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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대추리 신종원 이야기

군사기지에 맞선 투쟁은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속에서 진행된다. 특히 미군기지인 경우 그 양상은 더욱 격렬하게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격렬한 투쟁만큼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된다. 미군기지 평택이전에 맞서 투쟁해왔던 신종원 팽성읍대책위 전 조직국장을 만나서 그 힘겨운 투쟁과 그 이후의 고통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신종원은 63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태어나서 계속 농사를 짓고 살아오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북 천안에 있는 대학을 다니기도 했지만 대학 졸업 후 86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시골이 어리거나 뭐하거나 일손 바쁠 땐 다 도와주고 그러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주저앉게 됐어요. ‘부모님들 농사지으니까 농사지어야 된다’ 이런 거보다도 생활이 그러다보니까 그냥 친근감이 있고 그래서...”

 

몇몇 뜻이 맞는 사람들과 위탁영농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던 신종원은 평택이 농사짓기에 천혜의 조건이다고 얘기한다.

 

“지금까지 가물어서 물 때문에 고생한 적이 중학교 2학년 때 한 번 밖에 없었어요. 안성천이 안성부터 시작해서 평택호로 나가니까 그 물줄기가 상당해요. 그 물줄기 때문에 물 걱정은 없었어요. 어디 가면 가물어서 물길 뚫느라고 장비들여오고 그러는 걸 봤는데, 그런 걸 몰랐으니까. 그렇게 농사짓기 좋은 비옥한 땅이었다고요.

농촌에서는 칠십 나도 청년이라고 그러는데... 우리 농사지을 때 20대였었고, 20대 30대 40대 50대 계속 있었으니까. 농토가 좋으니까 농사짓는 것도 괜찮았죠. 나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농사짓는 사람들이 꽤 됐어요.”

 

90년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건설 이전부터 활동했던 평택농민회는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농사를 짓고 있었던 신종원은 농민회 활동에도 참여하면서 농촌 현실을 바꾸기 위한 활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전부터 농민회가 있어서 활동들을 했어요. 그때 수세폐지, 고추나 마늘 이런 것 때문에 싸움하러 다니고... 그때는 농민회 활동한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빨갱이라고 그랬잖아요. 학생들 농활 온다 그러면 전담 직원이 붙어 다니고, 못 받게 하고... 경찰들이 이장이나 이런 사람들한테 ‘학생들 와서 의식화시킨다’ 그러면서 받지 말라고 하고...

농민회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는데, 주민들 안에서 크게 그런 거는 없었어요. 이런 활동하는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있잖아요. 나나 이런 사람들은 농민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그런 거니까. 옛날부터 관행적으로 왔던 것이 변화하지 않고 그러니까... 수세니 뭐니 이런 것도 그냥 내야 되는 건줄만 알았으니까요. 수세라는 게 논에 들어가는 물에 세금을 내는 건데 옛날에는 그게 컸다고요. 300평당 벼 30kg인가 그랬는데, 그게 막 싸움하고 그래서 5kg으로 줄었다가 그 다음에 안 내고 그러다가 폐지되고 그랬는데...

농민대회다 뭐다 그러면 참석하고, 지역에서 뭐 하면 찾아다니고...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했어요. 그 당시에 활동했던 분들이 어르신들도 있었지만, 저희 또래들도 있었고, 그 밑에 학생운동 하다가 들어왔던 사람들도 있었고...”

 

오래전부터 농민회 활동을 해왔던 신종원에게 2008년 상반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저지투쟁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지금 광우병 때문에 한참 싸움들 하고 있는데... 우리 농민들이 옛날부터 서울에 올라가서 싸움할 적에 아스팔트농사라고 그랬잖아요. 그거 할 적에 사람들이 ‘저 빨갱이새끼들. 저 새끼들 때문에 나라 망친다’ 그랬거든. 그게 지금까지 온 거예요. 이게 어느 날 갑자기 싹 불거진 게 아니거든요. 몇 십 년 동안 농민들만 목숨 걸고 싸우면서 왔던 건데... 다 협상해놓고 먹으라고 그러니까 이제 와서 ‘나 그거 안 먹는다’는 거예요. 어떤 땐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괜히 열 받아요. 그렇게 손가락질 하고 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가 먹으면 안 되고 내 가족이 죽으면 안 되니까 반대하고...

