 유성을 본조로 해서 박홍규 위원장 직무대행체제로 전환한다. 유성 조합원들도 장기파업 이후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회사의 공세는 다시 시작됐다.

 

“그렇게 복귀를 했는데 얘들이 태도변화가 없는 거예요. 현장에서 더 압박하고... 2004년 단체교섭을 하는데 ‘이거 또 투쟁이다’하고 직감적으로 느끼겠더라고요. 당시 피로감이 굉장히 컸죠. 그것도 무노동무임금을 수용하고 들어갔는데... 그거를 믿고 막 까는 거예요. 감시 감독을 더 철저하게 하고...

우리는 복귀하면서 현장투쟁을 한다고 조합원들이 모여서 결의를 했는데, 회사 탄압이 거세지면서 흔들리는 거예요. 바로 간부회의를 소집해서 지침을 다시 내리죠. ‘우리는 조별활동을 지속한다’ ‘현장에 생기는 문제는 바로바로 간부들에게 보고한다’ 그러면서 쭉 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투쟁조가 왕성해졌고, 노동조합은 투쟁조들을 밖으로 끌어내서 ‘현재 조직은 어떻다’ 이런 얘기를 듣는 거예요. 현장에서 억눌렸다가 밖에 나와서 조활동을 하고...

그렇게 버티면서 6월까지 간 거예요. 2004년 단체교섭을 위해서 간부수련회를 갖는데, 간부들이 쭉 빠진 상태에서 이것들이 전체 직원을 모아놓은 거예요. ‘우리 폐업할 수밖에 없다. 누적적자에 의한 폐업이다’고 폐업을 공표해 버린 거예요. 조합원들한테 바로 전화가 온 거예요. 얘들이 그때 공표한 것이 ‘7월 30일까지 정리하고 8월 1일부로 폐업한다’였거든요.

그날 투쟁체로 바로 전환하고 투쟁을 시작했어요. 그때 초기만 해도 대단했어요. 2003년 투쟁했던 조직력이 살아있지, 현장에서 이 새끼들이 탄압하고 압박하고 이런 것들을 다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이미 장기파업투쟁을 경험했던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사측의 폐업방침을 전해 듣고 그 이상의 장기투쟁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장기파업 이후 경제적 어려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조합원들은 1인당 10만원씩의 투쟁기금을 결의하면서 장기투쟁에 대한 대비를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8월 1일부로 폐업을 했는데,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최소 3개월 최대 7개월까지 있었어요. 개인별로 다 파악을 해서 ‘3개월 끝나는 사람들은 끝나면서 생계투쟁을 할 수 있다. 이것도 투쟁이다.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랬어요. 투쟁이 길어질 것을 예상해서 우리 스스로 생계투쟁이라고 지칭을 했어요. 투쟁기금을 매월 7만원에서 10만원을 내라. 그리고 주 1회 집회에 결합하고, 9일에 한 번 철농 결합해라. 그것을 만약에 안했을 시 3만원 벌금. 이렇게 굉장히 빡세게 짜논 거예요. 그거를 지도부가 짠 게 아니라 조별토론에서 의견들을 모아서 전체가 만든 거예요. 조합원 스스로가 만들었기 때문에 이거를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조합원들이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어요.”

 

장기투쟁을 각오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투쟁이 길어지면서 닥쳐오는 생계의 어려움은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힘들기 시작한 게 실업급여 7개월이 끝나는 시점이었어요. 그때는 경제적 어려움이 누적이 돼있었어요. ‘생계투쟁이라고 만들어 놨는데 조직이 없으면 안 된다’는 고민이 들었어요. 그래서 리베라 대리운전 만들어서 20명 정도 보냈어요. 낮에 투쟁하고 밤에 대리하면 지역동지들이 불러주고... 간부들이 주축이 돼서 대리운전을 했어요. 대리운전을 해서 근 1년을 간부들이 모였죠.

그리고 또 강점이 됐던 것이... 우리가 남녀 비율이 반반이 되는데... 그릇 닦는 동지들, 청소하는 동지들은 아주머니인데 남편분들이 벌고 계세요. 이 동지들이 약 30~40 대오가 기본대오가 돼 버린 거예요. 그게 결과적으로 핵심조직이 돼 버렸는데... 그 조직에 대의원조직이 있으니까 1년 넘으면서도 60~70대오가 유지가 되는 거예요.”

