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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민주주의

노동과 투쟁과 생활의 근거지로서 현장은 대중의 역동성이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는 토대이다. 이런 현장에서 대중을 주체화시키고 그 역동성을 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제도와 기풍이 제대로 서 있어야 한다. 그런 현장민주주의를 통해 대중은 서로를 신뢰하고, 자신과 주위를 바꿔나가는 것이다.

 

적발한 투쟁 공간에서 현장민주주의를 가장 모범적인 형태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대중주체의 직접민주주의는 하나 하나의 대중을 주체로 만들기 위한 최소 단위에서부터의 민주적 공동체운영에서 나타난다.

2001년 폐업에 맞선 갑을전자노조 투쟁과 장기간 노조 탄압과 구조조정에 맞서 투쟁을 벌였던 호텔리베라노조의 사례는 투쟁시기 현장민주주의의 생생한 모범을 보여준다.

 

“10명 단위로 8개 조를 짜서 조장들이 있어요. 농성을 하다보면 몸이 아파서 늦게 나올 수 있는 건데, 조합원들이 ‘얄짤 없다. 누군 안 아프고, 안 힘드냐? 규율을 분명하게 해야 된다’ 그래요. 나는 오히려 그렇게 하면 위화감 생길 수 있고 단결이 저해될까봐 걱정했는데... 조합원들이 조합원 투표 붙여서 압도적 다수가 ‘그렇게 해야 된다’ 해서 했어요. 조별로 출석 체크 다하고, 마지막에 일괄 정리할 때 출석률에 근거해서 지급했어요.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노동자 규율인거 같더라고요. 돈 한 푼 더 받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출근은 아침 8시까지 해서 그날 저녁 6시까지 일정이에요. 밤에는 2개조씩 돌아가면서 자고... 연대집회나 이런데 안 나가면 아침 집회부터 30분 하고 20분 쉬고 이런 식으로 계속 해요. 지루함 없이 해요. 그 진행은 간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별로 조원들이 나와서 하게 해요. 전체 율동에, 조별 율동에, 노가바(노래가사 바꾸기) 만들기, 구호 만들기 이런 것도 쭉 진행하고... 저는 로비에 앉아 있은 적이 거의 없어요. 맨날 회의도 해야 되고, 바쁘니까... 간부들 다수가 그랬어요. 간부들 바쁘니까 위에 있고, 조합원 자체적으로 다 운영했어요. 투쟁이 짜증스럽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 진짜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어올 수 있었던 거고... 그러면서도 빡 쎘어요.”

- 갑을전자 전 위원장 김소연

 

“그때 우리도 투쟁조직을 9개조로 운영했어요. 이게 2001년에 만들어져서 2003년 파업투쟁에 그대로 이어지고, 2004 폐업투쟁에도 그대로 갔어요. 지금도 사람들 그대로 모임을 하고 있어요. ‘노동조합 아니면 안 돼!’ 이런 것들이 조합원들 머리에 다 박혀서... 노동조합이 그 개개인에 대해서 끈끈한 것이 굉장히 강해요. 여기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사수대 포함해서 한 조당 평균 20여 명 되는 9개 조를 완벽하게 운영을 하고... 여기서 철저하게 조별토론을 통해서 문제점이나 조별 안건이나 이런 것들을 모으고... 이 토론들을 꾸준히 했어요. 조별 문제제기를 안건으로 만들고 전체토론을 하고, 이게 전체토론의 내용이 아니다 그러면 전체투표 하고... 본인이 어떤 날 한마디를 하더라도 이게 전체토론 시간에 나오는... ‘내가 뱉으면 이게 실제 이뤄지는구나’하는 것을 굉장히 모범적으로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 호텔리베라 박홍규

 

