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대한이연 양선배 이야기

조합원 200여 명 정도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금속사업장에서 10년이 넘도록 노조 상근간부를 하고 있는 대한이연의 양선배 동지를 만났다. 10년의 상근간부 활동은 일반적으로 노조관료적 사업에 빠져들던지 아니면 끝없는 업무와 투쟁들 속에 지켜서 일선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양선배 동지는 “옛날처럼 재미는 없지만, 지치다는 생각은 별로 안해요”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양선배는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대전과 충남지역을 떠나지 않고 살아오고 있다. 공고를 졸업하고 한국타이어에 취업하면서 공장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공고출신으로서의 첫 직장생활은 대학 진학에 대한 자극을 줬다.

 

“공고 다닐 때는 대학 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고... 한국타이어 들어가서 일을 하는데 대학 나온 사람들이 월급을 더 받더라고요. ‘저 사람들 하고 나 하고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씨발 왜 대학 나왔다고 월급을 더 줄까?’ ‘대학, 가보지’ 하고 간 거예요.”

 

그렇게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공부해 93년 한밭대 금속학과(야간)에 입학하게 된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생활이 그런대로 재미있었다는 양선배는 96년 현장활동과 함께 과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매우 활발했다. 대학을 졸업해서는 “공부 한 김에 더 해보자”며 대학원에 입학해 2년 6개월 동안의 석사과정도 밟게 된다.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 그의 인생에 전환이 오기 시작한 것은 94년 6월 대한이연의 모회사인 한국이연에 들어가게 되면서이다. 한국타이어를 다니고 있을 때 아는 선배가 한국이연이 병역특례사업장이라며 소개를 해 줘 병역특례로 입사하게 된 것이다.

 

“내가 들어오는 해쯤에 민주집행부가 섰죠. 민주집행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학출들이 들어왔다 나왔다 했고, 지금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리고 병특이 한 70명 가까이 있었는데, 인원이 하도 많으니까 병특모임이라는 게 있었어요. 부서별로 조직이 있고, 전체 회장도 있고... 그때 대전지역 병역특례연합회도 만들고... 그런 사업들을 쭉 했었죠. 그런 활동 쭉 하고 있었고, 노동운동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선배가 여기 다녔는데, 그 선배가 병역특례 회장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어떻게 하다가 총무도 하고 회장도 이어받았죠.

병특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노동조합에 적극적이었어요. 저는 처음에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받은 교육 때문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는데, 병역특례 활동 쭉 하고, 노동조합에 있는 사람들 하고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 나이 많은 아저씨들한테 관리자들이 무시한다거나, 이런 것들 보면서 바뀐 거죠.

병역특례모임 회장을 맡게 됐고,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청년부장 역할을 95년부터 맡게 됐어요. 청년부장이라는 게 원래 없는 건데 만든 거죠. 그때부터 간부생활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거르고 하고 있어요.”

 

자동차 부품업체인 대한이연은 89년 만들어졌지만, 50년대 만들어진 모기업 한국이연으로부터 하면 꽤 오랜 세월 운영되던 회사였다. 양선배가 한국이연에 입사하던 때는 이미 한국이연이 몇 년간 법정관리 상태에 있었다. 74년에 만들어졌다는 노동조합은 오랜 기간 친사측세력에 의해 장악돼 오다가 90년대 중반 노민추 세력에 의해 처음 민주노조가 들어선 상태였다.

민주노조는 현장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합원들의 열망을 안고 매우 열성적으로 활동을 벌이며 기반을 조금씩 다져간다. 그런 과정에서 양선배와 같은 젊은 병역특례 조합원들의 열정이 노조활동에서 주요하게 작용했고, 노조간부들의 눈에 띄게 된 양선배는 입사 이듬해인 95년에 노조 청년부장을 맡은데 이어 97년 신임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사무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때 사실 뭔지도 제대로 모르고 했죠. 핵심들이 내부적으로 ‘제 시켜도 관계없겠다’고 판단을 했나보죠. 그러니까 시켰겠죠. 현장에서 활동력이 있었으니까 집행부가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회의할 때 얘기하고... 그때는 많이 다혈질이었어요. 현장투쟁이나 이런 것도 좀 하고, 여기저기 많이 뛰어 다녔어요. 그때는 뭣 모르고 열심히 뛰어 다녔죠.”

