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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인권을 위한 변명 - 서준식

2. 한 인권운동가의 짧은 이력서

저는 인권운동을 10년 가까이 해 온 인권운동가입니다. 딸들이 학교로 가져갈 가정환경조사표의 부모 직업난에 ‘인권운동가’라고 적어 넣는 직업적인 인권운동가입니다.
89년 이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공동의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인권위원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인권위원장, 그리고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로서 제가 해 온 인권활동은 우리 사회 인권 신장의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의 분명한 발자취를 남겼다고 자부합니다. 살인적인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해 내는 공안기관에 대한 문제 제기,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 동티모르 문제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해 낸 국제연대사업, ‘어린이 권리조약’의 소개와 홍보 및 아동권 관련 보고서 UN제출, 그리고 ‘인권영화제’ 개최... 이런 일들에 얽힌 갖가지 수많은 추억들이 지금 지난날을 회상하는 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현재 제가 대표로 있는 인권운동사랑방은 이미 지령 1,000호를 넘긴 인권전문 일간 소식지 <인권하루소식>, 1993년 단체 창립 때부터 꾸준히 대상과 내용을 넓혀 온 인권교육, 우리나라에 유일한 인권자료실 등 기초 인권사업의 독보성으로 널리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이른바 ‘좌익사범’으로서 7년간을 복역했으며, 바로 뒤이은 10년간의 예방구금까지 합쳐 모두 17년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88년에 풀려났습니다. 출옥 당시 저는 사회운동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우선 이 사회에서 마치 천형(天刑)과도 같은 저의 좌익 전과로 말미암아 공안기관은 저의 행동을 매우 신경질적으로 통제하려고 들었으며 운동생활에의 전망이 쉽게 서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저 역시 남들처럼 조용히 독서를 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끈질긴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점 때문이었습니다. ‘인권운동가’는 분명 저의 예정된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온 후 제가 처한 조건은 저를 빠른 속도로 인권운동으로 몰고 갔습니다. 자신의 남편 혹은 자식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고 호소하는 부인들이 저를 찾아와 함께 진상규명운동을 해줄 것을 간청했던 것입니다. 오랜 군사정권의 폭정 하에서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은 이제 거의 상식에 가까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공안정보기관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혹은 수사관들의 포상에 대한 욕심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고문이 동원되면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벗어날 수 없는 ‘간첩’이라는 멍에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용서받지 못할 수많은 국가폭력은 물론 하나 하나 판사의 판결로써 정당화되어 왔습니다. 암담한 시대에 ‘독립적인 법관의 양심’이나 ‘정의의 잣대’는 실종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몇 세대를 거치기 전에는 회복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그 부인들의 간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장기수로서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저는 권력이 만들어 낸 그 많은 이른바 ‘간첩’들의 한과 눈물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간첩’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쨌든 저는 그들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 부인들의 간청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일은 분명 저에게 ‘소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권운동가 서준식의 첫 번째 경력은 철없는 국가권력이 저지른 잔인한 죄악의 뒤치다꺼리였던 셈입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저는 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객관적으로’ 인권운동가가 됩니다. 이후 10년 동안 저는 이 고달픈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 제가 몸 바쳐 만들어 온 인권운동의 성과들은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족들과의 두 번에 걸친 이별, 즉 두 차례의 가슴 아픈 감옥행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가지 않을 경우에도 밤과 낮이 따로 없는 운동가의 가정에 ‘단란’이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었으며 저는 그렇게도 되고 싶은 ‘좋은 아빠’가 아직도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듯한 피가 통하는 한 인간으로써 무척 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 하나 아쉬움 속에 잘라냈습니다. 학문 연구의 꿈도 독서와 집필의 꿈도 심지어는 남들처럼 조촐한 평화 속에 살고 싶은 소망마저도 자꾸만 멀어져 갔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얼마간의 유산을 야금야금 까먹어야 하는 불안한 세월 속에서 번역 아르바이트에 밤을 새워도 또 새워도 먹고사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생활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어느새 ‘양복쟁이’들 앞에서 비굴해져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는 일은 고통 중 으뜸가는 고통이었습니다.

10년 동안 인권분야에서 제가 이루어 낸 모든 성과, 그것이 바로 ‘공익’임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와 저의 가족이 겪은 10년 동안의 고생, 그것은 ‘공익’을 위한 처절한 헌신이었다고 저는 떳떳하게 주장하겠습니다. 이런 저와 저의 가족을 공안검찰과 경찰은 왜 이토록 증오하는 것입니까? 인권운동 그 자체를 저들은 증오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벌써 ‘빛바랜 흑백사진’이 되어 버린 저의 전력을 저들은 지금도 증오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들은 왜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저를 감옥에 처넣으려고 안달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이런 역사는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더 계속되어야 끝나는 것입니까?