농민들이 자기 권익만을 위해서 싸움을 하지는 않았다고 봐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국민들의 먹거리, 식량 자급률 이런 것이 농민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나마 오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을에서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하던 2003년 4월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평택에 사회활동 하는 단체들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런 얘기를 듣게 된 거죠. 그때 4월달인데... 그런 얘기를 듣자마자 김지태 이장 하고 몇 명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마을방송을 하고, 마을 주민이 평택으로 다 갔어요. 평택시내에서 구호 외치고 시민들에게 알리고... 우리가 그러는 사이에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다’고 언론에 나온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게 시발점이 된 거예요. 팽성읍에 71개 마을 이장, 새마을지도자(여자, 남자), 작목반, 기술자협의회 등등 해가지고 그런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내고...

우리가 사는 고향 땅에 미군기지가 150만평이 돼요. ‘미군기지 있는데다가 온다고 하지만 앞으로 올 파장이나 이런 걸 볼 적에 팽성 지역이 더 낙후된 지역으로 간다’고 그랬지만,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몰라요. 강간이나 폭력이 되게 많았는데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게 있는데 미군이 하면 어떠랴’ 이렇게 받아들였었고, 기지 주변에서 미군들 보면서 벌어먹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속에서 논의하고 알려내는 준비기간이 꽤 걸렸어요. 7월까지...

팽성에 기지가 일제 때는 20만평이 있었데요. 종전 이후에 미군이 와서 키워놓은 거라고... 안정리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는 상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미군에 대해 아주 우호적이지... 나중에 이 사람들하고 싸운데니까... 이 주변의 농사를 전적으로 하는 마을 이장들이 대책위를 꾸린 거라고...”

 

급작스럽게 정부 정책을 확인하고, 마을별로 여러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면서 팽성읍주민대책위가 만들어지지만, 팽성읍대책위는 얼마 안가서 몇몇 마을 중심으로 축소된다.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이해득실이 생기는 거예요. 동 떨어져 있는 마을들은 떨어져나가고, 거기에 농민회 활동 같이 했던 사람들은 끝임 없이 도와주고... 여기에 전적으로 들어가는 농사짓는 사람들의 마을이 17개 마을이 있었어요. 이쪽에 285만평이 들어가는 건데, 이쪽을 팽성 서부라고 그러는데, 팽성읍대책위가 이 사람들 활동으로 축소가 된 거예요.

공무원과 경찰들 압력... ‘이런 거 들어오면서 자산가치가 높아진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땅 보상가를 평당 15만원씩 받았는데, 그때 당시 막 싸움하고 그럴 적에 주변 땅값이 100만원씩 거래된 것도 있고, 보통 땅값이 20만원에서 30만원씩 갔어요. 도로변에는 70~80만원... 지금도 그래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그냥 방관하는 거예요.

2005년 초까지는 그나마 잘 됐죠. 농사짓는 사람들이니까 일을 하면서 이런 싸움들을 다 했죠. 무슨 발표가 있다고 해서 하는 규탄대회다 이런 거 외에는 대개 바쁜 철은 피해가죠. 우리가 대책위 사무실과 농성장을 꾸려놓고 이렇게 하니까 끊임없이 사람들이 방문하고...

사람들이 떨어져나가는 것은 다 생각했던 거고... 싸움하면서 다른 데서 사람들이 많이 와서 이런 사례에 대해서 많이 듣잖아요. 최종적으로는 몇 사람 안 남을 거다는 거까지 다 알고 진행을 했던 거니까 떨어지던 뭐를 하던 기본은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싸움을 했던 거죠.”

 

팽성읍대책위를 중심으로 주민들의 저항이 완강하게 이어지자 정부는 2005년부터 더욱 강도 높은 공세와 함께 주민들 내부를 분열시키기 시작한다.

