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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노 사파타 : ‘토지와 자유’의 혁명

에밀리아노 사파타 : ‘토지와 자유’의 혁명

임상래 (부산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교수)

1. 왜 사파타인가

우리는 한때 ‘게바라 신화’의 열풍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진보적 지식인 및 학생들의 우상으로 등장하며 베레모와 파이프 그리고 턱수염을 유행시켰던 체 게바라가 죽은 지 30년 만에 다시 부활하여 세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체 게바라 신화의 모티브는 다른 혁명지도자들과는 달리 끝가지 오염되지 않았던 낭만주의적 도덕성, 혁명을 성공시킨 후 챙길 수 있었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무에서부터 새로 시작한 국제 혁명운동에의 투신과 열정 그리고 젊은 나이에 그것도 이국의 산중에서 맞이한 비극적 죽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멕시코의 사파타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냄새를 느낄 수 있다. ‘땅의 혁명’에 대한 순수한 집착, 한때 누구보다도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도 스스로를 모렐로스 지방에 한정시킨 신비함 그리고 요절과 배반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비극적 종말에 더해진 것까지, 사파타와 개바라 간의 생과 죽음에는 무언가 교묘한 유사성의 대비가 존재하는 듯하다.
게바라를 부활시킨 것이 서거 30주년에 맞추어 그의 유해가 혁명 고향인 쿠바로 돌아온 것이었다면, 멕시코 혁명의 사파타를 다시 우리에게 불러 세운 것은 치아파스 반군이라는 이름의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들이었다. 이들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에 맞추어 멕시코 동남부 라칸돈 정글에서 봉기하여 스스로를 멕시코 혁명 영웅이었던 사파타의 이름을 따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라고 불렀다.
기실 사파타의 신화와 실체는 그가 1919년 죽은 후에도 멕시코 역사에서 단절 없이 계승되어왔다. 그는 집권당이건 야당이건 모든 정치적 수사의 대명사였고 수많은 저항가들의 상징이었으며(그 대표선수 격이 마르코스일 것이다), 멕시코 전역에서 그의 이름을 딴 마을이나 거리는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를 추모하는 각종 행사는 연중 끊임없이 열리며 심지어 헐리우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1952년 제작된 엘리아 카잔 감독의 “사파타 만세[Viva Zapata!]"는 아직까지도 가장 훌륭한 정치영화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는 멕시코인들에게 사파타의 혁명은 ‘지나간 역사’가 아닌 ‘진행형의 역사’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동시에 현대 멕시코 연구의 저수지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사파타 혁명의 ‘왜’와 ‘어떻게’를 이해함을 연구의 목적으로 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우선 사파타가 중심에 서 있는 멕시코 혁명을 개괄적으로 재구성하고, 이어 과거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사파타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파타 혁명 소사

