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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을 키우는 새로운 실험>

<인권운동을 키우는 새로운 실험> ① '춤추는 허리' 공연

장애여성들에게 연극이란


[편집자주] 인권운동이 새로운 양식과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판에 박힌 기자회견, 집회, 법률투쟁 등에 갇혀 온 인권운동의 현재를 반성하고, 소수 활동가나 전문가들만이 참여하는 방식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본지에서는 7회에 걸쳐 최근 새롭게 실험되고 있는 운동들을 소개해, 이들의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인권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한다.

장애여성공감 연극 팀 <춤추는 허리>는 지난 2003년 장애여성과 폭력을 주제로 처음으로 장애여성의 문제를 다룬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2004년 장애여성의 생애사를 다룬 연극을 공연했고, 올해도 새로운 주제에 맞는 장애여성 연극을 올릴 계획이다.

지금까지 장애여성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연극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장애여성공감에서는 지금껏 닫혀 있었던 장애여성들의 목소리와 문제를 장애여성 당사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에 제대로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연극팀을 기획하게 됐다. 팀장 겸 배우로서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보면 느끼는 것이 있다. 배우들이 단순히 연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들에게 연극에 대한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연극에 대한 열정 속에 자신들이 장애여성으로서 겪으며 살아온 삶들을 처절히 표현해 낸다.

연극은 워크샵을 통해 서로의 살아온 삶을 얘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본을 만들고 연습하게 된다. 지난해에는 장애여성의 생애사를 연극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어린 시절, 사춘기 시절, 처녀 시절, 그리고 중년기까지의 과정들을 차례차례 워크샵을 통해 털어놓았다. 그리고 워크샵 과정을 다 마친 후에는 연출자들이 이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상황극 등을 재연시키면서 본격적인 연극연습에 돌입했다. 상황극 등에서 나온 대사들을 바탕으로 연출자들이 대본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정기공연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장애여성들은 연극을 한다는 열정 못지 않게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놓으면서,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되며, 심적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일반 대중들이 장애여성들이 안고 살아가는 문제를 인식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좀 더 다가가기 쉽고 색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장애여성공감에서는 '연극'을 선택하게 됐다. 한 편의 연극을 통해 장애여성들의 문제를 제시했을 때, 그 효과는 다른 어떤 방법들보다 정말 쉽고 편안하게 인식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을 공연을 통해 실감한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 문제는 다 마찬가진데, 장애여성의 문제를 따로 분리시킬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장애여성 문제는 장애남성들의 문제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여성'이기에 가정과 사회에서 받아야 하는 불이익은 장애남성에 비해 배가 되는 부분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장애여성의 문제는 장애인의 문제와 사회적으로 남성에 비해 열악한 여성의 문제를 동시에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춤추는 허리>는 앞으로도 이러한 것들을 계속적으로 알려나가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한편 연극을 본 사람들은 <춤추는 허리>의 연극이 다른 장애인 연극과 다르다는 말들을 한다. 그 말 속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다. 다른 장애인 연극, 내지는 장애인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들은 결말이 모두 훈훈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반면에 우리의 연극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들의 지적처럼 우리의 연극은 그것이 다르다. 문제를 던지는 연극, 관객들에게 극이 제시하는 문제를 자꾸 생각나게 하는 연극, 그것이 바로 다른 연극이나 장애인을 소재로 한 여타의 작품들과 다른 것임을 말하고 싶다. 사실 장애인의 삶이 어찌 해피엔딩일 수 있겠는가? 이제는 그 해피엔딩 뒤에 가려진 진실의 베일을 벗겨야 하지 않겠는가? 대중들이 우리의 연극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이 벌써 어떤 형식으로든 그 의미를 생각하고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미 <춤추는 허리>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속에 장애여성의 문제가 깊이 각인되고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그 날까지 <춤추는 허리>의 공연은 계속 될 것이다. 장애여성에게 연극이란 온 몸을 다해 표현하는 삶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박주희]

◎ 박주희 님은 장애여성공감 연극팀 <춤추는 허리> 팀장입니다.







