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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83회 – 겸손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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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스워 보이냐? (35회)
1
작년 연말부터 지칠 줄 모르고 몰아치던 추위가 잠시 주춤하더니 며칠 동안 날씨가 많이 포근했었습니다. 거기다가 겨울비까지 내리니 구석에 녹지 않고 쌓여있던 눈들까지 말끔히 녹아내리더군요. 그런 날씨에 두터운 잠바를 걸치고 외출했더니 잠바가 좀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조금 가벼운 잠바로 바꿔 입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강추위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아직도 1월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제대로 위력을 보여주고 있군요. 덕분에 가벼운 잠바에 대한 생각은 쏙 들어가고 두터운 잠바와 목도리로 다시 무장을 합니다. 아직도 한겨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만, 이제는 이 추위가 많이 적응이 됐습니다.
춥다고 어딘 가에 틀어박혀 있지만 말고 아주 잠시 밖으로 나가서 매서운 겨울바람을 쏘이고 들어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몸을 움직여줘야 겨울을 좀 더 잘 버틸 수 있기도 하고, 차가운 공기를 가슴 속에 집어넣으면서 마음 속 공기도 환기를 시켜주면 좋겠지요. 버스를 타고 멀지 않은 바다로 가보는 것도 미친 짓은 아닐 겁니다.
푸른 하늘이 부릅니다.
‘겨울 바다’
겨울 바다로 가자
메워진 가슴을 열어보자
스치는 바람 불면 너의 슬픔~ 같이~하자
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
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을
겨울 바다로 그대와 달려가고파
파도가 숨 쉬는 곳에~
끝없이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 넘치는 기쁨을 안고
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
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을
겨울 바다로 그대와 달려가고파
파도가 숨 쉬는 곳에~
끝없이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 넘치는 기쁨을 안고
겨울바다로 그대와 달려가고파
파도가 숨 쉬는 곳에~
끝없이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 넘치는 기쁨을 안고
겨울바다로 그대와 달려가고파
파도가 숨 쉬는 곳에~
끝없이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 넘치는 기쁨을 안고
2
인디밴드 음반을 전문으로 내는 음반사인 ‘붕가붕가레코드’라고 있습니다.
서울대에서 음악을 하던 이들이 학교 안에서 자체적으로 음반을 제작해서 유통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음반사를 차린 것이지요.
‘붕가붕가레코드’의 모토는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입니다.
자기들만의 음악을 하고 싶은 이들이 최소한 먹고 살면서 음악을 하고 새로운 형태로 유통을 해보자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허름한 자취방 같은 곳에 적당히 방음시설을 해서 녹음실을 만들고
간단한 편집 장비를 싸게 사서 공CD에 녹음된 음악 파일을 저장하고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으로 표지를 만들어서 겉에 붙이고는
공연장 같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음반을 파는 것이 이들의 시스템입니다.
이런 원시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음반도 인디음악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금 팔리기는 했지만, 그들이 목표로 했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에는 턱도 없었지요.
그렇게 얼마 동안 몇 개의 음반을 만들면서 유지됐던 음반사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는 당연히 어려웠겠지요.
멤버 중에 졸업생은 생계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고, 인디음악에 대해 지속적인 고민을 하던 이는 다른 형태를 고민하면서 붕가붕가레코드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붕가붕가레코드에 소속돼 있던 ‘아마도 이자람밴드’의 음반의 반응이 괜찮았는데, 멤버들은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아마도 이자람밴드’를 독립시켜 버리기로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실험이 이렇게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던 순간 뜻하지 않은 대박이 떠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반이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들은 밤새도록 수작업으로 ‘장기하의 얼굴들’의 음반을 만들어내느라 정신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붕가붕가레코드가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리게 됐고, 그들이 목표로 했던 ‘지속가능한 딴따질’이라는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았습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2집 음반까지 연속 홈런을 쳤지만, 재무관리가 엉망인데다가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만들어내지는 못해서 그들이 목표로 했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음반사가 ‘장기하와 얼굴들’에만 의존하게 되면 나머지 밴드들이 소외되는 문제도 있어서 그에 대한 고민도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음반사를 만든 지 8년이 되도록 음반사를 유지하면서 그들만의 자유로운 음악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상근직원은 1명뿐이고, 장기하를 빼고 나머지 멤버들은 아직도 투잡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붕가붕가레코드의 초기 음반 중에 한 곡을 들어볼까요?
