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 고길섶

격포항을 가득 메운 촛불들 사이, <반핵출정가>가 울려 퍼진다. 무대에 오른 노래패의 노래는 금세 부안 군민 모두가 함께 부루는 노래로 변한다. 그들의 노래는 군민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노래가 되며 아픔을 모아 분노를 만들어낸다.
부안 군민이 모두 인정하는 부안의 최고 노래패 ‘노랑고무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긴 함성이 따라붙는다. 노랑고무신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없다. 단지 부안 사람이 모두 입고 있는 노란 옷을 함께 맞춰 입을 뿐이다. 그 노란 옷에 담긴 의미 ‘핵 없는 세상’ 하나만으로도 부안은 이미 노랑고무신의 노래에 실어 보낼 함성을 장전하고 있다.
이정선(37) 회원은 “노래를 잘 불러서 무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노래가 10점, 개사점수 20점에 의상이 70점이다. 핵과 맞서 사우는 사람은 노래를 잘 부르건 못 부르건 모두 한식구다.”라고 말했다.
평균연령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높다. 회원 전부가 아줌마, 아저씨다. 노랑고무신이라는 공식 이름을 달고 활동에 들어간 것은 채 한 달을 넘지 않는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대 위에서 간혹 음정과 박자를 놓쳐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열성팬과 관객동원 능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안 군민 모두가 이들의 열성적인 팬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만들어지자마자 부안지역 읍·면을 돌며 순회공연에 나섰고, 활동 1주일 만에 팬클럽(?)이 생겼을 정도다.
노랑고무신이 전폭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는 단 하나, ‘군민의, 군민에 의한, 군민을 위한 부안의 노래패’이기 때문이다. 핵폐기장 부지 유치가 부안으로 확정되는 순간부터 부안은 한 덩어리고 싸우기 시작했고, 그 반핵투쟁은 해를 넘겨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긴 싸움의 순간순간 군민들은 투쟁의 마음을 힘차게 독려해줄 노래패를 필요로 했다. 작년(2003) 12월 18일 어쩌다 몇 명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고, 그것으로 노랑고무신은 창단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
‘노랑고무신’에 담신 속뜻을 보면 그들의 존재이유는 아주 선명해진다. ‘노랑’은 모든 부안 사람들의 목소리인 반핵을 상징한다. ‘고무신’은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자는 의미이다.
“반핵투쟁은 부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다. 고무신처럼 서민적이다. 노래를 부르는 우리만이 노랑고무신이 아니다. 반핵을 위해 매일 발바닥에 땀이 나는 부안 사람 모두가 다 노랑고무신이다. 부안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반핵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게 강양수(39) 단장의 말이다.
아저씨 세 명에 아줌마 다섯 명, 노랑고무신의 주축은 집안살림을 책임지는 아줌마들이다. 날마다 변산, 진서, 하서면 등지로 공연을 나서는 일정 때문에 집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식구들은 따뜻한 밥을 제대로 챙겨 먹는 날이 드물다. 그러나 가족 누구 하나 엄마이자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한 그녀들의 빈 자리를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한다.
회원 이오순(46) 씨는 “핵폐기장 싸움이 시작되고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부안 사람은 거의 없다. 부안 사람 모두는 아픔을 알고, 그 아픔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안다. 우리는 부안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노랑고무신 회원들은 핵폐기장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였다. 촛불을 들고 모인 부안수협 앞 민주광장에서 혹은 반핵대책위 사무실에서 반핵을 외치다가 만났다. 사는 지역도 하는 일도 다르다. 몇 명은 농사 짓고, 또 몇은 고기 잡고, 건축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정경미(37) 씨의 말처럼 “농사 짓는 것보다 핵폐기장 싸움이 더 중요”해서 만났고,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무대 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노래를 부란다. 생업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반핵의 열정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다.
노랑고무신뿐만 아니라 부안 사람 모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서 반핵을 이야기한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동지가>를 배워 부르고 <불나비>를 목청껏 외치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이 할 일로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김정(41) 씨는 “할머니들은 촛불시위에 나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담벼락에 반핵을 색칠하는 것으로 자기 자리를 지킨다. 부안의 반핵운동은 누가 시킨 게 아니다.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는다. 우리는 노래로 우리 자리를 찾았다.”고 말했다.
노랑고무신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자신들의 노래를 녹음해 음반을 해는 것이다. 노래실력을 뽐내거나 돈을 벌 생각은 아예 없다. 음반 속에 담긴 노래가 가두방송을 통해 부안 땅, 우리 땅 곳곳에 울리면 된다. 핵 없는 세상 그날을 기다리며 ‘노랑고무신’은 매일 ‘군민의, 군민에 의한, 군민을 위한 노래’를 부란다.
- 정상철, <전라도닷컴>, 2004년 2월 4일

