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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사각지대, 불법파견

노동의 사각지대, 불법파견
법원의 법 개정 권고에 귀 막은 정부와 국회
이정희    


“A회사에서 생산직으로 근무할 사람을 모집합니다.” 이런 구인광고는 어느 동네마다 널려 있는 생활정보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광고를 낸 회사와 실제 일을 하는 회사가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필요한 곳은 A회사이지만 그 광고를 B회사가 내는 식이다. A회사에서 일하게 될 사람들을 B회사가 뽑는 이유는 뭘까?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인력, 재정은 물론이고 연관된 다른 산업 부문까지도 모두 하나로 집중시킨 기업이 ‘잘 나가는’ 기업의 표상인 것처럼 여겨진 적이 있었다. 실패한 경우이긴 하지만 미국의 포드자동차는 타이어를 만들기 위해 고무농장까지 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그렇게 기업을 운용하는 경우는 없다. 다들 긴축, 슬림화, 네트워킹 전략에 따라 사업을 부문별로 나눠서 자회사를 차리거나 하청에 재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쪼개고, 나아가 노동자를 채용하고 관리하는 것까지 인력관리 전문업체에 맡기고 있다.

결국 B회사는 신문에 광고를 내 필요한 인력을 선발한 뒤, 그 사람들을 고스란히 A회사로 보내 일을 하도록 하는 셈이다. A회사 입장에서는 인력채용, 임금지급 등에 관한 부담을 더는 것은 물론이고 B회사에 인력파견 계약해지를 통보하는 것으로 그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책임까지 덜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딱히 무슨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는 B회사로서도 단지 사람을 선발, 관리해 주는 대가로 A회사로부터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임금과 일정한 금액의 수수료까지 받고 있으니, 역시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이처럼 고용해서 임금을 지급하는 회사(B회사-고용업체) 소속이면서 직접 업무지시를 내리고 일을 시키는 회사(A회사-사용업체)로 가서 일을 하는 경우를 ‘파견노동’이라고 하고 이렇게 일을 하는 사람들을 ‘파견노동자’라고 부른다.


나도 모르게 범법자?


지난 98년 7월부터 시행된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하 파견법)’에서는 제조업의 직접생산 공정업무를 제외하고 전문지식·기술 또는 경험을 필요로 하는 26개 업무와 결원이 생겼거나, 일시적·간헐적인 경우에 파견노동자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올 6월 말 현재까지 이 법에 의해 허가를 받은 파견업체는 1천2백43개소이고, 여기에 소속돼 파견노동을 하는 사람은 6만78명에 이른다.
하지만 산업현장에는 파견법에서 정한 대로 노동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파견업을 하는 업체가 많다. 이것이 바로 ‘불법파견’인데, 이들 업체에 소속돼 스스로 ‘불법’인지도 모른 채 파견노동을 하는 노동자들 또한 부지기수다.

올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동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방용석 노동부장관이 “현재로선 현장의 제보 없이는 불법파견을 적발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노동부조차 불법파견의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부가 적발한 불법파견업체(노동자)는 대부분 노동자들의 고소·고발, 진정 등에 의해 밝혀진 것으로 2000년에 15곳(8백21명), 2001년에 13곳(7백25명), 2002년 8월 말 현재 8곳(1천3천28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SK, 대한항공, 하나로통신 등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허가받지 않은 파견업체를 통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파견노동자를 받아 사용해 왔다는 점이다. SK의 경우 인사이트코리아라는 업체를 통해 1백37명을, 대한항공은 한진관광을 통해 65명을, 하나로통신은 하나로테크놀로지를 통해 3백69명을, (주)캐리어는 대명실업 등 6개 업체를 통해 6백여 명을 써 왔고, 공기업인 서울도시철도공사 역시도 4백14명의 불법파견 노동자를 사용해 왔다.