1) 모렐로스의 지역성

사파타 혁명이 모렐로스에서 시작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연유에서였다. 하나는 사파타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파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에 의해서 봉기될 수밖에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시티, 푸에블라 주, 멕시코 주에 접해 있는 모렐로스는 멕시코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면적은 전 국토의 0.25퍼센트에 불과한 작은 주이다. 북부 산지(15퍼센트)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기름진 평원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렐로스란 이달고 신부와 함께 멕시코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모렐로스 신부(미초아칸 출생이며 멕시코 주에서 처형되었다)가 이 지역을 주무대로 독립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렐로스의 역사는 멕시코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코르테스는 멕시코시티를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모렐로스를 정복했고, 이후 모렐로스의 중심도시인 쿠에르나바카에 멕시코 최초의 사탕수수 아시엔다(대농장)를 건설했다. 또 온화한 기후로 인해서 코르테스의 개인 별장이 건축되기도 했다. 이처럼 모렐로스는 비옥한 토질, 수도와 인접한 지리적 장점, 풍부한 노동력으로 식민 초기부터 스페인인들의 관심과 이해의 대상이었다. 행정상으로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을 이루는 미초아칸, 멕시코, 코아트사코알코스, 믹스테카의 네 개의 행정구역 중 멕시코에 속해 있었다.
식민 초기 도입된 모렐로스의 사탕수수 농업은 스페인의 통치가 진행되면서 날로 번창했고, 이에 따라서 쿠바와 아프리카로부터 다수의 흑인들이 노예로 유입되었다. 스페인인들의 토지 야욕이 커지게 되었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들은 더 많은 사탕수수 생산을 위해서 토지를 침탈하고 수로를 독점하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 불기 시작한 사탕수수 붐은 결정적으로 모렐로스 토지문제의 도화선이 된 셈이었다.
식민 초기 농민들과 대지주 간의 토지분쟁은 때때로 원주민들에게 유리하게 판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식민통치가 공고화되면서 원주민들의 저항력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수도 상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매입하는 일이 많아졌고 수도와의 인접성으로 원주민 토착문화도 빠르게 붕괴되었다. 또 식민정책에 대한 스페인 왕실의 입장도 일관적이지 못하고 전횡적으로 변했다. 토지대장 분실과 같은 토지소유권에 대한 원주민들의 인식 부족과 아시엔다에 토지를 대수롭지 않게 임대해주는 식으로 원주민 소유 토지는 날로 감소했다. 따라서 이전의 토지분쟁이 개인 또는 식민당국의 명령에 대항하는 것이었다면 18세기에는 아시엔다에 대항한 토지환원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즉 이전의 투쟁이 뺏기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면 18세기 들어서는 뺏긴 것을 되찾기 위한 투쟁으로 변하게 되었다. 원주민 공동체는 자갈밭, 황무지 등에 국한되었고 산이나 숲속에서 간신히 존속되었을 뿐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침탁하고 말뚝 박고(당시 일반적인 소유권 행사의 방법이었다), 농민들은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소송을 걸게 되고 그 소송은 몇 년 또는 몇 십 년에 이르고 결국 제대로 해결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여기에다 식민당국와 아시엔다 가의 결탁으로 원주민들이 이러한 분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파타가 태어난 아네네쿠일코 역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에네네쿠일코란 나우아틀(원주민)어로 ‘물이 소용돌이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식민 초기 문서에 의하면 아스테카에 공물을 바치던 지역으로 나와 있다. 식민통치기부터 이 지역은 행정구역 설정에서부터 독자성과 정체성을 지켜왔던 곳이었다. 인근의 다른 지역들이 행정구역 변경으로 지명이 바뀌거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아네네쿠일코라는 지명을 끝까지 지켰다. 1607년 당시 부왕이었던 루이스 데 벨라스코는 아네네쿠일코 원주민들에게 메르세드를 인정하기도 했으나 이후 아시엔다의 확대로 사문화되었다.
식민통치를 가치면서 토지집중은 강화되었고 19세기 초가 되어서는 많은 원주민들이 아시엔다의 소작인이 되어 있었다. 식민통치기에는 원주민 공동체 토지를 부분적으로 인정하기도 했으나 독립 이후 그마저도 완전히 무시되었다. 토지의 개인주의적 소유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독립 이후 스페인인들이 떠난 후,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1840년대에는 비스타 에르모사 아시엔다가 인근 지역의 토지에 침투하여 원주민과 충돌했고, 미국-멕시코 전쟁 동안 모렐로스의 많은 마을들이 토지반환을 둘러싸고 아시엔다와 투쟁을 전개했다. 1848년 시콘테팩에서, 1850년 쿠아우틀라에서 원주민들이 아시엔다를 상대로 토지반환 투쟁을 벌였다. 당시 쿠에르나바카 지사는 “여기서 땅이라는 말은 스캔들의 돌이며 혼란의 박차이며 군중을 모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라고 회술했을 정도였다.
