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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7/02/01

사진으로 보는 이스라엘의 레바논침략

사진으로 보는 이스라엘의 레바논침략

 

일 레바논 남부 가지예의 한 병원 시체안치소에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숨진 3살짜리 소년 마날 알-후세인의 사체가 안치돼 있다.

전쟁은 이 아이의 삶의 꽃을 밟아버린 것이다. 레바논이 밟히고있다. 

 

레바논 구호요원들이 7일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무너진 레바논 남부 가지예의 건물 잔해 속에 파묻힌 사망자의 손을 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잡은 손은 레바논의 운명일 수 있다.

 

이스라엘군 전함이 9일 새벽 레바논 최대 팔레스타인 난민캠프를 포격, 최소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했다고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관리들이 전했다. 사진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8일 대레바논 야간 군사행동을 실행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진입하고 있는 모습.

 

한 이스라엘 군인이 9일 이스라엘 북부 레바논과의 국경지대에서 아침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가 기도하는 神은 이 살륙의 현장을 어떻게 보실까?

 

4일 레바논 남부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크게 부상한 한 여성이 항구 도시 티레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져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군이 30일 밤 사이 레바논 남부 도시 카나를 공습,

어린이 37명을 포함해 최소 6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한 가운데 레바논군 병사들이 피해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던 도중 갓난 아기 시체를 발견하고 침통해 하고 있다. 이날 공습은 19일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에서 하루 희생으로는 최다 규모다. 게다가 아직도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매몰돼 있는 것으로 전해져 사망자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스라엘군 탱크부대가 26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민가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생후 8개월 된 아기를 다른 시민이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이날 가자지구에서는 무장대원 9명과 장애인, 어린이 등을 포함, 팔레스타인인 19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이스라엘 마을 키리야트 시모나에서 레바논을 향해 155mm포를 쏘면서 귀를 막고 있다.

막을 것은 귓청이 찢어지는 包聲이 아니라 끔찍한 전쟁이다.

 

30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하이파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이스라엘군 병사 아사프 나메르의 장례식에서 동료 병사들이 오열하고 있다. 나메르는 헤즈볼라에 대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전사했다. 같은 날 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도시 카나를 공습, 잠자고 있던 어린이 37명을 포함해 민간인 60여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에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나서 카나 사태를 규탄하고 즉각적 정전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열하는 눈물에도 값이 있는가? 죽음에도 따로 값이 있는가? 레바논의 눈물은 이보다 더하다.

http://wnetwork.hani.co.kr/vnfmsshdmf/view.html?blog_board=29&log_no=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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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랍의 말살을 원하는가?

필진]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랍의 말살을 원하는가?

 

미국이 레바논 공습에 나선 이스라엘에 정밀유도폭탄을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공급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스라엘이 레바논 공습을 시작한 이후 지난해 체결한 무기공급계약에 따라 정밀유도폭탄을 신속하게 공급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를 수용했다면서 계약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요청을 받고 수일 만에 정밀무기를 내준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지난해 이스라엘과 '벙커버스터'로 불리는 GBU-28 폭탄 최대 100개와 위성유도무기 등을 포함하는 수백만달러 상당의 무기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연일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의 침묵은 늘상 그들이 말하는 전쟁없는 평화와 상관없는 이기적인 침묵이고 암묵적인 지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 미국의 이라크침략에 대해 미국내 에서도 거세게 일었던 흔하디 흔한 반전시위도 없다. 이것은 미국과 서방 각국이 정부차원의 침묵일뿐 아니라 국민들 조차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에 침묵한다는 의미다.

 

미국은 자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해서도 거센 반대시위가 일었으며 유럽 각국의 반전시위는 국민들을 포함한 정부차원의 반대까지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선에서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에 침묵하는 현상들은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중동지역의 반이스라엘 정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결국 전 유럽과 미국을 상대하는 것이고, 얼마나 고단한 현실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것도 벅찬 상황에서 거의 전세계를 상대로 저항하는 팔레스틴 근방의 피압박 민족들의 수난은 인류 역사이래 이런 수난이 드물고, 이렇게 버거운 상대와의 투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주변 국가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가는 이스라엘에 첨단 공격무기를 신속하게 공급하고 있으니 아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중동지역의 아랍민중들의 씨를 말리려는 의도를 공공연히 내비친것과 다름없다.