 

“무슨 사업이 있으면 자기네 편을 만들어야 되잖아요. 제들이 슬슬 마을에 들어와서 그런 사람들을 작업해 들어가는 거지. 첫째 그런 게 공무원 가족들, 돈에 솔깃한 사람들을 작업해서 끊임없이 갈라치기 작전들을 했어요.

노무현 정권에 들어가 있는 운동권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리고 우리랑 이 싸움 같이 하는 사람들도 인맥들이 있으니까, 그 인맥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정보들이 나오는 게 ‘2004년이면 끝날 거다’ ‘2005년이면 끝날 거다’ 이랬는데... 이것이 생각보다 장기화되니까 얘네들이 미치는 거지. 그래서 2005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마을에 작업을 해요.

보상을 하기 위해서 지작물 검사를 해요. 땅 위에 있는 집, 창고, 우사, 가축, 그리고 거기에 무엇이 재배되고 있는 지 이런 거를 조사하는데 그거를 막아내는 싸움을 한 거예요. 마을 입구에 천막치고 못 들어오게 막아내는 싸움을 하는데, 한 달 가량 했을 거예요.

이게 사람 피 말리게 하는 거예요. 옆에서 사람들이 ‘같이 싸우자’ 했는데 ‘나는 보상 받고 나갈래요’ 그러잖아. 그러면 그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얘들이 이런 일들을 끊임없이 해낸 거예요. 이렇게 ‘같이 하자’ 해놓고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마을을 떠난 거지. 우리 마을 같은 경우가 140가구 됐었는데, 지작물 조사를 1차적으로 20가구가 신청해서 받고, 또 몇 십 가구, 또 몇 가구 이렇게 계속 빠져나간 거예요.

이런 것이 진행되면서 평택특별법이 만들어졌어요. 그 주 내용이 이것에 관련된 사람에 대해서 보상대안을 마련해 놓은 거지. 그 내용 중의 하나가 상가분양권이 있었어요. 상가를 주는 것도 아니고 상가분양권이에요. 8평 분양권을 준다고 했어요. 이거를 되팔면 몇 천 만원을 번다는 거예요. 그리고 상가를 목 좋은데 받아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등 이런 얘기를 끊임없이 한 거예요.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수입 농산물 들어오면 농사 힘들다는데 포기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이제 나이도 먹고...’ 이런 생각들을 갖게 되는데, 이런 것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거를 정부에서 어떻게 얘기했냐하면, ‘상가를 8평 줄 테니까 그거로 먹고 살면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거다’ 이렇게 사기를 친 거여. 지작물 조사를 받는데 ‘3월말까지 받으면 8평을 주고, 조사를 안 받으면 5평을 받을 거다’이러는 거여. 그런데 이 차이가 이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거여. 얘들이 끝까지 이걸 가지고 물고 늘어진 거예요. 사람들이 이거에 현혹이 된 거여.

그래서 끊임없이 얘기를 했다고요. ‘상가분양권이고, 이거는 여러분들이 분양을 받음과 동시에 당신 돈으로 이거를 사고, 땅을 사던 건물을 사던 내 돈으로 하는 거다. 상가를 지어서 여러분들한테 주는 게 아니다.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땅값이 얼마겠느냐? 이게 가능하겠냐? 보상받는 금액으로 이 상가를 사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그런 게 되겠느냐?’고 그랬는데, 주민들이 ‘1차적으로 상가 주고, 이거를 되팔아도 몇 천 만원을 받는다는데... 거기다가 말 안 들으면 5평을 주고, 평당 천만 원씩 차액이 생긴다면 3평이면 2~3천만 원씩 차액이 생기는데, 니들이 이거를 책임져 줄 수 있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미치는 거지.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슬슬 떠난 거예요.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몰래 받았어요. 이 사람들이 그냥 나가면 그만인데, 자기네만 나가기 뭐하니까 옆 사람 작업하고 그래서 조금 조금씩 늘어나요.