앞으로의 봉기를 예고하듯 모렐로스에서 무력이 동원된 최초의 토지분쟁은 1856년에 일어났다. 12월 17일, 일단의 무장농민들이 치콘쿠악 아시엔다를 점령하고 스페인인들을 살해했다. 아직까지 옛 식민지에 나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 정부는 이 사건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멕시코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징벌했다. 한 기록에 의하면, 당시 모렐로스에서 아시엔다의 페온이 농장주에 대한 채무로 인해서 8대에 걸쳐 존속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정부 내의 보수파들은 이 봉기를 자유주의자들이 부추긴 것이라고 비난했다.
막시밀리아노 제2제정의 전성기에 모렐로스 지역의 토지분쟁이 심각해지자 1864년 막시밀리아노가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원주민 공동체에 메르세드를 인정하기도 했으나, 불행히도 제2제정은 붕괴되어 농민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혁시대’가 끝나고 모렐로스의 토지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일단의 자본가들에 의한 토지의 독점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모렐로스가 정식으로 연방의 주가 된 것은 1868년이었다. 당시 주지사 선거에는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자유주의자 프란시스코 레이바가 입후보했는데, 레이바는 후아레스 휘하에서 프랑스 침공에 맞서 용맹을 떨친 군인이었고 아시엔다 문제에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다. 초대 모렐로스 주지사에 취임한 그는 한때 원주민 공동체 토지의 반환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아시엔다의 저항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881년 디아스 정부는 모렐로스를 통과하는 철도를 부설했고 주 내의 경제도 빠르게 성장했다. 20세기 초, 모렐로스의 24개 제당공장은 멕시코 전체 설탕 생산의 3분의 1을 담당했고 이는 하와이, 푸에르토리코에 이어 세계 제3위 수준이었다. 이 기간 모렐로스의 사탕수수 아시엔다에는 증기제당기가 도입되어 설탕 생산이 더욱 증가했다. 현대적인 농기구들로 경작되는 아시엔다의 사탕수수 경작지는 더욱 확대되었고 수로시설이 건설되었으며 주정부의 세수입이 증가했다. 어떤 마을은 전체가 사탕수수 경작지가 되어버렸다.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서 아시엔다는 더 많은 토지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토지 독점의 강화를 전제로 한 근대화와 토지분배 요구 간의 대립은 심각한 사회 봉기를 촉발시킬 듯했다.
디아스 통치기에 본격화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횡단철도는 멕시코시티에서 동으로는 베라크루스, 서로는 아카풀코를 잇는 사업으로 멕시코시티에서 아카풀코로 향하는 중심에 모렐로스가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에 의해서 횡단철도 습격사건이 있을 정도로 철도의 부설과 확대는 원주민 농민들에게는 하나의 공포이자 재앙이었다.
아시엔다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원주민 공동체는 아시엔다의 지배에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적으로 멕시코 북부보다는 중남부지역이 더 강했다. 이러한 원주민들의 소극적인 저항은 원주민 공동체의 전통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모렐로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메스티조까지 포함하는 원주민 공동체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지도자인 카시케를 중심으로 종교행사를 거행하며, 고유의 언어(원주민용 스페인어)를 지키려는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여하튼 모렐로스의 토지집중이 심회된 때가 독립 이후였다면 디아스 통치기는 아시엔다에 의한 토지독점이 완성된 기간이 된 셈이었다.
디아스 말기가 되면 모렐로스의 토지를 둘러싼 아시엔다와 농민들 간의 대립은 극적인 상황에 이를 정도가 된다. 크라우세의 전기에 의하면, 디아스 자신도(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모렐로스 주야말로 제일 먼저 자유를 누려야 할 상황에 있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새로운 주지사를 뽑는 선거가 임박하여 아센다도(대농장주)들은 농장주 출신 주지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초대 주지사(프란시스코 레이바)의 아들이면서 디아스 정부에 대해서 비교적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파트리시오 레이바를 선호하고 있었다. 1909년 주지사로 선출된 친농장주 주지사 에스칸돈은 아시엔다에 세금을 감면해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부동산 평가법을 발표했고, 이는 농민들과 상인들의 불만을 더욱 가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에서 아알라 강령으로