3. 보안관찰법, 양심의 자유 그리고 나의 삶

이제 저에게 걸린 혐의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차례차례 해야 합니다. 먼저 보안관찰법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안관찰범이라는 법률

제가 대학생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약 30년 전 우리 사회는 아주 살벌하게 경직된 반공 일변도의 사회였습니다. 일단 어떤 형태로든 공산주의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인정되면 곧바로 인간 이하의 무지막지한 대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권’을 들먹이는 그 어떠한 항변 한마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암혹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저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그리고 간첩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17년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24살부터 41살까지, 겪을 만한 고생은 두루 남김없이 겪은 감옥살이었습니다.
17년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실은 제가 법원에서 선고받았던 형기는 7년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콩밥을 씹으면서 7년을 채워 나갔습니다. 31살 나이에 저는 7년형을 마치고 만기출소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31살, 아직도 인생을 포기할 이유가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7년이 끝났을 때 저는 만기출소를 하지 못하고 또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새벽 4시 반, 저를 맞으러 교도소 문 앞에 막 도착한 어머니와 누이를 어둠 속에 따돌리고 호송차는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바람처럼 질주했습니다.
저에게 만기출소가 허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재범의 위험성’이 현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법원에서의 재판 따위는 없습니다. 보안감호처분 결정서에 찍힌 법무부 장관의 커다란 직인은 자못 위압적이었습니다. 저는 별다른 항변도 못하고 도축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묵묵히 청주보안감호소로 끌려갔습니다. 이른바 ‘간첩죄’로 7년을 복역하는 동안 ‘사상전향’을 거부했기 때문에 출소 후에 다시 간첩행위를 할 “위험성이 현저”하다는 것이 제가 31세부터 41세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이유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이런 암흑의 시대, 멀리 격리된 높은 담 안에서 저는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보낸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권력이 침범할 수 없는 헌법상의 권리이며 절대적 기본권입니다. 따라서 헌법은 원래 특정 수행자에게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바꿀 것을 강요하는 법과 제도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안전법이라는 ‘법률’은 생각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한정 없이 감옥에 가둬 둘 수 있는 초(超)헌법적인 ‘법률’이었습니다. 윤관 현 대법원장을 비롯하여 당시 일선에서 활약했던 법관들은 저마다 기상천외의 궤변과 비겁한 ‘상황논리’로 기본권론적 주장들을 모두 ‘격파’하고 사회안전법을 지켜 냈습니다.
1975년에 제정된 사회안전법은 사상전향을 거부했던 약 150명에 이르는 좌익 정치범들을 재판도 없이 그리고 뚜렷한 근거도 없이 “재범의 위험성이 현저하다”는 이유를 달고 감옥에 가두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다가 1989년 제정 14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1987년, 위대한 6월항쟁의 성과로 반민주적인 제도를 개혁하는 나름대로의 작업이 진행되었고, 사회안전법 역시 군사정권 시절의 대표적 악법으로서 개혁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한 인간의 긴 인생에서 신명나는 세월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이 무렵이 저에게는 바로 그런 신명나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철폐 직전까지 갔던 이 사회안전법은 결과적으로 사람의 신체를 구금하는 조항만 없어지고 나머지 내용은 고스란히 다른 이름의 법률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저에게 채워져 있는 ‘족쇄’ 보안관찰법입니다. 사회안전법 철폐 입장에서 의정활동을 했던 중요한 인물은 당시 평화민주당의 박상천 의원과 이상수 의원이었습니다. “완전히 철폐시키지 못해서 미안하다. 정치란 여당과의 타협과 흥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자.” 이것이 1989년 봄 임시국회가 끝나면서 그들이 저에게 했던 말입니다. 즉 사회안전법이 보안관찰법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법률 구조와 내용이 헌법과 합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여당과 야당과의 정치적 흥정거리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보안관찰법은 사회안전법의 구조와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사회안전법의 ‘적자(嫡子)’이기에 사회안전법이 가졌던 치명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밖에 없는 법률이었습니다. 국가권력을 자신의 잣대를 갖다 대면서 특정 국민의 내심을 제멋대로 억측하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 내심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 국민에게 재판도 없이 보안처분을 과하면서 경찰의 일상적 감시와 감독 시스템 아래 둡니다. 이런 치명적인 인권침해구조야말로 보안관찰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법무부는 과거 10년 전에 서준식이 감옥에서 사상전향을 거부했던 행위를 일직선으로 간첩의 ‘재범 위험성’이라는 결론으로 연결시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논리도 없습니다. 다만 광기가 있을 뿐입니다. 보안관찰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1998년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그런 집단 광기에 사로잡힌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보안관찰법의 숨겨진 목적

