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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하느님

정치적 참여를 깊이 할수록 현대인은 인류 대다수가 생활필수품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을 특히 민감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좌우하고 있는 불의와 압제에 시달리는 대중에게 봉사할 방도를 모색한다. 그뿐이 아니다. 크리스천들마저도 “종교적” 사물이 과연 “인간”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에 관해서 많이 부심하고 있다. 이 같은 사조는 모호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많은 이들은 곤잘레즈 루이즈의 말마따나, “설사 잘못되더라도 인간을 편드는 것이 낫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신학이 점차 계시의 인간학적 측면에 큰 비중을 두는 추세라고 했다. 사실 “말씀”은 하느님께 관한 말씀만이 아니고 인간에 관한 말씀이기도 하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인간적인 것 전부가 말씀의 대상이 되고 그 테두리에 들어온다는 것은, 말씀이 인간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도달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폰 라트도 “하느님이 당신 비밀을 열어 보이시는 것은 역사 한가운데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는 장이다. 성서를 보면 하느님이 당신 백성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진리가 단계적 과정을 거쳐 계시된다. 그 같은 계시의 진전을 보면, 역사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는 형태를 잘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을 뵙는 우리의 “만남”이 인류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에서 이 두 사실을 종말론적 기쁨으로써 칭송하는 것이다.

인류는 하느님의 성전

성서의 하느님은 인간과 친근하시다. 인간과 친교를 나누는 하느님, 인간을 상대하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 속에 계시겠다는 약속은 성서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반복되는 약속이다. 첫 번째 계약과 결부시켜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내려와 머물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그러하면 그들은 야훼가 저희의 하느님임을 알리라. 내가 저희 가운데 내려와 머물려고 저희를 에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저희 하느님임을 알리라. 나 야훼가 그들의 하느님이다”. 그리고 새 계약의 언질을 주실 때는 이렇게 말씀 하신다: “나는 나의 집을 그들 가운데 둘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영원히 나의 성소를 두면 그제야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구별해 낸 것이 나 야훼임을 뭇 민족은 알게 되리라”. 하느님의 이 현존, 어떤 일정한 자리에 현존하심을 표현하는 “처소”라는 개념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발생한 관계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콩가르의 말대로 “하느님이 당신 피조계, 특히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이야기는 곧 당신 피조물 한가운데 더없이 자비롭고 더없이 심원한 모습으로 임재하시는 이야기가 된다”.
그 같은 현존의 약속은 역사상 여러 방식으로 실현되었으며, 결국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기상천외한 형태로 완성을 보았다. 그러므로 역사를 살펴보면 하느님의 현존은 갈수록 보편화하고 갈수록 완전해졌다.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훑어볼 때 하느님이 “산”에서 계시를 내리시는 일이 많다. 시나이 산은 하느님을 만나 뵙는 특정 지역이었고 거기서 그분의 현현이 자주 있었다. 야훼는 모세에게 “내가 있는 이 산으로 올라와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신다. 야훼의 영광이 산 위에 머물고 계셨기 때문이다. 오랜 후대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산신이고 벌판의 신이 아닌”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광야를 여행하던 때 항시 옮겨 다니던 “천막”과 결부되면서 야훼의 현존은 더욱 가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세가 진지 밖에다 지어놓은 “천막”은 야훼를 만나 뵙는 장소였고, 이스라엘에 상세한 가르침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곳에 들러 야훼께 문의하였다. “결약의 궤” 역시 야훼의 처소로 인식되었고 궤 앞에서 모세는 야훼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야훼께서 겨기에 거처하신다는 사상을 극력 강조하다가 급기야는 야훼와 결약의 궤를 동일시하는 어조마저 쓰였다: “법궤가 떠날 때마다 모세가 외쳤다. ‘야훼여, 일어나십시오. 당신의 원수들을 쫓으십시오. 당신의 적수들을 면전에서 쫓으십시오.’ 법궤가 머무를 때마다 모세가 외쳤다. ‘야훼여, 돌아오십시오. 이스라엘 군대에 복을 내리십시오’”.