멕시코 혁명을 촉발시킨 마데로의 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의 혁명 공약 중의 하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사파타를 위시한 모렐로스의 혁명가들은 1910년 12월 마데로와 이를 협의하고 이듬해 무력행동에 들어갔다. 모렐로스 지방의 혁명군을 지도하던 토레스 부르고스가 전사하자 사파타가 혁명군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정부군을 격파하고 농민군에 합류하는 자들이 증가하면서 봉기한 지 세 달도 되지 않아 모렐로스 지역은 사파타군의 휘하에 놓이게 되었다. 노인들의 혁명군 합류가 가속화된 것은 스페인인들과 아센다도들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고, 사파타가 그들에게 토지분배라는 ‘원초적 희망’을 약속해기 때문이었다. 결국 1911년 5월, 디아스는 파리고 망명했고 혁명 전(前) 체제는 붕괴되었다.
사파타-마데로 연합의 최초 위기는 5월 29일 임시정부가 아시엔다를 옹호하던 인물을 주지사로 임명하면서 표면화되었다. 마데로가 수도에 입성하고 6월 8일 사파타는 그를 만나 토지개혁의 중요성을 재차 역설했다. 마데로는 혁명적인 상황을 종결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사파타 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그는 부분적인 무장해제를 받아들여 사파타 군의 일부가 시민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파타는 마데로가 자신을 비난하는 세력과 가까이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 내의 보수주의자들, 수도의 신문들, 아센다도들 그리고 우에르타 같은 군인들은 사파타를 시골의 도적 우두머리 정도로 무시하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파타 군의 무장해제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봉기는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이며, 아센다도의 비난은 부당하며 마데로를 신임하기 때문에 농민군을 무장해제하고 자신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혁명 초기 마데로는 혁명을 현실로 옮기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힘, 즉 충분한 무장세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혁명의 이념이 될 만한 사상적 기초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상이한 혁명세력들을 조정하며 아슬아슬하게 혁명을 이끌고 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에다 아직까지도 도처에 반(反)혁명세력들이 은밀한 반란을 획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임시정부와 사파타 세력 간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사파타 혁명을 경계하던 반동세력들은 “모렐로스의 후손들”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공개적인 반(反)사파타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경제력을 동원하여 신문에 모렐로스가 치안부재의 상태에 있다고 호도했다. 실제로 일부 농민들이 아시엔다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으나 이는 사파타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들이었다. 어찌 보면 사파타 군의 무장해제는 오히려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혼란 상황 하에서 우에르타가 사파타 군의 완전무장해제를 위해서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파타 군은 다시 전투준비를 했고, 그는 임시정부에 새로운 지지사의 임명과 토지개혁을 즉각 시행할 것을 요구하면서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중앙의 권력자들에게 모렐로스의 무지렁이 농민이 감히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데로는 이미 사파타는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며 가능하면 그의 요구를 수용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라고 정부에 권했다. 더욱이 당시 임시정부의 병력은 사파타 군을 일시에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데로의 조언에 따라서 정부는 우에르타에게 진군을 멈출 것을 명령했으나 벌써 정부군은 사파타 군에 근접해 있었다.
마데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파타 군 장악 하에 있는 모렐로스를 8월 18일 방문했다. 그는 사파타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칭송하면서 무장해제가 완료될 때까지 정부군이 모렐로스에 주둔할 것이고, 자유선거에 의해서 새로운 주지사를 선출하며, 애국적 행동을 인정하여 사파타와 농민군을 총사면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임시정부에 대한 마데로의 영향력을 믿고 있었고 아직까지도 평화적 해결을 도모했던 사파타는 농민군을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양자간에는 믿음이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사파타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당시 주지사는 정부에 사파타 군의 공격징후가 있다는 과장 보고를 하고 정부군의 증원을 요청했다. 또 사파타 군의 무장해제도 속임수인 것 같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는 아마도 사파타를 체포하거나 또는 그를 처형함으로써 마데로 역시 사파타 군에 의해서 제거될 것이라는 속셈이 아니었나 추측된다(또는 당시 낙후된 통신과 혁명의 혼란으로 인해서 의사소통에 문제도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있다).
이로써 정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는 모렐로스에서 사파타가 독자적인 혁명을 개시하게 만들었다. 중재노력이 실패하자, 마데로는 이 모든 것이 우에르타에 의한 음모라고 생각했다. 9월과 10월에 치열한 전면전이 전개되었으나 그때까지도 사파타는 평화적인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9월 말 그는 정부에 협상대표를 파견했고, 또 10월에는 평화회담을 위해서 13일간의 휴전을 제안하기도 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사파타는 멕시코시티로 들어가는 길목을 점령하여 정부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파타 군의 진격으로 위협을 느낀 임시정부는 일부 각료들에 대해서 문책을 했고, 마데로의 주장에 의해서 우에르타가 해임되었다. 훗날 마데로에 대한 우에르타의 반역은 여기에서 잉태되었다.
혁명 초기 정부군이 사파타 군을 진압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멕시코 전역에서 봉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은 이 지방 저 지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전투를 하여 병력을 충원해야 했고, 따라서 모렐로스에 파견된 정부군도 이 지역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파타를 채포하기란 불가능했다.
11월 6일 대통령에 취임해고 새로운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데로가 대통령이 되자 양자간의 관계는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사파타는 단호하게 주지사의 즉각 사임과 새로운 주지사의 임명 그리고 토지개혁법의 시행을 요구했고, 반대로 마데로는 사파타가 무조건 투항할 것과 모렐로스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기실 마데로는 혁명의 열광과 상이한 혁명세력들의 요구를 모두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근본적으로 마데로는 멕시코 민중이 지금 원하는 것은 빵보다는 자유라고 생각했으나, 사파타에게 멕시코 농민, 특히 그의 해방구였던 모렐로스의 절대 다수는 굶주림에 지친 문맹들이었다. 또한 사파타는 마데로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전에 디아스 정권에 충성했던) 정치인과 장군들을 불신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길은 원주민으로부터 불법적으로 뺏은 농토의 반환과 아시엔다 토지의 3분의 1을 농민들에게 불하할 것을 요구하는 아알라 강령이었다.
전쟁이 경과되면서 양측의 불신은 더욱 깊어졌고 게다가 사파타 군은 예전의 농민군이 아니었다. 그는 혁명이 “패한 자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리”가 되었다고 분개하면서 마데로를 배신자로 규정했다. 사파타는 절대적 믿음만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파타는 마데로와 농지개혁에 대한 암묵적인 자세와 온건파와 그가 잠재적인 반혁명분자들에 둘러싸여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약해보면 사파타에게 마데로의 대통령 취임은 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토지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선택이었으나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대부터 합법적인 투쟁의 가능성은 배제되었고, 전면전이 개시되고 양측의 적대감은 더해갔다. 모렐로스의 모든 주민은 잠재적인 농민군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취급되었으며,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않은 모든 아시엔다는 파괴되었다. 이 와중에 1913년 2월 마데로가 우에르타에게 암살되었다. 우에르타 정부와도 아얄라 강령의 인정을 두고 몇 차례 협상이 있었고 때로는 사파타에게 공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파타는 단호했다. 그는 그들을 주인을 죽인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사파타에게 우에르타는 마데로를 죽인 반역자였기 때문이었다.
정부군에 밀려 모렐로스에서 후퇴한 사파타는 아얄라 강령에 동조하는 인접 주들의 혁명세력들로 병력을 보충하고 1913년 10월 중남부해방군을 결성했다. 정부군의 진압작전은 무자비했으나 이는 일면 사파타 군에게 도움이 되었다. 우요아의 연구에 의하면 정부의 토벌작전에는 재식민화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반란군의 잠재적 지원자이며 은신 기지인 마을의 주민을 모두 사파타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다른 지역(실제로는 수용소)으로 이동시키고 무장병력으로 감시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파타 혁명군에 합류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파타는 그들의 수호자였기 때문이었다. 1914년 들어 전세는 역전되었다. 사파타는 칠판싱고(아카풀코 항에 인접한 내륙 중심도시)를 점령했고 쿠아우틀라까지 수중에 넣었다. 우에르타 군은 북쪽에서는 비야와 오브레곤에 의해서 협공당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우에르타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사파타에게 이제 타협과 협상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마데로의 배반, 우에르타의 역습은 그들에게 타협 없는 투쟁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우에르타 정권이 타도된 후 카란사에게도 사파타는 그가 퇴진할 것과 아얄라 강령을 마침부호 하나 바꾸지 말고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거기에 사파타 혁명의 힘이 있었고 동시에 약점이 있었다. 그들은 ‘고립의 섬’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사파타는 마데로 정부를 계승한 카란사와 1914년 9월 충돌하게 되었다. 아구아스칼리엔테스 회담에서 사파타-비야 간의 동맹과 카란사 정부의 불인정이 합의되었고, 1915년 1월 사파타-비야 연합군은 멕시코시티를 점령하여 카란사 정부를 베라크루스로 내모는 데 성공했다.