보안관찰법이 정면에 내세우는 취지는 두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보안관찰 해당범죄’의 재범을 방지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러기 위하여 그런 전과가 있는 피처분자의 일상생활을 낱낱이 파악해놓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에 규정된 ‘보안관찰 해당범죄’란 내란예비.음모, 내란 목적 살인, 외환유치, 간첩, 국가보안법 상 목적수행, 잠입.탈출 등 어마어마한 것들뿐입니다. 즉 재범을 하라고 풀어놓아도 이 사회에서는 차마 손댈 수 없는 엄청난 범죄유형들인 것입니다. 이런 범죄의 재범시도가 만에 하나 이루어진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이 사회의 드러난 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보안관찰법이 소위 ‘위험하다’는 판정을 받은 피처분자에게 요구하는 여러 가지 의무의 이행이란 경찰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그 사람의 드러난 측면일 수밖에 없으며, 따로 특별히 그 피처분자 생활의 ‘은밀한 부분’을 파악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이상 그 ‘드러난 부분’의 통제만으로 절대 ‘보안관찰 해당범죄’의 재범을 방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즉 법에 명시된 목적만으로 볼 때 보안관찰법은 난센스의 극치이며 백치가 만든 법률입니다. 따라서 보안관찰법은 명시적 목적과 별도로 진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명시된 법의 목적과 관계없이 보안관찰법을 살펴볼 때 이 법이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구실을 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것이 본래 내세우는 목적(보안관찰 해당범죄의 재범 방지)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으로는 보안관찰 피처분자가 국민으로서 정당한 시민권을 행사하며 정치사회활동을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그리고 아주 쉽게 통제하고 차단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10년 가까운 저의 인권운동은 보안관찰법이라는 ‘족쇄’가 채워진 참으로 괴로운 운동이었습니다. 검찰과 경찰은 보안관찰법을 앞세워 일상적으로 저의 사생활과 인권운동에 노골적인 간섭을 했습니다. 경찰은 한 시절 거의 매일같이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어디로 가느냐? 그 집회에는 참가하지 말라, 누구를 만나지 말라, 아무개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느냐?” “00대학에 가서 한 강연 내용이 어떤 거였느냐? 몇 명이 참석했느냐?” 등등. 이런 생활 속에서 저 자신은 물론 아내와 심지어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불안은 이루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일은 분명히 국민의 헌법적 권리임에도 보안관찰 피처분자에게는 그런 권리마저도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2년에 한 번씩 날아드는 보안관찰처분갱신결정 통지서에는 매번 제가 국가보안법을 반대했다는 것이 처분을 갱신하는 이유로서 버젓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1993년에는 전국연합 인권위원장직을 그만두라는 희한한 내용의 경고장도 받아 보았습니다. 그 경고장에는 서부경찰서장의 커다란 직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결국 보안관찰법의 진정한 목적은 공안사건 전력을 가진 사람들의 통상적인 사회활동 혹은 정치활동을 규제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공안검찰이 저를 보안관찰법 위반이라는 명분으로 잡아들일 때, 그들은 보안관찰법에 대하여 불복종을 하는 저의 일상생활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잡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그 어마어마한 보안관찰 해당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잡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보안관찰법은 저의 정당한 인권옹호활동을 결정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동원됩니다. 즉 저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전투적이 되어 공안 당국과 저의 인권옹호활동 사이에 묘하게 존재하는 일상적인 ‘균형과 평화’가 깨지는 순간 그들은 보안관찰법으로 손쉽게 서준식의 ‘인권옹호활동’을 철창 속으로 잡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생활을 숨기고 싶은 욕구는 당연히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경찰의 요구와 관계없이 투명한 삶을 추구합니다. 투명한 삶이야말로 특수한 과거 전력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에서 치명적인 핸디캡을 안고 활동해야 하는 저와 같은 인권운동가의 생명이라고 믿는 까닭입니다. 보안관찰법이 요구하는 각종 신고의무는 당연히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경찰은 저에 대하여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보안관찰법에 대하여 비타협적으로, 그리고 비폭력적으로 불복종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저의 생활을 숨기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보안관찰법이 인권운동가가 타협해서는 안될 악법인 까닭입니다.