 

“현장에 문제점이 발생하면 쉬는 시간에 조합원들 소집을 해서 ‘부서에 이런 이런 문제가 있다’ 쭉 얘기를 하고, ‘이 문제가 비단 그 사람의 문제냐. 누구든 찍히면 잔업을 안 시킬 수 있는 거 아니냐. 이건 문제다’라고 서로 공유를 하고,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라고 물어보죠. 그러면 조합원들이 ‘가서 얘기를 해라’ ‘어떻게 하자’ 얘기를 하죠. 그러면 요구를 명확히 걸죠. ‘부서 관계자는 명확히 사과하고, 이거에 대해서 잘못된 것은 고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부터 잔업거부 하겠다’ 그리고 잔업거부 들어가는 거예요. 잔업거부 들어가면 부서에서 요구가 올 때도 있고, ‘부서장 처벌해라’ 같이 회사를 상대로 얘기해야 하는 큰 사안 같은 경우에는 회사에서 전무가 직접 오는 경우도 있어요. 내부적으로 그런 것들이 해소되면 잔업 풀고... 그런 식으로 투쟁을 하는 거죠.”

 

조합원과 함께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현장투쟁의 기풍 속에 민주노조는 점차 기반을 다져가지만 현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이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 한 번은 97년 회사통합 과정이었고, 또 한 번은 98년 정리해고제 도입에 맞선 민주노총 총파업 과정이었다.

 

“원래 2공장이 한국이연이었고, 1공장이 대한이연이라는 회사였어요. 대한이연은 한국이연의 자기업이었는데, 자기업이 모기업을 합병해 버린 거죠. 대한이연에는 노동조합이 없었고, 여기는 노동조합이 있었고, 합병과정에서 노동조합 승계문제, 고용승계문제 갖고 많이 싸웠죠.

......

싸움을 크게 했는데, 나중에 애매하게 꼬인 부분이 있었어요. 재입사를 해야 되는 이런 거였거든요. 노동조합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은 재입사는 안하겠다고 버티고 있었고, 나머지는 회사가 작업을 해가지고 대부분 재입사를 해버린 거고... 그러니까 노동조합 지키는 사람들만 몇 명 남아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게 끈질기게 해가지고 해결됐어요.”

(완강한 투쟁의 결과 노조승계 단협승계는 쟁취했지만, 결국 재입사 형식으로 대한이연에 통합된다.)

 

“정리해고법 국회에서 통과되고 나서 민주노총에서 총파업을 때렸거든요. 회사는 ‘불법파업이다’ 그러면서 못나가게 막고, 노동조합은 ‘파업 가겠다’ 그러면서 싸웠어요. 그러면서 회사의 입김이 현장에 많이 작용한 거죠. 회사가 ‘불법파업이다. 나가면 징계 하겠다’라고 공고도 붙이고 막 이랬죠.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갔어요. 일을 한 건 아닌데, 사람들이 전부 숨어버렸죠. 오후에 파업을 때렸는데, 70명 정도 모이고 나머지는 전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겪은 후 노조간부들은 조합원과 하는 활동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현장기반을 굳게 다져나가기 시작한다.

 

한국노총 사업장이면서 96~97년 노동법 개악에 맞선 민주노총 총파업에 함께 했던 대한이연노동조합은 그를 이어 97년 민주노총 가입을 결의하게 된다. 이런 과정들 속에서 대한이연 노조간부나 활동가들에게 지역연대활동은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된다.

 

“그 당시 지역에 분위기는 ‘대한이연 없으면 교육이 안된다’였어요. 교육이나 연대투쟁 이런 데는 굉장히 많이 끌고 다녔죠. 그런 데를 많이 다녔기 때문에 학습이나 이런 거는 자연스럽게 됐어요. 정치학습을 따로 시킨다거나 이런 건 없었지만, 연대투쟁이나 밖의 교육이나 이런 거는 간부들 대의원들 거의 다 가서 듣고 했기 때문에 많이 배웠어요. 그렇게 한 20명 정도 움직였어요.”

 

97년부터 노조 사무장으로 본격적인 노조활동을 벌이기 시작하던 중 우연치 않게 노동안전관련 상담을 하게 되면서 이후 근골격계투쟁 등 노동안정활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98년쯤엔가 어떤 사람이 의뢰가 들어왔어요. 한국타이어 다니는 사람인데 전신마비가 됐어요. 회사에서 산재처리도 안 해주고 내쫓기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이것 좀 도와 달라’ 그래서 그 사람 산재처리 하러 서울에 왔다 갔다 하고, 원진병원(원진녹색병원) 왔다 갔다 하고 그러면서 노안(노동안전)에 대해 알게 됐죠.

그렇게 하다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건 2002년부터 근골격계 질환투쟁이었어요. 그때 (금속)연맹에서 근골격계 조사사업을 했었어요. 조사사업을 쭉 하고 ‘근골격계 질환이 심각하다’ 이런 것들이 나와서 사업을 시작하게 됐죠. 회사랑 원진(원진녹색병원)이랑 공식적으로 조사를 하고, (유소견 의심) 나온 사람들 서울 원직병원 직접 데리고 가서 검사도 받고, 그렇게 하다가 지부(금속노조 대전충남지부)차원에서 집단요양투쟁을 했죠. 그때 한라공조, 대한이연, 캄코, VDO 이렇게 해가지고 집단요양투쟁을 했죠.