부안에 새로운 시위문화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집단난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페트병, 플라스틱통, 깡통, 냄비, 쟁반 등 소리가 날 만한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아스팔트 바닥을 마구 두드려 소음을 내며 투쟁하는 방식인데, 최고 대접을 받는 악기는 양철통이다. 무덥고 습한 여름날 열과 성의를 다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난타를 하고 있는 이들을 옆에서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소리가 소리를 내고, 소리가 소리를 먹어, 빠르고 독특한 가락으로 변해 신명나게 쳐대는 이들을 무아지경으로 빠지게 하는데.....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를 재연하듯이 페트병이나 막대기를 두 손으로 잡고 다듬이질하듯 가락과 강약을 조절해가며 두드려대는 사람, 젓가락 장단에, 풍물가락, 빨랫방망이 두드리듯 냄비뚜껑을 앞뒤로 뒤집으면서 쳐대는 사람, 그저 마구 바닥을 두드리는 사람 등 가지각색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낸다. 그런데 묘하게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끄러운 소음이 멋들어지고 구성진 가락으로 변하여 거대한 타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어떤 사람이 먼 곳에서 이 소리를 듣고 북을 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 걸 보면 정말 소리란 함께 섞여야 제맛이 나고, 드는 것보다 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난타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다. 군청 행정을 마비시키거나, 연행자 석방을 위한 경찰서 투쟁 등 길고 긴 투쟁을 시작할 때 등장한다. 즉 소음을 통해 상대방의 뇌신경을 건드려 짜증나게 하면서도 자신들은 지치지 않는, 행위예술을 통한 시위방식인 것이다. 지난(2003) 8월 15일 전북 경찰청 앞 투쟁에서 처음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인기를 끌면서 특히 여성 참가자들한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잇다.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사람들이 내다 버린 것들을 활용한다는 것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고 특별한 연수가 필요없다.
특히 남의 말을 듣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주체로서 등장하며, 복잡한 체계와 질서 없이 단순한 동작을 통해 서로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하여도 지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난타를 통해 속에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는 것이다. 이 난타공연에는 나이 든 여성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을 보고 특히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쌓인 ‘한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부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경박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안에서 등장한 특이한 투쟁형태, 집단난타는 축제의 한 프로그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집단적 분노를 집단의 소리로 표출하는 저항행위였습니다. 그녀들의 악기는 징이나 장구가 아니라 양철통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짤막하게 자른 수도관으로 양철통을 쉴 새 없이 쳐댔습니다. ‘무대뽀’로 쳐대는 것이 아니라 대형 스피커와 확성기로 울려퍼지는 민중가요의 장단에 맞추어 음악적 가락을 강렬하게 배치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트로트 가락에 젓가락 장단을 맞추는 듯 보이면서도, 그것과는 또 다른 종의 것이니 사람들은 이를 ‘난타공연’이라 불렀습니다. 오히려 한국 여성들의 전통미를 속도감 있게 다스리는 다듬이질을 닮았습니다.
2003년 10월 12일 부안예술회관 앞에서는 하루 종일 대규모 집단난타가 벌어졌습니다. 300명 가량 되는 아줌마부대와 ‘아저씨’ 몇 명이 끼어 있었고, 함께하는 군민들도 수백 명 되었습니다. 이날의 난타공연은 전라북도에서 개최되는 전국체전 경기 중 시범경기인 바둑대회가 부안 군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안예술회관에서 강행되는 것에 대한 잡단 저지 활동, 바꿔 말하면 난타시위였습니다. 부안군에 배정된 요트와 트라이애슬론 두 종목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지만 바둑은 실내경기여서 보호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대로 강행하자, “초상집에서 웬 축제냐”며 난타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아줌마 난타부대는 예술회관 정면에 인접한 깨밭과 고구마밭 사이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난타공연을 하며 1,000여 명의 전경부대가 지키고 있는 바둑대회장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녀들 앞에 설치한 ‘새 쫓는 기계’ 16대도 연달아 폭발음을 내었고, 전경들에게 젓갈탄도 발사하였습니다. 난타와 젓갈 냄새가 포성과 화약냄새를 대신한 것입니다.
난타, 누가 이것을 공연이라 쳐주겠습니까. 견디기 힘든 소음이 광폭하게 들리는데 말입니다. 사실 수백 개의 철판이 찢어지는 소음을 직접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청각공해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 장소에 직접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소리에 소리를 무는 공연으로 협화음을 이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난타는 그 대상이 되는 자에게는 엄청난 소음공해인 동시에 그 주체에게는 강렬한 저항력을 보여주는 공연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녀들의 난타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아야 했습니다. 난타공연장에 있다는 것은, 곧 난타의 소음을 행위예술적 저항으로 승화시키는 그녀들의 집단적 얼굴성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질긴 저항과 난타의 고행,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성, 그녀들은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늘로 치켜세우지도 아니합니다. 그녀들은 바로 앞의 부조리한 상황을, 분노에 차 있으되 고도의 동적 평형상태를 유지하며 응시합니다. 응시는 난타의 한 행동이며, 난타는 응시의 음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의 다양성과 일관성을 획득하며 저항적 리토르넬로를 생산하는 표현의 얼굴성이며, 난타공연이 행위예술인 까닭입니다.
그녀들은 문화예술행위가 특권화된 고급형식으로만 창출되는 게 아니라 저항적 삶에서 창출되는 것임을 체험했습니다. 불과 한두 달 새 동질화된 감정구조로 혈육화된 시선들을 함께 잇는 난타공연은, 늘 구경꾼이기만 하던, 그것도 지역축제 때나 겨우 구경할 수 있는, 순전히 텔레비전의 낯선 타자로만 존재하던 그녀들 스스로가 얼마든지 뛰어난 문화예술 행위자가 될 수 있음을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도 전복의 전위예술가로 말입니다. 지휘자도 없는 집단 난타공연은, 잃어버린 해방의 문화소를 되찾는 몸의 운동이자 소리의 파장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들의 저항은 민주주의를 유린한 군수에 대한 정치적 저항에서, 삶과 표현과 소통의 새로운 문화를 갈구하는 문화적 투쟁으로 이미 확장된 것입니다.