민주적 공동체운영을 배워나가는 과정은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배려, 그리고 진정성이 생명이다. 재단비리에 맞서 7년간 투쟁을 벌이면서도 이런 기풍을 잃지 않았던 에바다학교의 사례는 그것를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우리 내부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7년을 싸우면서도 투쟁에 대한 방향이라는 이런 문제 갖고 얼굴 붉힌다거나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처음에 사건 터졌을 때 학생들이 선생들에 대한 신뢰가 확고했었어요. 그 신뢰가 바탕이 됐던 거고. 부모님 같은 경우는, 처음에 농성을 시작하면서 선생님들끼리 그런 얘기를 했어요. 특히 부모님들 상대로 우리가 굉장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 싸움이 시간이 걸리다보면, 처음에는 ‘선생님 고생하십니다’ 그러지만 그 ‘고생하십니다’가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우리가 부모님들에게 ‘역시 우리 선생님들은 어딘가 다르구나’하는 인식을 심어주지 못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뒤죽박죽되는 일이 생길수도 있기 때문에 부모님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초기에 상당히 신경을 썼어요. 투쟁외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가 힘써가지고 도와주고 이러면서 선생이다 학생이다 부모다 이런 거 보다는 거의 한 가족처럼 지냈어요.”

- 에바다학교 권오일

 

현장민주주의는 제도적 형식의 문제일수는 없다. 일상생활에서부터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바탕이 된다.

 

“(학생회나 교사대표 선출 같은) 선거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소통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봐요. 충분하게 장애대중과 호흡하고 알려나가고 이야기 하면서 조직해 나가는 거죠. 투쟁사업도 바쁘고 그러다보면 딱딱 지침이 떨어져가죠. 장애대중이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전혀 모르고 들어오고.. 노들야학은 검정고시를 배우러 온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이 갑자기 운동의 주체로 서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충분한 과정과 소통과 교육이 동반되어져야만이 장애대중이 아래로부터 튼튼해지는 것인데... 그냥 내리꽂고 이렇게 하면 활동가들 몇몇은 잘 해낼지 몰라도 아래로부터 대중들이 동참하고 그럴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거든요. 그럴 수 있는 터전들이 별로 없어요.

검정고시라는 교육을 제공하지만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들이 주체로 설 수 있고 참여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끝임 없이 조직하는 거죠. 맨날 만나고, 술 먹기도 하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교육도 하고 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과정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에요.”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현장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공동체운영은 구성원 중심으로 한정돼서는 안 된다. 구성원을 중심으로 갇히는 순간 민주주의는 내부의 형식으로 축소되고, 공동체는 고사한다. 90년대 초반부터 구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해왔던 송경동의 경험은 이를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문학회 활동 하는 과정에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안 되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중간에 회원 조직의 한계를 느꼈던 거 같애요. 써클화 되는 운동에 대해서도 고민이 됐고... 저는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처음 설립했던 취지의 활동을 밀고 나가는 게 맞다는 고민을 했었으니까요. 나중에는 있는 회원들끼리의 친목모임처럼 자꾸 가게 되더라고요. 다른 사업들은 축소되고 자르고... ‘그런 것들을 넘어서 어떻게 가야 되나?’ 그래서 ‘전문적으로 노동자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자문학교육센터 이런 걸로 갈 필요가 있지 않나?’ 이런 고민을 했었죠. 그런데 잘 소통이 안 되더라고요. 아직은 동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니까... 회원들 모이고, 맨날 즐겁고 그러니까 좋잖아요.

전형적인 활동들이 안 만들어지다 보니 활동가층도 안 만들어져요. 모두가 조금씩 밖에 책임이 안 돌아가는 조건이다 보니 그랬죠.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을 더 투여할 곳들을 찾게 되요. 구심력은 자꾸 줄어들고 원심력만 생겨나가는 것을 보았죠.”

- 시인 송경동

 

2007년 부산에서 넘나들면서 울산과학대투쟁에 결합했던 우창수는 현장민주주의가 구성원 안에서만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것이 아니라 밖을 향해서도 민주적이고 공개적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강조한다.

 

“과학대는 전술과 전략이 아주 공개적인 거예요. 내가 농성장에 참여하는데, 할 수 있는 게 그대로 전력과 전술이 되고 집행이 되는 거예요. 이게 제대로 되니까 문화패가 시너지 효과를 낸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화요일 와서 농성장에서 노래배우기 하면서 즐겁게 놀고, 수요일 집회에 와서 대중적 공간에서 노래 부르는 거였거든요. 전략과 전술이 공개되면서 모여 있는 연대단위들에 의해서 공동으로 집행되고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거예요.”

- 노동가수 우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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