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다시! 83회 – 겸손한 삶
- 11/26
내가 우스워 보이냐? (32회)
1
2013년이 시작됐는데도 역시나 추위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날씨가 춥다고 집안에만 계속 박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서
밖으로 나서보지만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요.
그럴 때 가장 만만한 곳이 영화관입니다.
연말연시라고 다양한 영화들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볼만한 영화들도 많아서
저는 요즘 영화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오늘 방송은 요즘 들어 제가 봤던 영화들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요?
2
미국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기타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낮에는 여기저기 일을 하면서 밤에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흔한 3류 가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술집에 들른 음악관계자가 그의 노래를 듣고 귀가 솔깃해져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음반을 내는 꿈을 이루게 됩니다.
그 가수의 이름은 시스토 로드리게즈였습니다.
도시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절망과 희망을 노래했던 그의 음악은 담백하면서도 삶이 생생하게 녹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거대한 상업망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의 노래에 가능성을 본 또 다른 음악관계자를 만나 또 한 장의 음반을 더 냈지만, 두 번쩨 음반도 신통치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로드리게즈는 다양한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줄어들어갑니다.
무명가수의 꿈은 그렇게 별다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왔던 한 미국 소녀가 듣던 노래 중에 무명 가수 로드리게즈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가 마음에 들은 남자친구는 주위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그의 노래가 무섭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인정권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과 억압통치가 활개를 치던 시절, 그의 노래는 남아공 사람들의 절망과 희망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지만, 남아공 민중들 속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남아공 민중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흑인들의 투쟁으로 백인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남아공 사람들은 그의 노래에 환호했고, 어느 순간 로드리게즈는 공연 도중 권총으로 자살을 한 신비한 인물로 변해서 신화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남아공의 한 기자가 로드리게즈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남아공에 퍼진 그의 음반들은 대부분 해적판이었고, 미국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한 노력은 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자신이 로드리게즈의 딸이라고 밝힌 그는 인터넷에서 로드리게즈의 행방을 찾는다는 글을 보고 깜짝 놀라서 전화를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을 했지요.
“아버지는 살아서 아직도 일을 하고 계신데요.”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늙은 로드리게즈의 동료들은 그가 가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로드리게즈가 공연을 하기 위해서 남아공으로 날아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남아공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죠.
기자들은 “당신이 진짜 로드리게즈냐?”라고 물으면서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습니다.
일용직 노동자가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스타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남아공에서의 역사적인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공연장을 가득 매운 사람들은 엄청난 박수와 환호로 그를 맞았습니다.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무대에 올라간 그는 “내가 다시 살아나서 노래를 부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짧은 멘트를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일용직 노동자로 가난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달라진 점이라면 그의 동료들이 그가 가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이었지요.
그 후로도 그는 여섯 번이나 남아공 공연을 가졌지만, 공연 수익금의 대부분은 가족이나 동료들에게 나눠준 채 허름한 집에서 혼자 살았다고 합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봤던 다큐멘터리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은 아주 큰 감동과 강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누군가의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현실과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웅은 달라도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낮은 곳에서 허접하게 굴러다니다가 발견된 보석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 빛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오래간만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에서 로드리게즈의 노래들이 많이 나옵니다.
솔직히 그의 노래는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태도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 노래들이 빛나더군요.
남아공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의 노래 중의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sugar man'
Sugar man, wont you hurry
Cause Im tired of these scenes
For a blue coin wont you bring back
All those colors to my dreams
Silver magic ships you carry
Jumpers, coke, sweet Mary Jane
Sugar man met a false friend
On a lonely dusty road
Lost my heart when I found it
It had turned to dead black coal
Silver magic ships you carry
Jumpers, coke, sweet Mary Jane
Sugar man youre the answer
That makes my questions disappear
Sugar man cause Im weary
Of those double games l hear
Sugar man, sugar man, sugar man, sugar man
sugar man, sugar man, sugar man...
Sugar man, wont you hurry
Cause Im tired of these scenes
For a blue coin wont you bring back
All those colors to my dreams
Silver magic ships you carry
Jumpers, coke, sweet Mary Jane
Sugar man met a false friend
On a lonely dusty road
Lost my heart when I found it
It had turned to dead black coal
Silver magic ships you carry
Jumpers, coke, sweet Mary Jane
Sugar man youre the answer
That makes my questions disappear
3
어렸을 적에 크리스마스가 되면 TV에서 흔하게 봤던 영화 중의 하나가 ‘장발장’이었습니다.
