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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 신화와 회귀를 생각하며

혁명가의 준비여정

사르트르는 게바라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게바라에 대한 최고의 평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언사는 그의 이론과 사상이 실천과 일치하고 당대의 역사 속에 완전히 녹아 있음을 의미한다.
1928년,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아일랜드계 귀족의 후손인 건축가 아버지와 스페인계 군인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때로는 심한 발작증세까지 일으킬 만큼 평생을 괴롭혔던 천식을 어릴 때부터 안고 지내 가족의 보살핌이 특별했다. 앞으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생각하며 암을 정복하고 싶다는 야망을 가지고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대에 입학할 때까지 그는 부유한 중산층 자제로서 생활했다. 대학 시절인 1950년 그는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여행하게 되는데, 자전거가 고장나 도보로 그리고 노숙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살아왔던 환경과는 다른 인간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분히 낭만적으로 시작한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계속하기 위해서, 그는 1952년 1월 초 친구 알베르트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시작한 여정에서 칠레와 페루, 콜롬비아, 카라카스를 거쳐 미국 마이애미까지 8개월간의 여행을 한다. 미지에의 경험이라는 대륙 종단의 이 여행은 중남미는 물론 유럽과 미국의 당시 중산층 젊은이들이 꿈꾸던 가장 낭만적인 경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여행은 단순히 한 젊은이의 낭만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게바라로 하여금 중남미인의 척박하면서도 숨겨진 역사와 삶을 경험하게 함으로서 훗날 그를 혁명가의 길로 이끄는 바탕이 된다. 이 여행은 그가 평탄한 삶이 보장된 조건을 벗어나 이후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보이지 않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여행 중 그를 감동시켰던 마추픽추에 대한 인상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 기간 동안 중남미 대륙의 역사와 현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중남미의 가장 강력한 인디오 문명의 본래적 모습 앞에 마주 섰습니다. 정복자 군대의 창칼이 미치지 못한, 이제는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석축과 그를 둘러싼 형언할 수 없는 정경은 한 몽상가를 황홀경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초혼(招魂)의 거대한 보석과 같습니다.” 그는 여행기간 내내-그 이후 모든 게릴라 활동 중에도 그러했지만-일기를 썼으며, 그것에 기초해서 후에 펴낸 여행기인 [나의 첫 여정 : 아르헨티나에서 베네수엘라까지의 오토바이 여행]은 한 중남미 젊은이의 낭만과 역사에서 눈뜸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긴 여정을 마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와 의대를 졸업한 그는 병원에 취직을 하지만 두 달 만에 의사직업을 버리고 1953년 7월 볼리비아로 떠난다. 그는 인생에서 두 번 자신이 향유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버리는데 그 첫 번째가 이것이다.
그가 볼리비아 행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볼리비아가 에스텐소로 대통령이 집권해 개혁을 추진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바라가 목격한 현실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개혁은 일반 민중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실망한 그는 과테말라의 혁명적인 아르벤스 정권에 희망을 품고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를 거쳐 1953년 12월 과테말라로 들어간다. 과테말라는 1950년 하코보 아르벤스가 지휘하는 과테말라 혁명당이 선거에서 승리해 신(新)혁명정부가 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다. 게바라는 여기에서 아르벤스의 유명한 언설, “인간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굶주려 있다”라는 말을 자기 삶의 명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혁명정부에 자신이 가장 일조할 수 있는 일, 의사로서 봉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이어 미국의 조종으로 아르벤스 정권이 붕괴되고, 그는 새 정권에 의해서 수배를 받게 되면서 멕시코로 망명한다. 당시 멕시코는 스페인 내전 후에 망명한 스페인 정치가, 사상가, 지식인뿐 아니라 트로츠키로 상징되는 많은 사회주의 정치, 지식인들의 망명활동 무대였던 점에서 게바라가 혁명이론과 활동을 준비하기에는 적합한 나라였다.
