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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작용-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는 앞에서 러시아 대중파업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이러한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기만 해도 독일의 대중파업 논쟁에서 나타난 그런 모습과는 전혀 딴판임을 알 수 있다. 최고위원회의 결정과 일련의 계획에 따라 무미건조한 정치적 행동을 벌인다는 엄격하고 공허한 도식 대신에, 우리는 혁명이라는 커다란 틀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천여 개의 정맥으로 혁명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피와 살을 가진 살아있는 생명체를 여기서 보게 된다.
러시아혁명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처럼, 대중파업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모든 국면, 혁명의 모든 단계와 요소들을 반영하는 그러한 변화무쌍한 현실이다. 대중파업의 적용 가능성, 대중파업의 효과, 대중파업을 일으키는 요인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혁명이 이미 곤란한 형세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리고 확실하게 무엇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바로 그 곳에서 대중파업은 갑자기 새롭고 넓은 혁명전망을 펼쳐준다. 그것은 때로 제국 전체를 드넓은 바다와 같이 흘러가며, 때로는 수많은 실개천으로 흩어진다. 그것은 때로 신선한 샘물처럼 땅속에서 솟아나기도 하고 땅속으로 아주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정치파업과 경제파업, 개별 산업부문의 총파업과 개별 도시의 총파업, 평화적 임금투쟁과 가두의 대량학살, 바리케이트 전투-이 모든 것은 서로 뒤엉키며, 서로 나란히 진행되기도 하고 서로 엇가리기도 하며 서로 뒤섞여 흘러가기도 한다. 대중파업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변하는 현상들의 바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의 운동법칙은 명확하다. 그 법칙은 대중파업 그 자체나 대중파업의 기술적인 세부항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치적 사회적 세력관계에 있다.
대중파업은 단지 혁명투쟁의 형태이며, 당의 발전과 계급분화, 반혁명의 조건 속에서 투쟁하고 있는 세력들 사이의 관계-이 모든 것이 아주 다양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고 거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파업투쟁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를 완전히 교란시킨다. 그러나 파업행동 그 자체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파업행동은 단지 그 형태와 규모, 효과만을 변화시킬 뿐이다. 대중파업은 혁명의 약동하는 맥박이며 혁명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파업은 러시아혁명에서 나타났듯이, 노동자투쟁의 효과를 높이려고 머리에서 쥐어짜낸 교묘한 방법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의 운동방식이며, 혁명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투쟁의 현상형태이다.
이제 대중파업 문제를 올바르게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일반적 측면을 검토해 보자.

1. 대중파업을 일회적인 고립된 행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대중파업은 몇 년 동안, 아마도 몇 십 년 동안 지속된 계급투쟁의 모든 시기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대중파업에 관한 도식에서는 지난 4년 동안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아주 다양한 대중파업들 가운데서 밋밋한 계획에 따라 시작되고 끝나버리며 단기적인 개별행동인 순수한 정치적 운동이라는 하나의 부차적인 파업들-순전히 시위성 파업-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5년 동안 일어난 모든 과정 속에서 그저 몇몇에 국한된 시위성 파업만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개별 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해마다 5월 1일에 바르샤바와 러시아의 로즈에서 벌였던 메이데이 총파업은 아직 대규모의 작업거부를 통하여 이 날을 경축하는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다. 1905년 9월 11일의 바르샤바 대중파업은 사형당한 마르틴 카스프르자크를 기리는 추모행사였다. 1905년 11월 빼쩨르부르크 대중파업은 폴란드와 기보니아에 대한 계엄선포에 맞서는 항의시위였다. 1906년 1월 22일에 바르샤바, 로즈, 첸토콘과 돔브로와 탄광지대, 그리고 러시아의 몇몇 도시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은 빼쩨르부르크에서 일어난 대학살을 애도하려는 행사였다. 또한 1906년 7월 타플리스의 총파업은 군인반란과 관련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병사들을 동정하는 시위로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똑같은 원인으로 1906년 9월 레발에서 군사재판 심리 중에 대중파업이 벌어졌다. 그 밖에 다른 모든 크고 작은 대중파업과 총파업들은 시위성 파업이 아니라 전투적 파업이었다. 그 파업들은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고, 모두가 특수하고 지역적이며 우연한 원인에서 비롯했으며, 어떠한 계획도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났다. 또한 저절로 거대한 운동으로 성장했으며, 그리고 나서는 ‘질서 있는 후퇴’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때로는 경제투쟁이나 시가전으로 전화했으며 때로는 저절로 무너져 내렸다.
