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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와 김민희에 대한 기사를 보고 쓴웃음이 지어졌다.

홍상수가 영화 속에서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 자기 영화를 만드는 건가? 크크크

홍상수와 김민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케이블에서 둘이 함께한 작품을 방영했다.

너무 속보이는 짓거리지만 내가 보지 못한 영화라서 편하게 봤다.

 

익숙한 방식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지만

조금씩 다른 지점을 건드리는 홍상수 영화는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감독인 남자가 우연히 어떤 여자를 만나고

남자가 수작들 걸다가

둘이 술을 마시면서 본격적인 밀당을 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의 선들이 들락날락하다가 끝나는 영화

 

아, 그런데 정재영과 김민희의 연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정재영은 ‘우리 선희’에서 이미 그 놀라운 연기력을 확인했었는데

홍상수와 만난 김민희 역시 그런 정재영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술에 취해 둘이 밀고 당기고 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와호장룡’에서 주윤발과 장쯔이가 대나무 위를 날아다니며 검술대결을 하는 장면이 연상됐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그 연기를 조율하는 홍상수의 능수능란한 솜씨가 압권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어느 순간부터 홍상수 영화에서 여관이 사라지더니

남녀간의 벌거벗은 욕망과 이중적 허위의식이 지워졌고

그렇게 까발려진 속물근성이 가려진 인물들은

현실에서 약간 붕떠있는 도인같은 느낌을 풍겼다.

 

‘하하하’를 끝으로 더 이상 현실의 인간들과 싸우지 않는 홍상수는

‘옥희의 영화’부터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철학자가 되었다.

노장철학을 영화로 얘기하는 장인이라고 해야하나?

 

그런데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가난한 작가는 원고료를 위해 출판사를 찾았다가

마르크스니 노장철학이니 하면서 떠드는 편집장의 얘기를 귀찮은 듯이 듣다가

직설적으로 돈얘기를 해버렸다.

나이들어 노장철학을 능수능란하게 구현하는 지금의 홍상수를

젊은 날의 홍상수가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었는데

이 영화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홍상수의 초기영화 ‘오! 수정’과 너무도 비슷한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남자의 시각과 여자의 시각을 대립시키면서 남자의 이중성과 허위의식을 드러냈던 ‘오! 수정’과 달리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대립하는 게 아니라 파트너로서 현란한 밀당의 기예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중성과 허위의식에 천착하지 않고 아주 자유롭게 밀당을 즐기는 노련함이 돋보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영화 후반부의 김민희 집앞에서의 장면이었다.

김민희와 정재영의 밀당이 절정에 이르며 보는 이의 가슴이 한층 부풀어올랐을 때

김민희가 집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겠다며 정재영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김민희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역시 홍상수의 초기작인 ‘생활의 발견’에서 보여줬던 엔딩장면을 다시 가져온 것이었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다시 나오지 않는 여자를 애처롭게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끝났다.

정말 확깨는 엔딩이었다.

남자 주인공도 관객도 그렇게 허무하고 허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영화에서 빠져나온 관객은 현실의 생활을 발견했었는데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는 그 뒤로 얘기를 더 붙여 넣으면서

그 둘의 밀당을 자연스럽게 마무리해버렸다.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영화를 기예로서 마무리하는 게 목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젊은 날의 홍상수가 짜증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니까

나이 든 홍상수가 노련한 기예를 보이며 직설적으로 한 마디 툭 던져버린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젊은 날의 홍상수는 아무리 잘난 척 해봐도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나이 든 홍상수는 젊은 여배우와 바람나서 외국으로 가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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