이들의 수법은 하나같이 ‘파견계약’이 아닌 ‘도급계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도급계약은 도급(용역)업체 관리자가 자기 회사 소속 노동자들에게 직접 작업지시를 내리고 근무태도 등을 관리하면서, 계약을 맺은 업체의 특정한 라인이나 기계 등을 맡아 일정한 물량을 정해진 기간 동안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용업체로서는 ‘파견계약’과 달리 파견법에 따른 허용 업무의 종류 등에 제한을 받지 않는 데다 도급업체 소속 노동자들에게 근로시간, 산업안전 등의 영역에서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아도 되므로 사실상 ‘부리기’ 편한 방법인 셈이다. 특히 현행 파견법에는 파견노동자를 2년 이상 사용할 경우 사용업체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조항이 있는데, 도급계약을 맺으면 이 역시 지키지 않아도 되므로 일부 문제 사용업체들이 ‘선호’하는 계약방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노동자들에 대한 인사/노무관리를 실질적으로 본사(사용업체)가 직접 해왔다. 형식만 ‘도급’이지 사실상 ‘파견’이었다는 말이다. 나아가 이들 기업은 불법파견 노동자를 사용하면서 같은(비슷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30∼40% 낮은 임금, 심지어 매년 고시되는 최저임금보다 조금 높은 50만∼60만 원을 지급하는가 하면, 직접 고용의무를 갖는 2년이 되기 전에 대부분 도급(사실상 파견)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하는 방식으로 이들 노동자를 해고해 왔다.


하나로통신, “그래, 우리 불법파견했다”


놀라지 마시라. 다음은 국내 굴지의 통신업체 하나로통신에서 작성한 문건이다. ‘대외비’임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지난 5월 자회사이면서 하나로통신과 도급계약을 맺고 있는 하나로테크놀로지(이하 하나로테크) 노동자들에게 입수된 이 문건에서 하나로통신은 스스로 불법파견을 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테크(하나로테크)의 노무관리상 취약점은 인사/노무관리를 본사(하나로통신)에서 직접 실시하고 있는 현실에 기인하여 파견법에 저촉된다. 3개 도급업체 소속 근로자들을 2년이 지나면 (파견법에 따라) 직접 고용을 해야 하는데 인력의 비대화로 효율성의 저하가 예상되므로 하나로테크를 설립하여 소속만 변경시켰다. 하나로테크의 업무수행 방식은 형식적으로는 도급(=업무위탁)이지만 실제로는 위장도급(=근로자파견)이다.”(하나로통신 인력개발실이 작성한 「하나로테크놀로지 인사/노무 현안진단」)

그동안 하나로통신에서는 초고속 통신망 운용·구축·개통장애 처리 등의 업무를 3개의 도급업체가 나눠서 전담하고 있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말이 도급이지 사실상 불법파견임을 하나로통신쪽도 알고 있었다.

하나로통신은 도급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근속기간이 2년이 가까워 오던 지난 2000년 7월, 현행 파견법에 따라 직접 고용해야 할 것을 우려해 자회사 하나로테크를 설립하고 도급업체 노동자들을 전직시켰다. 그로부터 정확히 2년 뒤인 올 7월, 또다시 하나로통신은 하나로테크에 소속된 노동자들을 다른 도급업체로 넘기려 했고, 이에 응하지 않은 노동자들과의 계약을 해지한 것이다.

이처럼 사용자 스스로도 잘 알면서 버젓이 ‘불법’을 선호하는 진짜 이유는 파견법상 무허가 파견업체를 통해서 파견노동자들을 사용하는 경우 처벌은 고작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솜방망이 처벌과 다름없다. 수백 명의 노동자를 싼값에 부릴 수 있는데, 벌금 1천만 원이 뭐가 두려우랴.