일반 영화로도 보고 만화영화로도 봤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줄거리는 앞부분 밖에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0여 년을 옥살이 했던 장발장이 감옥에서 나와서 어느 신부의 집에서 은수저를 훔쳤다가 들켰는데, 신부가 은촛대까지 선물로 주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는 그런 내용이었지요.
이 내용은 전체 내용 중에서 시작에 불과한데 왜 이 내용만 기억에 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장발장’은 빅토르 위고라는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의 소설이 원작이라는 것도, 원래 제목이 ‘레미제라블’이라는 것도 어른이 돼서야 알았습니다.
워낙 유명한 소설은 어릴 때 만화영화나 청소년용 세계문학전집을 통해서 읽었기 때문에 어른이 돼서 원작으로 읽어보게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책을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별로 없는 처지가 돼서 고전 소설들을 읽기 시작하다가 레미제라블을 원작으로 읽게 됐습니다.
빅토르 위고라는 노친네가 프랑스의 사회와 역사와 지리와 문화 등에 대해서 잘난 척 장황하게 떠벌이는 것이 짜증나서 포기하려다가 참고 읽어나가는데, 점점 얘기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6권짜리 원작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얘기에 빠져들기 시작하니까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죄와 용서, 정의와 사랑, 타락한 사회와 혁명, 그리고 죽음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는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였습니다.
마지막 장발장의 죽음과 함께 소설이 끝나자 가슴이 뭉클해져서 쉽게 책을 덥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었던 종교적인 내용의 ‘장발장’과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 ‘레미제라블’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단연코 ‘레미제라블’은 제가 읽었던 소설 중에 최고의 소설이었습니다.
그 ‘레미제라블’이 오페라 영화로 개봉했고, 언론에서도 난리였고, 흥행도 잘 되고 있어서 주저 없이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매우 추운 평일 낮 시간이었는데도 영화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약간의 기대를 갖고 짜증스러운 광고들을 참으면서 보고 있으려니 드디어 영화가 시작하더군요.
초반부터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영화는 시작됐고, 돈과 노력을 많이 들인 것이 역력한 장면들이 이어졌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 줄거리에 충실하게 이어지는 영화는 거의 대부분의 대화를 노래로 이어가면서 뭔가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초반부터 보여지는 극적인 아리아들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더군요.
줄거리가 약간 축약되기는 했지만 극적인 집중과 노래의 효과는 뛰어났습니다.
영화가 시작해서 30여 분이 지났을 때
장발장에게 어린 코제트를 부탁하면서 자신의 불행했던 삶을 한탄하는 판틴의 노래에서 눈물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남자들이 내게 친절하던 때가 있었죠
그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내 마음을 유혹하곤 했었죠
사랑에 눈멀었던 시절
세상은 하나의 노래였고
그 노래는 날 설레이도록 만들었어요
그런 때가 있었죠
그리고는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이제는 가버리고 없는 옛날, 나는 꿈을 꾸었답니다
희망이 가득했고,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었을 때
사랑이 결코 마르지 않는 꿈을 꾸었답니다
산이 용서를 베푸는 꿈을 꾸었답니다
그때 난 젊었고 두려움이란 없었죠
그렇게 꿈을 만들어서 이용했고, 그리고 버렸어요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없었죠
세상의 모든 노래를 불렀고, 모든 술을 마셨죠
하지만 시련은 한밤중에 찾아오는 법
천둥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서
당신의 희망을 갈갈이 찢어 놓고
당신의 꿈을 수치심으로 바꿔버리죠
그는 내 곁에서 여름을 보냈어요
그로 인해 그 시절은 끝없는 경이오룸으로 가득찼죠
그는 내 어린 시절을 마음대로 조종했어요
그리고 가을이 오자 떠나버렸어요
난 아직도 그가 내게 돌아오는 꿈을 꾼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꿈을 꾼답니다
그렇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있기 마련
우리가 해쳐나갈 수 없는 폭풍도 있듯이 말이에요
나는 꿈을 꾼답니다
내 삶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지옥과는 전혀 다르고
이제는 내 삶이 그때 그 시절과는 많이 다른 꿈을 꾼답니다
하지만 이제 삶은 내가 꾸었던 그 꿈을 죽여버렸어요
하지만, 너무 일찍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버린 영화는 조금씩 힘들어졌습니다.