3. ‘인간’ 사파타

1) 사파타의 성장과 인성

사파타가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멕시코 혁명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통해서 그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그를 모렐로스의 농민에서 혁명아로 인도했기 때문이었다. 사파타가 정의가 부재하는 주변 사회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은 훗날 그가 혁명의 올바른 진로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게 만든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사파타는 1879년 8월 8일, 아네네쿠일코에서 10형제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모렐로스의 전형적인 메스티조 농민들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일곱 살 때 마을의 학교에 보냈다. 비록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상황으로 수업을 빠지기도 했지만 그는 읽기와 쓰기, 부기의 기초 그리고 멕시코 역사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농사일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유용하게 사용된 말 다루는 기술을 아버지로부터 배웠고, 삼촌으로부터 총 쏘는 법을 배워 사냥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파타 전기는 1887년경 아네네쿠일코의 한 대농장의 토지침탈이 어린 사파타에게 모렐로스의 현실을 접하게 한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6세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지만 그리 가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크라우세의 연구에 의하면, 사파타는 그 당시를 “나는 약간의 땅이 있었고 그것으로 가족들과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한동안 나는 건축용 벽돌과 석회를 운반했고(마부업이자 당시에는 일종의 운수업이었다), 농업에도 이윤을 얻었다. 수박 농사로 수지를 맞기도 했고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혁명 직전인 1910년 그는 3,000페소의 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독립된 농부로 생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1897년 그는 한 아시엔다와의 대립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징집되기도 했다(당시 징집은 형벌 중의 하나였다). 당시 그의 투쟁이 아시엔다에 대한 그의 저항의식에 의한 것이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시엔다의 ‘힘’을 몸소 체험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1902~05년 그는 인근 마을의 아시엔다와의 사건에 개입했다. 거기에는 사파타의 친척이 살고 있었는데 아시엔다는 디아스의 정치적 반대파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겼다. 사파타는 정치적인 감각을 활용하여 디아스에게 이 문제에 개입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그는 사건 심사 위원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 문제는 아센다도의 추방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마도 사파타 투쟁의 최초의 승리였을 것이다.
1906년 그의 의식을 깨운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토레스 부르고스’라는 교사가 이 마을에 왔는데 사파타와 가깝게 되었고 그를 통해서 사파타는 당시 반(反)디아스 성향의 신문들을 접하게 되었다. 또 이웃 마을의 오틸리오 몬타뇨를 통해서 유럽의 급진사상에 대해서 접하게 되었다. 사파타와 몬티뇨는 나중에 대분관계를 맺을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부르고스, 몬티뇨 모두 사파타와 함께 혁명을 주도했고 사파타 혁명군의 참모로 활동했다. 사파타의 사회인식은 이들과의 친교를 통해서 성숙되었다.
1908년, 한 아센다도의 토지탈취에 분노한 아네네쿠일코 주민들은 사파타를 중심으로 봉기했으나 곧 진압되는 일이 있었다. 1909년이 되면서 이 마을에도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새로운 주지사 선거를 둘러싼 혼란 등으로 1909년 9월 그는 주민들에 의해서 마을의 방어 위원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 1월 사파타는 주정부에 의해서 3일간 투옥되는 일이 있었는데, 당국은 그가 만취한 채 돌아다녔다고 죄목을 내세웠지만 진짜 이유는 그의 투쟁경력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서 그는 2월에 다시 징집되었지만 그의 말 다루는 기술을 인정한 한 대농장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멕시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렐로스 역시 혁명 전의 상황은 유사했다. 1909년경 28개 아시엔다가 모렐로스의 7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파타에게는 혁명아로서의 기질보다는 ‘인간’ 사파타로서의 채취가 더욱 강하다. 수많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사파타를 따른 것은 소외와 가난이라는 구조적 억압을 극복하려는 의지이기도 했지만 사파타라는 인간이 보여준 개인적 매력 또는 카리스마에서 오는 면도 있다. 그가 만약 백마 위에서 솜브레로(멕시코 모자의 일종)를 쓰고 허리에 권총을 차고 그들과 똑같은 거친 말투로 진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모렐로스의 혁명은 또 다른 역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차로’라는 멕시코적인 문화적 전통과 집단적 심성을 간과할 수 없다.
‘멕시코식 카우보이’라고 할 수 있는 차로 문화는 남성다움의 과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파타는 주정뱅이는 아니었지만 코냑을 무척 즐겼다고 한다. 또 페리아(마을의 전통축제가 있는 날이면 빠지지 않았고 카드놀이도 좋아했다고 한다. 크라우세의 연구는, 사파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훗날 “그는 용감했고 미남이었고 장난기가 있었으며 여자들에게 매우 친절했다”고 회상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마른 편이었고 콧수염을 남성다음의 상징으로 생각하여 길렀으며 눈빛이 강렬한 차로 중의 차로였다고 기억되고 있다. 그는 투우, 투계 등에 관심이 많았고 즐겼다. 그는 은장식이 가득한 차로의 복장을 즐겼으며 당연히 말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특히 차로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마술은 그에게 ‘뜻하지 않은’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디아스의 사위인 모렐로스의 한 대농장주는 그를 자신의 말 관리자로 임명했다. 이 덕분에 그가 아시엔다와 사소한 싸움을 벌여 마을을 도망쳤을 때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또 1910년 체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본처가 있었던 그는 인근의 부녀자를 납치하여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파타를 고발했고 그는 군대에 강제징집 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그의 친절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우에르타의 반혁명이 붕괴되고 1915년 내내, 사파타 혁명군의 본거지였던 모렐로스 주는 혁명의 정신적 수도였고 동시에 혁명사업의 시험장이었다. 이 와중에도 사파타는 차로였다. 집무가 끝난 후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혁명의 미래를 숙의하면서 코냑을 마시고 여송연을 피우면서 말타기를 즐겨 보았다. 여성편력 또한 차로다웠다. 그는 적어도 스무 명의 여자들을 사랑했고, 거기서 최소 일곱 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차로 중의 차로였던 사파타에게 불굴의 혁명의지는 어쩌면 차로다움의 또 다른 발현이었고, 사파타의 인간적 매력 내지 혁명 카리스마 또한 거기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당시 모렐로스 주민들은 그의 여성편력을 “사랑도 민주적으로 한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당시 멕시코인들에게 이상적인 남성상은 바로 차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사파타와 사파티스타