“천막”, “궤”-“산”까지도-는 야훼의 현존이 가동적(可動的)임을 시사한다. 야훼는 당신 백성의 역사적 운명을 함께하시기 때문에 옮겨 다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궤나 천막은 하느님의 현존을 어느 특정한 장소에다 고정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전이 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초에는 가나안 땅 자체가 야훼께서 거처하시는 자리로 정해져 있었다. 그 땅은 야훼께서 약속하신 땅이며, 그 지경을 벗어나면 당신을 뵈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이 귀양 가기를 두려워한 것도 야훼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기가 싫어서였다.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사에게 문둥병을 치료받고서 가나안의 흙을 한줌 가져갔다. 가나안 국경 밖에 가서도 야훼께 제사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가나안 땅에서도 몇 군데 특정 지역이 있었다: 소위 성소들로 대개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얼마 안 있어, 특히 신명기적 개혁이 있은 다음에는 예루살렘의 성소, 곧 솔로몬 성전만이 공식으로 인정을 받았다. 여러 가지 다른 전승들을 이 성전에다 병합시켜 놓았다: 지성소를 어둡게 만들어 모세가 시나이 산을 올라간 그 어둠을 표상했고, 결약의 궤를 성전에 안치하였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중심이요, 예루살렘은 가나안 땅의 중심이 되었다. 성전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집” 또는 “처소”라는 개념이 전보다 부각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성전도 야훼를 포용할 수 없다는 사상이 대두되었다. 야훼께 성전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소망을 듣고 예언자 나단이 극력 강조한 것이 곧 이 사상이었다. 그뿐 아니라, 성전을 헌당하는 자리에서 솔로몬은 하늘이야말로 참으로 야훼의 처소임을 고백한다: “소인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 부디 들어주십시오. 당신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처소가 하늘에 있다는 생각은 예부터 있었으나, 그 사상이 확연히 드러나고 하느님 현존의 초월성과 보편성이 강력하게 부각된 것은 바로 인간들이 야훼께 거처할 처소를 지어드리고 그곳을 야훼를 만나 뵙는 장소로 삼던 시각이었다. 하느님이 천상에 거하신다는 사상은 점차 강화되었고, 특히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그러했다. 성전과 지성소는 빈 공간에 불과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하느님 현존의 초월성과 보편성이 확립될수록 순전히 외적인 경신례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은 날카로워졌다. 비난의 대상은 경신례 장소에까지 미쳤다: 하느님의 현존이 돌과 금으로 지어진 건물에 국한될 수가 없다는 비난이었다. 예레미야는 “그때 다시는 야훼의 계약궤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마음에 두고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되리라. 아쉬워 찾거나 새로 만들 필요도 없으리라” 했다. 성전에 관해서는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것이 아니냐?’ ... ‘그러나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는 말씀이 있다. 이사야서의 이 마지막 구절은 예언자들의 비판의 진상을 표현하고 있다: 야훼께서는 인간의 내심의 태도를 중히 보신다는 것이다. 야훼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 아들의 “육화”로 말미암아 위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우리들 사이에 천막을 지었다]”. 나단의 예언이 정말 놀라운 방식으로 실현을 본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과 진리를” 바치는 기도를 말씀하시고 손으로 지은 성전이 필요치 않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단언하셨다: “이 성전을 허무시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소.” 요한은 거기에 토를 달았다: “그러나 실상 예수께서는 당신 몸이 곧 성전임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바울로도 “신성의 온갖 충만함이 몸으로 되어 그분 안에 머물러 있다” 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을 남김없이 드러내보이셨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인간 역사에 철두철미하게 개입해 들어오신 신인(神人)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전이시다. 바울로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산 돌로 지은 성전이며, 그 공동체의 일원인 크리스천마다 “성령의 성전”이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도 그 사람을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모신 성령의 성전이며 따라서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성부와 성자께서 구원사업을 성취하기 위해 보내신 성령은 모든 인간 안에 처소를 두고 계시다. 모든 인간, 그러니까 인간관계의 특정한 조직 속에 있는 인간들, 구체적 역사 상황에 사는 인간들 안에 거처하신다.
그리고 크리스천만도 아니고 인간이면 누구나 하느님의 성전이다. 로마인 백부장 고르넬리오 일화에서 유대인들은 “성령이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리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베드로는 거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어느 누가 세례 받을 물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함께 살 것입니다” 하신 말씀도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해당한다고 하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유명한 금귀에 주를 달아 콩가르는 이런 말을 하였다: “많은 이가 그 성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는 그 성전에 들어 있지 못하지만 성전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도 많으며, 성전에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도 많다.” 결국 주님 홀로 누가 “당신 사람들”인지 알고 계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현존 사상의 두 가지 진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 현존의 보편화이다: 일정한 장소와 특정한 민족에게서 지상의 만인들에게로 그 현존이 넓어진다. 또 하나는 하느님 현존의 내면화 또는 총체화아다: 경신례 장소에 국한되던 하느님의 처소가 인류 역사 한가운데로 옮겨지면 인간 전부를 포용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 두 현상이 만나는 합치점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인격 안에서, “특정한 것”이 초극되며 “보편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인격적이고 내면적인 것이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것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에게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끝으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영성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肉]이 되신 하느님, 인간 하나하나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산악이나 성전에 계시는 하느님보다 “신령한” 분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물리적”이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각 인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라고 해서 인류 역사에 덜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들 가운데 당신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더욱 크게 개입하시게 되었다. 하느님이 더 “신령한” 분이 되신 것이 아니라 더 가깝고 더 보편적인 분이 되셨고, 눈으로 보기가 더 쉬우면서도 더 내면적인 분이 되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상, 인류와 개인과 역사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이다. 성전에 들어올 수 없던 “속적(俗的)인 것”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웃을 향하는 전향

하느님의 현존양식은 인간이 그분을 뵙는 양식을 결정한다. 인류가, 이난이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일진대 우리는 타인들과의 만남에서 그분을 뵙게 된다. 인류의 역사적 도정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된다.

