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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부산으로 향하는 초고속 열차 안에서 두 시간 동안 인정사정 볼 것없는 액션이 이어졌다.
황당한 히어로의 액션이 아니라 현실적인 액션이 더 몰입하게 했고
어설픈 멜로나 코미디 같은 곁가지 없이 시종일관 우당탕탕 거리면서 시원하게 내달렸고
CG나 특수분장이나 음향효과 같은 것도 흠잡을데 없이 깔끔했다.
기존 좀비영화와 다른 독특하고 신선한 맛은 별로 없었지만
기존 상업영화들처럼 식상함으로 떡칠되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의 최고의 장점은 좀비영화의 본질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좀비영화는 대중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말이다.

 
초반부터 영화는 폭력시위에 대한 보도장면을 보여주면서 좀비들의 이미지를 여과없이 연결시켰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은채 미쳐서 날뛰는 좀비들이 어떻게 급속히 확장되며 불안과 무질서와 폭력이 극한으로 치닫는지도 생생하게 보여줬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좀비들은 점점 불어나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고립되어갔다.
이미 군중을 이뤄서 무질서와 폭력을 일삼는 좀비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때려 눞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옛 동료였어도 이성을 상실한 좀비가 된 이상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단무지인 좀비들은 휴대폰에서 울리는 ‘오 필승 코리아’라는 노래에 혹해서 미친 듯이 달려들기도 했다.
이쯤되면 이 영화가 어떤 세계관을 바탕으로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걸 숨기지 않았다.

 
몇 년 전 서울시청과 광화문 일대에서 며칠이고 밤새도록 설쳐댔던 나와 같은 사람들을
차벽 너머로 지켜봐야했던 사람들이 가졌을 불신과 두려움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통제되지 않는 대중들의 무질서와 폭력의 광란은 좀비때들의 광란 그 자체였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마 감독은 자기 영화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펄쩍 뛸지도 모른다.
뭐 하긴, 감독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했냐 하는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나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이니까.

 
몇 년 전에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을 보고 오윤의 판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가졌었다.
거대한 폭력의 피라미드를 거칠고 직설적으로 보여줬던 그 영화에서도 폭력이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은 잘 그려졌다.
하지만 오윤의 판화에는 그런 투박함과 각렬함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중의 한과 흥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연상호와 오윤의 결정적 차이였다.
오윤은 민중 속에 있었지만, 연상호는 민중 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돼지의 왕’이 보여줬던 세계관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부산행’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폭력의 피라미드가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 광란의 아비규환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또다른 폭력의 피라미드를 만들려고 하는지
감독은 그걸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오윤이 살아있었으면 민중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서있었을지 모르지만
연상호는 차벽 너머에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촛불을 든 민중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노숙자는 살려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문제만 키우는 민폐인물로 그려지지만
촛불집회에서 노숙자는 같이 투쟁하고 논쟁하고 즐길줄 아는 동지였다.
좀비때의 한 일원이었던 나는 좀비들 속에서 어떻게 민주적인 토론이 이뤄지고, 협력과 창의력은 어떻게 발휘되어 번져가는지, 그 힘이 어떻게 폭력적인 세상을 바꾸는지 생생하게 경험했다.
좀비가 아닌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런 세상이었다.

 
교육부의 한 관료는 민중은 개 돼지라고 했다.
먹을 것만 적당히 주면 군소리 없이 잘 지낸다고 설명도 해줬다.
연상호는 그 개 돼지들이 통제불능의 상황이 되면 어떻게 미쳐서 날뛰는지를 보여줬다.
멍멍, 꿀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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