<인권운동을 키우는 새로운 실험> ② 이라크 전범민중재판

풀뿌리 평화 운동을 꿈꾸며


법정형식의 운동은 가깝게는 조선일보 민간법정이 있었고, 몇 해를 거슬러 올라가면 5.18 민간법정도 있었다. 그렇다면, 2004년 진행된 이라크 전범 민중재판운동을 대안적인 인권운동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전쟁반대운동은 이라크 전쟁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전쟁반대운동은 발생하는 이슈가 있고 없음에 따라 심하게 굴곡을 그려오기도 했었다. 민중재판운동이 제안되던 당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김선일 씨 죽음을 계기로 파병반대운동이 대중적으로 일어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운동 또한 점점 힘을 잃어갔으며 추가파병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란 문제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이었다.

민중재판운동을 고민하던 사람에게 이 문제는 적어도 한국 반전운동의 실천양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슈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대규모 집회와 대국회 압박이라는 운동방식을 반복해 오다보니, 이슈가 없어진 시기에 풀뿌리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어떤 반전운동을 벌여야 하는지 기획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단체 간 연대라는 연대운동방식이 과연 개인들과 소모임들 간의 활동을 고무하고 소통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는가라는 점도 고민의 화두였다. 2004년 추가파병이 이루어진 이후 가장 끈질기게 저항했던 이들은 오히려 박기범, 김재복 씨 등 개인과 공부방 같은 지역의 작은 모임들이었고, 이처럼 행동하고 있는 이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소통해나갈 수 있는 연대운동의 새로운 실험도 필요했다.

민중재판운동에서 기소장을 쓰는 운동이 가장 강조되었던 이유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몇몇 전문가의 국제법적 지식에 기댄다면 더욱 훌륭하게 민중법정을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기소장을 쓰면서 전쟁을 다시 기억해내고, 직접 이라크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과정을 만듦으로써 반전운동의 기초를 튼튼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이슈 쫓기에 급급했던 기존 반전운동의 활동방식을 넘어, 우리의 요구를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직접행동의 한 전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풀뿌리 대중이 자기 이유에 근거해 참여할 수 있는 운동형태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민중재판운동에선 전쟁을 부당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설득하는 '유랑' 활동을 내내 진행했다. 유랑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지역의 모임들이나 공부방 같은 소모임을 찾아가 이라크를 이야기하는 일, 혹은 거리와 대학가에서 문화적인 방식으로 시민을 만나나가는 일, 이라크인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전쟁 증언대회를 열었던 일 등. 이와 같은 활동의 결과, 예전에는 몰랐던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트고, 또 다른 반전활동을 기획할 수 있는 여러 개인들과 소모임들 간에 정서적인 연결망을 낳았다. 민중재판이 마무리된 지금 이 시점에도 그때의 연을 바탕으로 새롭게 운동이 제안되고, 또 몇몇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평화를 실천할 평화운동모임이 고민되고 있다는 것은 유랑이 남긴 좋은 성과 중의 하나다.

사실 민중재판운동이 간직했던 화두와 실험이 아주 새롭거나 거창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운동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과 직접 대면하면서 운동을 해보려 했던 실험이었을 뿐이었고, 그 만큼 한계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고발과 심판운동이 사회적으로 환기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는 점, 의욕을 가지고 실행위원회 구성과정에서 실험해보았던 개인참여에 바탕을 둔 수평적 조직형태가 운동의 책임성과 소통의 활성화라는 문제에 있어 여전히 한계를 보였다는 점, 풀뿌리 운동의 활성화라는 이 운동의 목표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등등 곱씹어봐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많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한계가 아닌 과제로 인식하는 이유는 '대중 속으로'라는 포기할 수 없는 이 운동의 정신이 여전히 뚜렷하기 때문이다. [손상열]

◎손상열 님은 평화인권연대 활동가입니다.