어린 코제트를 보호하기 위해 눈물 나게 헌신적인 장발장과 정의감에 불타서 범죄자를 쫒는 라베르 경감의 대립은 앙상하게 줄거리만 따라가다가 중간 중간 장엄한 아리아를 부르는 역할로 축소돼 버렸습니다.
이야기의 힘이 사라진 채 이어지는 노래 대사들은 맥이 없어지면서 익숙지 않은 오페라 형식이 더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영화가 1시간을 넘기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한 두 명 씩 영화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원작의 크라이막스는 후반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참고 봤습니다.
드디어 코제트가 자라서 혁명의 열기에 불타오르는 젊은이와 사랑을 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혁명과 사랑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근데 웬걸, 혁명이 애들 장난처럼 그려졌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 중의 하나가 바리케이트 전투 중에 나이 어린 소년이 용감하게 바리케이트 너머로 달려가다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었는데, 영화 속에서는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조금은 우스쾅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장면에서 화가 나더군요.
혁명의 대의에 불타서 엉뚱하게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지지했던 빅토르 위고가 이 장면을 봤다면 극장을 나가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크라이막스가 지나고 나서 장발장은 사랑하는 코제트를 위해 결혼을 허락하고 그 곁을 떠나 쓸쓸히 죽어갑니다.
마지막 코제트와 그의 연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발장이 죽어가는 장면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렀지만, 그 눈물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혁명과 사랑과 구원의 대서사시였던 소설 ‘레미제라블’이 포와 차를 때 버리고 종교적 구원과 용서의 메시지로 각색돼 버린 만화영화 ‘장발장’은 앞부분만 기억에 남았다면, 혁명과 사랑과 구원을 다 얘기했지만 영혼을 없애버린 영화 ‘레미제라블’은 두 개의 노래만 기억에 남게 만들었습니다.
저를 울게 만들었던 판틴의 노래는 앞에서 들려드렸고, 이번에는 영화의 후반부와 마지막에 웅장하게 불리어졌던 합창곡입니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대표해서 프랑스 국가로도 만들어진 노래였습니다.
기온도 떨어지고, 사회의 열기도 식어버린 지독하게 추운 이 겨울에 사람들은 앙상하게 울려 퍼진 이 혁명가요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너는 듣고 있는가 성난 민중의 노래
노예이기를 거부하는 민중들의 뜨거운 숨결
우리 심장의 고동 북소리 되어 울릴 때
새날은 밝아오네 태양과 함께
우리 함께 나가자 혁명의 깃발 올리자
압제를 부숴라 그곳에 자유가 있다
자 힘내어 싸우자 자유의 동지들아
너는 듣고 있는가 성난 민중의 노래
노예이기를 거부하는 민중들의 뜨거운 숨결
우리 심장의 고동 북소리 되어 울릴 때
새날은 밝아오네 태양과 함께
4
요즘 유럽영화를 볼 기회는 심심치 않게 있어서 유럽영화를 보는 게 낯설지 않지만,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루마니아 영화는 솔직히 좀 낯섭니다.
감독도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이고, 종교적인 냄새가 아주 강하게 풍기는 영화라면 구미가 땡기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래저래 평들이 괜찮아서 호기심에 보게 된 영화가 ‘신의 소녀들’이었습니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두 소녀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고아원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알리나는 위탁가정에 있다가 독일로 가게 됐고, 보이치타는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느 날 독일로 갔던 알리나가 수도원에 있는 알리나와 찾아옵니다.
고아원에서의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을 나누기도 했던 두 소녀는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절제된 생활을 강조하는 수도원이라는 공간은 그 둘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외롭고 힘들었던 알리나는 보이치타와 같이 있고 싶었지만, 수도원 생활에 익숙해지고 수녀가 되고 싶었던 보이치타는 알리나의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같이 독일로 가자는 알리나의 제안을 거절한 보이치타는 수도원장인 나이 든 신부에게 알리나가 수도원에게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믿음과 규율이 우선이었던 수도원장은 믿음과 규율이 없이는 수도원에 머물 수 없다면서 빠른 시일 내에 다른 거처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알리나와 보이치타, 그리고 수도원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세상의 풍파에 심각하게 찌들어 있던 알리나는 이미 심각한 정서적 질환까지 앓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온 친구이자 연인과 함께 할 수 없음에 절망하기도 하고, 믿음과 규율만을 강요하는 수도원 생활에도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보이치타도 알리나와 수도원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알리나의 외로움과 힘겨움을 잘 알기 때문에 매일 같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면서 알리나가 잘 적응하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갈등 속에 알리나와 수도원 사람들은 더욱 심각한 갈등에 놓이게 되고, 알리나의 정서적 불안은 심각한 히스테리로 나타납니다.