정의의 실천은 하느님을 아는 길
대신(對神)관계와 대인(對人)관계가 어떻게 상관되는지는 구약성서에도 잘 나와 있다. 아마 이것은 성서의 하느님의 특징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웃을 멸시하고, 비천하고 가난한 일꾼을 혹사하거나 품삯을 미루는 것은 하느님께 배역하는 행위가 된다: “너희 나라, 너희 성문 안에 사는 사람이면 같은 동족이나 외국인이나 구별 없이 날을 넘기지 않고 해지기 전에 품삯을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한 자라 그 품삯을 목마르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너희를 원망하며 외치는 소리가 야훼께 들려 너희에게 죄가 돌아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함은 그를 지으신 이를 모욕함이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야훼를 안다는 것-야훼를 사랑한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과 압제받는 이들에게 정의를 행한다는 것이다. 새 계약을 예언하면서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인간들의 속마음에 당신 법을 새기시리라고 선언한다: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그 대신 야훼를 알아 모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분명히 말한다: “부정한 수법으로 제 집을 짓고 사취한 돈으로 제 누각을 짓는 이 몹쓸 놈아! 동족에게 일을 시키고, 품값을 주지 않다니! ‘집을 널찍이 지어야지. 누각을 시원하게 꾸며야지’ 하며, 창살문은 최고급 송백나무로 내고 요란하게 단청까지 칠하였다만, 누구에게 질세라 송백나무를 쓰면 그것으로 왕 노릇 다하는 것 같으냐?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내가 똑똑히 말한다”. 정의와 의리가 있는 곳에 야훼께 대한 “앎”이 있다. 정의와 의리가 결여된 곳에는 야훼께 대한 지식도 없다: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느님을 알아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자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꼬리를 몰고 가는 데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성서의 용어를 보건대 야훼를 안다는 것은 곧 야훼를 사랑하여 모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야훼를 안다 함은 인간들 사이에 정의의 관계를 확립함이며,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인정함이다. 성서의 하느님은 인간 상호간의 정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분이시다. 정의가 없는 곳에는 하느님은 알려지지 않으며,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의 소설 <피의 대가>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사제가 제의방지기에게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법이야” 하고 한마디 한다. 그러자 형이상학은 모르지만 이난 불의와 압제를 철저하게 목격한 제의방지기는 이렇게 되묻는다: “죄 없는 베이도 선생의 몸뚱이를 으스러뜨려 죽인 자들의 맘속에도 하느님이 계셨을까요? 라 에스메랄다라면 마구 잡아 죽이는 자들의 몸속에도 하느님이 계실까요? 또 옥수수밭을 수탈해간 그 관리에게도 하느님이 계실까요?” 메델린 회의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다: “이 같은 사회적 평화가 깃들이지 못한 곳에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불평들을 볼 수 있고, 주님의 평화를 뿌리치는 거부, 주님께 대한 거부를 볼 수 있다”.
그 대신 정의가 실현되고, 뜨내기와 고아와 과부가 시달림 받지 않을 때 “너희 조상에게 길이 살라고 준 이 땅에서 너희를 살게 하리라”. 야훼의 이 현존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야훼는, 묶인 자들을 풀어주신다. 야훼,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야훼, 거꾸러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며 야훼, 의인을 사랑하신다. 야훼,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시나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야훼, 영원히 다스리시니 시온아, 네 하느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타인에 대한,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체적 행동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된다는 이 진리야말로 외모에만 그치는 일체의 경신례를 비판.공격한 예언자들의 근본이념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은 야훼의 초월성과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 지쳤다. ...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들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비로소 우리의 기도에 귀기울이시며, 비로소 우리가 그분 눈에 들 것이다. 하느님은 희생제물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을 바라신다. 야훼를 알아 모신다는 것과 인간 상호간의 정의구현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강조하면서 호세아는 야훼께서 봉헌제물보다 당신을 깊이 알기를 더 바라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찍어 쓰러뜨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이리라.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
물론 위에 인용한 본문에서 “이웃”이라고 할 때는 유대인 공동체의 성원들을 말하지만, 뜨내기들도 과부와 고아와 더불어 나란히 열거한 점으로 미루어, 그 같은 한계를 탈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말씀의 육화로 말미암아 이웃과 하느님 사이의 결속이 변질되고 심화되고 보편화되었다.

