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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변호사 박훈 이야기

소위 인권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그 명성으로 다양한 영역에 정치적·사회적으로 진출해 있기도 한 세월을 살고 있다. 그런 시대 흐름과 다른 결로 노동자의 투쟁과 함께 하기 위는 변호사들이 있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소속 법률원에는 그런 변호사들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중 유독스럽게 못 말리는 변호사가 있다. 변호사이기 전에 노동활동가인 금속노조 법률원 박훈 변호사를 만나 다혈질적인 삶의 얘기를 들었다.

 

탄광노동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다보니 박훈에게는 딱히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다. 66년 충남 보령의 성주탄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성주탄광의 생산이 줄어들면서 새로운 곳을 알아봐야 했다. 그렇게 찾아온 곳이 전남 화순탄광이다. 화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기까지 전남지역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0년 광주항쟁을 목격하게 된다. 광주 옆에 위치해 있는 화순은 광주의 직접적 영향 속에 있었지만, 이후 군대에 의해 광주가 봉쇄되면서 광주와 단절된다.

 

“날자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만... 5월 18일 이후였어요. 19일이나 20일이나... 동네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데 동네 주민들이 ‘난리가 났다. 빨리 집에 가라’ 이런 이야기를 해요. 군용트럭에 군인들이 앉아 있는 게 아니고, 민간인들이 앉아서 쑥쑥 지나가는 모습이 보여요. 집에 와가지고 ‘무슨 일이 있는 가’ 해가지고 화순 읍내를 나가봤더니만 경찰서가 뽀개져 있고...

화순탄광을 돌아 나오는 차를 보니까 총을 다 들고 있었어요. 시민들이 군용트럭을 탈취해서 화순탄광에 가서 총을 갖고 왔으니까. 군용트럭 일반버스 하여간 큰 차량들 이용해서... 그 차량에는 전부다 피였는지 빨간 페인트였는지 구분이 잘 안 가는데 ‘전두환 찢어 죽이자’라는 구호를 앞면에다가 쓰고... 굉장히 충격이 컸었어요. 마을 청년들이 차량에 같이 올라타려고 하는 것을 부모들은 말리고 울고불고 난리치고...”

 

광주가 무참히 진압된 후 사람들은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 침묵 속에서 박훈은 ‘무장공비에 의한 폭동’이라고 믿었고, 빨갱이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된다.

85년 전남대에 입학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재수를 하기 시작할 즈음 실천문학 창간호를 접하게 된다. 창간호에 실린 친일문학인들의 행적을 보면서 사회와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이 트이기 시작한다. 86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한 후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박훈은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렇게 학생운동을 시작하자마자 한 학기 만에 제적을 당하고, 결국 군 입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광주에서 방위를 받아요. 방위들 모아놓은 전투방위부대가 따로 있거든요. 그럴 때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요. 황당하더라고. 퇴근하고 밤새도록 데모를 하고 들어가고...

20일 동안 전개되는 것에 푹 빠져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껴요. 우리 해방구였어요. 가서 불 질러버리고, 포위해서 작살을 내버리고.. 어디가도 숨겨주고... 군복 입은 새끼들은 적이고, 군복 안 입은 사람들은 우리 편이고... 그거는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몰라요.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민중의 열기라는 것은 앞에 나서는 사람보다는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들이 진짜 민중의 바다예요. 어디가도 숨겨줘요. 없다고 그러고... 아니면 ‘씨발놈아 왜 들어와’ 그러면서 자기 오십년 역사에서 최초의 항거를 하는 사람들... 그런 거 보면서 ‘민중의 바다 속으로 숨는 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두려움도 없었지요.

광주에서 전투방위부대에 있다 보니까 데모진압훈련을 전문으로 해요. 충청훈련이라고 그래서... 전투경찰이 하는 것은 방패에 최루탄 들고 하는 것이고, 우리는 총 들고... 밤에는 데모하고, 낮에는 진압훈련 하고...”

 

87년의 격렬한 한가운데서 그런 이중적인 생활을 하던 가운데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87년 12월 12일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선거에서 (김대중이) 지니까 퇴근을 못하게 하고 충정훈련을 시켜요. 엄청나게 훈련시켜요. 완전 차단이에요. 그때는 아예 정보도 통제되고 충정훈련만 하니까 ‘이거 진짜로 진압하러 가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군부가 더 긴장했지요. 광주시민들은 긴장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동료들은 전부가 다 그쪽 지역 출신들인데... 우리들은 전부 다 암묵적으로 ‘진압부대로 나가면 총 거꾸로 돌린다’라고 명확하게 생각했어. 출동 싸이렌이 울려서 가는데... 실제 실탄 지급하고 중무장해서 나가는데... ‘이제 뒤지는구나. 내가 뒤지든 누가 뒤지든’ 결국 내 머리 속에는 ‘누굴 쏴 죽이고’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게 스물두 살 때예요.