이처럼 일반적인 모습을 볼 때, 순수하게 정치적인 시위성 파업은 거대한 평면의 작은 점처럼 아주 부차적이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두드러진 특징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즉, 시위성 파업은 전투적 파업과는 달리 당 규율과 목적의식적 지도, 정치적 사고의 총체를 보여주며, 따라서 대중파업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운동의 출발점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최초로 사회민주당의 결정에 의해 일어난 1905년 5월 1일의 바르샤바의 놀랄 만큼 철저했던 전면파업 사례는 폴란드 노동자운동에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다. 또 같은 해에 빼쩨르부르크에서 일어난 동조파업은 러시아에서 의식적으로 계획된 대중행동 가운데 첫 실험으로서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1906년 1월 17일 함부르크 동지들이 벌인 ‘시험적인 대중파업’은 수많은 쟁의 무기들을 활발하게 사용한 첫 사례임과 아울러 함부르크 노동계급투쟁에서 전투적인 기운과 열망이 매우 성공적이고 설득력 있었던 두드러진 시도인데, 앞으로 독일 대중파업역사에서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대중파업의 시대는 그것이 진지하게 시작되기만 한다면, 저절로 5월 1일의 실질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메이데이 축제는 자연히 대중파업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거대한 시위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쾰른 노동조합대회 때 ‘절름발이 말’이라는 이름을 얻은 메이데이 축제는 여전히 그 앞에 위대한 미래가 있고, 독일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투쟁이 착실하게 발전함에 따라 그러한 시위의 중요성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예정된 계획과 당의 명령에 따라 시위성 파업이 실현되게끔 촉진하는 객관적인 계기들-즉, 정치의식의 성장과 노동계급의 훈련-이 바로 시위성 대중파업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 러시아노동계급과 대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위는 대중파업을 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농담할 기분이 아니며 이제는 오직 진지한 투쟁과 그 결과만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1905년 1월에 거대한 대중파업이 맨 처음 벌어졌을 때는 시위성 요소가 뜻하지 않게도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모습을 띠며 여전히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8월에 두마를 해산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로서 대중파업을 요구했던 러시아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의 시도는 훈련된 노동자들만이 나약하고 불철저한 행동과 단순한 시위를 단호하게 반대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2. 그러나 덜 중요한 시위성 파업이 아니라, 오늘날 러시아에서 노동자투쟁을 실제로 떠맡은 전투적 파업에 주목한다면, 경제적 계기와 정치적 계기를 따로 분리할 수 없음을 훨씬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또한 현실은 이론의 도식과는 다르며, 순수한 정치적 대중파업이 논리적으로는 가장 성숙하고 높은 단계의 노동조합 총파업에서 비롯하지만 동시에 그것과는 별개라는 식의 현학적 설명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1896녀~97년에 빼쩨르부르크 직물노동자들이 벌인 최초의 거대한 임금투쟁에서부터 요즈음 1905년 12월에 일어난 거대한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대중파업은 경제적인 영역에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느끼지 못할 만큼 슬그머니 옮겨간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영역과 정치적인 영역 사이에 분리선을 거의 그을 수 없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거대한 대중파업 하나하나는 이른바 러시아 대중파업의 모든 역사를 작은 규모로 되풀이하며  순전히 경제적이거나, 어떻게든 부분적인 노동조합투쟁에서 시작해 여러 단계를 거쳐 정치적 시위로 나아간다. 1902년과 1903년에 남부러시아에서 거대한 대중파업이 터졌을 때, 우리가 본 것처럼 바쿠에서는 실업자 징계를 둘러싼 갈들에서 생겨난 것이고, 로스토프에서는 철도 작업장 임금분쟁에서 생겨난 것이며, 티플러스에서는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상업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생겨난 것이다. 오데사에서는 어느 조그만 공장의 임금분쟁에서 비롯한 것이다. 1905년 1월의 대중파업은 푸틸로프 공장의 노사분쟁에서 발전한 것이고, 10월 파업은 연금기금을 위한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발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12월 파업은 우체국과 전신소 노동자들이 단결권을 목표로 한 투쟁을 벌인데서 발전한 것이었다. 