<인권운동을 키우는 새로운 실험> ③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방방곡곡 울리는 평화의 몸짓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은 이라크 전쟁반대, 한국군 파병철회, 평택 미군기지 총집결 반대의 목소리를 전하며 2004년 한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사람을 불러모아 얘기를 듣게 하기보다는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려 했고, 인터넷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얘기하는 것보다는 직접 대면하고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랑단은 2003년 겨울, 서울을 중심으로 파병철회를 위한 거리공연을 시작으로 해서 2004년 5월29일 벌어진 평택 평화축제를 알리기 위한 전국순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7월에는 전국도보행진을 전쟁피해자들과 함께 했고, 파병철회를 요구하며 오랜 기간 단식을 한 김재복, 박기범 님과 함께 철군과 종전을 위한 단식순례를 9월 내내 진행했다. 이어 2004년 마지막 일정으로 전범민중재판 기소인을 모집하며 전국을 돌았다.

유랑단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유랑단은 거리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북으로 난타도 치고 퍼포먼스도 했다. 이 거리공연이라는 것이 얼핏보면 그럴싸하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공연경험이 전무한 아마추어들의 황당한(?) 몸짓이기도 했다. 하지만 횟수가 거듭할수록 나름대로 노하우라는 것이 쌓이면서 어떤 것이 좋은 표현인지에 대해서도 느끼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잘한 공연이 아니라 '잘 표현한' 공연이다. 투박하고 어설퍼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느낌이 잘 드러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사람들은 집회나 문화제에 전문 공연자를 불러오려 하지만, 정작 그 문제에 대해 고민이 가장 많은 사람 중 하나인 자기자신이 스스로 표현을 해보려는 노력은 잘하지 않는다. 유랑단은 뛰어난 공연자 열 명을 부르는 것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하나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임을 유랑을 하면서 거듭 깨달았다.

유랑단이 주대상으로 하는 사람은 미디어를 거쳐서 만들어진 정지된 장면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리에서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다. 현장에 있는 일반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을 더 선호하게 된다. 파병에 반대한다고 해서 모든 곳에 '파병반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메시지가 강렬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시작된 퍼포먼스는 군인분장을 한 연기자가 '군인은 집에 가고 싶다'는 글씨의 발판을 놓고 사람들 한가운데 동상처럼 서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글씨와 분장 외에 아무런 설명이 없는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모이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람이야, 마네킹이야?"부터 시작해서 "군인이 왜 집에 가자는 거야?"라는 얘기까지. 만일 모든 것을 미리 설명해 버렸다면 사람들은 메시지만 보고 그냥 자기 갈 길을 가버렸을 것이다. 표현하는 이와 구경하는 이 사이에 인식의 간격을 주고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여지를 주면서 소통의 씨앗을 심는 방법이 바로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실제로 길거리에 나서서 아마추어 공연자가 사람들의 발길을 잡고 시선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다. 유랑단 역시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과 같이 하고 싶었지만, 냉담한 반응과 차가운 시선에 상처 입을 때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유랑단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뛰어난 공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서있는 사람이 이 어설픈 몸짓에 동행이 되길, 그래서 자기가 느끼는 이 모든 문제들을 몸으로 풀어내길, 그리고 우리의 흥이 거리를 뒤덮어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의식주 문제에 있어 대안을 찾듯이 표현에서도 대안적 방식이 필요하다. '문화적 접근'이란 전문 공연인의 공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느낌, 마음을 문화적으로 표현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재능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 부족했지만, 지난 1년간의 유랑단의 활동은 '대안적 표현'을 위한 작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고철 님은 지난 한해동안 평화유랑단에서 활동했습니다.





<인권운동을 키우는 새로운 실험> ④ 고대 청소용역노동자들 투쟁

그들과 함께, 그 곳에서


고려대 청소용역노동자들의 노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을 다시금 곱씹는 것은 그 투쟁이 저임금 불안정노동 철폐운동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거나 사회권운동의 앞길을 '뻥' 터주었다거나 해서가 아니다. 고려대 투쟁은 요구나 성과 모두 여느 비정규직 노조설립투쟁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투쟁의 과정만큼은 분명 색달랐다. 노조설립투쟁에 인권운동이 처음부터 결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불안정 노동과 빈곤이라는 '거창한' 과제를 두 어깨에 걸고 인권운동사랑방 신자유주의와 인권팀(아래 인권팀)이 유독 고려대 청소용역노동자들에게 주목한 것은 몇 가지 기대 때문이었다. 당시 인권운동사랑방의 핵심적인 목표는 불안정노동과 빈곤에 의한 인권침해 당사자들과 함께 싸우는 투쟁을 만들자는 데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당사자들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데, 대학은 다른 사업장에 비해 저임금노동자들을 보다 쉽게 만날 수 있을 뿐더러, 학생-졸업생-교직원 등으로 투쟁주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게다가 고려대에는 학내 저임금노동자 문제로 꾸준한 활동을 벌여온 학생모임 '불철주야'가 있었다. 실제로 인권팀은 노동자들과 신뢰를 쌓는데 있어서 불철주야의 덕을 톡톡히 봤다.