게네들이 가짜로 출동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실탄을 지급하는 순간 끝이야. 저 새끼들도 우리가 쏠 수 없다는 거 알아. 위수령 검토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하던데.. 밝혀진 바는 없는데.. 하여간 우리는 출동을 했어요. 목적지까지 가기 전에 3분의2 지점에서 돌아왔어요.”

 

격렬한 87년과 88년을 보내고 난 후 시대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89년 학교에서 복학하라고 해서 복학을 한다. 그렇게 복학과 함께 다시 학생운동을 시작했던 89년부터는 운동진영 내부에 격렬한 사회구성체 논쟁과 노선분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독자적인 소수파 흐름을 만들어가는 와중에 닥쳐온 것이 사회주의권의 붕괴였다. 그 충격으로 많은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운동에서 떨어져 나가고 조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박훈 역시 그 충격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갈 데가 없어요. 사회주의가 망했는데 어딜 가요. 갈 데가 없는 깊은 충격을 받은 놈은 항상 가족으로 돌아와요. 아버지가 그때 정년퇴직을 해요. 아버지가 진폐 때문에 42kg로 뼈만 남았어요. 병원비 데기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졸업을 해서 간 게 동양매직이에요. 영업사원을 해요. 그때 짜증나니까 담뱃불로 손에 자해를 하기도 하고... 피곤한 삶이지... 그때 자본주의 참 잘 배웠어요.”

 

92년 동양매직 영업사원으로 입사해서 4년을 힘들게 다니다가 다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선택한 것이 사법시험이였다.

 

“운동세계로 돌아가고는 싶고... 선후배들 떨어져나가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프리랜서로라도 가야 되겠다’ ‘먹고 사는 문제 하나만큼은 해결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사법시험을 보기로 했어요.

서른한 살 때 처음 시험공부를 하는데, 시험공부 하는 게 너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전부 다 아는 거였어요. 법을 아는 게 아니고,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에 대해서 이미 워낙 공부를 많이 해왔기 때문에 부르조아 법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96년부터 시험 준비를 하기 시작해서 2년만인 98년 사법시험에 최종합격하게 된다.

 

“합격하고 나서 어디 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 노동조합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거든요. 김기덕이라는 사람이 노동조합에 들어왔다고 99년에 신문에 난 거예요. 그래서 ‘여길 가야겠구나’ 생각했죠.

찾아가기 전에 한 달 보름 동안 밤잠 안자가면서 고민했어요. 돈 많이 버는 변호사 짓거리 하다가 들어오는 건 일도 아닌데, 저기 들어왔다가 나가는 건 인생의 중대한 패배거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찾아가요.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하고 생각이 비슷해요. 그래서 같이하자 그랬어요. 내가 김기덕 원장한테 ‘평생 보스로 모시겠다’ 그랬어요. 그건 뭐냐 하면 ‘당신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으니까 당신하고 같이 가자’는 취지였거든요. 내가 하는 활동에 대해서 그 양반이 나를 제지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또 그 양반이 하는 활동에 대해서 내가 제지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서로 옹호해요. 중요한 동지를 만난 거예요.”

 

2000년 금속연맹 법률원장으로 있던 김기덕 변호사를 만나 연맹 간부로 활동을 하기 시작한 박훈의 인생에 큰 전환으로 다가온 것이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이었다.

워크아웃 상태에 있던 대우자동차는 2000년 하반기부터 희망퇴직 등으로 조합원들이 심각한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금속연맹으로 많은 상담이 오지만 결국 5천 명 가까운 이들이 현장에서 쫓겨난다.

2000년 말 경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에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투쟁기조가 강경해지는 속에 회사는 2001년 2월 8일 1700여 명에 대해 정리해고 통보를 단행했다. 그리고 지도부는 부평 상곡성당에서 농성을 하면서 정리해고 저지투쟁을 벌인다.

한 달 전국에서 부평으로 집중하면서 매우 격렬한 투쟁을 벌이지만 투쟁은 확산되지 못하고 3월 8일부터 소강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런 상황에서 법원에 제기한 것이 ‘노조활동 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이었는데, 한 달 후인 4월 8일 법원에서 이 신청이 받아들여지며 국면이 다시 바뀐다. 그러나 그 변화는 엄청난 폭력으로 돌아오게 됐다.

 

“경찰들이 다 싸고 있었거든요. 공장 안과 밖에 3만 명 정도의 병력이 부평을 싸고 있었거든요. 노동조합 사무실이 현장 안에 있는데 못 들어가게 했으니까.

3월 8일 노조활동 방해금지 가처분을 냈는데 한 달 동안 아무런 투쟁이 없을 때 그게 받아들여져 버린 거예요. 2월 8일부터 3월 8일까지는 열심히 싸움을 했고, 싸움이 안 되니까 내가 소송을 낸 거예요. ‘이거 갖고 들어가면 되겠다’ 싶은 거죠.