멕시코로 망명한 게바라는 그곳에서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탐독하며 보편적인 혁명가의 길을 준비한다. 사상적 준비과정과 함께 그는 인생에서 중요한 두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첫 번째 부인이었던 일다 가데아와 피델 카스트로가 바로 그들이다. 일다 가데아는 페루 출신으로 게바라와 마찬가지로 과데말라에서 활동하다가 멕시코로 망명한 아프라(APRA) 당원 출신의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게바라의 어려운 멕시코 체류 시절 인간적, 사상적 동지로서 동반자 역할을 해주었던 여인이었다. 일다 가데아는 게바라가 게릴라전에서의 동료였고 두 번째 부인이 된 알레이다 마르츠 델 라 토레와 사랑에 빠진 것을 인정하고 1959년 이혼을 한다.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의 주역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운동의 기점이 되는 1953년 7월 26일 쿠바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습격의 실패로 투옥-병영 습격에 실패한 카스트로는 재판정에서 저 유명한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라는 법정 진술을 한다-중 사면되어, 1955년 7월 멕시코로 돌아와 구(舊)동지들과 함께 다시 쿠바 혁명 전략을 준비 중이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만남으로 쿠바 혁명준비는 본격화되고, 1956년 11월 ‘그란마호(號)’를 타고 그들은 쿠바에 상륙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한 게바라의 ‘여정’의 1단계는 쿠바 상륙으로 마감한다. 이 긴 여정에서 그는 ‘낭만주의적 청년’에서 총을 든 ‘게릴라’로 변화해 있었다. 1960년 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가난, 기아, 질병과 직접적으로 접했다. 그러나 나는 병든 아이들을 충분히 치료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내게는 충분한 약품과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적인 압제로 생긴 그들의 비굴한 모습을 보았다. 거기에서 내게 분명해진 것은 유명한 학자나 의학에 훌륭한 공헌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안 것이다. 이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쿠바 혁명과 체 게바라

쿠바 혁명은 중남미 현대사에 있어 대내외적으로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외적으로 쿠바 혁명은 서구세계에 대하여 중남미 가 근대성이 부재한 비(非)역사적 진로를 걷고 있는 대륙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킨다. 쿠바 혁명이 있기 전까지 서구는-특히 미국은-중남미를 단지 이국적 풍물의 대상 정도로 취급하면서, 서구 계몽주의 이식이 실패한 이후 자신의 역사 전개를 위해서 좌절하며 투쟁하는 중남미인들의 자기 모색의 과정에 무지했다. 중남미는 그들에게 정체성이 없는 하나의 대륙일 뿐이었다. 언젠가 카스트로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직 세례조차 받지 못한 대륙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중남미는 서구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름-이베로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 이스파노 아메리카 등-이 붙여져야 하는 고정된 자기 이름을 가지지 못한 채 타자에 종속된 대륙이었다. 이 대륙에서 발생한 쿠바 혁명은 따라서 서구인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며,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서구가 중남미를 바라보는 시각 교정의 한 예는 미국의 중남미 출신 지식인에 대한 대우에서 나타난다. 미국은 쿠바 혁명 이후 중남미의 상당수 지식인을 초청해 미국 내에 자리를 마련해주면서 자신의 자본주의 체제 내로 중남미 지식인을 흡수하겠다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각 변화는 단지 서구 지식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구대중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중남미의 사상과 문화가 서구로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서구에서 1960년대 일기 시작한 중남미 소설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현상의 또 다른 예이다.
대내적으로 쿠바 혁명은 중남미 정치변혁사, 특히 중남미 좌파운동사에서 과거와 질적으로 차별되는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다.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기 전까지 중남미 좌파는 사회변혁에 있어서 개량주의적, 점진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무력을 통한 혁명적인 승리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구 선진국의 사회 및 계급구조에 기초한 이론을 바탕으로, 노조를 중심으로 한 도시노동자 계급에 기반해 선거를 통해 사회변혁 혁명 역량을 도외시했다. 쿠바 혁명은 주변지역인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한 무장투쟁이 혁명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중남미 역사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첫 번째 인물들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중남미에서의 무장투쟁은 19세기부터 유래한다. 무장투쟁의 전통은 쿠바의 마르티, 멕시코의 비야, 사파타, 엘셀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니카라과의 산디노 등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서 이어져왔다. 그러나 무장투쟁이 당과 국가의 정치체제로 변환된 것은 쿠바 혁명이 처음이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는 1990년대 초까지, 거의 중남미 전 지역에는 무장투쟁 게릴라 그룹이 계속해서 창설되었고 쿠바 혁명은 그들에게 중요한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쿠바 혁명으로 이제 중남미 좌파는 ‘평화적인 노선’-특히 공산당의 노선-으로 어떻게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하는 전술적 문제를 전략적 교훈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쿠바 혁명이 중남미 현대사에서 대중을 포함한 지식인으로 하여금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했던 중요한 역할은 바르가스 요사의 한 글에서 잘 나타난다. “(쿠바 혁명으로) 우리나라들(중남미 국가들)에서 혁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혁명은 우리의 사고에서 낭만적이고 먼 얘기였다. 우리는 혁명을 우리와 같은 나라에서는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아카데믹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1959년 1월 아바나 입성 후, 게바라는 혁명정부에서 ‘예기치 않게’ 경제분야를 담당하게 된다. 그는 ‘전국농업개혁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산업상’ 등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경제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한다. 경제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인간이 물질, 특히 화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경제정책을 꿈꾸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경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화폐, 기업, 국가 개념을 부정했으며, 이러한 시각에서 당시 사회주의권 국가간의 경제교류가 국가 사회주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거부했다. 한 예로 그는 쿠바 경제 지원책으로 소련이 제공하는 유상차관을 비판했는데, 이는 그의 근본주의적, 국제 사회주의적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그의 근본주의적 이론은 현실적으로 경제정책을 실행하는데 있어 대내외적으로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계획된 정책들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소련이 게바라의 경제정책을 비판했고, 노동자, 농민도 임금의 삭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쉽게 동의해주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소련, 중국, 동구권 및 북한 등 사회주의권 국가를 순방하며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관한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토론하고 집필했다.