5월 노동절을 맞아 불철주야가 주선한 간담회에서의 서먹한 만남을 시작으로 인권팀은 그해 늦봄과 한여름을 노동자들과 함께 났다. 고대 청소노동자들의 출근시간은 새벽 5시이다. 근로계약서상의 출근시간은 아침 7시이지만, 그렇게 출근해서는 일인당 5백 평에 달하는 광활한 담당구역을 청소해낼 수 없다. 학교와 용역업체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새벽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임금에서도 빼 왔다. 그렇게 일하고 받는 임금은 에누리도 없는 65만원! 모든 수당을 다 포함해서다. 월차니 연차니 하는 휴가는 애초에 허용되지도 않았다. 반장, 소장격의 남성 중간관리자들로터 모욕적인 말과 협박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예 일상이다.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일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계약 해지. 10년을 넘게 일해도 매년 재계약 시기가 되면 해고의 칼바람이 나부끼는 3개월 수습기간을 거쳐야 하는 것이 그들의 신세다.

인권팀은 우선 기본적인 생활조차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노동자들의 저임금이 부당한 인권침해임을 말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서를 들고 학교를 누볐다. 쥐꼬리만한 임금으로는 병원도 여행도 갈 수 없는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이 저임금의 인권침해를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 여명의 노동자들이 진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할 즈음 재계약 시기가 닥쳐왔다. '이번엔 60세 이상은 고용승계 안 시켜준다더라', '야간근로까지 해야된다더라'…이에 주기적으로 모여 노동조건에 대한 의견교환을 해왔던 백 여명의 노동자들과 학생 그리고 인권활동가들은 6월초부터 매일 총회를 개최하고, 공동대응을 논의해갔다. 그 즈음 고려대는 용역입찰업체 프리젠테이션을 개최했고, 그 자리에서 입찰에 참여한 업체들에게 노동시간연장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인권팀은 사회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고용승계보장과 노동강도 강화계획 철회'를 요구하는 사회단체 집회를 고려대 본관 앞에서 벌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투쟁결의도 높아져갔고, 본관 앞 집회와 본관 점거 투쟁을 함께 이어나갔다. 결국 학교는 전원 고용승계 보장과 정년제한 삭제를 용역계약서에 명시하겠다는 약속을 통보해왔다. 감격스러운 반쪽의 승리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노조를 결성했다.

고려대 청소용역 노조설립 투쟁에는 '선수'가 따로 없었다. 매일 열린 총회에서 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했다. 모든 결정은 토론과 전체 합의로 이루어졌다. 해고의 칼날을 바로 눈앞에 두고 노동자들은 참으로 힘든 결정들을 용기 있게 내렸고, 그 과정 속에서 점점 더 당당해져갔다. 노조가 설립된 후에도 인권단체들과 불철주야는 노동인권교육 프로그램으로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계속 이어갔다. 이젠 노동자들의 정치집회에 이들과 마주치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인권 관련 토론회에서 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인권운동이 단지 선언에 그치지 않기 위해선 광범위한 피해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권리주체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각 없이는, 아무리 팍팍한 삶이라도 그저 참을 도리밖에는 없다고 여기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좋은 권리보장제도라도 '있으면 감사하고,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시혜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인권침해의 피해자로 인식하기 어려운 사회권 영역에서 권리주체를 조직화하는 운동의 기획은 더욱 요청된다. 고대투쟁은 정규직화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점이나 개별 사업장의 임금인상투쟁으로 그친 점 등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인권팀은 그 속에서 권리주체 조직화라는 사회권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저임금노동자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해야하는 사람들, 수도세 못 내 물이 끊긴 사람들, 모여 살 집을 못 구해 흩어져야 하는 가족들, 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들이 인권침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사회권 운동이 만나야 할 권리주체들이다. 따로 따로 떨어진 점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소통하고 단결하여 투쟁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권 피해자들이 살고 있는 현장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허혜영]




