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르포 2…난민촌의 한국인들

corinalis님의 [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난민촌 르포 1] 에 관련된 글.

 

(지난 주말 카렌족 난민촌 르포에 이어 2편을 계속합니다)
이렇듯 우리와는 너무나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미 카렌족 난민촌에 9년째 꾸준히 방문하며 끈끈한 우정을 쌓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치과의료 봉사단이 중심이 된 ‘라파치과봉사단’이지요. 애당초 서울 성북지역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한 의료인들로 구성된 봉사단은 80년대부터 낙도와 꽃마을 등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벌여왔는데, 90년대부터 그 범위를 전 세계 오지로 확대시킨 것입니다.
르포 1편 보기 - 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르포 1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형순 치과원장(54)은 “설날만 다가오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고 합니다. 치과팀만 20명(치과 전문의사 9명에, 치기공사 5명 그리고 간호사 6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단이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야 하기 때문에 설 연휴 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카렌 난민촌으로 벌써 만 9년째 빠짐없이 찾아온 이들은 올해도 역시 2월4일부터 9일까지 5박6일간 이곳 캠프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규모로만 보면 치과 종합병원 한 동이 전체가 이동했다고 보면 된다. 치과 장비를 이동하기 위해 비행기 한대를 전세 내듯이 와야 했습니다. 이들은 5박6일 동안 매일 1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고, 100명 이상에게 틀니를 제공했으며 언청이 수술과 각종 기초 수술을 포함한 다양한 의료활동을 펼치시더군요.

▼한국인들

상황은 말도 못하게 열악하지요. 먼지가 풀풀 날리는 데서 수술해야 하지만, 예상외로 수술 경과가 깨끗한 병원보다 훨씬 더 좋다고 합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언청이인 꼬마이군요. 전문용어로 ‘선천성 상구순파열’이란 이 기형은 어디서나 자주 발생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 듭니다. 태아로 있을 때 언청이인 경우 지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술 기회도 자꾸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6.25를 전후해서 언청이 수술에 대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고 한 의사분이 전합니다. 6.25 때 미국의 군의관들이 한국에 와서 엄청나게 많은 언청이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자의에 의한 것도 있지만 도망가는 아이들을 소 잡듯 로프로 묶어놓고 엄청나게 많은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시술법이 몇 가지 있다고 하는군요. 슬픈 이야기 입니다.


가장 젊은 선생님은 서울대 치대 구강외과 이지호 선생님(28ㆍ 레지던트)이셨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벌써 수 차례 해외 봉사활동을 나가셔서 그런지 아주 능숙하게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시더군요.


5박 6일 동안 끊임없이 틀니를 만드셨던 치기공 소장님들이십니다. 국내 치과 선생님들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직접 모습을 뵈니 사실 너무나 많이 놀랬습니다. 과연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반성의 느낌이 절로 나오더군요. 너무 헌신적인 모습에, 과거 “치과의사들 돈 많이 버니까 당연한 것 아냐”하는 편견도 싹 사라지더군요^^

밤에 난민촌 아이들에게 영화를 상영해주는 모습입니다. (삼각대가 없어 난간에 카메라를 걸쳐놓고 4초간 노출을 준 성과물입니다. 아! 카메라는 파나소닉 LC-5 였습니다. 언덕까지 아이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는데 모두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난민촌 아이들은 밖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신 문물을 접할 기회도 완전하게 봉쇄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영화를 상영한다는 말에, 적어도 500명이 넘어 보이는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4일간의 상영된 영화는 ‘슈렉1, 2’ 그리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마지막 날이 동남아를 휩쓴 ‘쓰나미’에 대한 기록 영화였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광경이었습니다. 이 곳은 한마디로 세상의 끝이라고 불릴 만한 공간입니다. 버마라는 제3세계. 버마는 북한과 함께 가장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나라라고 불리고 있지요. 그것도 버마라는 나라에서 자치권조차 갖지 못한 민족이 태국에 쫓겨와서 난민촌을 꾸린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거지요. 이 보다 더한 세상의 끝을 거론하라면, 도대체 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어디를 들 수 있을지 난감할 정도입니다.