‘눈뜨고 코베인’이 부릅니다.
‘헤어진 사람 방에 중요한 걸 깜박 놔두고 왔네’
아~ 헤어진 사람 방에
중요한 걸 깜빡 놓고 왔네
그냥 놓고 갈까
아니면 다시 돌아갈까
아~ 헤어진 사람 방에
중요한 걸 깜빡 놓고 왔네
그냥 놓고 갈까
아니면 다시 돌아갈까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줄까
나를 안에 들여보내줄까
웃을까 화를 낼까 어이없이 할까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줄까
나를 안에 들여보내줄까
웃을까 화를 낼까 어이없이 할까
하하하, 정말 기발한 노래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이 노래는 읽는 라디오로 읽는 게 더 재미있습니다.
실제 음악을 들어보면, 아마추어티가 팍팍 나는 연주 실력에 가사도 제대로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습게보시면 안 됩니다.
‘눈뜨고 코베인’은 지금까지 4장의 음반을 내면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나름 중견밴드이니까요.
이번에는 ‘눈뜨고 코베인’보다는 조금은 음악적 실력이 있는 ‘아마도 이자람 밴드’의 노래를 들어볼까요?
붕가붕가레코드에서 독립한 보컬 이자람은 어릴 적에 가수 이규대씨와 같이 ‘내 이름 예솔아’라는 노래를 불러서 대중적으로 알려졌던 가수인데요, 커서는 국악고등학교와 서울대 국악과에 들어가서 국악을 공부하다가, ‘아마도이자람밴드’를 만들어서 인디음악을 하기도 하다가, 지금은 신세대 판소리꾼으로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형태의 판소리 공연을 하고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실력이었으니 붕가붕가레코드에서 감당하기 어려웠던 걸까요? 히히히
‘아마도 이자람밴드’의 ‘비가 축축’이라는 노래 들어보겠습니다.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에서 비가 축축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걸까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에서 비가 축축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 위 구름이라도 우는 걸까
술김에 니 방으로 걸어들어 가지 않길 참 잘했어
분위기에 취해 니 입술에 키스하지 않길 참 잘했어
술취해 니 이불로 기어들어가지 않길 참 잘했어
분위기에 취해 니 입술에 키스하지 않길 참 잘했어
참 잘했어
참 잘했어
참 잘했어
근데 왜
비가 내려 비가 축축
내 맘에도 비가 축축
비가 내려 비가 축축
내 맘에 구멍이라도 뚫린 걸까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에도 비가 축축
비가 내려 비가 축축
하늘 위 구름이라도 우는걸까
술김에 니 방으로 걸어들어 가지 않길 참 잘했어
분위기에 취해 니 입술에 키스하지 않길 참 잘했어
술 취해 니 이불로 기어들어 가지 않길 참 잘했어
분위기에 취해 니 입술에 키스하지 않길 참 잘했어
참 잘했어
참 잘했어
참 잘했어
참 잘했어
이 노래는 읽는 라디오에서 가사로만 읽기에는 좀 아쉬운 노래입니다.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연주 실력도 그렇고, 이자람의 목소리 역시 판소리꾼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는 독특한 매력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직접 들어보세요.
인디음악을 하는 이들은 기존의 상업적인 음악들이 너무 천편일률적이어서 식상하고, 젊은 세대들의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만의 정서를 솔직하게 담아내면서 자유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어느 순간 인디음악도 유행을 타기시작하면서 말랑말랑하고 상큼한 노래들로 천편일률적으로 변하고 있더군요.