 

이미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보를 지킬 군사적 역량이 차고도 넘치는 나라다. 그들이 상대하는 인근국가에서 이스라엘과 군사력으로 겨룰 나라가 없고, 연합을 해도 이스라엘과 무력으로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의 재래식 무기는 이스라엘과 한판 붙어서 이길 전력이 아니고, 설혹 전쟁을 불사한들 이란이 이스라엘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현실앞에서 이란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선택 할 수도 없고 위협적인 적수가 될 수 없다. 다만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억지력을 보유하는 정도의 의미일 뿐이다.

 

시리아의 군사력이 규모면에서 상당하다고 하지만 이미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패한 나라고, 시리아의 재래식 전력은 이스라엘의 상대도 못되지만 이란의 수준도 못 따라가는 군사력이다.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잇단 첨단 무기를 공급하는 것은 아무리 무기 팔아서 먹고사는 군산복합체의 힘이 강한들, 미국이 말하는 평화와는 거리가 먼 기만적인 행동이다. 도대체 이스라엘이 상대하는 세력이 얼마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에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카니스탄을 침략할 때 사용되었을 무기들을 공급한다는 말인가? 이스라엘이 미국처럼 특정 중동국가를 궤멸시키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야말로 무기 팔아서 돈 챙기고 남의 손을 빌어서 코를 풀겠다는 수작인가?

 

이스라엘은 얼마나 많은 인명을 살상하기 위해서 이런 최첨단 공격무기들이 필요한 것일까...

미국으로부터 신속하게 도입하는 최첨단 공격무기들은 이스라엘이 중동지역에서 전쟁의 불씨를 끄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레바논 공격을 간단하게 마무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이미 자국 병사 2명의 납치라는 명분은 무수한 살육에서 퇴색된 변명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1,000명을 넘었고, 60만명이라는 난민이 발생했다. 아직 살아있는 그 2명 때문에 종교에 관계없이 잘 어울려서 살고있는 레바논의 아름다운 땅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희생이 이스라엘 병사 2명의 납치상태보다 못하다는 것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판단이라면 더 이상 말할 이유는 없겠다. 그러나 이것은 공존의 법칙을 무참히 깨는 행위고, 가장 야만적인 전쟁이다.

 

서방 각국과 미국의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 여러분들은 더 이상 이런 이스라엘과 미국의 대규모 살육을 위한 거대한 계획에 침묵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치열하게 반전시위를 이끌었던 미국인들의 양심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살육에 입을 다무는 것은 그들이 미국인, 또는 미국의 건국정신에 기초한 미국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인 이라고 고백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유럽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역사의 비극을 강 건너 불구경할 셈인가? 전 아랍인들을 몰살하기 위한 침묵인가? 나찌의 대학살과 코소보에서의 인종청소를 비난하던 양심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의 전범재판에 밀로세비치를 세웠던 인도주의적인 의식은 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앞에 침묵하는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앞에 양심과 지성을 꼭꼭 숨기는 사람들은 수치를 알아라. 수치다. 그 수치는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 민주의봄날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437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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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공동체 노린 이스라엘의 집중폭격 “야만의 보복”

무슬림 공동체 노린 이스라엘의 집중폭격 “야만의 보복”

 

 
» 유엔 평화유지군 병사들이 24일 레바논 남부의 항만도시 티레에서 지난주 이스라엘 전투기의 공격으로 크게 부숴진 건물의 잔해를 들추며 실종자를 수색하고 있다.(AP=연합뉴스)
 
한 공동체만을 이토록 집중적으로 폭격하는 건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에서만 볼 수 있다.”

베이루트 일간 <데일리스타> 발행인이자 편집자인 한나 안바르는 “이번 공격을 보면 이스라엘의 야만성이 잘 드러난다”고 말했다. 세계 전쟁사를 훑어봐도 전쟁에서 한 공동체만 집중타격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전혀 없진 않다. 1982년 레바논을 침략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을 집중적으로 공격·학살한 사실이 있다.