이웃 사람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메테오의 종말설교를 맞는 “최후심판에 관한 비유”에 복음 메시지의 본질이 요약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성서 주석가들은 신학자들이 이 본문을 인용하는 수법이라든가 크리스천 생활을 위해 연역하는 논조에 상당한 경악을 나타내고 있다. 이 새로운 문제를 두고 최근에 여러 가지 연구가 시도됐으나 근본 문제를 깊이 파헤치지 못한 것 같다. 마태오 복음의 이 본문을 재평가하고 중대시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이 본문이야말로 성서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풍부한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이 본문을 연구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장-클로드 앵젤레르는 가장 광범위 하고 치밀한 연구서를 내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대목에서 두 가지 근본 문제가 제기된다고 한다“ 사람의 아들에게 심판받는 백성들은 누구이며, 사람의 아들의 ”지극히 작은 이 형제들“은 누구를 말하느냐는 것이다. 이 두 문제와 연관시키며 저자는 이 본문을 해석하는 세 가지 노선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이 본문은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을 총망라하는 만민의 심판을 이야기하며 자기 이웃, 특히 남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한 선약에 따라 심판이 내린다는 해석이다. 다른 이들은 이 심판은 크리스천들에게 내리는 심판을 말하는 것으로, 크리스천 공동체 내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행한 대로 판단 받는다고 해석한다(오리게네스와 루터도 같은 노선이었다). 세 번째로 이 본문은 이교도들이 크리스천에게 행한 바를 판단 받는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소수파가 있다. 앵젤레르는 셋째 노선을 따른다. 그런데 그 저서는 훌륭하고 참고자료를 많이 인용하고는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이 셋째 해석은 (비록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셨는데 저희가 알고도 돌보아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는 질문에서 “그리스도를 알아 뵙는” 문제 등 사소한 의문점은 쉽사리 해결되지만) 성서의 그 본문과 문맥의 뜻과는 어긋나고 있다. 그 본문은 분명히 심판의 보편성과 더불어 사랑의 덕이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임을 가르친다. 이 같은 해석은 사실상 홀츠만의 명제를 부활시킨 것으로(앵젤레르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다), 라그랑즈가 롸시, 비스, 벨하우젠의 설을 근거로 하여 “이상한 만큼 비논리적”이라고 꼬집은 해석이다. 성서 주석가들 대다수는 앵절레르가 첫째 노선이라고 명명한 해석을 따르고 있다. 32절의 “모든 민족”이라고 하는 단일신교의 색채를 띤 표현은 “어느 모로 보나 보편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뮐런의 설에 의하면 이 표현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는 이교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이교도를 총망라한 만민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내 형제”라는 구절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이 굴절은 “크리스천만이 아니라, 남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해당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 해석을 따르기로 한다. 성서의 이 대목은 정말 풍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점을 특히 강조하고자 한다“ 인간의 친교와 형제애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다. 중요한 것은 ”지“(知)가 아니고 ”행“(行)이요 구체적 행동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다. 인간이 주님께 도달하는 데는 타인과의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인간은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 만민과 충만한 형제애를 이룩하라는 운명을 타고났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실상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곧 완전한 사랑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성삼위를 하나로 묶는 사랑의 궤도 속으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하심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는 길은 사랑뿐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뿐이다. 성령과 더불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작정하는 것뿐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작정하는 그것이 곧 인간 사이의 형제애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 친교와 형제애를 거절하는 것, 인간 실존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곧 죄이다., 마태오 복음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힌다: “진실히 말하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지 않았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남을 위해 봉사하지 않음은 곧 사랑하기를 거부함이다.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그만둠은 명시적으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과 똑같은 과오가 된다. 요한의 후기 저술에서도 같은 사상이 나타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당초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제기시키고 매듭짓는다: 그들은 “그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어왔고, 피투성이가 되어 길가에 쓰러진 사람에게로 모두의 관심이 쏠렸을 때 그리스도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되물으셨다. 참된 이웃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자기 이웃으로 만든”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이웃은 나의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그의 길로 내가 찾아 들어가는 사람, 내가 가가이 가고 능동적으로 찾아내는 사람을 일컫는다. 크리스천 생활의 다른 모든 부면들 역시 이 사랑의 덕에서 생기를 얻을 때 비로소 뜻이 있다. 사랑의 덕에 힘입지 못한 것들은, 바울로의 말대로 속이 빈 공허한 행동들이다.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 인생을 더 인간애에 찬 것으로 창조하는 우리의 능력에 따라 심판받으리라고 한 마태오 복음의 가르침도 바로 이것이다. 예언자적 견지에서 볼 때 사랑의 이 보편적 원리에서 오는 새로운 윤리도덕에 따라 “심판”이 내려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의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사랑의 덕은 굶주린 이를 먹여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등의 구체적인 행동으로써만 존립한다. 사랑의 덕은 필연적으로 인간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고 싶은가?”.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분이 의로우신 줄을 안다면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도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그러나 “사랑의 덕”이 인간적 사랑을 떠나서, 또는 그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은총이 인간적 사랑 위에 첨가됨과 같이 사랑의 덕이야말로 인가니 성취하는 “가장 숭고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사랑의 덕은 우리에게 쏟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따라서 그것이 사랑하고 정의와 인간애에 찬 세계를 건설하는 우리의 인간적 능력, 생텍쥐페리의 말대로 “인연을 맺어가는” 인간들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닫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어린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행위와 진실로 사랑합시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쏟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셨다. 