돈에 관련되니까 어느 정도 한계가 생기는 거예요. 옆집에 형제들이 있는데 얘기도 안 하고 몰래 받아서 형제들끼리 싸우고... 사람이 사는 데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우리 마을에서 1~2년 사이에 다 일어났다고요. 이거는 안 풀려요. 지금도 그래요.

우리 마을이 140가구라 시골마을에서는 굉장히 큰 편이예요. 그래서 평택시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하면 팽성읍 대표로 해서 나가고... 사람들이 대추리는 땅이 크니까 ‘부자마을’ ‘살기 좋은 마을’로 이 지역에서는 알아줬던 마을인데... 이렇게 사람 존엄성을 다 깨가면서 이런 짓거리를 해댄 거예요. 그 기간에는 마을이 지옥 같았어요. 서로 응집을 하고 아픔을 서로 달래줘야 되는데, 이런 시기가 되니까 서로 의심을 해요. 이런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이 다 피폐화 되가지고, 내게 도움이 안 되면 주민들 간에도 무조건 싸움을 하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계속 있는데 무법천지지.

주민들만 단속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공무원새끼들, 경찰새끼들, 정부관계자새끼들, 국방부니, 토지공사니, 국정원까지 별놈의 새끼들이 다 와서 쑤셔대고 이러니까... 마을을 막고서 못 들어오게 하더래도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들어오고... 길을 막아서 못 들어오게 하니까 2~3백m 되는 안성천을 밤에 몰래 배타고 들어와서 별짓거리를 다 했다니까요.

우리 대추리 마을 말고 도두리라는 마을이 있어요. 여기 60가구가 있었는데 여기 마을이 모두 다 10월말에 협상을 해버려요. 그 전부터 계속 나가서 20~30가구 정도 남았었는데, 다 싸인을 해버려요. 그리고 안 한 척 해요. 이 사람들은 관망을 하는 거여. ‘특별법에서 콩고물이 많았는데, 얘들이 잘 싸우면 더 나오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우리 주민 중에도 최종적으로 50가구 남았었는데, 그 중에서도 싸인해 놓고 있던 사람이 열 가구가 넘었어요.”

 

지작물 조사가 주민들의 저항으로 차질을 빚자 정부는 항공촬영을 통해 일방적으로 보상금액을 통보하게 된다. 그러면서 또 주민들이 동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힘겨운 과정들도 대책위를 중심으로 뭉치면서 견뎌낸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던 데는 당시 대추리 이장이었던 김지태 대책위원장과 신종원 조직국장 등 대책위 간부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주민들 속에서 강한 신뢰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경작 짓는 게 70만 평에서 75만 평정도 돼요. 그런데 김지태 위원장이나 나나 사무국장 했던 친구나 해서 6명이 20만 평에서 25만 평을 일을 해요. 1/3정도 마을 일은 전담해서 해줬던 사람들이여. 그러니까 끈끈한 게 있는 거여. 옛날부터 같이 해왔던 이런 유대관계들이 있으니까 잘 된 거여. 그 와중에는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일들을 다 안 해주면 이 사람들이 힘들어지는데 일을 더 해야지.

2006년에는 수로 차단하고, 논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면서 농사 못 지은 거 아녀? 주변 마을에 10여 만 평정도 잔여지 남은 거만 경작하면서 겨우 그거 가지고 근근이... 마을회관에서 공동으로 식사하고... 싸움하는 사람들이 오면 그 밥맛을 못 잊고 가는 거예요. 이렇게 일을 계속 하고 도와주고 그런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같이 남은 거예요.”

 

평택 미군기지 저지투쟁은 팽성읍대책위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만이 아니라 여러 사회단체에서 다양한 활동가들이 헌신적으로 결합하면서 단단한 연대를 과시했다. 특히, 2005년 겨울부터는 ‘내년에도 농사짓자’면서 많은 이들이 직접 대추리로 들어와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생활을 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순례 다니고 그랬을 때 같이 했던 단체, 우리들 사정 알고 그랬던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와서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하고 일도 도와주고... 그 친구들이 이 싸움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 준거여. 어르신들이랑 일 도와주고, 함께 아픔을 나누고 그런 것을 해준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거든.