그런데다 최근 서울행정법원에서는 사용자들의 이 같은 불법 선호를 부추기는 판결까지 내놓았다. 앞서 언급했던 ‘인사이트코리아’란 업체를 통해 SK가 운영하는 물류센터에서 3∼8년 가량 불법파견 노동을 해왔던 지아무씨 등 4명을 SK가 직접 고용하지 않은 것이 정당한가를 묻는 재판에서 법원은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파견법에서는 파견노동자를 2년 이상 계속 사용할 경우 그 노동자를 사용업체가 직접 고용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면 SK에서 2년 넘게 파견노동을 한 인사이트코리아 소속 노동자들을 SK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파견법상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파견에도 그 조항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허가를 받지 않고 파견업을 한 경우, 해당 노동자의 고용의무에 대한 사법기구의 판단은 모두 엇갈리고 있다. 우선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2년 이상 근무를 했다면 사용업체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반면 중앙노동위원회는 “파견법에서 허용하는 26개 업무에 종사한 경우에 한해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7월, “파견대상 업무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무허가 파견이라면 사용업체가 직접 고용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상급심으로 갈수록 판결이 보수화되고 있는 셈인데, 결국 서울행정법원에 따른다면 법을 어긴 사용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만 낼 뿐 2년 이상 파견노동을 시킨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아도 되고, 묵묵히 일을 해온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그런데 법원은 판결문에서 이례적으로 스스로 내린 파견법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며 법을 개정해서 불합리한 상황을 없애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를 경우 무허가로 근로자파견사업을 하는 사람은 엄격한 법적 규제를 받지 않게 되고, 그게 따라 파견근로자의 법적 지위에 상당한 불안을 초래하게 된다는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덧붙여 법원은 근로자파견관련법에서 “법에 따른 허가를 받지 않은 파견을 사용한 경우에는 사용사업주는 일을 시작한 시점부터 파견노동자를 직접 고용한 것으로 본다”라는 독일과 프랑스의 사례를 함께 소개하면서 “입법적으로 명시적인 규정을 둠으로써 논란의 소지를 불식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재판부가 스스로 파견법 조항이 불합리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재판부가 법의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여 실제로 어떤 조건에서 일을 했는지 따지지 않은 점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인사이트코리아 소속 지아무씨 등은 자기가 속한 인사이트코리아가 아닌 SK 관리자로부터 직접적인 업무지시, 감독을 받아왔기 때문에 계약형태가 비록 ‘도급’일지라도 사실상 ‘파견’ 노동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순천향대 조경배 교수(법학)는 “재판부가 법률에 따른 자신의 판단이 부당하다고 인정하고 입법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얘기한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라면서도 “그러나 실질적인 근로관계를 따졌다면 사용업체(SK)에서 일한 그 시점부터 직접 고용된 것으로 본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법 개정에 나서야


앞서 언급한 올 국정감사에 제출된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모두 36곳의 무허가 불법파견업체가 적발됐지만 사용업체로 전원 직접고용된 경우는 7곳에 불과하고, 대부분 무더기로 해고됐다. 설사 직접 고용되더라도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으로 고용된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문제는 지금부터다. 법을 바꿔서 불법파견을 한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아직 법 개정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파견노동자를 포함한 비정규 노동자 보호방안을 논의하는 노사정위원회 비정규특위 활동은 노사 간 첨예한 이견과 공익위원 간 입장 차이로 지난해 7월 출범한 이래 1년 4개월이 넘도록 어떠한 보호방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올해 안에 보호방안을 담은 법 개정안을 제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다. ‘대선’에만 빠져 있는 정치권 역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더욱이 노동부는 “현장 제보 없이는 불법파견 적발이 어렵다”며 불법파견을 하는 노동자들의 제보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데, 이제 불법파견이라고 판정되면 해당 노동자는 모두 해고되는 판이니 누가 제보를 하려 하겠는가. 더 이상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사람을 기다려선 안 된다. 정부와 국회가 서둘러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 이정희 『워킹보이스』 취재편집팀장, goforit@kcw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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