사랑의 덕-인간들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적 사랑(모성애, 부부애, 효애, 우정 등) 속에 화신(化身)되고 인간적 사랑을 완전케 만든다. 사마리아 사람이 길가에 쓰러진 사람에게 가가이 간 것은 냉철한 종교적 본분에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 대한 자기 사랑이 그에게서 실현된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나자린]은 이 사상을 탁월한 수법으로 처리한 작품이다. 처음 보면 나자린은 복음을 따라 살려고 하나 교회의 체재에 실증을 느낀 가난한 사제로 생각하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위해서 선업을 하기를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나자린은 점차 사랑의 덕의 실패와 무모함을 별견한다. 그러자 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이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수수께끼와도 같은 마지막 장면은 인간을 기만하는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난 한 사나이의 깨달음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확연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일부에서는 사랑의 횡적 차원을 묘사한 좋은 예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본다면, 나자린에게는 사랑의 덕이 결코 없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무엇이나 “의무감에서” 행한다. 그는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한 인간으로서, 즉 인간적 사랑으로 누구를 사랑한 일이 결코 없었다. 일찍이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연민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자기가 선업을 행하는 상대방 “사람”보다도 자기가 행하는 자선행동에다 관심을 두고 있었다. 부뉴엘은 그와 같은 자선행동의 파멸적인 결과를 처절하게 묘사하고, 또 그 같은 결과에 대한 나자린의 무감각을 그리고 있다. 나자린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인 듯이 담담히 세계를 통과해 간다(주연배우는 자기 대사를 아무런 감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외움으로써 나자린의 그러한 태도를 잘 살렸다). 부뉴엘은 나자린의 소위 “사랑의 덕”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냉소하면서, 이와는 성질이 다른 생생한 인간적 사랑과 대조한다. 그는 나자린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콜레라가 휩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알 것이다). 나자린의 그 같은 무감각은 결국 그에게는 사랑의 덕이 인간적 사랑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살과 피가 없는 사랑의 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박한” 인간적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배척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는 아무 상관없는 소위 “사랑의 덕”이다. 따라서 나자린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가까이 감으로써 거기서 하느님께 대한 참다운 사랑을 발견한다는 논리는 옳았다. 세자르 바예호의 시에 나오는 고통에 찬 항의도 나자린 같은 “크리스천들의 하느님”을 표적으로 하고 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이 인간이셨더라면 어떻게 하느님 노릇을 하지 아실 것이외다만...” 부뉴엘-자기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무신론자가 되었노라”고 말한 일이 있다-이 가르치고자 한바는 역설적이기는 하나 배울 점이 많다. 인간적 색채나 향기가 없는 사랑의 덕이야말로 “철두철미하게” “횡적 차원”에만 편중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마태오 복음의 이 본문에서 역설코자 하는 셋째 항목, 즉 인간들을 거쳐 하느님께 당도한다는 점을 이야기해 보자.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불가분하다는 정도로는 안된다. 거기다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불가피하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이웃 사람 안에서 사랑을 받으신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필요불가결한 매개체이다.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다: “...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이 지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지 않았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연설에서 바오르 6세는 마태오 복음의 이 본문을 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에 대한 지식은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 (공의회의 주목적은) 오늘의 인류로 하여금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을 다시 찾아뵙도록 친근하게 그들을 초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것은 멸망이요.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은 부활이며, 하느님께 머물러 있는 것은 안전이요, 그분께로 되돌아가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생명을 건진다는 것입니다’”.
엥절레르는 그리스도와 이웃을 동일시하는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 설명들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혹자는 이것이 신비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불쌍한 사람들간의 신비로운 유대를 설정하고 관조하는 대에 국한된다”고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아들”에게서 이상적인 인간을 보고서, 사람의 아들이 새 인류의 원형이며 “모든 개인 안에 그 원형이 이미 실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제3의 해석은 “대속(代贖)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의 아들이 모든 인간과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사람의 아들에게서 “집단 인격”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끝으로 그것은 별다른 무엇이 아니고 그저 이웃 사랑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일 따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엥절레르는 이러한 해석을 하나하나 검토하고서 배격하며, “가장 보잘것없는 자들”은 곧 크리스천들을 지칭한다는 자기의 지론을 고수하여, 주님의 제자들이 지상에서 주님을 대표한다는 해석을 창안한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다: “(그리스도와 제자들간의) 이 관계는 하도 긴밀하기 때문에 그이의 제자들에게 한 것은 바로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사람의 아들에게 한 것이 된다. 이것은 강력한 의미의 ‘동정’(同情)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엥절레르의 이 결론은 크리스천들에게만이 아니라 심중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인류 안의 하느님의 현존, 인간 개개인 안의 하느님의 현존-그 예로서 성전의 유비가 있다-의 사상이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우리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된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돌로 된 성전, 긴밀히 결속된 인간들로 만들어진 성전에서 뵙는 것이다. 인간들이 뭉쳐 역사를 창조하고 자아를 형성한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계시된다. 아울러 인간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을 만나는 것도 역사 한가운데서이다. 그리스도는 사사로운 한 개인[私人]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모든 인간에게 묶는 그 유대로 말미암아 그의 역할이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것이 되었다. 하느님의 성전은 인간의 역사이다. “성”(聖)은 경신례 장소의 비좁은 테두리를 초월한다. 우리는 타인들과의 만남,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그리스도를 뵙는다. 그들을 향한 사랑의 행동은 곧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동이다. 콩가르가 이웃을 “성사”(聖事)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웃은 우리가 주님을 뵙고 모시는 가견적 실재이다. “하느님의 (역설적) 표징이라 할 것이 하나 있으니 곧 우리의 ‘이웃’이다. 인간의 가장 깊이 접근할 수 있는 표징, 이것이 곧 ‘우리 이웃의 성사’이다.”
