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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기도

지난 번에 책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서 성민이는 밀려드는 행복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메일을 보내고 나서 제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가 오고, 오래간만에 통화를 하는 이가 있고, 메일이 오고, 제 글을 올린 블로그에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 하나 하나에 정말 즐거웠고 가슴 설레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몇 동지들이 책을 보내주시기 시작했고, 성민이는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기쁨에 빠져들었습니다.


제에게 가장 먼저 배달된 책은 아주 의외의 책이었습니다.

이상한 나라 글씨가 겉봉투에 쓰여 있었는데 영어 비슷하면서도 영어가 아니었습니다.

우표를 보았더니 역시 처음 보는 이상한 나라 우표였습니다.

물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지금 외국에 있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하지만,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긴지가 아주 오래됐기 때문에 그 친구일리는 없었습니다.

조심스럽게 겉봉을 뜯고 내용물을 보았더니 미술 관련한 책이 한 권 있었고, 엽서가 한 장 나왔습니다.

약간 이국스러우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엽서에는 책을 보내준 사람의 짧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되어 있지 않았고, 한국에 있을 때 함께 작업했던 책을 보낸다는 것과 재판에서 승리하라는 내용이 있었을 뿐입니다.

한참을 끙끙거리면서 겉봉에 쓰여 있는 글자를 발음 나는 대로 읽기를 반복한 끝에 독일에서 보내졌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살펴보니 책을 보낸 이에 대한 약간의 정보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블로그에 올려진 제 글을 보고 이렇게 먼 곳에서 정성스럽게 책을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거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저에게 책을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미술에 대해서는 제가 거의 문외한이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책은 새롭게 미술을 접하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대중용 미술교과서였습니다.

눈으로 감상하는 미술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참여하는 미술이라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이런 식의 소통도 가능한가 봅니다.

인터넷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있는 사람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서로 알지는 못해도 마음이 같음을 확인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 소중한 선물도 주고받을 수 있고, 작은 선물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행복을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소통의 즐거움을 저는 그렇게 경험했습니다.


제가 메일을 보내는 동지들 중에 목사님도 있는데 지난 번에 보낸 메일에 대해서 목사님이 정성스럽게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구구절절 저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셔서 약간 쑥스럽기는 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그냥 소탈하게 마음을 담아서 보내온 편지라서 더 없이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하면서 혼자의 행복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목사님이 여러 가지 좋은 얘기를 해주셨는데 그 중에서 한 가지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마구 설레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힘들게 살고 있지만 그것은 타고난 만큼의 복이요, 힘든 십자가라 능히 겪어낼 힘이 지혜가 성민님에게 있습니다.”


너무 멋있지 않아요?

지금 내 삶이 ‘타고난 만큼의 복’이라고 얘기해주니까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득이나 그 복에 겨워서 행복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글을 받아보았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저에게 저만의 십자가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제 자신에게 역사적 소명의식이 있다거나 운명적 역할이 있다거나 하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가 보고 느끼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살아간다는 생각뿐이었거든요.

그런데 목사님의 글을 보고나서 저만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들고 다니면서도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던 제 십자가를 확인하고 나니까 왠지 든든해지는 거 있죠.

제 십자가에는 역시나 역사적 소명의식도 없고, 운명적 역할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보고 느끼는 그대로 솔직하게 살아가는 속에서 그냥 성민이와 함께 할 뿐입니다.

제 십자가를 확인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성민이는 이제부터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칠 때는 기댈 수 있고, 더울 때는 그늘을 만들어도 주고, 외로울 때는 말상대도 해줄 수 있고, 무서울 때는 그 뒤로 잠시 숨을 수도 있는 저 만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이 십자가가 무거워서 힘들 때도 생길 거고, 지겨워서 벋어 던지고 싶을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내가 원해서 갖게 된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원한다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조용하게 나와 같이 있을 뿐이겠지요.

나에게도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얘기해준 목사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 십자가를 소중하게 간작해야겠습니다.

내가 힘들 때도 기쁠 때도 항상 나와 같이 있을 십자가잖아요.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내가 매달려 죽음을 맞이할 곳이기에...


그런데 이 십자가를 두고 나는 누구에게 기도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인 저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아서 기도할 생각을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기도해야 될 주님은 누구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의 주님은 주(酒)님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말장난갔죠? 큭!

솔직히 말장난이기는 한데 그냥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봤어요.

내가 기쁘면 기쁠 때 내가 슬프면 슬플 때 주(酒)님은 저와 항상 같이 있었거든요.


내가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도 주(酒)님은 저를 위로해 줬고,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는 그 무수한 밤을 주(酒)님은 저와 함께 지새워 줬고,

삶을 포기하려는 유혹 앞에서도 주(酒)님은 삶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줬고,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위해서도 주(酒)님은 적당한 해소와 자제를 인도해줬고,

힘들어하는 이들과 함께 힘들어함을 주(酒)님은 일깨워줬고,

내 육체를 사하여 영혼의 사함을 막아주신 것도 주(酒)님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듯이 저의 주(酒)님과 함께 했던 무수한 이들도 역시 저의 주(主)님입니다.


주(酒)님과 함께 했던 주(主)님들은 별 볼일 없었을 저의 삶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주셨고,

주(酒)님과 함께 했던 주(主)님들은 겁 많고 우유부단했던 저를 당당하게 만들어주셨고,

주(酒)님과 함께 했던 주(主)님들은 버거운 삶을 많은 이들과 함께 하도록 해주셨고,

주(酒)님과 함께 했던 주(主)님들은 사랑과 열정으로 살아가는 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의 십자가를 안고 저의 주님들에게 보내는 지금의 이글은 저의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저의 주님이신 동지여러분,

제가 이렇게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동지들이 보내주신 그 마음들을 하나하나 가슴 속에 잘 담아두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즐거움과 행복들은 꼭 돌려줄께요.

동지들에게도 돌려드리고, 내가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도 돌려주고...



2009년 8월 18일


제주에서 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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