기도도 해보고, 병원에도 가보지만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알리나의 히스테리적 발작이 점점 심해집니다.
고민하던 수도원장은 결국 알리나의 몸 안에 깃든 악마를 쫓아내야 한다며 퇴마의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퇴마의식이라는 것이 알리나를 십자가 형태의 틀에 묶어두고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몇날며칠 동안 기도와 주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알리나의 발작은 더욱 격렬해져만 가지요.
그렇게 며칠 동안 끔찍한 상황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보던 보이치타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밤에 몰래 알리나를 풀어주고 도망가라고 하지만, 몇 시간 후에 알리나는 죽고 맙니다.
알리나의 죽음으로 경찰이 수도원을 찾아와서 신부를 만나지만 신부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당당하게 얘기하고, 그에 대해 조사를 하던 경찰도 신부를 연행하기는 하지만 신부의 주장에 제대로 반박을 못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납니다.
유럽의 예술영화들이 흔히 그렇지만, 이 영화도 관객을 위한 배려는 거의 없습니다.
음악도 없고, 다양한 조명이나 촬영기술도 별로 없고, 배우들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등을 보이면서 말을 하기도 하고, 극적인 연기도 별로 없습니다.
그냥 그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게만 하는 전형적인 유럽 예술영화였습니다.
거기다가 런닝타임은 두 시간 반이나 되는 엄청나게 긴 영화였습니다.
정말 인내심이 필요한 영화였지요.
더군다나 영화관은 난방이 아주 약해서 냉기를 느끼면서 추운 루마니아 수도원의 장면을 지켜봐야 했고
의자는 얼마나 불편한지 허리가 아프고
중간 중간 속삭이며 얘기를 나누는 사람, 핸드폰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사람, 큰 소리로 하품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도 많이 났습니다.
이거는 3D를 넘어서 4D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 게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니까 매서운 날씨가 견딜만 하더라고요.
한증막에서 힘들게 땀을 빼고 나왔을 때의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전혀 감동적이지도 않았고, 허리와 어깨의 통증 말고는 여운도 없었는데, 뭔가 묵직한 게 가슴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더니 이 영화는 몇 년 전에 루마나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하더군요.
감독은 어떤 광적인 종교집단의 실태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루마니아라는 사회의 현실을 얘기하려 했던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이미 100여 년 전에 봉건제는 무너졌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던 사회주의 체제도 거쳐서, 산업화된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현재에도 봉건적 잔재는 루마니아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신적 정신질환자들도 아니었고, 체제의 떡고물을 노린 속물적 종교인도 아니었고, 폐쇄적인 자기들만의 공간을 지키기 위한 이단집단도 아니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과 규율을 지키면서 그 사회의 사람들과 호흡하며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했던 평범한 종교인이었을 뿐입니다.
수도원 사람들과 마을 주민들, 그리고 경찰들까지 인정하던 그 봉건적 신앙이 한 소녀를 죽게 만드는 과정을 냉정하게 보여주면서 그 봉건성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 지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힘들게 루마니아 사회의 얘기를 보고나니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가 보이더군요.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초반에 나이나 학번을 묻고는 자기보다 한 살이라도 어리면 호시탐탐 말을 놓을 기회를 찾는 선배님들
누군가를 소개받고 나서 친해지고 싶어지면 “선배님, 다음부터는 말을 놓으세요. 그래야 제가 편합니다”라고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후배님들
남자들만 있는 자리에 나이든 할머니라도 한 명 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뒤치다꺼리는 여자 몫으로 남겨두는 어르신들
좆도 아니면서 가오 잡는 남자 옆에서 괜히 약한 척 불쌍한 척 보이려고 애쓰는 아줌마들
이런 모습은 제가 살고 있는 보수적인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제가 살아왔던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운동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장유유서’ ‘부부유별’ 같은 삼강오륜이 아직도 힘을 발휘하는 이 사회는 루마니아와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더군요.