바예호의 시구에 이런 말이 나온다: “‘행운’을 팔러 다니는 복권장사를 보면 문득 머리에 하느님이 떠오른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우리에게 “행운”을 사라고 외치는 복권장사 같다: 인간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 뵙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을 하느님께 다가갈 기회 또는 도구로만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 자신을 위한 인간의 참다운 사랑이지, 선의에서라도 모호하게 남용되는 상투어대로 이른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사랑은 아니다. “모호하게 남용되는 상투어”라고 한 까닭은, 그것이 인간 자체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표현됨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 뵙는 단 한 가닥의 길이다. 이웃을 향한 내 행동이 곧 하느님을 향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 행동이 본격적이 아니고 구체성이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의미가 깊어지고 더욱 중대해지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개인주의 관점에서 사랑의 덕을 논하는 일이다. 근년에 거듭 강조되어 온 바와 같이, 이웃을 개인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웃”이란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그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종적 요소를 포괄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착취당하는 사회계급, 지배당하는 국민, 변두리로 밀려난 인종을 가리킨다. 셰뉘의 주장대로 대중 역시 우리의 “이웃”이다. 따라서 “너와 나 관계”라는 개인주의적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비오 12세의 표현을 따른다면, 오늘날의 사랑의 덕은 “정치적 사랑”이라야 한다. 그런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도 지금에 와서는 정치적 활동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타인의 노동에서 얻은 이윤과 가치를 자기 몫으로 점유하는 소수의 복지만을 노리고 조직된 사회를 변혁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변혁은 사회의 토대로부터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 달리 말해서 생산수단의 사유제도를 개혁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의 주님과의 만남은 인간들과의 만남, 특히 압제와 착취와 소외로 그 형상이 일그러진 인간들, “볼품도 없이” “사람들이 얼굴을 돌리고 마는” 그런 인간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사람들은 변두리로 밀려난 무리들인데, 그들 나름의 진짜 문화를 이루고 있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면 반드시 그들의 가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류의 구원은 그들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으며,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의미를 전수하고 또한 “하느님 나라를 상속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취하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위한 우리의 현실 참여가 곧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실존을 부합시키고 있느냐 않느냐를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불쌍한 사람들을 동일시한 그 본문이 계시하는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 아직도 더 연구되어야 하는 “이웃 신학”은 여기에 토대를 두고 정립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해방의 영성

그리스도 왕국의 전망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타인들에게 압제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노력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최근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체험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만약에 그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이탈된 자들로 본다면, 이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순전히 교회 공동체 내부의 문제로 국한시키려 하고 또 그들을 제멋대로 행동하는 고집쟁이로, 심지어는 위험스럽기도 한 무리로 보는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서 생을 바쳐 투신하는 그들이 자기 행동의 깊은 아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는 신학이 그들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범주들을 정립시켜 주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신학이 복음의 새로운 요청과 이 대륙에서 착취당하고 압제받는 국민들의 요구에 독창적인 응답을 모색하면서도 아직 적절한 범주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의 투신과 이 같은 투신을 설명하려는 노력에는 신앙에 관한 더 깊은 이해가 깃들여 있다. 이 같은 투신은 일정한 서클을 형성하고 있는 영명(令名)높은 크리스천 사상가들의 이른바 “정통”교리보다도 주님께 더 충실한 것 같다. 물론 이 “정통”교리는 교회당국의 성원을 받고 있는데다가 사회 대중전달의 수단을 가까이하고 있어서 널리 보급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너무도 정적(靜的)이고 생기를 잃고 있다. 그렇다고 복음을 저버릴 만큼 과감하지는 못하다. 오히려 복음이 그것을 배척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신학적 카테고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근본 태도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을 포괄하고 종합하고 우리 생의 총체적인 면과 세부적인 면을 아울러 활기차게 할 무엇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영성”이 필요하다. 가장 엄밀하고 깊은 의미에서 영성이란 곧 성령의 지배이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한다면”, 성령이 “그대들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완전한 자유,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기를 완성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장애로부터의 자유, 하느님 및 이웃들을 사랑하고 사귀게 만드는 자유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영성은 우리를 해방의 길로 이끌어갈 것이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영성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복음을 생활에 옮기는 구체적 방도이다. 영성은 만인과 연대하여 “주님의 눈앞에서” 사는 길이며, “주님을 모시고” 인간들의 눈앞에서 사는 길이다. 그것은 진지한 영신적 체험에서 우러나온다. 일단 체험을 했으면 그것을 설명하고 증언해야 한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해방운동에 투신하는 가운데 이미 이 같은 경험을 체득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세대들이 얻은 체험도 거기에 보탬이 안되는 것은 아니나, 무엇보다도 우선 이런 종류의 체험은 그 나름의 고유한 방도를 모색해야 함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현대사가 있고 현대의 복음이 있듯이, 현대적 영성체험이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무릇 영성이란 크리스천 생활의 주축을 현대의 영성체험에 따라 재정리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런 재정리에서 초래되는 종합이다: 다양한 이념들을 깊이 이해하도록 자극하고, 크리스천 생활의 알려지지 않거나 망각된 측면을 되살려내어, 크리스천 생활과 기도와 사회 참여와 행동에다 옮기는 일이다.