되게 소외됐으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데도, 인근 마을에서는 ‘그 안에 사람들이 다 나갔다더라’ 이런 말이 휑휑 돌아다니고 그거를 믿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주변 마을 사람들이 이 싸움에 대해서 ‘저기 또 싸우는구나...’ 이런 거니까. 주민들이 집을 들어가는데도 심할 때는 7번씩 검문을 받아서 들어가야 될 정도니까. 철망 쳐놓고, 경찰들이 때로 다니고, 군인들이 논으로 막 다니고... 살벌했다니까...

이런 생활을 하는데 지킴이들이 모든 거 팽개치고 오고, 학생들은 학교 휴학해서 오고, 싸울 때 다치기도 많이 하고... 대단했지. 그런 것이 이 싸움에 큰 보탬이 된 건 사실이라고. 그래서 마을 분들이 ‘전혀 상관없이 저 고사리 같은 놈들도 우리 마을 지켜주겠다고 와서 있는데...’ 그러면서 더 다독거리고... 그런 힘들이 지속적으로 왔던 거지.”

 

지작물 조사를 통한 보상문제를 밀어붙인 정부는 2006년 들어 마을 철거를 위한 본격적인 공세를 벌이게 된다. 그에 맞서 대책위는 트렉터 전국순례 등을 진행하면서 전국적 이슈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전농(전국농민회총연합) 차원에서 전국에서 트렉터를 끌고 와서 농사를 짓기 위한 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기아자동차와 쌍용자동차 등 지역 노동조합들의 연대투쟁도 매우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정부는 2006년 5월 4일 행정대집행을 통해 대대적인 물리력을 동원해서 빈집 철거를 강행하게 된다.

 

“싸움이 너무 광범위 한 거예요. 농토를 막는 싸움을 하고, 마을을 지키는 싸움을 하고 했는데, 사람이 한정돼 있잖아요. 군인, 경찰에 전국에서 깡패 같은 용역들 700여 명 데려오고... 동네가 난리법석이지. 전쟁터지...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지... 행정대집행 한다고 해서 많은 노동자하고 학생하고 단체사람들이 와 있는데, 토기몰이를 한 거여. 학교에 다 들어가 있는데, 학교가 풍물을 한다고 방음장치가 돼 있었어요. 그 안에서 애들을 반 죽인 거예요. 밖에서는 소리도 안 들리잖아. 한 놈씩 잡고 거기서 초죽음을 해서 끌어낸 거야. 애들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려하고 별 짓을 다했으니까. 그런 공포가 4시간이여. 가마짝 물 먹여서 끌면 축 쳐지거든. 사람 그렇게 해서 끌고 가더라고.”

 

결국 투쟁의 상징이었던 대추초등학교 건물이 허물어지면서 행정대집행은 마무리됐다.

 

“학교가 상징적인 거거든. 내가 초등학교 5횐데... 옛날에는 계양이라는 곳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글로 학교를 다닌 거여. 4km정도 되는데... 길도 없어서 논으로 다니고 산으로 다니고 그랬는데... 옛날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는데, 소문에 ‘나병환자들이 보리밭에 숨어서 사람 간을 빼먹는다’는 등 해서 돌아서 가고... 이렇게 학교를 다녔다고... 그래서 어르신들이 마을에서 논의를 해서 학교를 세운 거라고... 그 어려운 때에... 보릿고개 이럴 적에 사람들이 쌀을 한 말 두 말 해가지고 땅을 사서 교육부에 학교를 지어달라고 해서 지은 건데... 마을의 상징적인 건물 아니여?

이거를 2001년도에 초등학교가 폐교가 되면서 등기를 가져갈 적에, 우리는 증여를 해준 건데. 이 새끼들이 매매등기로 가져간 거여. 그래서 건물값이고 토지값이고 다 교육부에서 찾아가 버렸다고... 주민 몫인데... 그리고 우리 마을 체육행사랑 경로잔치를 매년 거기에서 했었거든... 이런 것이 다 부서지는 걸 보고 주민들이 주저앉은 사람들이 많아.”