<인권운동을 키우는 새로운 실험> ⑤ 인권영화 정기상영회 '반딧불'

인권 현장을 밝히는 필름


인권 영화를 좀더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저변을 확대하자는 고민에서 2002년도 9월부터 시작된 인권 영화 정기 상영회 반딧불(아래 반딧불)은 2004년 1월부터 총 11차례 동안 인권의 현장을 '찾아가자'는 취지를 내걸고 움직였다.

인권 영화로 사람의 마음에 불씨를 띄우고, 인권의 심지를 향한 발걸음을 다독이자는 마음을 먹고 인권영화제를 시작한 지 9년째에 다다른 때였다. 인권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우며 밀어붙이는 대통령의 입에서 유행인 냥 오르내리기도 했다. 화려한 멀티플렉스관의 수많은 스크린은 블록버스터들의 고유한 잠식지가 되었고, 영화가 행동과 괴리된 사유의 대상인 듯 취급받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인권영화제의 부피를 작게 만들되, 인권 운동의 현장에 힘을 싣고, 반딧불을 찾은 관객들과 인권 현안에 관한 좀더 깊숙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반딧불을 개편하고자 한 초심이었다.

인권운동과 좀더 밀접하게 결합하자는 취지는 두 가지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우선, 시시각각 변하는 인권 운동의 흐름에 맞춰,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필요한 인권의 문제를 매달 주제로 삼아 해당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물론 관객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인권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였다. 2004년 2월 부안의 반핵열기가 민주주의 투쟁으로 한층 고조될 즈음, '부안을 가다, 핵을 넘다'는 주제로 영화를 상영했다. 더불어 핵폐기장 반대 투쟁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던 부안 지역 주민을 초대해, 부안에서 터져 나왔던 반핵민주주의의 생생한 외침을 나누었다. 또한 성매매방지법 시행이후, 성산업 붕괴 우려와 사주 비호 논리가 팽배했던 지난해 10월에는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인권'을 주제로 반딧불을 개최하여, 성매매를 둘러싼 왜곡된 인식을 전환할 필요성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반딧불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실천이 필요한 인권 운동의 현장을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3월에는 고용허가제, 단속추방을 반대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던 이주노동자들을 찾았다. 9월에는 불안정 노동이 야기한 빈곤에 허덕이는 대학 내 여성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일터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반딧불에서는 정부와 자본의 공조 아래 인권 유린을 당한 피해자이자, 인권의 씨앗을 뿌리는 운동 주체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물론, 이들의 활동을 볼 수 있는 영상물을 상영하기도 했다. 또한 7월에는 어린이, 청소년의 시각에서 장애인권을 접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어린이의 눈과 마음에서 인권을 말할 수 있는 매체가 턱없이 미비한 실정에서, 영상을 매개로 어린이들과 인권을 나눌 수 있다는 소중한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반딧불의 실험이 초기에 직면했던 구조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쌓여 있다. 산재해 있는 인권 현안을 다루는 인권 영화의 제작과 배급 활성화, 안정적인 공간과 상영 지원 시설을 위한 물적 인프라 구축, 인권 영화에 꾸준한 관심과 역량을 투여할 수 있는 활동가 양성 등 반딧불의 실험이 실험을 넘어서기 위한 갈 길은 아직 멀다.