혁명 당시 사파타 군은 30~300명의 단위로 나누어 행동했고 각각의 지도자들이 비교적 독자성을 가지고 부대를 인솔하고 있었다. 때때로 여성들에 의해서 부대가 지휘되기도 했다. 사파타 군은 게리라식 지원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정부군과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에 참여하고는 했다. 1914~15년 동안 사파타 군이 확고하게 모렐로스를 통치했을 때에는 봉급이 지급되기도 했지만 그 외의 기간에는 농민군의 물자조달은 분권적이었다. 전비는 도시로부터의 세금이나 아센다도와 부자들을 강탈한 것으로 충당되기도 했으나 비참여자의 자발적 협조가 대부분이었다. 사파타 군은 제당회사에서 압수한 말과 노새, 연방군에게 노획한 총과 화약 그리고 몇 문의 대포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에 절대적으로 복종했고 마을사람들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농민들은 이들에게 식량과 군용지를 제공했으며 특히 마을에서 전해주는 정보는 자발적이었기 때문에 매우 유용했다. 또 혁명 초기부터 사파타 군은 “통합과 선전을 위한 상담소”를 개설하여 국민들에게 사파타 혁명의 이념을 전파했는데, 이 기구는 혁명과 국민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가교 역할을 했다.
사파타 전쟁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원주민과의 일체화였다. 한 농민은 사파타가 자신들에게 지도자로서 최초로 멕시코어(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스페인어는 어법이나 어휘 등에서 상류층의 스페인어와는 차이가 있었다)로 얘기했다고 전했다. 또 사파타 군은 당시 농민들의 전형적인 복장인 솜브레로에다가 흰색 바지저고리를 입고 ‘우아라체’라고 부르던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다. 모렐로스 농민들에게 사파타 군은 그들과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종교적 열정 또한 사파티즘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진군할 때 과달루페 성모상을 앞세웠고 모자에는 수호의 상징으로 성인들을 표시했다. 사파타 군 지역에서 성직자들은 우대되었고 그중 일부는 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일부 군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종교적인 경우도 있어 종교적 기준이 처벌의 잣대가 되어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엄격한 군율은 때때로 지나칠 정도였는데 특히 반역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예외 없이(사파타의 대부까지도) 사형에 처해졌다. 사파타가 얘기한 일화 중 반역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

한 농부가 집을 지키는 개를 기르고 있었다. 개는 코요태(일종의 늑대)가 닭들에게 접근하면 그들을 쫓아버리고는 했다. 그때마다 농부는 충실한 개에게 많은 먹이를 주었다. 한번은 코요태가 와서 개가 쫓아나갔고 주인은 혹시 한 마리라도 잡았을까 해서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개와 코요태가 사이좋게 닭을 잡아먹고 있었다. 코요태는 농부를 보자 도망갔지만 이를 모른 개는 열심히 먹고 있을 뿐이었다. 주인은 개를 반역자로 생각하고 마체테(칼)를 뽑아 단숨에 개를 두 동강 내버렸다.

사파타 자신이 보여준 혁명의 순수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반역과 배반에 대한 극도의 경계 그리고 사파타의 남성다움에 대한 집단적인 신뢰 등은 혁명기간 동안 줄곧 정부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농민군의 군율과 용맹을 가능케 한 것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파타 군이 수도에 입성했을 때 멕시코시티 시민들은 사파타 군의 엄정한 규율에 놀랐다고 한다.
이상에서처럼 사파타에 의해서 지도된 사파타 혁명은 당시까지 아직 생소했던 게릴라전의 한 유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모렐로스의 모든 것들이 사파티스타였고, 그들은 자발적으로 사파타와 절대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렐로스의 돌멩이까지도 사파티스타이다”라고 할 정도로 사파타에 대한 모렐로스 농민들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사파티스타가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삶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의무이자 권리였다.