 

행정대집행 이후에도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면서 투쟁을 이어갔고, 범국민대책위도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분위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9월 24일날 서울 시청 앞에서 평화대행진을 하자고 그래가지고 전국 순례도 떠나고 그랬었는데... 그때 최대 4만까지는 모을 수 있다고 그래서 ‘진짜 바꾸는 싸움을 한 번 해보자’ 그랬는데, 그렇게까지는 못 모였다고. 많이 모여야 7천정도 모였나? 그래서 큰 싸움은 그 싸움이 마지막이 된 거지.

안에서 자그마한 싸움들은 지속적으로 해온 거지만... 얘들은 언론에 ‘다 끝난 거다’고 대대적으로 얘기하고... 주민들은 ‘아니다’라고 계속 얘기는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있었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고립된 거였으니까. 가족들도 못 들어왔어. 두 시간 세 시간씩 검문소에서 싸우고... 아들은 들어오는데 며느리는 못 들어오고, 딸은 들어오는데 사위는 못 들어오고... 모든 것들이 조여오고...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어르신들이 심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시더라고... ‘너희들이 못하면 우리라도 나가서 정리를 해야 될 거 같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 ‘이보다 더 다쳐서라도 우리가 지켜낼 수 있다면 하겠는데, 이제 그 단계는 넘어서지 않았냐?’ 이런 말씀들도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회의를 거쳐서 그만 하는 걸로 얘기가 된 거고... 범국민대책위원회에 그런 얘기를 전달하고...”

 

2006년 10월 대책위는 정부와 합의를 하고 인근에 있는 임대주택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정부와 합의한 이주단지로의 완전 이주를 위해서는 해결해야될 문제가 많다.

 

“여기 44가구가 나와 있는데, 15가구 정도는 보상금이 2억 원이 안돼요. 집, 논, 밭 모든 거 다 합쳐서... 1억 원 이하 되는 사람들도 꽤 되고...

어쨌거나 나왔어. 그러면 이주단지를 새로 만들어야 잖아요. 마지막에 제일 중요했던 것이 대추리라는 마을을 재건하는 것이 최고였었거든. 모든 것은 다 내버려도 그것만은 받아내야 한다고 했는데... 대체부지가 4군데 있었는데, 보상금이 2억도 안 되는 사람들이 15가구가 되는데 이 사람들 데리고 어디로 가겠어요. 그래서 제일 싼 노와리로 간 거예요. 그나마 ‘여기라도 같이 가서 같이 살다가 죽자’해서 온 거라고...

그런데 택지를 200평씩 짤라요. 평당 40만 원정도 되는데 200평이면 8천만 원 정도 된다고, 농사는 지어야 되니까 밭 100평 하면 1억3천에서 1억 5천 정도는 간다고... 보상받은 돈이 2억도 안 되는 사람이 그 돈이 그대로 있느냐? 가장 급한 게 부채상황이야. 공탁이 걸리니까 압류가 들어오는 거야. 그것부터 딱 빠져나가... 이 분들이 여기를 어떻게 가느냐고? 그래 좋아. 1억 5천 주고 땅을 샀어. 집 짓는데 평균 1억 5천 정도는 들어간다고... 그러면 2억 7천에서 3억은 있어야 거기 가서 사는데... 이 사람들이 여기에 올인 해서 집 지었다고 처요. 뭘 먹고 사는데? 이게 문제예요. 죽으라는 거야. 지금부터가 문제라고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2007년부터 생계유지를 위해서 한 가구당 한 명씩 공공근로를 해주는 거예요. 그 분들이 도로변에서 위험하게 풀 깎고, 쓰레기 주우러 다니고, 벽보 때고, 이런 걸 하는데 누가 좋아해? 이 사람들이 농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던 분들인데... 미치는 거지. 그것도 2008년 11월이면 끝나. 2009년부터 집 지으면 돈 다 들어가는데... ‘그것까지 어떻게 책임 지냐?’ 이러면 무책임한 소리라고... 쫓아내놓고...”