......

‘반핵·민주’라는 거창한 간판과는 달리 미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뛰어든 것이 아니어서 매일 매일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동분서주, 혼비백산했다. 2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핵에너지 문제’ 같은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스며들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서울상경투쟁을 처음부터 끝가지 아이들이 준비하고 이뤄지면서 그 자체로 ‘반핵’과 ‘민주’를 체험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강조했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은 지독히도 수동적이고 타율에 젖어 있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힘들어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다. 나 또한 비슷한 모양으로 그 시절을 지나왔겠지 하면서도 이런 모습에 많이 놀랐다. ‘의미 있는’ 동아리 활동을 시도하다 ‘차라리 신나게 놀아보기’를 선택한 것도 이런 연유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았던 것이 무어냐고 물으니 학교의 벽을 넘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된 점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지금 서로에게 미쳐 있다. 학교 담장 안, 교실 안, 짝꿍의 좁은 세계를 벗어난 만남을 갖게 된 것은, 이번 작은 불꽃학교가 아이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한 친구는 원래 별로 말이 없고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이번 불꽃학교의 경험으로 자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좋아했다. 계기를 물으니 “여기선 서로 경쟁하지 않아도 되잖아요.”라고 답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학교의 모습, 우리 교육이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는 곳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소맷자락을 잡고 “차라리 가지 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작은 불꽃 만남이 계속 되길 바란다. 무슨 의미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숨통을 트는 공간으로라도 계속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짧은 기간이지만 집중적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청소년 인권’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생각이 관념적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고백하자면, 인권활동가라고 자처하던 나는 아이들을 의식화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접근했던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내게 어림없다는 것을 대번에 보여줬다. 그리고 아이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사랑’이 먼저임을,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

.....