법원의 결정문도 있는데 자본이 그렇게 나올지 몰랐어요. 법원이 그렇게 판결했으니까 당연히 열어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막히는 순간 나는 선택을 해야 했어요. 다시 법원으로 쫓아갈 것이냐, 여기서 한 번 붙을 것이냐... 아무도 결정할 수 없고 내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사람을 300명 데리고 투쟁하는 현장에서 1시간 동안 고민을 했어요. ‘오늘 여기서 결판내겠다’고 결정했어요. 그건 명확한 불법적인 공권력 집행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했지요.

‘씨발놈들이 법원 결정문이 있는데도 지들이 가로막아!’ ‘죽지 않을 만큼 패라’고 그랬어요. 그때는 우리가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했으니까... 방패 뺏어 부셔 버리고, 헬멧 벗겨서 버리고... ‘노동조합의 업무를 방해하는 현행범 체포하라’고 그랬어요. 16명을 체포했는데, 전경뿐만 아니라 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들도 체포해버렸어요. 사람들이 경찰들 풀어주라고 그러는데 내가 다 거부했어요.

경찰들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 못한 것은 아닌데... 그게 나한테 평생의 한으로 남는데...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양쪽 도로가에 반으로 나눠서 웃옷 벋고 누우라고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하면 쉽게 진압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연와시위를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처음으로 연와시위 전법을 쓰게 된 거예요.

그렇게 들어올 줄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97명이 다치고, 4명은 장애2급을 받아요. 상상불허의 일들이 벌어진 거예요. 나도 현장에서 그대로 맞았는데 전경 애들이 나를 방패로 찍어도 별로 세게 찍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마구 찍어버리더군요. 도망가다가 떨어지고... 씨발....

내가 체포하도록 한 경찰들을 풀어줬으면 되었는데... 그게 내 두 번째 트라우마예요. 그 뒤로는 사람 많은데 가지를 못해요. 공황장애의 일종인데... 북적북적한 사람들 많은데 가지를 못하고, 출구가 없는데 가지를 못해요. 지하철을 못 타요. 아직도 피가 분수처럼 올라오는 꿈을 꿔요.”

 

대우자동차 투쟁 이후 계속 되는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박훈은 변호사뿐 아니라 노조간부로서의 역할도 함께 하게 된다. 발전노조, LG칼텍스,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GM대우 비정규직, 포항건설노조, 세원테크 등 무수한 투쟁에 법률지원이든 투쟁지원이든 결합하게 된다. 찾아가는 사업장에서 직접 조합원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기도 하고, 단순히 변호사로서 적당히 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싸우기도 했다.

그런 활동을 계속 벌이다가 지역에서 직접 노동자들과 소통하면서 기반을 갖고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금속연맹의 주요 기반 지역 중의 하나인 울산과 창원을 고민하게 되고, 대공장 중심으로 움직이는 울산보다는 중소사업장들이 크고 작게 있는 창원을 선택한다. 그렇게 2004년 금속연맹 법률원 경남사무소를 열고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쪽 지역적 특색을 보면 다양한 생각을 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요. 자기 작은 울타리 안에 아성은 있는데 터놓고 이야기 할만한 개인과 집단이 굉장히 드문 게 지역운동의 특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나 자기 사업장 내를 떠나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들이 크더라고요.

서울과 지역적 운동의 장단점들은 보이기 시작하는데... 서울의 단점을 치자면 부평초고, 장점을 치자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거고... 여기는 뿌리박고 있는 소나무이기는 한데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작은 생각을 갖고 자기 아성은 있는... 그게 사업장 기반을 갖고 있냐하는 큰 차이에서 오는 거예요.

기반이 없는 사람들은 그 기반이 없다보니까 의식이 여러 가지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기반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게 흘러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적다 보니까... 그것이 내가 여기서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예요. 사업장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세상의 중심이 자기네들 속인 거고, 부평초처럼 떠돌아 오는 사람들이 자기네 지지하냐 아니냐 하고 편 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건 부정적인 것보다는 나는 사람들이 자기 인식을 확대해나갈 수 있는 존재기반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역운동에 뿌리를 내린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사업장이 됐든, 아무런 사업장 기반이 없는 마을 주민들 속에 들어가 있든, 나처럼 법률적으로 어디 들어가 있든, 의사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지역주민과 만나는 의료센터를 만들든, 생태운동이든, 다양한 형태의 지역운동 속에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서울에서 할 때보다는 훨씬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4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박훈은 지역에 뿌리는 내리고 생활에 밀착한 운동을 하기 위해 좀 더 지역에 적응하는 기간을 갖고 있다. 창원으로 내려온 지 4년의 세월은 지난 20년의 세월과는 또 다른 호흡과 인내를 요구하는 기간이었다.

 

“나는 좀 더 생활에 밀착했으면 하는 생각이 강해요. 생활에 밀착한다는 게 웃기는 이야기 중의 하난데...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거든요. 맨날 술이나 먹고... 그게 의미가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월을 같이 갈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긴데... 세월을 같이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크고... 지금 굉장히 흔들리는 세월인데... 흔들리는 세월에 인생을 세워야 하는 순간에 와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난 내 20대가 불혹의 나이였던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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