[이진영]




<인권운동을 키우는 새로운 실험> ⑥ KT 상품판매전담팀 인권침해 조사

노동 속 인권 찾기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의 만남!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운동의 과제인 동시에 인권운동의 과제인지 모른다. 노동과 인권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운동의 화두다. 그러나 둘 사이의 만남에는 계기가 없었다. IMF 경제위기 이후 반복되는 구조조정 반대 투쟁에 지쳐있는 노동운동에게 인권운동은 멀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장애인, 소수자운동 등 끊임없이 확장되는 인권운동 영역에 다가서지 못하는 노동운동이 인권운동가들에게는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 두 운동은 만났다. KT 상품판매전담팀(아래 상판팀)에 대한 인권차별의 투쟁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빠르게 진행된 KT 민영화는 노동 유연화에 따른 대대적인 고용불안과 각종 복지후퇴를 가져왔다. 이런 과정에 발생하는 노동에 대한 공세는 참으로 심각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개별적이든 집단적이든 이를 노사문제로 제기하면서 싸워나갔다. KT 노동자들도 1998년, 2000년 파업을 하기도 했으며 소규모 집단에 의한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백전백패였다. 그 사이 정규직 2만5천 명, 비정규직 1만 명의 노동자가 KT를 떠나야 했다. 노동의 무력화에 자신감을 갖게된 회사는 강압적인 노동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퇴사를 강요하기 위한 퇴출 프로그램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상판전팀은 그 정점이었다. 상판팀은 대다수 비연고지로 인사조치 되었으며 대부분이 영업활동과는 거리가 먼 기술분야 종사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상품판매 과정에서 일반 영업사원과는 달리 영업지원비 등에서 온갖 불리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한마디로 "더러운 꼴 보기 싫으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이러한 차별과 불이익에 대해 해당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노조사무실 항의농성 등 노사문제 수준에서의 대응을 했다. 그러나 회사는 꼼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행, 감시 등의 차별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상적 차별과 감시로 인해 상판팀 노동자들은 발가벗겨진 채 인간적 밑바닥을 다 보인 것 같은 모멸감과 자괴감 심지어 두려움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이 문제는 노사관계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권단체연석회의(아래 인권회의)를 찾았다. 그리고 우리들의 호소에 인권회의는 "신자유주의 시대 인권침해의 주요 형태가 기업 내 인권침해"라며 적극적인 연대를 결의했다.

이 연대 결정을 계기로 인권회의와 상판팀 전국모임은 상판팀 해체를 위한 서명운동, 집단 설문조사, KT 반인권적 차별 행위 및 노동감시 실태 증언대회와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등의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했다. 더 나아가 인권회의는 각 지역의 상판팀 노동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직접 들어보자는 취지로 을 꾸렸고, 전국 KT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이 소박한 만남은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의 만남이 본격화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어쩌면 노동자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기업 내 인권침해에 놀라워하는 인권운동가들을 보며 노동자들은 그 동안 겪어야 했던 억울함, 불안함, 주눅 든 자신들의 얘기들을 눈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8월 땡볕에 목이 말라 야쿠르트 하나를 사먹고 싶어도 회사의 감시가 두려워 스무 걸음을 움직이지 못했던 노동자, KT를 떠나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워 눈물로 지내신다는 노동자, 옆의 동료가 나를 감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노동자, 길을 가면 항상 뒤를 보며 골목길로 다닌다는 노동자, 운전 시 전방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을 주시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노동자 등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KT 상판팀 노동자들을 인권운동가들은 만날 수 있었다. KT 노동자들은 '국가보안법 철폐 반대', '경찰폭력 규탄' 등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활동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거리감을 느끼던 인권운동가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한 만남은 새로운 투쟁을 만들어냈다. 은 집담회를 진행하면서 KT 상판팀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이 단순한 인권침해 수준을 넘어 정신 건강상의 문제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의료단체들과 함께 집단적인 MMPI(다면성 인성검사)를 추진했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조사자의 45%가 우울, 불안, 긴장, 공포, 신경과민, 공포, 피해의식 등을 시사하는 비정상적인 척도들을 보여주었다. 그 중 4명은 이미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정신건강상의 이유로 산재를 인정받기도 하였다.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은 점점 성역화되고 있다. 인권침해의 주요 유형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에서 기업 내 인권침해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 내 노동인권의 문제는 노사관계 수준의 문제로 은폐되면서 시민사회의 관심이 다소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 시민사회의 인권의식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기업 내 인권의 수준은 그만큼 확장되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었다. 노동인권의 문제는 더 이상 기업 내 노사관계의 이슈가 아니라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어야 한다. 상판팀의 투쟁은 어쩌면 그 출발일지 모른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인권운동의 깃발 아래 이미 하나인지 모른다.