대체로 운동의 발전이란 최초의 경제적 단계가 생략된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시위의 모든 단계를 관통하는 빠른 속도와 파업이 전진하면서 다다르는 절정 속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러나 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방향으로도 움직인다. 모든 중요한 정치적 대중행동은 그 절정에 다다르고 나서는 일련의 경제적 대중파업들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법칙은 하나하나의 대중파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일반에도 적용된다. 정치투쟁이 확산되어 명확해지고 강화됨에 따라,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됨과 아울러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싸움으로 시야를 넓혀주고 또 싸우려는 의욕을 강화시킴과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정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삭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노동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바로 이 저수지에서 정치투쟁은 늘 새로운 힘을 끌어내며 동시에 곳곳에서 노동계급의 지칠 줄 모르는 경제적 공병(工兵)들을 각각의 첨예한 갈등으로 이끌어간다. 그로부터 대규모 정치투쟁들이 뜻하지 않게 폭발한다.
한마디로 경제투쟁은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 초점에서 다른 촛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장치이다.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의 토양을 주기적으로 기름지게 한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에서 대중파업이 벌어지는 동안에 이 두 가지 투쟁 즉,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현학적인 도식들이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분리되거나 서로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러시아 노동계급투쟁에서 서로 얽혀있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잇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요소의 통일이 바로 대중파업인 것이다. 만약 거짓된 이론이 ‘순수하게 정치적인 대중파업’을 추출해내려고 대중파업을 고상한 논리로 해부한다면, 모든 해부가 그렇듯이 이러한 해부를 통해서는 현상을 생생한 본질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을 죽이게 될 것이다.

3.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대중파업이 혁명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대중파업의 역사는 러시아혁명의 역사이다. 확실히 독일 기회주의의 대표자들은 ‘혁명’이라는 말을 들을 때, 곧바로 유혈사태와 시가전, 또는 그때 치러야 할 댓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대중파업은 반드시 혁명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그것을 일으킬 수는 없다. 사실 우리는 러시아에서 거의 모든 대중파업들이 마침내는 짜르체제의 무장호위대와 충돌하게 되며, 거기에서 이른바 정치파업이 대규모 경제투쟁과 비슷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혁명은 유혈사태와는 다르며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혁명을 완전히 거리의 혼란과 폭동 즉, ‘무질서’로 보는 경찰의 해석과는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는 혁명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사회계급관계가 철저하게 뒤집힌다는 측면을 본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과 대중파업 사이에는 대중파업이 일반적으로 유혈시태로 끝난다는 천박한 사고와는 전혀 다른 연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러시아 대중파업의 내적 메카니즘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작용은 혁명적 시기에 한정되어 있다. 혁명의 시기의 격렬한 분위기 속에서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부분적이고 사소한 갈등이 전면적인 폭발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야만적인 충돌이 해마다 매일이다시피 일어나지만 개별 행정구역이나 개별 도시, 심지어 개별 공장의 경계를 뛰어넘는 투쟁으로는 발전하지 않는다. 빼쩨르부르크의 조직노동자에 대한 처벌, 바쿠의 실업, 오데사의 임금투쟁, 모스크바의 단결권을 위한 투쟁 같은 일들이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늘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급작스럽게 전면적인 계급행동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들이 확실히 정치적 색채를 띠는 하나의 대중파업으로 성장할 때에도 그들은 결코 전면적인 폭발상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뜨거운 공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노동계급이 전혀 동원되지 않는 상태에서 쉬 사그라들어 버린 네덜란드 철도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이다.