한편 1962년 소련 미사일 위기로 그는 동부지역 군 사령관직까지 수행하며 자신의 게릴라 전략을 전 세계에 이식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이 기간에도 유엔, 아프리카 등을 누비며 쿠바의 자립경제, 전 세계적인 반제투쟁의 고무, 지원 등을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게바라의 근본주의적 경제정책은 앞서 지적한 대로 대내외적인 비판과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 시점에서 그는 다시 자신의 모든 현재의 조건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1965년 4월 카스트로에게 작별 편지를 남긴 채 아프리카의 콩고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조용히 쿠바를 떠난다. 그가 의사직을 버리고 볼리비아로 떠난 이후 두 번째의 일이다. “피델, 나는 지금 많은 것들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집에서 처음 당신을 만났던 시간, 나에게 (쿠바 침공에) 동행하자고 제의했던 일, 준비과정에서의 긴장 등 말입니다.... 이제 나는 당에서의 직위, 장관직, 사령관직, 쿠바 시민권, 이 모든 것에서 공식적으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나는 새로운 전쟁에서도 당신이 세뇌시켜준 신념, 민중의 혁명정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투쟁한다는 가장 성스러운 의무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쿠바 혁명에서 분출하는 의무감을 제외한 모든 짐으로부터 나는 쿠바를 자유롭게 하고자 함을 다시 밝힙니다. 어느 하늘 아래서 나의 최후를 맞이할 때라도 나는 끝까지 이 민중과 특히 당신을 생각할 것입니다.”

볼리비아 일기

9개월간의 콩고 체류 중 게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중남미에서의 혁명을 위해서 1966년 11월 변장한 모습으로 볼리비아로 잠입한다. 당시 볼리비아는 바리엔토스 군사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 지도자인 마리오 몽헤와 연합해 중남미 대륙에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정부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1966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67년 10월까지 11개월간 게바라가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거점을 확보하면서 투쟁해나가는 과정은 그의 [볼리비아 일기]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일기는 어느 전기 비평가의 표현대로 “로빈슨 크루소 표류기와 같은 생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산악에 거주하는 농민을 지원세력으로 확보하려는 시도, 비트의 건설, 정부군과의 전투와 심리전, 대원들 간의 갈등 등을 게바라는 비교적 건조한 문제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런 중에도 이 혁명과업이 실패로 귀결될 것 같은 예감을 느끼게 하는 구절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볼리비아 공산당 지도자) 몽헤는 내 예상대로 처음에는 핑계를 대더니 끝내 우리를 배반했다. 이미 볼리비아 공산당에서는 우리를 반대하는 선전을 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 계획했던 게릴라 군과 공산당의 연대는 끊어졌고, 게바라의 게릴라 전략을 비판했던 소련의 비협조, 그로 인한 쿠바의 지원 약화, 대원들의 사기 저하-“날이 갈수록 대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식량이 부족해서 육체적으로 약해지고 있다”-등으로 그의 게릴라전 준비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게바라의 처음 예상을 뒤엎고 상황을 악화시킨 중요한 요인은 농민의 게릴라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였다. 쿠바 혁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는 게릴라 군이 근거지로 삼고 있던 산악지대의 농민의 지지였다. 쿠바에서의 경우, 혁명 준비과정의 초기 게릴라는 정부군에 협조하는 농민의 상당수를 처형하는 등 농민의 지지를 위해서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많은 농민들이 게릴라를 지원했고, 또 모두 수용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게릴라 지원자들이 몰리면서 농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에서의 상황은 게바라가 쿠바에서 경험했던 예상과는 달리 전개되었다. 볼리비아에서 게릴라들은 농민에게 강제적인 수단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고-게릴라전에 필요한 물품은 반드시 농민에게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다-위협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나, 농민들은 게릴라에게 비협조적이었고 정부군에 게릴라 정보를 제공하는 등 게릴라 군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었다. 게릴라전에서 가장 중요한 우군인 농민의 지원 확보 실패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게바라는 투쟁하고 있었다. 쿠바 혁명을 통해서 실천했고 성공했던, 농민에 기반한 게릴라 활동을 통한 혁명의 주관적 조건의 창출이라는 문제가 벽에 부딪힌 것이다.