5
아흔 살의 나이에도 영화를 찍는 알랭 레네라는 노인네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유럽에서는 살아있는 영화의 역사라고 하는 그가 아흔 살에 만든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을 했습니다.
“아흔 살 노인네가 만드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하는 호기심에 ‘당신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를 봤습니다.
영화 내용은 별게 없었습니다.
한 연극 연출가의 독특한 장례식을 위해 모인 나이든 동료들이
연출가의 유언으로 어느 아마추어 극단의 연극 리허설 장면을 보게 됩니다.
아마추어 극단이 보여주는 연극은 노배우들이 왕년에 공연했던 작품이었는데
아마추어 극단의 연극을 보면서 감회에 젖기 시작한 노배우들이 점점 연극에 빠져들더니
아마추어 극단의 연극과 노배우들의 연극이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연극의 내용도 사랑과 인생에 대한 고풍스럽지만 특별한 것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내용이 아니라 얘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처음에 전위적인 예술영화처럼 보이다가 점점 고풍스러운 연극으로 변하더니 한 편의 우아한 영화로 마무리되는 그 솜씨에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영화더군요.
“무슨 얘기를 하려나..”하면서 팔짱을 끼고 영화를 보고 있는 저에게
쭈굴쭈굴한 노인이 영화 속에서 나와 “같이 춤 한 번 춰볼까요?”라면서 손을 내밉니다.
당황스러운 저는 “저는 춤을 잘 못추는데요”라면서 쭈삣거리니까
노인이 “괜찮아요. 그냥 나만 따라 하면 되요”라면서 미소를 지을 뿐이었지요.
거부하기 어려운 분위기라서 쑥스럽게 노인의 손을 잡기는 했습니다.
우아하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능숙한 스텝을 밟기 시작한 노인을 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과 발을 따라가 보지만 꼬이기만 하는 스텝에 점점 긴장만 되어 갔지요.
그러자 노인이 저를 향해 살며시 웃어주면서 안정되면서도 불규칙적인 스텝을 계속 이어갑니다.
노인을 따라 힘들게 스텝을 밟다보니 불규칙해 보이던 스텝이 익숙해져갔고
조금씩 노인과 저의 호흡이 맞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노인과 함께 리듬을 타면서 스텝을 밟고 있으려니까 제가 능숙한 댄서가 된 기분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노인이 살짝 변형된 스텝을 밟는 순간 제 중심이 흐트러졌습니다.
노인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중심을 잡아주더군요.
규칙적인 스텝에서는 노인과 저의 호흡이 완전히 일치하고
불규칙적인 스텝에서는 노인에게 의지에서 따라가다 보니
흥겹기는 해지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춤을 계속 추면서 약간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노인과 함께 춤을 췄더니
살며시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땀이 났습니다.
드디어 멋있는 마무리로 춤이 끝나자
상쾌한 한숨을 쉬면서 노인에게 인사를 하려는 순간
손을 놓지 않고 있던 노인이 다시 제 손을 끌면서
한 박자 반의 센스 있는 마무리 스텝을 보여주고는
뒷모습을 보이면서 유유히 극장을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저한테는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어느 여인과 함께 우아하고 멋있는 탱고를 추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 영화였습니다.
정말 독특한 영화였는데, 보고 나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당신은 아무 것도 보이 못했다’를 보고 나온 상쾌한 기분으로 오늘 방송을 마칠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박인희가 부른 ‘방랑자’를 들으면서 오늘 방송 끝내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또 다른 얘기로 만나겠습니다.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오늘은 비록 눈물 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엔 우리 다시 만나리라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오늘은 비록 눈물 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엔 우리 다시 만나리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오늘은 비록 눈물 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엔 우리 다시 만나리라
오늘은 비록 눈물 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엔 우리 다시 만나리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라랄랄 라라 라라라라, 랄라랄 라라라라..
-------------------------------------------------
이런 방송에도 누군가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방송에 대한 의견도 좋고
전하고 싶은 얘기도 좋고
광고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됩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얘기 주절거려도 되고요. ㅋㅋㅋ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문을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954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