가사들도 상업적 유행가 못지않게 온통 사랑타령이고, 유치찬란한 기성세대의 뽕짝 못지않게 가사들도 유치찬란하기는 마찬가지고...
역사니 사회니 하는 골치 아픈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다른 이의 삶에 대해서도까지 별 관심 없이 자신만의 세계와 감정에 충실한 인디음악은 어느 순간 독특한 방식으로 기성세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인디음악이 저변을 넓혀갈지는 모르겠지만, 생명력을 오래 끌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3
우연히 ‘니키 드 생팔’이라는 프랑스 미술가에 대한 책을 읽게 됐습니다.
1930년에 태어나 2002년에 죽은 이 미술가는 조각, 행위예술, 드로잉, 건축, 영화제작 등 정말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예술가였다고 하는데,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으로 그에 대해서 알게 됐습니다.
프랑스의 귀족출신 중산층 가정에서 때어나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로 인해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자란 니키 드 생팔은 빼어난 미모에 지적인 인텔리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별 걱정 없이 자랐을 것 같은 그는 학창 시절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주위를 걱정시키더니 18살에 급하게 결혼을 해서 자식도 낳고 살다가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미술에 빠져듭니다. 그러면서 심한 우울증으로 정신병원 치료도 받기도 하는 등 험난한 20대를 보내지요.
그렇게 철없는 중산층 출신 예술가였던 그녀는 ‘내 애인의 초상’이라는 도발적인 작품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 작품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기발합니다.
자신에게 추근거리는 바람둥이 마초가 있었는데 그에게서 와이셔츠를 달라고 해서는 와이셔츠를 검은 판자 위에 붙이고, 셔츠 위 머리가 있어야 할 부분에 다트 판을 붙여놓고는 다트 판을 향해서 화살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하하하, 정말 유쾌 상쾌 통쾌한 작품이었지요.
그 다음으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슈팅 페인팅’이라는 일종의 행위예술입니다. 흰색 부조를 벽에 설치하고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물감이 들어가 있는 총을 쏘면 물감이 사방으로 튀고 흘러내리면서 작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두고 “작품이 피를 흘린다”라고 표현하면서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가부장적 질서를 향해 거침없이 총을 쏘아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부장적인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조롱을 퍼붓던 그녀는 점점 임산부와 창녀와 결혼식의 신부 등 다양한 여성의 이미지를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하면서 여성의 긍정적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그런 결과로 나온 것이 ‘나나’시리즈였습니다.
임신한 친구를 모델로 해서 만들기 시작한 ‘나나’는 아주 풍만한 가슴, 불록 튀어나온 배, 거대한 엉덩이를 가진 여성이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고 즐겁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상처로 얼룩진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긍정성을 유쾌하게 드러내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지요. 근엄하신 남성분들이 “너무 외설적이다”고 개 거품을 물었지만, 나나시리즈는 곧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도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1966년 스톡홀름 전시회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출산 직전의 만삭인 나나가 누워있는 작품인데, 길이가 28미터에 높이가 7미터나 되는 거대한 작품이었는데, 사람들은 누워있는 나나의 다리 사이에 벌어진 질 입구를 통해서 나나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 일종의 건축물이었지요. 우리네 어르신들이 보면 질겁하겠지만, 수 만 명이 나나의 질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거침없는’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던 그는 과로와 우울증, 유기용제 중독 등으로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도 이탈리아에서 거대한 공원을 만드는 작업에 매달립니다. 그 공원은 유럽에서 유명한 타로 카드에 나오는 상징들을 건축물로 만들어진 공원이었습니다. 기괴한 형태의 상징물들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널려져 있고, 사람들은 그 상징물들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면서 즐겁게 어울려 노는 공원이지요. 그 공원의 중앙에는 ‘나나’와 비슷한 모습의 스핑크스인 ‘여왕’이라는 작품이 자리 잡고 있지요.
