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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 외로움, 간절함

한 달 가까이 방황 아닌 방황을 하고 이제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을 보내면서 가장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화두가 ‘배고프다는 것’과 ‘외롭다는 것’이었습니다. 끈질기게 따라다닌 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결과, 이제 조금은 이것들을 피하지 않고 마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배고프다는 것

저녁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 시장에서 한 아저씨가 “고등어, 세 마리에 오천원!”이라고 외친다. 순간 눈이 고등어로 향한다. 푸른 등의 고등어가 나란히 놓여있다. 군침이 돌면서 지갑 속에 얼마 있나를 생각했다. 칠천원이 있다. 고등어 세 마리를 사고, 무와 대파와 고추를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그러면 지갑은 비워진다. 매정하게 눈을 돌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고등어를 생각하면서 지긋지긋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가면 참 먹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저것 눈요기만 할 뿐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빚 때문에 자주 싸우는 부모님과 때가 되면 돈 벌러 일본으로 가야 하는 엄마를 알기 때문이었다.
20년 전 처음으로 집을 나와 서울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밤늦은 시간까지 학원에서 자습을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지나야했다. 싸구려 자취방은 종종 시장 안쪽에 있기 마련이다. 배는 고픈데 늦은 시간 시장에는 아직 철시를 하지 않은 상인들이 늦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유독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튀김과 오뎅들... 역시 침을 삼키며 자취방으로 돌아와 지긋지긋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너무도 익숙한 삶이 갑작스럽게 지긋지긋한 삶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면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이 삶을 벋어날 수 있을까?” 앞으로 다시 10년이 지나서 내 나이 오십이 됐을 때에도 이 지긋지긋함은 문득문득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지긋지긋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내 주위에 너무 많다.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 데려가서 라면을 끓여주는 이가 있고, 납루한 집에서 커피를 대접하며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이가 있고,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던 고2 아들이 집안 어려움 때문에 일반계로 옮겼다는 얘기를 덤덤하게 하는 이가 있고, 아내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려다 면박을 당해야 하는 이가 있고, 같이 밥이나 술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것에 너무도 익숙한 이들이 있다.
위안이 된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조금 살만하다. 지긋지긋한 삶 속에서 자녀들 교육까지 고민해야 하는 이들, 고향에 있는 부모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아등거리지만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이들, 그렇게 살면서도 항상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통계상으로만 수 백 만 명이라고 한다. 소위 차상위계층을 비롯한 수 백 만 명의 빈곤층이 이렇게 지긋지긋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쉽게 벋어날 수 없는 우리들의 삶이다. 그 지긋지긋함을 몸서리쳐지도록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만이 알고 있는 배고픔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삶이다.

갑작스럽게 배고프다는 것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는 순간, 내 삶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고, 그런 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내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잠시 비참한 나를 놔두고 한 발 물러서보니 내 주위에 지긋지긋한 이 삶들을 비슷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이 널려있다. 내가 배고픈 것처럼 이들도 배고프고, 내가 지긋지긋하게 느끼는 것처럼 이들도 지긋지긋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고, 내가 비참하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이들도 비참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제일 먼저 비참함이 사라졌다. 그래도 지긋지긋함은 남아 있지만 조금은 견딜만 해졌다.

자신의 삶을 그러려니 하면서 숨죽이고 참으면서 살아왔던 이들이 그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이후 엄청난 힘과 활력을 드러낸다. 최근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그런 힘과 활력을 많이 느끼게 되고, 그들의 힘과 활력은 나에게 힘과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조금만 지나면 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힘과 활력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진다. 그 감당하기 어려움이 나를 단련시킨다.
간혹 비참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긋지긋한 그 삶이 변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것이 배고픔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자양분이고, 낮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원동력이다. 그렇게 지긋지긋함은 샘솟는 활력으로 급변하지만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배고픔이 어느날 문득 나를 엄습하면서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너무도 익숙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불편했다. 그 비참함과 불편함이 나에게 다시 활력을 주고 있다.