이 땅에 동아시아의 끝에 자리한 한국인 선교사들과 치과 봉사 단원들이 들어와 있고, 그리고 이들이 틀어주는 영화는 헐리우드에서 만든 최신의 가족오락 영화라는 사실입니다. 슈렉을 함께 보면서 아이들이 어떤 영감을 얻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후일 버마족에 대항하는 전사로 키워질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운명에 대해서, 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꿈을 심어줘야 할지 누구도 확언하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쯤에서 ‘닥터 사이먼’ 이라 불리는 이 난민촌의 지도자를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카렌 난민을 이끄는 정치적인 지도자는 적지 않지만 정신적 지도자는 바로 ‘사이먼 목사’ 하나 뿐입니다. 신학박사 출신으로 일찍 근대화한 카렌족이었기 때문에 안락한 인생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20년 전 버마 군부의 카렌족 탄압을 지켜본 후로는 스스로 난민이 되기를 결심하고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멜라 캠프에서만 16년을 살아온 그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적잖은 고생을 겪었지만 전 세계로부터 소수민족의 인권을 지키는 성직자의 표상으로 부각했습니다. 그는 미국 침례회가 수여하는 제2회 인권상 수상자이지요. 제1회 수상자는 노벨상 수상자인 투투 남아프리카 성공회 주교였다고 하네요.

그는 맬라라 캠프 안에는 과투레이 신학교 운영하면서 미래에 카렌족을 이끌 지식인을 양성하는데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이먼 목사와 신학교를 찾아 끊임없이 카렌족 젊은이들이 이 곳에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10명의 교사와 1백여명의 학생이 4년 과정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버마가 민주화 되는 날 카렌족은 다시 자신들의 땅인 버마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연신 한국인들의 봉사활동에 대해 최대한의 감사의 표현을 한국민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생활에 제약이 많은 난민들이기 때문에 한국 치과의사들의 방문을 너무나 고맙고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 한국인 당신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이런 일을 계속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고 카렌족은 한국인들처럼 꼭 역경을 극복해 내겠다.”
사이먼 목사는 ‘버마의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88.8.8운동을 거론했습니다.

자 이제 이야기가 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 카렌족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과거에 이들이 전혀 기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웅산 수지 여사를 기억하지요?

아웅산 수지 여사입니다. 88년 ‘버마 랭군의 봄’의 주역으로 버마 민주주의의 상징이지요.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인 만큼 이미 국제적인 인물이지만 가택연금을 반복해 가면서 어느새 버마 군부와 싸워온 시간만 20년이 흘렀네요. 국제적인 관심이 얼마나 지속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버마의 군부 독재에 대해서는 독자님들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줄이도록 하겠습니다.(1990년 버마 총선에서 82%나 넘는 득표율로 압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이양을 거부하는 버마 군부에 의해 끊임없이 탄압 받고 있습니다. 버마식 사회주의가 실패한 버마는 네윈 장군이란 분이 일당 독재를 해왔는데,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화 세력에 일단 네윈 장군이 실각하기에 이릅니다.  88.8.8 이란 버마 민중의 저항이 본격화 된 날로 이날을 중심으로 사망한 버마 시민들이 1천명을 넘는다고 하네요)

▼전쟁의 상처
  
전쟁의 상처입니다. 국경지대를 넘어오면서, 발생한 지뢰 피해자들이 치료소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카렌족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종교 갈등과, 민족 갈등과, 게다가 민주주의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사이먼 박사의 말대로, 버마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날 카렌족이 버마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민족 문제가 풀리는 첫번째 지름길이 되겠지요.

우리 역시, 이념 문제와 지역갈등 문제 그리고 민주주의 문제를 고단하게 겪어 왔습니다. 때문에 이들 동남아시아의 현실이 남의 일 같이 않고 애틋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꺼낸 김에 두 가지 이야기를 첨부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뱀발이지요^^

매솟 지역구에 출마한 타이락타이 당 후보화 함께 포즈를 취한(?) 태국의 탁신총리(왼쪽).
민주주의 여망이 강해서 그런지 매솟에서는 야당인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태국에 자리하고 있는 난민촌이니, 태국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옳는 수순 같습니다. 제가 태국을 방문했던 2월 6일은 태국의 총 선거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태국이란 나라에 대해 여러분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동남아시아의 최강국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태국의 수도 방콕은 실질적인 동남아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었고, 특히 태국의 바트화가 갖고 있는 파워는 상당해 보였습니다. 나라 이름부터 태국(泰國), 큰 나라 아닙니까.

그런 최근의 태국의 정치에 대해서 설명을 잠깐 한다면, 수십 번의 쿠테타를 거치면서도 차근차근 진행해 왔던 태국의 민주주의가 약간 정체한 느낌입니다. 현재 태국 수상은 ‘탁신’이란 분입니다. 아주 논쟁적인 지도자이지요. 제2의 마하티르 라는 호평이 있는가 하면, 필연적으로 파쇼, 포퓰리즘 이라는 비판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가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선 까닭은 태국고위 경찰 출신으로, 이후 통신과 석유업체를 거느린 태국 최대의 재벌로 부각한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이른바 정경유착의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특유의 정치력으로 중산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당을 이끌고 있는 현역 정치인입니다.