지역차원에서 공동투쟁하자 그래서 공동으로 다 (집단요양신청을) 집어넣기로 했는데 시기가 잘 안 맞았죠. 그러면서 집어넣는 건 개별 단사로 됐을 거예요. 시기는 약간 약간씩 달랐지만 투쟁은 같이 했죠. 그렇게 하면서 거의 대부분 다 (산재)승인 났어요.”

 

2003년 전국적으로 번진 근골격계 투쟁은 현장 노동자들의 심각한 건강실태를 드러낼 뿐 아니라 그 원인으로서 극심한 노동강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하면서 투쟁이 발전한다. 그리고 마산-창원지역과 대전-충청지역은 현장 유해요인조사를 위한 지역조사단 구성을 위한 공동투쟁을 벌이며 활발한 활동이 진행된다.

 

“캄코, VDO, 대한이연이 같이 지역조사단을 구성하고, 한라공조는 따로 하고, 유성도 따로 하고... 근골격계 유해요인조사가 법적으로 만들어지고 나서 ‘이걸 우리가 하자’ 이렇게 된 거고, 마창(마산, 창원)에서 먼저 진행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에 대해서 교육받고, 회사한테 요구를 했어요. ‘유해요인 조사사업을 노동조합이 한다’ 이걸 갖고 싸운 거죠. 회사는 자기들도 같이 하자는 거였고, 우리는 ‘안된다. 니들이 들어와서 제대로 돌아가겠느냐’ 그거 갖고 싸운 거죠. 그래서 결국 노동조합이 하는 걸로 해서 각 지회마다 3명씩 상근할 수 있는 조사단을 꾸리고, 각 부서마다 현장개선위원들 뽑고 그래서 같이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진행한 거죠. 그래서 보고서 낸 거고, 보고서 가지고 현장개선이나 이런 거 요구하고, 그리고 지부교섭에서 휴게시간이나 이런 거 요구하고... 이렇게 간 거죠.

처음의 요구는 지부운영위에서 결정해서 ‘이러 이런 것들을 (단사) 산보위에 요구해서 따내고, 지역조사단을 꾸리자’ 이런 거였어요. 큰 틀에서 보면 공동요구이기는 한데, 조사단을 만드는 과정까지는 개별싸움을 했고... 그 대신에 대한이연이 제일 먼저 뚫었고, 캄코를 쫓아가 가지고 캄코를 작살내서 캄코를 뚫었고, 그 다음에 VDO 쫓아가서 VDO 뚫었고... 그런 방식으로 했어요.”

 

2002년부터 준비해서 2003년 집단요양투쟁과 지역조사단 구성투쟁, 2004년 현장 유해요인조사, 2005년과 2006년 휴게시간 확보를 통한 노동강도 저하투쟁으로 근골격계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조사사업은 현장 설문조사부터 해서 면접조사 이런 것을 다했죠. 조합원들의 의견을 받아서 개선요구안을 다 잡았죠. 현장에서 관심을 많이 가졌었던 것 같아요. 후속조치로 지부 공동요구에 그것을 넣고 싸운 게 부족해서 그렇지... 현장개선, 작업개선 이런 건 실제로 많이 됐는데, 노동강도를 낮추는 휴게시간 문제나 생산량을 다운시키는 문제는 굉장히 에로사항이 많았죠. 2004년에 조사사업을 하고, 2005년에 휴게시간 확대를 요구했는데 못 땄죠. 그래서 2006년에 휴게시간을 땄죠. 그때 혹서기 중심으로 10분 연장인가 그랬을 거예요.

회사가 노동강도를 제외하는 나머지 현장의 문제들을 거의 다 들어줬어요. 웬만한 건 다 개선했어요. 실제로 노동강도에 대한 문제를 접근하지 못했던 건데... 그거를 휴게시간의 문제로 요구를 했던 건데... 2005년에는 회사가 작업시작 전 체조시간 5분을 준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그건 못 받는다. 그거 받으면 오히려 꼴이 더 이상해진다’ 그래서 안 받았죠. 2006년 또다시 요구를 해서 혹서기 휴게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따냈죠.”

 

이 와중에 대전 충청지역에서는 하이닉스-메그너칩 사내하청지회를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투쟁이 몇 년 간 핵심투쟁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에 맞서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한 전국투쟁과 지역투쟁이 매우 격렬하고 완강하게 진행된다.