그리고 거꾸로, 계급사회의 사회적 기반과 방벽이 흔들거려 끊임없이 교란상태에 빠져드는 혁명적 시기에만 노동계급의 정치적 계급행동이 단 몇 시간 안에 지금까지 무감각하게 남아있던 노동계급의 모든 부분을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격렬한 경제투쟁으로 곧바로 나타난다. 갑자기 정치적 행도에서 오는 전기충격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곧바로 그들의 경제적 노예상태에 대항해 투쟁하려고 주위에 있는 무기를 잡는다. 정치투쟁의 격렬한 의사 표시는 그들로 하여금 뜻밖의 강렬함으로 자신들을 옭아맨 경제적 사슬의 무게와 압력을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가장 격렬한 정치투쟁-선거투쟁 또는 관세법을 둘러싼 의회투쟁-이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임금투쟁의 진행 양상과 강도에 눈에 띌 정도의 직접적 영향을 거의 까치지 못했지만,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의 모든 정치적 행동은 곧바로 경제투쟁을 격렬하게 벌어지게 했으며 투쟁 지역을 확산시켰다.
그래서 혁명은 먼저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으로 급격히 변화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만들어내며 그러한 변화는 대중파업 속에서 나타난다. 속류 도식에서는 대중파업과 혁명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대중파업의 마지막 국면인 거리의 유혈충돌에서만 보지만,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어느 정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정확히 그 반대의 관계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에서는 대중파업이 혁명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이 대중파업을 산출하는 것이다.

4. 앞에서 얘기한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대중파업에서 의식적인 지도와 주도권 문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중파업이 하나의 고립된 행동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모든 시기를 뜻하며, 또 이 시기가 혁명의 시기라면, 대중파업은 가장 강력한 사회민주당의 최고위언회가 명령을 내렸더라도 마음대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사회민주당이 자기 멋대로 혁명을 일으키고 취소 수 없는 것처럼, 사회민주당이 최고의 열성과 조급성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활기 있고 강력한 대중운동인 진정한 대중파업의 시기를 만들 수 없다. 당 지도부의 결정과 당 규율에 따라 스웨덴의 대중파업이나 오스트리아 파업, 심지어는 1월 17일 함부르크 대중파업과 같은 일회적인 짧은 시위가 벌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위들은 실제적인 혁명적 대중파업 시기에 일어나는 시위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외교적으로 긴장된 때에 외국 항구에서 벌이는 판에 박힌 시위가 해상의 전쟁과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순전히 규율과 열정에 기대어 만들어 낸 대중파업은 기껏해야 에피소드 역할 즉, 노동계급의 전투적 분위기의 징후 역할을 할 뿐이고, 거기에는 평화로운 시기의 조건들이 반영될 뿐이다.
물론 혁명적 시기에도 대중파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대중파업을 일으켜야 한다. 또한 노동자들이 결의와 결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주도권과 더 광범위한 지도는 마땅히 노동계급 가운데 가장 조직되고 계몽된 핵심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혁명적 시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대부분의 투쟁들이 한 도시에 머무를 때, 이러한 주도권과 지도의 범위는 대부분 개별투쟁과 개별파업에만 적용된다. 그래서 우리가 보아 왔듯이, 예를 들어 사회민주당은 이미 몇몇 경우 즉, 바쿠, 바르샤바, 로즈, 빼쩨르부르크에서 대중파업을 직접 호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체 노동계급의 일반적인 운동에 적용해 보면 이러한 성공은 매우 드문 편이다.