이번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탁신이 이끌고 있는 ‘태국을 사랑하는 당(TRTㆍ일명: 나의사랑 태국당)은 전체 500석 가운데 375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최초의 단독정부라고 하는군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2001년 집권이후 눈에 띄는 경제성장을 이끌고, 강력하게 마약을 퇴치한 공로를 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남부 무슬림들과의 갈등과 소수 민족들과의 눈에 보이는 대치 국면도 있지만 중산층 이상 태국인들의 탁신에 대한 지지는 압도적입니다.  

그의 포퓰리즘은, 얼마 전 그가 잉글랜드 프로축구 명문클럽 리버풀의 지분을 곧 인수한 뒤  태국 축구팬들에게 그 주식을 나눠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단한 포퓰리스트이지요. 반대로, 마약 퇴치를 위한다고 20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을 사법적 절차 없이 사형시킨 것으로도 유명해졌습니다.

그 덕인지 정말 태국에서 마약이 싹 사라졌습니다. 이쯤 되면 극우적인 정치인으로 불러도 될 것 같은데, 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왜 인기를 끄는 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말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관심을 갖고 좀 지켜 보시죠.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이지요.
바로 카렌족을 중심 주제로 연구를 하고 있는 ‘이상국 박사님’ 과의 짧은 인연 때문이지요. 이 박사님은 서울대 인류학과 졸업 이후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젊은 학자입니다.
앞에서도 느끼셨겠지만, 소수민족 하나 연구하기 위해서도 버마의 정치 경제적인 상황, 그리고 태국, 주변국인 중국과 강대국인 영국 또한 인근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역사까지 충분한 연구가 이뤄져야 합니다.

태국어에 능통한 이 박사님은 5년 전에는 이곳 난민촌에서 3개월간 숙식을 하며 카렌어를 마스터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단순한 여행지로의 동남아시아가 아닌 우리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동남아시아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하더군요.
지나가는 말로 “우리나라가 너무나 협소하게 동북아 중심으로 아시아를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쉽다”고 말하더군요. 저 역시 짧은 여행 속에서도, 우리가 어째서 이 땅과 사람들을 주목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알게 모르게 우리의 학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렇게 연구성과를 진행시킨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우리도 서서히 선진국이 돼 가고 있는 것이지요) 수입도 충분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물론입니다만 아주 즐겁게 태국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어느새 5년째 타지 생활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혹시 궁금한 사항은, 제가 아닌 이상국 박사 메일인 josephlee811@hotmail.com 로 문의하셔도 좋겠습니다. 짧게 방문한 기자의 견문은 사실 전문가의 식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헤어짐을 아쉬워 하는 카렌족 꼬마들


이 밖에도 이 같은 분쟁 지역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우리와의 네트워크를 넓혀주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알게 모르게 촘촘하게 진출해 있는 선교사님들이 계시고, 물건을 팔기 위한 기업이 있습니다. 또한 전세계 대표적 분쟁지역 사명감을 갖고 오다니는 기자분들도 계시지요. 특히 이 지역에 대해서 좀 더 알기 위해서는 한겨레 21의 정문태 기자의 글을 읽어 보는 게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정기자님은 버마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국내 유일의 언론인입니다. 정기나님이 분쟁지역 전문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 사건은 1988년 ‘랑군의 봄’이었다. “버마 민주항쟁 이후 1만 여명의 버마 학생들이 타이 국경에 쫓겨가 있었던 때였지요. 그곳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 혁명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다양한 민족해방 혁명가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분쟁 지역을 취재하는 종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기타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는 일도 있겠군요.
www.freeburma.org 가장 대표적인 버마민주화 운동 사이트 입니다.
www.dassk.com 아웅산 수지 여사 홈페이지 도 있군요
www.unhcr.ch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입니다.

짧지 않은 글이 끝났습니다.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 왜 미얀마가 아니고 버마인지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미얀마는 국명은 버마 군사정부가 일방적으로 나라 이름을 개명한 것이라는군요. 그래서 버마의 민주주의를 바라는 이들은 미얀마로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군사정부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소수민족이 미얀마로 부르지 않는 것이 지당했기 때문에 계속 버마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버마라는 표현보다는 미얀마란 표현이 민족 탕평책의 의지라고도 합니다. ^^ 많이 헛갈리지만…좀 더 연구해 보지요.

도깨비 뉴스 리포터 = 호자이 Hojai@dkbnews.com









http://blog.naver.com/dabanggu?Redirect=Log&logNo=10001081822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