1967년 10월 8일, 좁혀오는 정부군의 포위 속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총상을 입었고, 이튿날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사살할 것을 결정했다. 그의 일기와 두 손이 쿠바로 보내짐으로써 카스트로는 그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투쟁은 죽음이라는 현실적 실패로 막을 내렸다. 게바라를 이야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왜 무모하게 그는 그곳으로 갔을까”하는 의문을 가진다. 게바라가 아파리카에서의 게릴라전 투쟁을 거쳐 최종 목적지로 볼리비아를 택한 것은 그곳이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남미 혁명으로 연계시킬 수 있는 몇 가지 요인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가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혁명의 파급력이 클 것으로 그는 판단했다. 정치적으로도 당시 볼리비아는 군사정권에 대항해 공산당을 중심으로 좌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고, 저임금과 척박한 노동조건에서 생활하는 광산 노동자와의 연대 가능성도 높을 것으로 게바라는 예상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결국 빗나갔다. 게바라의 볼리비아행을 비판적으로 보는 평자들은 그의 행위를 자살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년간 볼리비아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고 1960년대에 쿠바 혁명을 지지했다가 1971년 에베르토 파디야 사건을 계기로 쿠바와 결별한 페루 출신의 작가 바르가스 요사는 “(게바라에게는) 체포되거나 죽음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출구가 없었다. 그는 한 행위는 자살이다”라고 말한 바 있고, 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하기도 한다. 1967년 게바라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그의 혁명이념과 당시 사회주의적 상황과의 괴리 속에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를 읽다보면, 이미 지적했듯이 그도 실패의 예감을 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유작일기는 고립무원의 상태로 빠져드는 한 인간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가 아니다. 회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옥죄어오는 죽음 앞에서의 몸부림이 아니라, 불가능 앞에서 자신의 이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자의 의연한 죽음인 것이다. 가족과 정치적인 지위를 모두 포기하면서 그가 택한 것은 현실적인 죽임이지만 그는 죽음을 통해서 순교자적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게바라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끊임없이 대중에게 다가올 수 있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1990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대선에서 패배한 후, 그 정권에서 11년간 장관직을 수행했던 신부이며 시인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은 결국 실패한 것이 아닌가”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나카라과 민중이 산디니스타 정권을 통해서 하늘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잠깐 동안 본 하늘은 그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이고 이것은 후에 다시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일견 이해되지 않는 이 대답은 게바라의 죽음의 의미와 일맥상통하지 않나 생각된다.

카스트로와 게바라 : 혁명에의 동행과 작별

쿠바 혁명은 서구의 정통적인 혁명에 대한 인식, “혁명이론 없이 혁명운동 없다”는 명제를 벗어난 혁명이다.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자신들의 혁명에 “자본주의적, 사회주의적 혁명도 아닌 푸른 혁명”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듯이 혁명의 초기 모습은 서구의 지식인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서구 지식인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특이한-이론적 토대에 기초한 과학성이 결여되고 무질서한-예외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1956년 11월 멕시코의 베라크루스에서 출항한 그란마호에 승선했던 82명의 게릴라 중 쿠바 상륙과 함께 벌어진 1차 전투에서 생존한 전사는 12명에 불과했다. 한줌에 불과했던 그들이 2년여 만에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원동력은 “거점이론”의 전략 때문이었다. 게릴라전을 통한 혁명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론은 게바라의 글 “게릴라전쟁”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쿠바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세 가지의 근본적 요인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첫째, 민중으로 구성된 군대는 정부군을 이길 수 있다. 둘째, 혁명을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거점 봉기로 혁명의 조건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셋째, 저개발의 중남미에서는 무장투쟁의 공간이 농촌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앞서 지적했지만 도시로부터 격리된-언어, 지리, 종족적으로 격리된-농민을 거점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도시의 학생과 중산층 지식인을 혁명적으로 연대하는 전략이다. 당시 공산당들이 도시의 노동자계급과 소시민을 전위적인 세력으로 구축하려고 했던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전략이며,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인 혁명계급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산업화된 도시를 기반으로 했다면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활동의 무대로 삼아, 포코라는 작은 거점-스페인어로 포코(foco)는 초점을 의미함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을 움직여 거대한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것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정통 마르크스주의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오히려 모택동의 중국 공산혁명과 상당히 유사성을 띤다.