 

“2004년 10월에 하이닉스-메그너칩지회가 만들어졌고, 12월 24일 전원 계약해지 당했고, 그러면서 투쟁이 시작됐죠. 그래서 간부들 투쟁 좀 있었고, 지부총파업 결의하고,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총파업 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쭉 하다 올해 개판으로 끝났죠. 많이 싸우고, 많이 다치고... 그게 지역에서는 가장 큰 투쟁이었죠.”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청년부장->사무장-“노동안전부장->부지회장-”노동안전부장_사무장’으로 이어져 오는 노조간부 활동에는 양선배의 왕성한 활동력도 작용했지만, 새롭게 충원되지 않는 활동가의 문제도 있었다. 쉽게 풀리지 않는 이 문제에 대해 대한이연은 노동조합과는 독자적인 활동가조직으로 현장위원회를 구성하면서 현장의 자발성을 유지하고 활동가들간의 소통체계를 만든다.

 

“금속노조 만들어지고 나서 간부나 대의원들 동원이 굉장히 많아졌기 때문에 실제로 대의원을 안 할라고 해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지회들도 그런 애로사항 많이 있을 거예요. 열심히 싸운 데들은 간부기피현상이 두드러질 거예요.

현장투쟁보다는 밖으로 동원되고 나가는 게 굉장히 많으니까 지치고 힘들고... 그러면서 현장에 대해 놓치고 가는 것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안하면 안 되는 투쟁이기는 했지만, 밖의 연대투쟁에 치중하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2003년부터는 간부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활동가층이 얇아졌다기보다는 신입 조합원이 없으니까 맨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거죠. 간부 했던 사람이 대의원하고, 대의원했던 사람이 간부하고... 고민은 늘 있죠. 그런데 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한정적이고...

저희 지회 같은 경우에는 30명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 30명 중에 간부하고 대의원하고 그 속에서 거의 다 해요. 어떻게 보면 220명 조합원 중에 30명이면 적은 숫자는 아니예요. 그래도 저희들이 판단했을 때는 한정적이니까 힘들죠. 간부 안 맡는 사람들도 대충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같은 경우는 현장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어서 현장위원회에 전부 결합하고 있기 때문에 웬만한 사업들은 같이 하니까 힘들죠.

현장위원회는 부서별 활동가 조직이죠. 대공장 현장조직이라고 보시면 돼요. 부서별 대표도 있고... 현장위원회로 공식화된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전에는 선거모임 비슷하게 하기도 하고, 연대투쟁실천단으로도 따로 있었고 그랬는데, 부서별 활동가들이 나눠져 있던 것을 한꺼번에 모아버린 거죠.”

 

그동안 회사와의 크고 작은 투쟁 속에 달려온 대한이연노조는 최근 회사는 구조조정 공세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희망퇴직을 중심으로 한 회사의 공세와 여러 가지 양보교섭 요구에 대해 노동조합은 강경한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회사가 계속 적자가 나고 있는 상황이고, 올해도 적자가 예상되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가 ‘희망퇴직을 하겠다’는 얘기를 했죠. 그래서 우리는 ‘희망퇴직 못 받는다’ 그래서 3월에 투쟁을 했어요. 파업하고 한 달 정도 싸웠죠. 거의 백지화시킨 것이나 다름없는데, 임단협투쟁 하면서 노동조합에서는 ‘(희망퇴직) 철회 갖고는 안 된다. 회사가 발전전망이나 이런 것을 명확히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서 2차 구조조정투쟁이 시작됐죠. 회사는 ‘구조조정 안하면 절대 안 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노동조합은 ‘발전전망 내라’ 그러면서 싸웠어요. 그러면서 또 희망퇴직이나 이런 부분을 회사가 얘기했고, 노조는 ‘희망퇴직을 포함해서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 얘기를 했고, 회사가 ‘발전전망을 도저히 낼 수 없다. 이제 청산이다’ 그래서 2차 구조조정 투쟁이 마무리가 됐죠. 지금은 회사가 ‘종업원지주제 하자’고 나와서 그게 진행 중이죠.”

 

쉼 없이 달려왔던 10여 년의 노조활동 속에서 정규직 노조간부인 양선배는 민주노조의 정규직 중심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이 마찬가지겠지만, 비정규직투쟁에 대해서 투쟁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비정규직투쟁에 중심을 둬야 하는데, 말로는 그렇게 하는데, 실제로 파업이나 이럴 때 보면 그런 부분들이 많이 부족하죠. 그런 부분이 안타까운 점이 있죠.

제가 보기에는 비정규직 동지들이 민주노총을 바라보는 시각이 옛날 한국노총 때 노민추를 하던 사람들이 한국노총을 바라보던 시각하고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떻든 기득권을 갖고 있으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