열나흘째 접어든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공습은 남부 무슬림 지역만을 반복적으로 타격하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 정부 당국자들은 “헤즈볼라가 주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주민들이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다”고도 했다. 어느 쪽이 됐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시민 공격’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남부 무슬림 주거지역을 공습하고도 어떤 군사적 목표를 달성했는지 제대로 밝힌 적이 없다. 구체적으로 군사적 타격목표가 무엇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그저 “헤즈볼라의 토대를 궤멸시킨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시아파 무슬림들이 살아가는 베이루트 남부는 거의 같은 지점이 매일 공습을 받고 있다. 더 파괴시킬 것도 없을 정도다. 이곳은 구멍가게를 비롯한 각종 가게들이 1층에 있고, 그 위층에는 주민들이 사는 전형적인 상업·주거 지역들이다. 이번 이스라엘 공습으로 날아가 버리긴 했지만, 그 지역 안에 헤즈볼라라는 정치단체 사무실이 있었고, 헤즈볼라 방송사 <알마나르>도 있었다.

몇 해 전, 헤즈볼라를 취재하면서 남부 무슬림 지역을 들여다보았던 기억을 되살리면, 이스라엘이 밝힌 헤즈볼라 방송사와 헤즈볼라 본부 파괴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반건물 지하에 차린 간단한 스튜디오와 편집실을 거쳐 위성으로 송출하는 시스템을 지녔던 <알마나르>는 대규모 지상파 방송사와 달리 움직이는 ‘게릴라 방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알마나르>는 온전히 방송을 하는 중이다. 헤즈볼라 본부라는 것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도로 앞쪽 문보다는 편안한 뒤쪽 주차장 ‘뒷문’으로 드나들었던 그 건물은 그저 일반 사무실에 지나지 않는다. 늘 이스라엘의 공격목표였던 헤즈볼라가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본부 같은 걸 꾸리겠는가.

그렇게 해서, 열나흘째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남부지역 공습은 헤즈볼라 궤멸과는 거리가 먼 ‘시민 보복’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말대로 베이루트 남부지역은 헤즈볼라 거점임이 분명하다. 또 주민들이 모두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주민들이 현재 레바논 정치판에 헤즈볼라(신의 당) 출신 국회의원 14명과 장관 2명을 배출시킨 동력이었다. 말하자면, 남부지역 주민들이 헤즈볼라를 레바논에서 합법적인 정치조직으로 키워낸 장본인이란 뜻이다.

이스라엘 폭격으로 삶터가 날아가 버린 주민 모하마드 라슈드(52)의 말을 들어보자. “헤즈볼라는 우리 삶의 전부다. 희망이기도 하고. 헤즈볼라가 아니었다면 누가 이스라엘 침략자들을 몰아냈겠는가? 누가 우리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가졌겠는가?”

 

남부지역에서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헤즈볼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이들은 없다. 실제로 헤즈볼라는 대이스라엘 투쟁뿐만 아니라, 정부가 하지 못하는 교육·의료·복지 같은 대민사업을 통해 남부지역 무슬림 공동체의 심장 노릇을 해 왔다.

레바논 언론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헤즈볼라를 비판해 왔고, 할 수 있는 <데일리스타>의 편집자 한나 안바르 같은 이들도 “헤즈볼라는 테러리스트 집단이 아니다”라며 이스라엘-미국의 논리만을 쫓는 일방적인 국제사회의 시각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베이루트 남부지역 무슬림 주민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헤즈볼라와 한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14일째 이어지는 고단한 보복공습의 날을 맞고 있다. 비록 오늘은 폭음 없는 조용한 하루를 보냈지만, 내일은 또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시민들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매일 베이루트를 방문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라이스 덕분에 이스라엘이 공습을 하루 멈췄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베이루트/정문태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 팀장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1440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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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르포 2…난민촌의 한국인들

corinalis님의 [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난민촌 르포 1] 에 관련된 글.