평생을 발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유쾌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온 니키 드 생팔의 지치지 않는 열정의 밑바닥에는 뜻밖에도 11살 때 친아버지로부터 당했던 성폭행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끔찍한 상처를 평생 동안 간직하면서 그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작품들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철없는 중산층 출신 인텔리 여성이 보여줬던 발칙함의 근원이었습니다.
그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남자는 아버지 말고 두 명이 더 등장합니다. 첫 남편이었던 해리 매튜스는 너무나 순수해서 두 명의 자녀를 낳은 후 예술을 위해 가족을 떠나려는 그를 말없이 보내줬고, 그 죄책감으로 니키는 더욱 미술에 빠져들었습니다. 이후 장 팅겔리라는 예술가를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고, 장과는 평생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동지로 살아가게 되지만, 장은 엄청난 스피트광에 바람둥이 마초였습니다. 장은 니키 외에도 두 명의 여성과 동거를 하면서 그들에게서 서로 다른 자녀를 낳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니키는 장을 끝까지 사랑해서 법적 부부가 되기도 하지요.
멕시코의 여성 화가였던 프리다 칼로는 여성을 폭력으로 짓밟는 가부장적인 세상을 향해 여성으로서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하지만 니키 드 생팔은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력으로 그 고통과 싸웠습니다.
수없이 성추행을 일삼으면서 달콤한 가부장적 질서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저는 니키 드 생팔의 전기를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니키 드 생팔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한 번 들어보실래요?
어제 밤엔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고 나니
잠이 들고 말았어요
밤새 꿈나라에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
어제 밤엔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고 나니
잠이 들고 말았어요
밤새 꿈나라엔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
밤새 꿈나라엔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
4
일본의 고전적인 시의 형태로 하이쿠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조랑 비슷하지만 시조보다 훨씬 짧아서, 총 17자로 지어진다고 합니다.
일본이 번창하던 17~18세기에 아주 유행하던 형태라고 하는데, 조선의 시조가 양반님들의 전유물이었다면, 하이쿠는 조선의 중인집단과 같은 사람들이 좀 더 대중적인 형태로 지어서 불려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제가 하이쿠에 대해서 좀 아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솔직히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은 이게 전부입니다. 히히히
어떤 교수가 번역한 하이쿠를 읽었는데, 묘한 매력이 있더군요.
나름대로 까다로운 법칙을 갖고 17자로 지어야하는 그 짧은 시 속에 인생과 철학이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고승이 죽어서 육신을 태우면 사리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런 사리와 같은 느낌의 시였습니다.
추운 겨울밤 하이쿠 몇 편을 감상하면서 음풍농월을 해보는 어떨까요?
하이쿠를 감상하면서 오늘 방송 마치겠습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가 뛰어드는 젖은 물소리
외로움에 꽃들을 피웠는가, 산벚나무야
나를 위해 학이 먹다 남겨두었나, 봄날 미나리
떨어진 꽃잎 가지로 돌아가네, 아, 나비였구나
모기장 안에서 반딧불이 날리니 아, 재미나구나
죽이지 마라, 파리가 손으로 빌고 발로도 빈다
내 별은 어디서 한뎃잠 자나, 여름 은하수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
오동잎 한 장, 환한 햇살 받으며 땅에 내리네
내가 나를 손짓해서 불러보네, 가을 저물녘
도둑이 남겨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
병든 기러기, 추운 밤 뒤쳐져서 객지 잠 자네
재워달라며 칼마저 내려놓네, 밖은 눈보라
물은 차갑고, 갈매기도 쉬 잠들지 못하는구나
절인 도미의 잇몸도 시리구나, 생선 파는 집
타버린 숯이여, 예전에는 눈 쌓인 나뭇가지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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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송에도 누군가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방송에 대한 의견도 좋고
전하고 싶은 얘기도 좋고
광고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됩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얘기 주절거려도 되고요. ㅋㅋㅋ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문을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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