 

위장폐업저지투쟁 과정에서도 지역연대투쟁의 힘은 다시 발휘됐다. ‘대전에서 리베라투쟁은 지역이 책임진다’는 분위기 속에 가장 고민스러웠던 재정문제에 대해서 지역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가장 우리에게 컸던 것은 지역 동지들인 CMS결의를 했던 거예요. 그게 1년 정도 됐던 시점이었을 거예요. 지역동지들이 CMS결의를 하고 조직하고... 초기에는 한 달에 180만원 정도 들어오고, 나중에는 월평균 500만원 까지 들어왔어요. 만원, 3만원, 5천원, 3천원 그렇게 해서... 대단했죠.”

 

지역의 건강한 연대투쟁기운은 2005년 민주노총 지역본부장 선거를 계기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당시 선거에 수석부본부장후보로 출마했던 박홍규는 선거가 무산되고 난후 조합원들의 질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홍규 스스로도 “투쟁이 한참 진행 중인 상황에서 그렇게 출마를 하게 된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얘기하면서 이후 건강한 지역연대투쟁의 분위기가 갈라진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사측의 태도는 매우 완강했지만 전반적 분위기는 노조에 유리한 상황으로 이어져 갔다.

 

“지노위 중노위 이겨, 2004년 국정감사에서 박순석 완전히 똘똘말이 시켜... 이런 게 쭉 이어지면서 우리 조합원들은 힘들어지는데 투쟁 분위기는 상승세를 계속 타고 있었어요. 폐업투쟁은 긴 투쟁을 하면서 유지하는 투쟁만 했어요. 어디를 점거하거나 그런 강한 투쟁을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고 보는 거예요.”

 

2004년에 이어 2005년에도 국정감사 증인으로 나온 박순석 회장은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에게 깡패발언을 하면서 문제가 되기도 하는 등 사회적 분위기는 더욱 사측에 불리하게 돼갔다. 중노위 판결에 불복한 사측은 행정법원으로까지 재판을 몰고 갔지만 재판부마저 사측에 합의를 종용할 정도로 상황은 노조에 유리해져 갔다. 결국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진 사측은 임단협 승계, 고용보장, 폐업기간 생계비 300만원 지급, 비정규직 5명 정규직 전환 등의 내용에 노조와 합의를 하게 되면서 619일간의 위장폐업저지투쟁은 마무리된다.

 

폐업투쟁 기간과 복귀 후 어려운 상황에서 비대위 위원장을 계속 하던 박홍규는 2007년 10월 5기 임원선거에서 물러나면서 13년간의 기나긴 임원활동을 마무리 한다. 그러나 현장은 급증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투쟁과정에서 조합원들이 떠난 자리를 모두 비정규직으로 충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체 직원이 230명 정도 되는데, 그중에 120명 정도가 조합원이고, 그 나머지가 비정규직 이예요. 새로 충원된 사람들이 전부 비정규직으로 충원된 거예요. 그거에 대한 괴리감... 그런 부분들이 정규직이 되든 조합원이 되든 해서 같이 교육받고 그러면서 ‘그런 투쟁이 있었다’ 이렇게 하나가 돼야 되는 부분이 있는데 길어지고 있어요. 이거를 줄이려고 그동안 많은 투쟁을 했는데, 비정규직이 워낙 많다보니까 이원화되고 있죠. 우리 투쟁 대오 속에 이원화는 없는데, 새로 들어온 비정규직들과 이원화되는 거죠.

제가 걱정되는 게 정년퇴직을 앞둔 분 들이 있고 그러면서 120~30명의 투쟁을 끝가지 해왔던 대오들이 줄고 있어요. 그래서 빨리 비정규직들을 조합원화 시켜내지 못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학습이나 교육이 없어지면, 회사가 이 고리를 노려요. 그것이 지금 굉장히 중요한 점으로 보여 져요.”

 

임원에서 물러난 박홍규는 기나긴 투쟁 속에 단련된 노조간부들을 의식적인 활동가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얘기를 마무리 했다.

 

“우리가 긴 투쟁을 하면서 교육을 받은 거는 총연맹이나 지역본부를 통해서 짤막한 것이 거의 전부고... 집단적으로 학습을 통해서 의식을 다지고 사상으로 무장하고 이런 것들을 못했어요.

제가 하려고 하는 것이 그런 쪽이에요. 활동가 역할을 하자고 같이 고민하는 동지들이 투쟁했던 핵심 중에 좀 있어요. 활동가는 최소한 단위노조에 건강성이나 지속적인 이념이나 사상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그거에 동의하는 동지들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어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