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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이야기

50년 가까운 삶을 살면서 인생의 반은 비장애인으로 또 반은 장애인으로 살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장애인운동 20년, 장애인야학 15년을 힘겹게 해왔지만 야학은 거리에 쫓겨나 천막을 치고 있었다. 겨울의 천막교실에서 노들장애인야간학교 박경석 동지를 만나서 장애인운동 20년의 얘기를 들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자랐던 박경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족들이 서울로 떠나게 되며 힘겨움 삶이 시작된다. 79년 영남대에 입학했던 박경석은 가족과 떨어져 학교를 다니다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를 한다. 매우 어수선하고 살벌한 시기에 군생활을 한 후 복학해 다시 학교를 다니다가 83년 헹글라이딩 도중 사고가 발생한다. 그 사고로 흉추가 다치면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입게 된 후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비장애인들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애인문제 잘 모르고... 집에만 있었죠. 학교는 때려치우고... 돈도 없었고, 계속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들고... 장애를 입게 되거나 그러면 일반적으로 다 겪는 과정이에요. 힘들고 이런 것들이... 잠자고 텔레비 보고 이런 게 다죠. 일반적으로 집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거의 다 그런 생활을 하는 거죠.”

 

그렇게 20대 중·후반을 힘겹게 보내던 중 친구의 소개로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을 알게 돼 직업훈련을 받기 시작한 것이 88년이다. 그곳에서 두 명의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면서 장애인운동에 대한 인연이 시작된다. 안타깝게도 그 둘은 나중에 운명을 달리한다.

 

“그때 88장애인올림픽 거부투쟁을 했던 장애인단체들이 있었어요. 그때 투쟁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졸업생이에요. 그분이 장애인운동 하는 사람 조직할라고 와 가지고 사람들 만나고, 같이 술 먹으면서 밝히고 그러면서 운동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된 거죠. 그 사람이 박흥수라고 청계천에서 노점상투쟁 많이 하고, 장애인 생존권문제로 많이 투쟁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죽었어요. 그 형이 장애인운동에 대해서 가르쳐 줬던 거죠. 저랑 같이 입학한 사람이 정태수... 태수랑 나랑은 같이 훈련생이었고...”

 

이렇게 장애인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는 가운데 90년 장애인운동진영에서 중요한 양대입법투쟁이 벌어진다. 심신장애자복지법(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시혜적으로 만들어진 장애인관련 최초 법안이지만 장애당사자들에게는 실질적 혜택이 없었다) 개정투쟁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투쟁이 그것이다. 이 투쟁에는 장애인관련 모든 단체들이 달라붙어 공동투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이 투쟁을 통해 양대 법안이 만들어지고, 장애인단체들에서는 입장 차이에 따른 분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사상적으로 따지면 시혜와 동정으로 먹고사는... 상층부의 로비형태로 해결하려고 하는 그룹들이 있고... 철저하게 관변의 형태들이 있는 것이고... 장애인복지관이나 장애인관련 단체들이 대부분 다 그런 거죠.

그나마 시민운동 형태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단위가 하나 있었고... 주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있었고...

그리고 또 장애인문제를 좀 더 계급적인 문제로 접근하려는 세력들이 한 부류가 있었고...”

 

90년 양대 입법투쟁에서 집회라는 것을 처음 경험해본 이후 복지관 출신들과 함께 장애인운동에 대한 생각들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장애인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전국지체장애인대학생연합회(전지대련)이라고 해서 소아마비 경증장애인들 중심으로 운동했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죠.

또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출신들이 있어요. 큰 세력은 없고 직업훈련 받으면서 친목모임 했던 수료생들이 ‘싹틈’이라는 이름으로 동문회를 조직해서 친목모임 겸 대중운동한다 했던 사람들이 몇몇 있고... 흥수형이나 태수나 저, 이렇게 세 명 정도가 열심히 했고... 운동세력으로 따지면 세력도 아니고 그냥 몇 명 정도 있었던 거고...”

 

적극적으로 장애인 당사자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청년그룹들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강화하면서 여러 가지 장애인투쟁에 매우 열성적으로 달라붙는다.