해방운동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쿄 생활도 그 나름의 문제점이 있음은 무시할 수 없으며, 극복해야 할 장애들이 있음도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같은 여건에서 주님을 만나 뵙는 일이 어려워진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고 몰두하다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그 잠재세력을 어디까지 키워나가야 할지를 모른다. 이것은 사실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문제 자체에서 해결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단견적인 처방밖에 안되어 연달아 새로운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곧 “해방의 영성”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이다. 인간의 압제와 해방이 하느님께 득죄했다면, 불의를 뿌리째 뽑아내고 전반적 해방을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에게는 마땅히 신앙과 희망이 가득 차 있지 않으면 안된다. 압제-해방의 대지에 뿌리를 갓 내린 것이 바로 이 영성이다.
해방의 영성은 이웃을 향한 회심을 골자로 한다. 압제받는 사람들, 착취당하는 계급, 차별받는 민족, 피지배 국가를 향하는 회심 말이다. 주님을 향하는 우리의 회심은 이웃을 향하는 이 회심을 함축하고 있다. 복음적 회심은 모든 영성의 시금석이다. 회심은 우리 자신의 철저한 근본적 변혁을 뜻한다. 그리스도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감을 뜻한다. 착취당하고 소외당한 인간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살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의 해방운동에 투신하는 것이다. 단호하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처신하는 것이다. 그저 관대한 아량만을 가지고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전략적인 행동을 구사하여 투신하는 것이다. 회개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물리학의 법칙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중심을 우리 바깥에 둘 때 비로소 우리가 직립할 수 있음을 깨닫고 체험하는 일이다.
회개는 하나의 항속적인 과정이다. 거기서는 우리가 만나는 장애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까지 손에 넣었던 것을 송두리째 잃고 아예 새로 출발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의 회개가 어떤 결실을 내느냐는 우리가 이 같은 모험에 얼마나 자기를 개방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어린 아이와도 같은 영성적 천진난만성에 달려 있다. 모든 회심에는 반드시 어떤 파열이 있다. 아무런 갈등과 균열이 없이 회심을 성취하겠다는 것은 자기와 남들을 기만하는 소치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위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순전히 내향적이고 경건한 태도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회심은 회심이 일어나는 상황, 즉 경제-사회적.정치적.문화적.인간적 환경에 좌우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같은 구조와 상황을 변경시켜 놓지안고는 우리의 진정한 회심은 불가능하다. 회심하겠다면 우리네 사고방식과 결별해야 한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하고, 주님과 일치하는 방법도 달리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 특히 불의와 비참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과의 유대를 맺는 데 지장이 되는 모든 것을 청산하고 결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순수 내면적이고 영신적인 태도가 어떤가에 의해서가 아니고 이 같은 철저한 실제적 변혁이 일어날 때 비로소, 이미 없어진 “옛 인간”의 잿더미에서 “새 인간”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이웃을 향하는 회심, 사회정의와 역사를 향하는 회심만으로 할 바를 다했다고 하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곧 정의를 실행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하느님과 그리고 모든 인간과 진적으로 하나가 되어 살고 있다고 할 수 없고, 또 구체적인 인간 역사를 외면하려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실존을 발견했다고 할 수 없다. 크리스천은 아직도 할일이 하나 더 있다. 사회적 투쟁과 노력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평화를 찾아내는 방도를 강구하는 일이 곧 그것이다.
해방의 영성은 은혜의 “무상성”(無償性)을 생생하게 파악하고 느끼는 것이라야 한다. 주님과의 친교, 만인들과의 교제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선물이다. 바로 여기서 해방의 보편성과 철저성이 생긴다. 이 선물은 결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정신차리고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 깨어서 지키는 태도야말로 성서의 일관된 주제의 하나이다: 주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하며, 또한 그분의 뜻에 충실하고 선업을 행해야 하며, 받은바 능력을 선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 개인 및 공동체의 실존 근저에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이라는 선물, 당신 친교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 생은 감사의 정으로 넘치게 된다. 그렇다면 타인들과의 만남, 우리의 사랑, 생활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이 오로지 선물이요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런 조건과 부담이 없이 자유로이 주는 사랑만이 참다운 사랑이다. (하느님이나 타인으로부터 오는) 무상의 사랑만이 우리 존재를 속속들이 꿰뚫고 진정한 사랑을 우리 안에 일으킨다.