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혁명 승리 후 6년 여 간의 동거를 통해서 이론보다는 현실 인식, 민중과의 연대, 중남미 해방에 대한 확신 등을 통해서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지만, 1965년 게바라가 쿠바를 떠남으로 해서 그들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분기점은 그 둘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카스트로는 혁명가였지만 정치가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게바라는 정치가, 행정가보다는 영원한 혁명가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런 점만으로 게바라가 쿠바와 카스트로를 떠난 이유를 다 설명하기는 부족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던 1965년경 그는 대내외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었는데, 이 비판의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근본주의적 혁명관이 소련의 수정주의 등 당시의 사회주의 블록 국가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의 근원론적, 영구 혁명론적 관점은 소련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극좌로 인식되었고, 쿠바 내의 구(舊)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게바라가 쿠바 혁명으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게바라의 혁명 내의 위치, 카스트로와의 관계 등 개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 체제로 양분된 세계구도 속에서 쿠바라는 약소국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혁명노선의 변화를 게바라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혁명노선의 변화를 게바라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쿠바 혁명은 애초부터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혁명이 아니었다. 전위적인 당의 역할과 당에 의해서 이글어지는 일사불란한 조직체계에 기초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비해서, 쿠바 혁명은 ‘좀더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무질서하고, 열대적이며, 즉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혁명 초기의 모습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혁명 모델은 소련의 그것과 유사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초기의 ‘자유분방한 혁명’의 성격도 퇴색해가면서 노선은 경화되어갔다. 1965년경 쿠바는 이미 소련의 모델에 경도되어 있었고, 게바라가 알제리에서 귀국했을 때 그는 트로츠키주의자, 친(親)중국혁명주의자로 몰리면서 카스트로와 혁명노선에 관한 격렬한 논쟁을 벌여야만 했다. 게바라가 혁명의 초기 모습을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키려고 하는 반면, 카스트로는 다시의 세계정치 구도 속에서 쿠바가 생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노선을 선택한고 있었다.
지금까지 묻혀져 있던 자료와 많은 인터뷰를 통해서 게바라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기술한 것으로 평가받는 호르헤 카스타네다는 [적색의 생에, 체 게바라의 전기]에서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관계를 “결혼도 이혼도 아닌” 관계라고 적고 있으나, 1965년 게바라의 볼리비아행은 분명 게바라와 카스트로 간의 작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작별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카스트로와 게바라로 상징되는 혁명노선간의 갈라짐이다.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작별은 게바라의 이상주의적 혁명관으로 설명하려는 시각이 많다. 이상주의는 현실 속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낭만주의적 연민의 감정이 담겨진 이 시각은 그의 혁명관과 인간관을 자칫 간과해버릴 위험성이 있다.
게바라가 쿠바 혁명을 통해서 이룩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새로운 인간의 창출’이라는 문제는 그의 글 “쿠바에서의 사회주의와 인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사회주의 사회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실행되어야 할 문제 중,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수립보다도 제도의 변화 후에도 잔존하고 있는 개인의 자본주의적 의식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시각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시작된 쿠바 혁명의 발전과정을 정리하면서 추출한 이론이다. 객관적으로 혁명의 조건이 전무한 상황에서 주관적 혁명의 조건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각 게릴라와 농민의 의식의 변화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강조하고 있는 개인 주체와 대주지단의 직접적 정치참여의 문제이다. 그는 개인의식의 발전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는 개인을 단독자와 집단 구성원이라는 양면적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하부구조의 변화와 동시에 개인 주체, 즉 개인의 의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 집단적으로 의식적인 체제로의 참여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신사회와 신인간이 창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당의 전위성과 제도만을 중시하면서, 사회의 기본구조에 무게 중심을 두고 그것을 변혁시키면 그 구성원들은 필연적으로 변화된다고 하는 소련 사회주의의 정통 공산주의자들의 관점과는 대립적인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카스트로 역시 게바라와 같은 관점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결국 소련과의 유대 속에서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이고 보면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결별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 ‘체 게바라 : 신화와 회귀를 생각하며’ 중에서, 고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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