 

“전지대련도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울림터’라는 조직을 건설해서 하다가 장애인운동세력으로 조직하자고 그래서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장청)를 만들게 됐어요. 그게 92년쯤 됐을 거예요.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가 조직되면서 급진적인 투쟁들을 많이 했어요. 편의시설문제 때문에 계단을 깬다거나... 생존권문제로 노점상싸움과 철거싸움에 많이 하고... 그게 최정환 열사, 이덕인 열사 싸움이죠. 장애인생존권과 관련된 투쟁들을 많이 했었어요.”

 

새로운 형태의 장애인운동이 활발해질 즈음 박경석은 뒤늦게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91년 숭실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해서 12년 차이나는 동기들과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이즈음 논의가 시작된 장애인야학에 대해서도 지원을 하면서 노들장애인야학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에서 서울지역 사업을 해보다가 조사를 해보니 장애인들이 교육을 많이 못 받았더라고요. 대중조직을 하기 위해서 ‘검정고시 야학을 해보자’ 그래서 92년부터 시작해서 93년 8월 8일 개교를 했죠.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에서 기획하고 조직했지만, 93년 8월쯤에 장애인한가족협회와 통합하면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전장협) 하부조직으로 교장도 파견하고 그랬어요.

장애인운동을 계급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세력들이 조금 남아서 대중조직은 장애인한가족 협회와 통합해서 전장협을 만들면서 지역투쟁이나 그런 것들을 쭉 한 거죠. 주로 야학을 만들고, 정신지체장애인 수용시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원봉사자 활동가조직을 만들고, 그리고 장애아동 공부방도 만들고, 그리고 노점상 투쟁을 하기 위해서 전국노점상연합회하고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형태로 만들어서 청계천8가 쪽에서 노점상을 통한 자립투쟁 이런 것을 하고... 생존권문제와 교육과 지역사업들을 많이 하면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가 쭉 있었던 거예요. 저랑 같이 있었던 흥수형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서울지부 회장하고, 태수는 조직국장하고...

저는 복지관 다니다가 취업 안 되고 그래서 다시 공부해서 91년 숭실대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어요. 대학 다니면서 태수가 야학 만드는데 같이 도와주고 교사 모집해주고... 조직국에 그냥 도와주는 사람으로 있었죠.

숭실대 다닐 적에 내 학번 위에 있는 학생들을 많이 꼬셔가지고 교사로 보냈다가 ‘교사가 힘들다. 죽겠다’ 그래가지고 ‘그럼 같이 교사하자’ 그래서 시작한 게 94년이에요. 93년에 야학 만들고 94년에 교사로 시작한 거예요.”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노들야학을 중심으로 장애인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95년부터는 전장협 조직국장을 맡게 됐고, 97년에는 노들야학 교장으로 임명되면서 활동은 더욱 왕성해진다. 전장협 차원의 다양한 투쟁과 사업을 벌이는 한편 97년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에바다 시설비리투쟁에 결합하면서 7년에 이르는 투쟁을 함께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왕성한 활동에도 사람과 재정의 어려움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던 전장협은 97년부터 장애인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DPI(장애인연맹)와의 통합을 논의하게 되면서 갈등이 일어난다.

 

“DPI는 명망가에 의해 이끌어가는 조직이었는데 대중조직화하자는 이해가 있었고, 전장협은 생존권투쟁들 때문에 활동가의 재생산문제나 재정문제나 이런 것들이 고민이 됐던 거고... 그래서 통합을 하자 이렇게 된 거죠.

97~98년 이때가 시민사회형태의 운동들이 굉장히 발전했던 시기잖아요. 김대중이가 정권을 잡고...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가 장판(장애인운동판) 내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크고 그러면서 시민운동적 형태의 기류가 굉장히 확장됐던 시기라서... ‘이런 방식의 운동이 의미가 있냐?’ 이런 문제부터 시작해서...

통합과정에서 전장협이 대중들을 조직하기 위해서 해왔던 사업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는 거죠. 장자추(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같은 경우도 장애인문제를 노점의 문제로 풀 수 없다고 그러면서 정리하고, 노들야학 같은 경우도 대중을 조직하기 위한 것들이었는데 교육서비스공간으로만 정리하려고 하고... 아래로부터 민주적인 운영, 교사대표도 선출하고, 학생회도 선출하고, 교장도 임명제였지만 자체적인 추천권을 갖고, 사업들도 충분하게 공유하면서 가는 이런 것들이었는데, 다 임명제로 바꾸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너희들은 가리키기만 열심히 해라’ 이런 태도였죠. 공부방은 돈 없다고 철수해 버리고, 자원봉사 활동가는 ‘너희끼리 알아서 해라’ 그러면서 없애버리고... 그런 식으로 정리해나간 거죠.