4. 사파타 혁명의 성공

1) 사파타의 혁명 인식

멕시코 혁명에서 주체가 되었던 사상이나 이념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이는 각 혁명세력의 이념적 준비가 아직까지 미약했었다는 점과 혁명에 참여한 세력들이 다양하고 이질적이어서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이념이나 사상의 정립이 불가능했던 측면 때문일 것이다. 혁명세력들이 힘을 합친 것은 단 두 차례 정도였다. 혁명 초기에 디아스의 장기독재 타도를 위해서 그리고 우에르타의 반혁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치가 있었을 뿐 혁명에 참가한 세력들은 각각 봉기의 배경과 원인이 상이했고, 혁명과정에서 서로간의 이합집산으로 애초 추구했던 목표나 가치가 일관되게 지켜지지 못했다.
사파타 역시 특정한 이념적 좌표를 세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파타 혁명에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이념가들이 참여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안토니오 디아스 소토 이 가마였다. 무정부주의적 급진사상의 소유자였던 안토니오 디아스가 사파티즘에 합류한 것은 양자간에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농민들의 반란은 자연적 (또는 원시적) 무정부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는 농민들의 이상향은 자유 마을이며 따라서 국가는 농민들에게 부정적인 것이라고 인식했다. 가족적-내부적 성격에 기초한 자신들(원주민) 고유의 사회구조와 질서로 대체시키는 것이 사파타 혁명의 진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정부주의가 19세기 말부터 멕시코 노동운동과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가장 중심적인 급진사상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파티즘에서 무정부주의적 가치를 찾으려고 했던 안토니오 디아스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사파타의 핵심 참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에 대한 사파타의 이해는 그리 깊은 것이 아니었고, 안토니오 디아스 역시 철저한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었다.
혁명과 권력에 대한 사파타의 인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안토니오 디아스와 사파타 간의 짧은 대화가 있다.

- 사파타, 당신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 그게 무어냐? 설명해봐라.
- 예를 들어 모두 함께 생산하고 결과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다.
- 누가 나누는가?
- 대표자 또는 마을이 구성한 위원회이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만약 나에게 그런 일(내가 일해서 얻은 것을 남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이 일어난다면 그 자가 누구이든 나에게 총알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에게는 생산수단이나 방식보다는 땅을 소유하고 거기서 살아간다는 원초적 인식이 더욱 강했던 것이다. ‘땅과 자유’라는 엠불렘은 아얄라 강령 자체였고 사파타의 핵심 이념이었다. 자유는 누구에게나 그러했듯이 혁명정신의 수사였고 그것은 땅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따라서 땅은 혁명에서 그가 선택한 믿음이자 이상이었다.
기실 그의 ‘땅’은 아얄라 플랜 이전부터였다. 봉기의 이유를 물으면 그는 항상 양철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문서함을 가지고 오게 했다. 부왕으로부터 그리고 막시밀리아노로부터 받은 메르세드가 명시된 토지문서는 그의 투쟁을 설명해주는 이유였다. 그에게 토지는 종교적 구원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에게 토지는 그들을 낳아주고 지켜주는 어머니이며 또 다른 이름의 조국이었다. 그들에게 땅은 시작이자 끝이었고 시간의 신비함을 간직한 어머니였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었고 조상들의 영원의 쉼터였기 때문이었다. 크라우세의 표현은 이를 미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사파타는 어느 곳도 지향하지 않았다. 머물고만 있었다. 그의 의도는 진보를 향해서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진보로 향해진 문을 닫는 것이었다. 산과 나무가 있는 인간적인 생태의 신비스런 지도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고장을 떠나지 않았다. 사파타-비야 연합군이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통치할 때도 그는 이를 자신의 혁명동료에게 위임했고 그 자신은 모렐로스에 있었다. 그의 비전은 아버지처럼 역동적이고 자발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어머니처럼 수동적이고 영적이었다. 그는 밖으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해서 내향적으로 고립의 길을 걸었다.

2) 모렐로스의 성공

사파타 혁명의 시험은 모렐로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무력적으로 모렐로스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에서 다른 세력을 압도할 수 있었던 1914~15년 그의 혁명사업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혁명으로 모렐로스의 일상은 큰 변화를 겪었다. 거의 모든 아센다도들이 도망했고 혼란 속에서도 나름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또 무니시피오(군이나 읍에 해당) 단위의 지역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가 실시되었다. 사파티스타 지도자들은 민주주의에 개입할 수 없었다. 사파타 농민군은 단지 ‘공동체의 무력 결합체’였으며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정도였다.
특히 사파타 혁명의 모토였던 토지분배는 관습과 각 마을의 용도에 따라서 진행되었다. 사파타가 몬티뇨와 함께 아얄라에서 작성한 아얄라 강령은 1911년 11월 25일 발표되었는데, 거기에는 다음의 3개 조항이 중심을 이룬다.

6조 - 아얄라 강령의 일부분으로 우리는 독재의 비호 아래 아센다도가 강제로 탈취한 토지, 산, 물은 원래의 권리를 가진 자들의 소유임을 확인한다.
7조 - 따라서 아센다도 재산의 3분의 1을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고 자신들의 에히도와 농장을 경작하도록 유상 몰수할 것이다.
8조 - 만약 아얄라 강령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재산과 토지를 국유화하여 전쟁배상, 미망인보상, 전쟁고아를 위해서 사용할 것이다.