외롭다는 것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이라는 영화를 봤다.
남자들에게 무수히 학대당하고 버림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는 낙서를 남기고 죽는 마츠코.
무수히 버림받고 상처받은 마츠코에게 또 남자가 찾아오고, 마츠코는 “여기 있어도 지옥, 나가도 지옥”이라고 혼자말을 하며 밖으로 나가 그 남자의 품에 안긴다.
사랑을 위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마츠코는 그 남자에게 맞으면서도 “혼자 있는 것보다 나아”라고 얘기한다.
마츠코는 혼자 사는 집에 들어오면서도 항상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그 지독한 외로움이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듯한 느낌
함께 있어도 내 아픔을 얘기할 수 없는 공허함
외롭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수시로 메일을 체크하지만 온통 스펨메일과 사회단체들 소식뿐이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도 수시로 확인한다.
외로움이 강하면 강할수록 뭔가에 대한 갈망은 커진다.
갈망은 점점 막연해지고 그럴수록 외로움은 점점 깊어만간다.

어느날 핸드폰이 오래간만에 울렸다.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전화였다.
잠시 즐거움이 스쳐지나간다.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동안 나는 절대적으로 고립된 것은 아니었다.
잠시 같이 지내면서 나를 신경써주는 동생은 너무 익숙해서 느껴지지 않았다.
각종 일정과 소식을 알리는 문자메시지에서도 정보만 보일 뿐 관계는 잊혀져 있었다.
투쟁을 하고 있는 이의 메시지는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멀리했다.
외롭다는 것은 내 스스로를 관계의 축소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비싼 식사를 사주고 헤어질 때는 얼마의 돈을 쥐어주는 이가 있었다.
오래간만이라고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술을 한 잔하고 “잘 살께요. 형도 잘 살아요”라며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이가 있었다.
돈과 관련한 어려운 부탁을 아주 편하게 수락하는 이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힘겨움과 아픔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난 기간 동안 나에게는 몇 통의 전화가 걸려왔지만, 나는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걱정하며 전화한 적이 없다.
외롭다는 것은 이런 게으름이고, 이기심이었다.


얼마 전에 우연치 않게 도범스님이라는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2004년부터 생명평화의 가치를 실현하기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3년째이고, 내년에 마칠 예정이라고 합니다. 보통 1주일이나 보름, 길어야 한 달 정도의 전국순례에 익숙해있는 나에게 4년에 걸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스님과는 직접적으로 얘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고, 순례단과 같이 생명평화의 정신으로 자신을 참회하며 백 번 절하는 시간을 같이 가졌습니다. 약 40분 가량 아주 천천히 참회 속에 절을 하는데, 솔직히 마음이 경건해진다는 느낌보다는 몸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백배를 마치고 나니 왠지 개운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때 ‘간절히 바란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생명평화를 간절히 바라며 4년 동안 전국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는 탁발순례라는 것은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지는 못해도 매일 백번씩 절을 하면서 자신을 참회하는 것도 간절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겠지요.

방황을 시작한 즈음 한주연합노조 여성동지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너무도 오래간만에 한주 동지에게서 온 메일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온라인 서명운동을 하고 있으니 홍보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천 명을 목표로 하는 서명운동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알리고, 서명을 했습니다.
그때는 초반 시작하는 때라서 서명한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소식을 알리고 울산노동뉴스에 기사도 실리면서 조금씩 사람들이 서명하러 오더군요.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매일 서명 게시판을 관찰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서명을 하고 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기뻤고, 어느 순간부터 서명하러 오는 사람들이 뜸해지면서 내가 속상해졌습니다. 그렇게 매일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울산지역 각종 게시판에 서명운동에 동참을 호소라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처럼 그 게시판을 매일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이가 있었고, 그는 나처럼 안타까워하지만 않고 직접 서명을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느껴지는 반가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 서명이 한주연합노조 해고자들의 법원판결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작 천 명 정도의 서명으로 회사를 압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한주 동지들은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그렇게 한 달 동안 그 게시판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달에 천 명을 조직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이 복직투쟁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한 달 동안 한주 동지들과 저는 게시판을 통해 마음이 하나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하나가 된 사람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것이 ‘간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배고픔과 외로움 속에서 내 자신에 대한 간절함은 나를 더욱 배고프고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하는 이들을 생각하는 간절함은 애절함과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울산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울산과학대는 마음 한켠에 묵직한 미안함으로 남아있었는데 다행히 이겼습니다.
효정재활병원은 더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솔직히 다가서기가 무섭습니다.
공무원노조는 안타깝지만 당사자들이 일어설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들은 나름대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울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들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역시나 배고픈 삶이 이어질 것이고, 간혹 외로움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간절함을 품으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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