나는 부안투쟁을 보면서 여러 번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예상 외로 주민들의 대규모화된 지속적 투쟁에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그 주민투쟁 동력을 자신들의 입맞에 맞게 코드화하는 대책위 지도부의 정치적 행보와 배제의 논리에 놀랐습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배제당하고 소외당하고 투쟁의 자기전망성/자기결정성이 박탈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어쨌거나 투쟁은 함께하면서 분열주의적 언행들을 극도로 자제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네 번째는 부안에서 뭔 일을 하려면 대책위 지도부의 ‘눈치’를 봐야 하거나 ‘교감’을 해야 한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이걸 사람들은 ‘허락’의 의미로 이해하고 반감을 가졌습니다. 다섯 번째는 그럼에도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으며 함께 투쟁하는 군민들의 원성이 자자해도 끄떡하지 않는 지도부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 고길섶, <반핵부안>, 2004년 7월 5일

2004년 10월 4일 상경투쟁 때, 앞에 있는 지도부는 “참여정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시위행렬 끄트머리에 선 주민들은 자진해서 “노무현을 박살내자!”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지도부와 주민대중의 차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민대중의 감정구조는 끊임없이 지도부의 개량화된 정치전략으로 종속되었는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현행 투쟁 이후 부안사회의 정치구도 및 문화정서를 부조리한 방식으로 장악해나가겠다는 욕심의 표현과도 연동되었습니다. 그 욕심은 끊임없이 투쟁의 승리를 좌절시켰습니다. 이는 코뮌놀이로 징후되는 주민들의 해방적 투쟁상황과 이중권력적 쟁취를 해체시키며 권력적 욕망으로 미끄러지는 분열증적 장애물이었습니다.
대책위에 대한 비판이,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거나, 분파를 형성하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지도부의 역량 부족을 탓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역량이 부족하면 힘을 실어주면 될 일입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을 메워나가는 태도입니다. 역량이 부족하면, 통 크게 수용하고 껴안으면 함께 채워나가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지도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큰 줄기를 틀어나가면서, 설명하려고만 했지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며 자신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뱉어냈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쓴소리를 하면 경계하고 배척했습니다.
부안사회는 대책위 지도부 사람들과 친밀하게 코드화된 사람들 및 이들과 결속된 ‘형님문화’ 패밀리에 의해 주도되고 있습니다. 이 몇몇 사람들 편으로 고개 숙여 들어가지 않으면 철저히 배제하고 심지어는 적대시하는 습성에 절어 있습니다. 이는 자기네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안고 가려 하는 낡은 운동관입니다. 그나마 이 낡은 운동관마저 민중적 실천에 근거하지 않을뿐더러 합리적 공론장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형님문화적 사고 코드와 개인적 욕심들로 뒤섞이면서, 배제와 적대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주류 형님문화의 우산 속으로 결속되지 않은 채, 이들과 다른 생각으로 부안에서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은 배제되고 도태당하기 십상입니다.
반핵투쟁 이전 오랫동안 보수주의 세력에 눌려 약자로서 소외되었던 대책위 지도부(농민회 계열)는, 반핵투쟁을 통해 급성장하여 부안사회의 주도권을 휘어잡게 되었지만, 이전에 체화된 방어적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상황이 달라졌고 부안항쟁이 대규모 주민대중투쟁임에도 타성을 혁신해내지 못했습니다. 대책위를 비판하면 내용의 타당성 여부는 묻지 않고 정치적 경쟁세력(민주당)의 지도부 흔들기 음모로 간주하거나 비판행위 자체를 불온시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늘에서 민주노동당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반핵진영 내 깊이 형성된 반목정서는 내버려둔 채, 군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감대 없이, 반핵투쟁의 성과를 정치적 이해관계난 개인적 욕심에 따라 일부가 배타적으로 챙기는 행보를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004년 봄 대책위에 비판적이던 사람들 중심으로 ‘부안주민자치참여연대’를 발족할 때 대책위 지도부가 방해활동을 했던 일, 대안신문으로 창간한 <부안독립신문>을 일종의 기관지로 전락시킨 일 등 아픈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