기도는 무상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여가”활동, 이 시간의 “낭비”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은 유익과 무익의 범주를 초월하신 분임을 깨닫게 만든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시다. 당신 은혜의 무상성은 깊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우리를 모든 종교적 소외에서 벗어나게 하고 결국은 모든 소외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운동에 참여하는 크리스천은 참답게 기도하는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자기 활동을 구실로 기도를 회피하면 안된다. 여기에는 상당한 위기가 존재하고 있으며 걸핏하면 불행한 파국으로 종말을 맞게 되리라는 것도 부인하지 못한다. 해방운동에 투신하고 있으면서도 망향의 정에 젖어 자기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들은 시편 작가처럼 “축제의 모임,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 무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일, 생각만하여도 가슴이 미어집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문제는 회고의 정에 잠겨 후회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얻는 새로운 체험과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과제가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친숙하고 안이한 길을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여정을 감해하게 만들었다. 욥처럼 주님께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고 아뢸 수 있기를 바라며 낯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비가들의 하느님만이 정말 믿을 수 있는 하느님이라고 한 본회퍼의 말이 옳다. 그렇다고 신비가들의 하느님이 인간사와 무관하신 분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 옳다면, 저 은혜롭기만 하신 하느님께로 가는 “통로”는 결국 내가 걸친 것을 갈기갈기 짖고 나를 벌거벗겨 놓으며, 타인을 향하는 나의 사랑을 광범위하게 툭 털어놓아 무상의 사랑이 되게 만든다. 내가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가는 움직임과 그분에 힘입어 인간들을 향하는 움직임은 상호 변증법적 작용을 하면서 하나의 종합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 종합을 볼 수 있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인(神人)에게서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편들고 하느님이 인간을 편든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영성이 한결같이 주창하는 “주님과의 일치”가 그를 인간에게서 유리시키지 않으며, 이 일치에 도달하려면 인간을 통해서 가야하며, 그리하여 획득한 일치는 인간과의 만남을 더욱 온전하게 만든다. 우리가 여기서 영성을 논하는 까닭은 앞에 말한 내용의 “균형”을 맞추자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을 더 깊게 하고 모든 의미를 다 밝혀보자는 것이다.
이웃을 향하는 회심, 이웃 안에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회심, 타인들과의 만남을 풍부하게 하는 무상(無償), 인간들의 친교와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의 토대가 되는 유일무이한 그 만남 ... 이것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적 “기쁨”의 원천을 이룬다. 우리가 이미 받았으나 아직도 기다려지는 그 선물에서 이 기쁨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같은 기쁨은 우리가 정의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가운데 봉착하게 되는 모든 난관과 긴장 속에서도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완전한 해방을 외치는 예언선포에는 종말론적 기쁨에 참여하라는 초대가 반드시 첨가되어 있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요, 그 시민은 나의 즐거움이다”. 이 기쁨이 우리의 전(全)존재를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이 기쁨을 가지고서 인간과 역사의 전체적 해방을 가져오는 선물을 받아들이고 아울러 우리 인생과 타인의 생활의 세세한 부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기쁨에 취한답시고 불의한 세계에 사는 인간들을 해방하려는 노력에서 발뺌을 하거나 안이하고 값싼 타협에 말려들어서도 안된다. 우리의 기쁨은 파스카 신비를 경축하는 기쁨이며 성령의 보장을 받는 기쁨이다.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강자들과 투쟁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기쁨이다. 우리가 현재에서 이 기쁨을 경축할 때 주님의 파스카를 상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상기하는 것은 곧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의 경축은 하나의 축제이며, 그리스도를 역사의 주(主)요 압제받는 이의 해방자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축제이다. 이 공동체는 반대의 표적이 되는 조그마한 성전에서부터 인류 역사의 대(大)성전에까지 다 해당된다. 공동체의 성원(聲援)이 없으면 새로운 영성이 출현하지도 못하고 존속하지도 못한다.
성모의 찬가 마니피캇은 이러한 해방의 영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주님께 바치는 사은가(謝恩歌)로서, 주님께 총애 받은 기쁨을 겸허하게 나타내고 있다: “내 영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반겨 신명났거니 정년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도다. ... 권능을 떨치시는 분이 내게 큰일을 하셨도다”. 그러면서도 이 찬미가는 해방과 정치 분야에 관해서 상당한 내용을 함축하고 이는 신약성서 본문 중의 하나이다. 감사와 기쁨이 하느님의 활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잇다. 압제받는 이들을 해방하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치시는 하느님의 활동과 연관되는 기쁨이요 감사이다.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 역사의 미래는 가난한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것이 될 것이다. 참다운 해방은 압제받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루는 업적이 될 것이다. 주님은 그들 안에서 역사를 구원하실 것이다. 해방의 영성은 아나빔(야훼의 가난한 이들)의 영성을 기반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미 지적했지만 해방의 영성의 진로는 신학적 사변보다도 생생한 체험으로 인하여 길이 열려지는 것으로 본다. 라킨아메리카에서 “제1세대 크리스천”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추진해 온 사명이 바로 이것이다.

- ‘해방신학’ 중에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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