더 나아가 주도권과 의식적인 지도에는 아주 명확한 한계가 있다. 혁명기에 노동자운동의 지도기관이 어떤 원인과 계기들이 대중의 폭발로 이어질까 하는 것을 예측하고 계산하기란 아주 어렵다. 또한 여기에서 주도권과 지도는 자기 멋대로 명령을 내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가장 민첩하게 적응하고 대중의 분위기에 될 수 있는 대로 긴밀하게 접촉하는데 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자발성의 요소는 추동력으로써, 또는 억제하는 영향력으로써 모든 러시아 대중파업에서 빠짐없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아직 어리고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투쟁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수없이 중요한 경제적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일반적이고 지역적인,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여러 요소들이 서로 반작용하여 어느 한 행동도 수학문제처럼 조정되고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회민주당을 선두로 한 노동계급이 기동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토대가 끊임없이 부서지고 바뀌며 무너지는 가운데 벌어지는 투쟁이다. 간단히 말해서, 러시아 대중파업에서 자발성의 요소는 두드러진 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러시아노동계급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이 어느 누구에게도 학교선생 역할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러시아를 볼 때, 혁명은 사회민주당이 대중파업을 명령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며 언제나 우스꽝스런 방식으로 그들의 손아귀에서 지휘봉을 빼앗거나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 주는 것을 보게 된다.-우리는 독일 논쟁의 이론적 도식에서, ‘지도부’가 풀어야 할 주된 임무로 여겨졌던 대중파업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혁명 속에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지도문제는 곧 ‘식량조달’, ‘비용 계산’, ‘희생’의 문제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손에 연필을 쥐고 앉아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상층 지도위원들이 조용하고 은밀한 모임을 가지면서 해결할 수는 없다. 대중파업운동에 드는 비용을 계산하거나 조정하는 일이 민사소송에서 비용을 미리 계산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임을 깨닫는 순간에, 그리고 혁명이 거대한 인민대중을 무대 전면으로 끌어낼 때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확실히 러시아의 지도조직들은 힘닿는 대로 직접 닥쳐오는 희생을 끝까지 견뎌내려고 했다. 예를 들어, 8시간 노동쟁취운동 뒤 빼쩨르부르크에서 대규모로 직장이 폐쇄되는 상황에서 용기 있는 희생이 몇 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대차대조표에서 이 정도는 바닷물 가운데 물 한 방울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진정한 대중파업의 시기가 시작되는 바로 그때에 이 모든 ‘비용계산’은 단지 양동이로 바닷물의 양을 재보려는 일로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모든 혁명이 노동자대중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진정으로 끔찍한 가난과 고통의 바다이다. 혁명적 시기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대중의 이상주의를 한꺼번에 작동시켜 그때에 어쩔 수 없이 닥쳐오는 온갖 어려움을 대중들이 느끼지 못하게 만들면서 심각한 고통들을 해결한다. 자신이 희생될 경우에 받을 수 있는 보조금의 정확한 액수를 미리 보장받지 않고는 매이데이에도 작업을 중단하려 하지 않을 노동조합주의자의 심리를 가지고는 혁명도 대중파업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혁명적 시기의 세찬 폭풍 속에서 노동계급은 보조금을 요구하는 신중한 가장(家長)에서 삶 그 자체가 최고의 선물이며 물질적 안녕이 투쟁사상에 견주어 거의 아무것도 아닌 ‘혁명적 낭만주의자’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대중파업의 지도가 대중파업을 시작하라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그리고 그 비용을 계산하고 헤아린다는 뜻에서 혁명적 시기 그 자체의 문제라고 한다면, 대중파업의 지도는 전혀 다른 축면에서 사회민주당의 의무이자 그 지도기관들의 의무가 된다. 대중파업의 기술적인 측면과 그 메커니즘에 대해 잔머리를 굴리는 대신에 사회민주당은 혁명적 시기의 한가운데서 정치적 지도를 책임져야 한다.
투쟁에 실마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 투쟁의 모든 국면과 모든 순간에 이어 풀려나 움직이는 노동계급의 모든 힘을 당의 투쟁대오 속에서 실현되도록 정치투쟁전술을 계획하는 것, 사회민주당의 전술이 단호함과 예리함에 바탕을 두고 결정되고 그 단호함과 예리함이 실제 세력관계의 수준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며 오히려 그 세력관계에 앞서도록 하는 것-이것이 대중파업 시기에 지도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는 어느 정도 저절로 기술적인 지도로 바뀐다. 사회민주당의 일관되고 단호하며 선진적인 전술은 대중들 속에 안장감과 자기 확신, 투쟁의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과소평가한 것에 뿌리를 둔 유약하고 머뭇거리는 전술은 대중에게 해롭고 혼란스러운 결과를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첫 번째 경우에 대중파업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일어난다. 두 번째 경우에 대중파업은 지도부가 직접 대중파업을 호소해도 여전히 효과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러시아혁명은 이 두 경우의 뚜렷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 ‘대중파업론’ 중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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