농지개혁은 아얄라 강령을 기초로 하여 일단의 농학도 청년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주도했다. 이들은 당시 원주민 공동체가 식민 시기부터 간직하고 있던 토지대장과 마을 원로들의 의견을 토대로 수개월에 걸쳐서 토지를 구획했다. 이렇게 해서 지도가 복원되었고 은행, 학교, 제당공장들이 세워졌다. 농지개혁위원회가 구성되고, 사파타가 한 일은 공정하게 업무가 수해되는가와 아시엔다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제당공장을 모렐로스 주의 유일한 산업이자 일자리로 인식했고 농민들이 생계형 농업에서 상업농으로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후리홀(콩의 일종으로 멕시코인들의 주식)이나 옥수수 대신 사탕수수를 경작하여 농민들의 경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당공장들은 농민들이 경작한 사탕수수를 제당하고 이를 판매하고, 농민들은 제당-판매에서 얻은 이익의 일부를 공장에 지불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제당공장들간의 경쟁이 가능하여 농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제당공장들이 이를 거부한다면 직접 제당소를 설립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15~16년 동안은 일련의 개혁적 법률들이 각 혁명세력간에 경쟁적으로 발표되었던 시기였다. 이는 각 혁명세력, 특히 사파타와 카란사 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 치열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사파타 정부에서는 각양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일련의 개혁입법들을 제정했다. 1915년 10월, 훗날 혁명헌법 27조의 기초가 된 노동사고법과 농지법이 발표되었다. 이 법에서는 전체 천연자원의 국가 귀속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토지소유에 있어 마을 단위의 법인체 인정, 기후와 토질에 따른 토지 소유상한의 설정, 2년 무경작 토지의 몰수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11월에는 공무원법, 노동법, 국가구호법, 교육일반화법 등이 연이어 제정되었다. 이어 12월에는 사법행정법을 발표해서 수형시설을 사회재생시설로 규정했다. 이외에도 사범학교 설립법을 제정했고, 1916년에는 언론검열을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인쇄법, 총선거법 등이 발표되었다. 특히 총선거법에는 직선과 총선을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로 삼았고, 이외에도 식민법과 초등교육법이 공포되었고 9월에는 무니시피오법이 발표되었는데 이 법은 기본적 형태의 지방자치를 담고 있었다.

5. 맺는 말 : 절반의 성공 그리고 미완의 혁명

사파타에 의해서 시작된 혁명은 지역적 기반을 둔 봉기였다. 푸엔테스의 말처럼 그의 혁명은 국가혁명이 아니었고 지방혁명이었다. 이 혁명이 지향하는 것은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고 원주인들에게 토지와 산과 물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치적이고 분권적인 공동체 민주주의를 추구했고 그것은 원주민 전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1914~15년 동안 사파타는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멕시코 역사상 가장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토지는 분배되었고 농업은 회복되어 성장했고 믿음의 정치가 복원되었다. 모든 일상은 법적 강제가 아닌 자치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멕시코인들 스스로 숙명주의에 빠지지 않고 민주적 통치를 이룩한 최초의 사례였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사파타 혁명의 승리였다.
사파타 혁명이 멕시코 혁명과정에서 보여준 지역적 한계, 과거로의 회귀, 전국적 차원의 계획의 부재, 국가와 권력에 대한 상세한 인식의 부족 등으로 사파타의 봉기를 과학적으로 혁명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정치적이건 사회적이건 혁명은 지역을 초월하고 과거로의 복원을 겨냥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권획득을 일차적 목표로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파타 혁명이 과학적으로 혁명의 범주에 속하지 않더라도 사파티즘이 지향했던 지점(토지분배)에 멕시코 사상 최초로(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도달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것 때문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카란사나 오르레곤의 중앙혁명보다 더 ‘혁명적’으로 멕시코인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분명 사파타 혁명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파타 혁명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은 “아센다도의 욕심은 주민들을 파괴했고 농민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아시엔다를 파괴했다”라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급진적인 생각은 ‘빼앗긴 자들을 위한 혁명’이 진전되고 있다는 확신과 혁명으로 생길 자유라는 것이 이들에겐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것이라는 역사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사파타는 환상적인 정치권력을 위해서 봉기한 것이 아니라 먹을 것과 자유를 주는 땅 때문에 봉기했다. 그는 “혁명이 완료된 후 자유와 권리를 획득하고 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을 거부했고, 혁명의 목표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혁명이 사파타에게는 ‘땅과 자유’였고 마데로에게는 ‘자유와 땅’이었던 것과 같았다. 사파타의 혁명이 중앙의 혁명과 조우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동시에 사파타 혁명의 비극은 그가 이야기한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진정 어떠한 역할을 알 수 있는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 전국적 차원이 아닌 지방적 차원의 혁명과 토지에만 집착하여 정치권력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파티스타들에게 정치란 햇볕만을 쫓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놈’들의 것일 뿐이었다. 카란사 혁명군을 물리치고 멕시코시티에 입성하여 안토니오 디아스가 던졌던 “만약 당신이 정치권력을 경시한다면 민중의 경제적 향상은 누구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사파타는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절반의 실패는 바로 그것이었다.
1919년 사파타는 카란사 정부의 사령관인 곤살레스 장군의 음모에 의해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모렐로스의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시체는 마을 광장에서 수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아야 했을 정도였고, 어떤 사람들은 백마를 타고 산 정상에서 모렐로스의 평원을 주시하고 있는 그를 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죽은 것은 사파타가 아니라 그의 대부였다는 그럴싸한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가 죽은 지 80년이 되었건만 멕시코인들에게 아직도 사파타는 살아 있고 또 유효하다. 자연인 사파타가 아닌 모렐로스에 유토피아를 건설했던 ‘사파타 정신’에서 발현한 사파타인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갈망하며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 한 그리고 자치적이고 민주적인 통치를 염원하는 한 그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파타 혁명은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래서 사파타가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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