보안관찰법에 불복종하는 두 가지 이유

저는 지난 해(1997년) 11월에 헌법재판소가 보안관찰법 합헌판결을 내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보논리, 공안논리에 아부하고 헌법논리를 팽개치는 헌법재판관들이 뭐라고 판결하든 보안관찰법은 명백히 위헌 법률입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무시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이 국회에서 비준하여 스스로 그 조약당사국이 된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The Intre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법률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보안관찰법을 비폭력적으로 불복종할 수밖에 없는 첫째 이유입니다. 남들에게 인권의 소중함을 이야기해 주는 일을 천직으로 아는 인권운동가는 자신에게 닥친 명백한 인권유린과의 대결을 피할 아무런 명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안관찰법을 근거로 해서 내려지는 여러 가지 지시와 ‘지도’ 그리고 의무를 꼬박 꼬박 준수하면서 인권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예 몸을 내놓고 이 법을 거부해 왔기 때문에 저는 오늘날까지 인권운동가일 수가 있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권운동가인 제가 보안관찰법에 대하여 비폭력적으로 불복종을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제 나이 50이 된 저는 남은 인생을 끝마칠 때가지 인권운동가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몰론 이러한 불복종의 결과 저는 항상 ‘체포 가능한’ 사람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공안경찰은 언제라도 저를 잡아갈 수가 있으며 저는 언제든 감옥에 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평소에는 그냥 두었다가도 서준식의 인권옹호활동이 공안세력에게 결정적으로 거치적거리는, 그런 시기에 저들은 어김없이 보안관찰법을 들먹이게 마련입니다. 1991년이었습니다. 저는 수천 명 경찰에 둘러싸인 명동성당에 끝가지 머물러 ‘유서대필사건’ 강기훈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행동 자체는 분명히 범죄를 구성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때 저를 구속한 명분이란 참으로 비열하게도 과거 2년 동안 지속된 저의 보안관찰법 ‘위반’행위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고약한 운명을 죽을 때까지 묵묵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은 다소 비싸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제가 인권운동가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일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 - 삶 그 자체

오랜 감옥생활을 통해 저의 인생 최대의 과제는 국가권력의 강제로부터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젊은 날에 본심과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평생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폭력에 굴복하여 ‘변질’했던 아픔을 애써 잊기 위하여 자신의 ‘변절’을 교묘히 합리화시킬 수 있는 온갖 ‘오묘한’ 논리와 세계관을 생산해 내는 수퍼급 지식인들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목격하기도 합니다. 국가권력이 인간의 양심의 영역을 침범할 때 그 침범당하는 사람에게 마치는 충격은 거의 파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이 자신의 작은 양심을 지켜 내는 일이 자신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명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치를 17년의 감옥살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조금씩 터득해 온 셈입니다.
20대 초반에 극악무도한 감옥에 들어간 이후 저는 30년간 저의 양심의 자유를 지켜 왔습니다. 이제 나이 50이 된 저에게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삶은 어느새 인생 그 자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저에게 나름의 양심이나마 포기한다는 것은 살아 있기를 포기한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잘해야 20년 남은 인생입니다. 양심의 자유를 지켜내는 대가로 저는 몇 번만 더 감옥에 다녀오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엔가 마지막 죽음의 병상에서 무거운 짐을 내리면서 눈을 감을 때 저는 ‘고생은 했지만 인간으로서 존엄은 지켜 냈다’고 잠시 만족스럽게 인생을 회고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나 소외된 소수자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어느 사회나 그 소수자를 참담하게 짓밟음으로써 그 사회의 통합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수자를 희생양 삼는 이러한 사회적 통합은 분명 거짓 통합이요 파쇼적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통합에 다름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한 사회의 소외된 소수자의 비참한 삶은 그대로 그 사회의 추악한 모순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반공이 아니면 국민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이 아직도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기꺼이 보안관찰법에 짓밟히는 소수자로 남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놀라울 만큼 가볍게 쓰여 지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이 그 얼마나 기만적인 정치선전에 지나지 않는가를 몸으로 증거 하는, 그런 존재로서 역사에 남고자 합니다.


*이 글은 지난 1998년 1월 30일, 서울형사지방법원 서부지원에서 열린 <레드헌트>사건 첫 공판에서 했던 ‘모두진술’을 수정.보완하여 재판부에 제출한 것의 일부입니다.

- ‘서준식의 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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