◎김미영 님은 KT 전국상판모임 집행위원장입니다.






<인권운동을 키우는 새로운 실험> ⑦ 3.8 여성 무지개 시위 2004

차별과 싸우는 다름으로 닮은 여성들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아래 다닮연대)는 장애여성공감, 전쟁을반대하는여성연대 WOW, 그리고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가 2003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결성한 비주류 여성 단체간 연대체다. 이 단체들은 2002년부터 한국여성단체연합 중심의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와 별도로 행사를 꾸려오다가 2003년 무지개 시위를 기점으로 상설 연대체를 구성했다. 즉, 다닮연대는 기존 여성운동의 이성애·비장애 중심적 관행과 의제 선정 등을 비판하면서 다양한 여성들 간의 수평적 교감과 연대를 꿈꾸며 태동했다.

다닮연대는 사안별 연대를 지양하고 일상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활동들을 만들어 내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세계 여성의 날 기념 무지개 시위 'WOW! 또 다른 세상을 공감하기, 3.8 여성무지개시위 2004'(아래 무지개 시위)였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가족에 대해 다르게 말하기, 대안적 상상력: 무지개포럼'이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고, 'WOW! 또 다른 세상을 공감하기, 3.8 여성무지개시위 2004'를 열었다. 이 두 가지 행사는 2003년의 행사와 다닮연대의 결성 이후 일년간의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자리였다. 세 단체가 차례대로 주관하는 세미나를 2003년 한 해 동안 꾸준히 진행했고, 이를 통해 무지개 시위의 기조를 잡아나갔다. 장애인이라고만 할 수도 없고 그저 여성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장애여성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다. 또한 동성애자라고만 하기에도 부족하고 역시 그저 여성이라고만 하기에도 부족한 삶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레즈비언의 문제를 같이 나누었으며, '국민'의 이름에 갇히지 않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의 조건들을 공유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다닮연대는 일상 속에 깊숙하게 침투해 있는 여러 가지 차별의 문제를 짚어볼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지속적인 만남를 통해 우리는 여성으로서 받는 이 사회의 억압과 차별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고, 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너무나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저마다 달리 느낄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의 다층적인 억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었다. 서로서로 기울이는 끈질긴 노력을 통해 '여성'이라는 뭉뚱그려진 이름이 가려버리는 다양한 현실들을 좀 더 예리하게 들여다보는 기회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무지개 시위의 실무 준비 과정과 당일 행사 현장 등에서 아주 구체적인 성과들로 드러났다. 끼리끼리 활동가들이 자신의 아웃팅을 덜 두려워하며 다른 단체 자원활동가들과 관계 맺을 수 있었던 것,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이 행사 준비 과정에서 덜 불편한 공간을 이용하여 회의하고 연습할 수 있었던 것, 다닮연대의 모든 활동가들이 억지로 감수해야 할 불편함 없이 거리 행사를 끝까지 진행할 수 있었던 것. 이 모든 것은 행사에 임박해서 했던 준비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강하게 쥐고 온 고민의 실마리들에 의해 가능할 수 있었다. 기획단과 자활단을 통틀어 어떤 위계서열도 존재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단 한 사람의 끼리끼리 활동가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웃팅 당하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살피고, 이동의 문제를 고려하여 행사장을 고르고 무대를 설치하고 행사 진행 순서를 짜는 일들은 모두, 일상적인 노력 없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종류의 실천들이었다. 이러한 성과들은 무지개 시위 당시 배포했던 '연대의 기본'과 관련된 '매뉴얼'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또 하나의 성과는 무지개 시위를 통해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숱한 차별의 문제들에 대해 사회적으로 발언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 내부의 억압의 문제, 부모와 아이들로 구성된 가정만이 '정상 가족'이라는 편견 속에서 다양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박탈해 온 사회의 문제 등에 대해 발언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활동가들 스스로가 먼저 서로의 차이에 대해 공감하고자했던 그 노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스스로가 속해 있는 운동의 영역으로부터 고민을 풀어나가는 것, 그것은 대사회적 발언의 실질적인 영향력 역시도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일상의 실천인 것이다. [케이]

◎ 케이 씨는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의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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