그래서 통합을 위한 활동가회의에서 혼자만 반대하고 나머지는 다 찬성했어요. 반대하는 과정에서 노들장애인야학은 분리되게 되었죠“

 

박경석은 DPI에서 주장하는 장애인 당사자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장애인 당사자주의를 그들은 외치는 것이고, 장애인 당사자주의의 핵심적인 것은 복지전달체계에 있어서 비장애인 전문가그룹을 중심으로 장악한 부분들을 장애인 당사자들이 장악해야 된다는 게 궁극적인 목표거든요. 복지전달체계를 장악하는 문제는 쉬운 방법으로 권력에 줄서면 최고 났죠. 정치집단에 줄을 서서 상층부랑 교감을 통해 임명을 해버리면 전달체계 장악이야 그런 식으로 해버리는 되는 것이기 때문에... DPI그룹에서 얘기하는 것은 장애인 당사자주의에 입각해서 우부터 좌까지 정치적으로 연대해서 장애인의 권리를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고...

RI그룹(사회복지사 의사 간호사 등 전문가 그룹)이라고 얘기하는 대리주의보다 당사자주의가 일정 정도 진전된 거는 맞죠. 장애인문제는 장애인당사자들이 기본적으로 서야 되는 건데... 이런 기본적인 문제를 전제로 해서 모든 정치적인 문제까지 모두 같다라고 얘기하면 굉장히 곤란한 거죠.

당사자주의로 해서 다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주의를 넘어서서 진보적인 장애인운동에 대한 규정과 실천들이 구성되어 져야 한다는 것이 저희들의 입장이죠. 복지전달체계에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복지전달체계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시장화 된다거나, 사회복지시설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다거나, 그래서 일어나는 시설비리문제나 인권의 문제들이 해결되어 져야 하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자기 목소리와 투쟁이 조직되지 않으면 그놈의 당사자주의도 여전히 동네 공원에 완장 낀 골목대장하고 무슨 다를 게 있느냐는 거죠.

장애인 당사자가 운영하는 장애인 사회복지시설이나 장애인 이용시설이나 장애인단체는 그런 부분에서 자유로운가? 장애인 당사자가 장애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들이 더 많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문제들로 장애인 당사자주의가 장애인운동에서 1차적인 중요한 목적이냐고 그러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외롭게 홀로 남은 노들야학은 에바다투쟁에 지속적으로 결합하면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에 대한 모색을 이어간다.

2001년 오이도 지하철역에서 수식형 리프트를 이용하던 장애인이 추락해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장애인 이동권문제를 중심으로 투쟁이 조직된다. 이 투쟁에 모였던 단체들은 오이도역 대책위를 이후 장애인이동권연대로 확대하면서 장애인버스타기투쟁, 지하철 선로 점거투쟁 등 매우 격렬한 투쟁을 4년에 걸쳐 벌이면서 저상버스 도입확대,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등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동권문제에서 많은 성과를 남기게 된다.

이런 이동권투쟁의 격렬함과 성과에 이어 장애인교육권투쟁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장애인투쟁은 새롭게 활성화된다. 이 투쟁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투쟁, 활동보조인 제도화 투쟁, 성남재단 등 시설비리 척결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아래로부터의 장애인대중투쟁으로 확산된다.

 

“생존권문제로 노점상으로 조직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장애인이 다 노점하지는 안잖아요. 노점상 생존권 문제를 걸고 얘기를 하면 거기 있는 당사자의 생존권문제는 제기할 수 있겠지만, 폭넓은 이동권이나 교육권문제를 갖고 제기하는 것하고는 파급력이 다르죠.”

 

이런 격렬한 투쟁 속에서 대중적 조직화의 문제는 이동권투쟁과 교육권투쟁이 다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동권투쟁은 주로 중증장애인을 중심으로 소수가 벌였다면, 교육권투쟁은 장애인 부모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력을 갖춰가면서 벌어지게 된다.