 

현재 대추리 이장을 맞고 있는 신종원은 정부가 합의사항을 조금씩 어기고 있어서 합의사항을 지켜내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노와리라는 곳에 대추리를 재건하기 위해서 행정적으로 노와리를 대추리로 지번을 정정해주기로 했어. 지금까지도 이 새끼들이 지번정정을 안 해놨어요. 정부와 주민과 시와 국방부가 들어와서 합의한 합의내용이야. 공공근로사업도 2007년과 2008년에 10월씩 해주기로 했는데, 2007년에 8개월 2008년에 9개월 하는 거야. 이 분들 한 가구당 70~80만원씩 기초생활빈데 3개월은 큰 거예요. 아무 대안도 없이 그따위로 약속도 안 지켜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장회의를 하러갔더니 대추리라는 마을 이름을 없애버렸어. 그래서 합의문을 갖다 놓고 ‘니네 정부에서 행정적으로 마을 이름을 인정해주기로 했는데, 왜 니들 마음대로 대추리 마을 이름을 없앴냐?’ 그러니까 읍사무소에서는 자기들은 모른데... 이런 식이라고... 합의문 자체도 이행을 안 하는 거예요. 우리가 거기 가서 사는 때까지 싸움이 계속 남아있는 거라고...”

 

마지막까지 남은 주민들은 40대가 가장 젊고 나머지는 60~70대의 노인들이다. 투쟁 자체가 격렬했던 만큼 투쟁 이후 주민들은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분들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시지만, 정신적인 피해가 치료를 받아야 되는 사람들이예요. 이분들은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시기에는 너무 비참한 거예요. 그 안에 있을 때 의사들이 학생들도 의료봉사 같은 거 오고 그랬거든. 지금도 와달라고 많이 얘기를 하는데, 그게 안 되지. 어디가면 했던 단체들 다 아니까 그래도 얘기를 해요. 그분들에 대한 치유는 정부에서 해줄게 아니거든. ‘우리 손으로 마음의 병을 고쳐줘야 하는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해요. 안 되는 게 답답할 뿐이지...

지금도 주변에서 ‘저 새끼들 빨갱이 새끼들’ 이렇게 보는 시각이 대단해요. 나는 이 싸움에서 나간다면 이민 갈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주민들하고 같이 해왔으니까 같이 있는 거지... 누구나 다 똑같을 거예요. 다른 데 가서 모르는 사람들하고 사는 거 보다 그 아픔 같이 했던 사람들이 같이 살자고 해서 사는 거예요. 여기 이주단지보다 더 좋은 데 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대추리라는 그런 거 때문에 ‘같이 살자’ 그랬어요.”

 

94년에 결혼을 해서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인 두 자녀를 두고 있는 신종원은 투쟁 과정이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애들한테 진짜 미안한 거야. 한참 사랑받고 그래야 되는 때였는데... 어릴 때 애들 눈에 비친 것이 평생을 가는 건데... 경찰들이 엄마 아빠 와서 못 살게 굴고 쫓아내고 이런 걸 봤던 거라고... 애들한테도 조심스러워요. 경찰이 검문을 하면 애들이 욕을 해. 이렇게 됐으니 걱정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 공부도 해야 되는데 마을에서 집회가 있으면 쫓아다니면서 학교도 제대로 못 가고...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것도 돌봐주고 그랬어야 되는데, 지금 와서 어떻게 해볼려고 하니까 괴리감이 있고... 그런 게 애들한테는 되게 미안해요.”

 

마을주민들과 함께 이주를 앞두고 있는 신종원은 대추리에서의 투쟁을 잊지 않도록 하는 과제 또한 안고 있다.

 

“앞으로도 대추리가 갖는 상징적 역사적인 것이 묻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려내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고... 이주단지 내에 역사관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계획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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