 

“예전에 이동권투쟁 할 때 이동권문제가 사회화되고 했을 때 비판받았던 것은 소수그룹의 선도투쟁이라는 거였거든요. 물론 선도투쟁의 문제도 있겠지만... 제가 장애인운동을 88년부터 접하면서 20년 있으면서 장애인들이 지금과 같이 조직되어진 역사를 보지 못했어요. 상시적으로...

보통 1년에 한 두 번 모여서 백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외치는 것이 다였는데, 요새는 하자 그러면 20명~30명은 나와요. 1년에 한 번 20명~30명 모이기 힘들었던 시절하고 상시적으로 1주일에 20명~30명 오는 지금을 비교하면, 교육권연대나 노동운동에서 몇 백 명에서 만 명이 오는 이런 문제하고는 다른 평가를 해야 한다고 봐요.

저는 투쟁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대중적 전술은 100~200명이면 충분히 조직하고 투쟁해낼 수 있다라고 생각해요. 100~200명이 감옥에 갈 각오로 싸우면 세상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머지 부분에서 자립생활센터나 전국적으로 조직되는 속에서 장애대중들이 자신의 인권의 문제나 권리의 문제를 알아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은 있죠.”

 

93년 당시 5~6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노들야학은 현재 학생 37명과 교사 17명의 규모로 커졌다. 그동안의 졸업생도 170여 명에 이른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참여와 호흡을 중요시했던 노들야학은 학생회, 교사대표들과 함께 공동운영의 기풍을 만들어 오고 있다.

 

“(학생회나 교사대표 선출 같은) 선거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소통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봐요. 충분하게 장애대중과 호흡하고 알려나가고 이야기 하면서 조직해 나가는 거죠. 투쟁사업도 바쁘고 그러다보면 딱딱 지침이 떨어져가죠. 장애대중이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전혀 모르고 들어오고.. 노들야학은 검정고시를 배우러 온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이 갑자기 운동의 주체로 서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충분한 과정과 소통과 교육이 동반되어져야만이 장애대중이 아래로부터 튼튼해지는 것인데... 그냥 내리꽃고 이렇게 하면 활동가들 몇몇은 잘 해낼지 몰라도 아래로부터 대중들이 동참하고 그럴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거든요. 그럴 수 있는 터전들이 별로 없어요.

검정고시라는 교육을 제공하지만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들이 주체로 설 수 있고 참여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끝임 없이 조직하는 거죠. 맨날 만나고, 술 먹기도 하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교육도 하고 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과정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에요.”

 

“검정고시 야학으로만 우리의 전망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사회를 접해보지 못한 장애인들이 많이 있고 이것들을 사회화시켜나가는 과정, 단순한 사회화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인간을 자본화시키는 교육들을 일정정도 거부하려는... 이들이 알지 안 알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의 논리를 지향하지 않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문제를 저항하기 위한 목적의식적인 문제들이 있어요.

그래서 검정고시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실천투쟁들도 많이 해요. 이동권투쟁이나 교육권투쟁이나 활동보조인투쟁에서 핵심적인 사람들은 노들야학출신이거나 학생들이니까... 이들이 다른 모든 영역에서 진보적이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장애인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2001년 이후 벌어진 활발한 장애인투쟁의 성과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다. 2007년 본조직을 건설을 전후해 법 제정투쟁만이 아니라 전국 각 지역에서도 활발한 투쟁들이 이뤄지고 있다. 박경석은 이런 흐름이 좀 더 진보적이고 계급적인 장애인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98년 통합하면서 혼자 남게 되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제는 10년이 됐고... 이제 제대로 건강하게 투쟁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서 잘할 수 있도록 해야죠.

조직적으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장애인운동영역에서 반자본운동으로 가치를 바꿔나가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자본주의 가치가 관철되는 한 장애인들은 살아남지 못하는, 살아남더라도 시혜의 차원에서 언저리에서 있을 뿐이에요. 효율과 속도와 합리성과 이런 거 따지면 경쟁하지 못하죠. 이들이 경쟁의 논리 속에서 시혜의 언저리에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사회의 가치 있는 존재로서 살아갈 것이냐는 다른 문제이거든요. 그런 가치영역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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