 

(지난 주말 카렌족 난민촌 르포에 이어 2편을 계속합니다)
이렇듯 우리와는 너무나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미 카렌족 난민촌에 9년째 꾸준히 방문하며 끈끈한 우정을 쌓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치과의료 봉사단이 중심이 된 ‘라파치과봉사단’이지요. 애당초 서울 성북지역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한 의료인들로 구성된 봉사단은 80년대부터 낙도와 꽃마을 등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벌여왔는데, 90년대부터 그 범위를 전 세계 오지로 확대시킨 것입니다.
르포 1편 보기 - 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르포 1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형순 치과원장(54)은 “설날만 다가오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고 합니다. 치과팀만 20명(치과 전문의사 9명에, 치기공사 5명 그리고 간호사 6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단이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야 하기 때문에 설 연휴 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카렌 난민촌으로 벌써 만 9년째 빠짐없이 찾아온 이들은 올해도 역시 2월4일부터 9일까지 5박6일간 이곳 캠프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규모로만 보면 치과 종합병원 한 동이 전체가 이동했다고 보면 된다. 치과 장비를 이동하기 위해 비행기 한대를 전세 내듯이 와야 했습니다. 이들은 5박6일 동안 매일 1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고, 100명 이상에게 틀니를 제공했으며 언청이 수술과 각종 기초 수술을 포함한 다양한 의료활동을 펼치시더군요.

▼한국인들

상황은 말도 못하게 열악하지요. 먼지가 풀풀 날리는 데서 수술해야 하지만, 예상외로 수술 경과가 깨끗한 병원보다 훨씬 더 좋다고 합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언청이인 꼬마이군요. 전문용어로 ‘선천성 상구순파열’이란 이 기형은 어디서나 자주 발생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 듭니다. 태아로 있을 때 언청이인 경우 지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술 기회도 자꾸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6.25를 전후해서 언청이 수술에 대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고 한 의사분이 전합니다. 6.25 때 미국의 군의관들이 한국에 와서 엄청나게 많은 언청이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자의에 의한 것도 있지만 도망가는 아이들을 소 잡듯 로프로 묶어놓고 엄청나게 많은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시술법이 몇 가지 있다고 하는군요. 슬픈 이야기 입니다.


가장 젊은 선생님은 서울대 치대 구강외과 이지호 선생님(28ㆍ 레지던트)이셨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벌써 수 차례 해외 봉사활동을 나가셔서 그런지 아주 능숙하게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시더군요.


5박 6일 동안 끊임없이 틀니를 만드셨던 치기공 소장님들이십니다. 국내 치과 선생님들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직접 모습을 뵈니 사실 너무나 많이 놀랬습니다. 과연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반성의 느낌이 절로 나오더군요. 너무 헌신적인 모습에, 과거 “치과의사들 돈 많이 버니까 당연한 것 아냐”하는 편견도 싹 사라지더군요^^

밤에 난민촌 아이들에게 영화를 상영해주는 모습입니다. (삼각대가 없어 난간에 카메라를 걸쳐놓고 4초간 노출을 준 성과물입니다. 아! 카메라는 파나소닉 LC-5 였습니다. 언덕까지 아이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는데 모두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난민촌 아이들은 밖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신 문물을 접할 기회도 완전하게 봉쇄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영화를 상영한다는 말에, 적어도 500명이 넘어 보이는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4일간의 상영된 영화는 ‘슈렉1, 2’ 그리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마지막 날이 동남아를 휩쓴 ‘쓰나미’에 대한 기록 영화였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광경이었습니다. 이 곳은 한마디로 세상의 끝이라고 불릴 만한 공간입니다. 버마라는 제3세계. 버마는 북한과 함께 가장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나라라고 불리고 있지요. 그것도 버마라는 나라에서 자치권조차 갖지 못한 민족이 태국에 쫓겨와서 난민촌을 꾸린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거지요. 이 보다 더한 세상의 끝을 거론하라면, 도대체 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어디를 들 수 있을지 난감할 정도입니다.

이 땅에 동아시아의 끝에 자리한 한국인 선교사들과 치과 봉사 단원들이 들어와 있고, 그리고 이들이 틀어주는 영화는 헐리우드에서 만든 최신의 가족오락 영화라는 사실입니다. 슈렉을 함께 보면서 아이들이 어떤 영감을 얻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후일 버마족에 대항하는 전사로 키워질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운명에 대해서, 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꿈을 심어줘야 할지 누구도 확언하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쯤에서 ‘닥터 사이먼’ 이라 불리는 이 난민촌의 지도자를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카렌 난민을 이끄는 정치적인 지도자는 적지 않지만 정신적 지도자는 바로 ‘사이먼 목사’ 하나 뿐입니다. 신학박사 출신으로 일찍 근대화한 카렌족이었기 때문에 안락한 인생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20년 전 버마 군부의 카렌족 탄압을 지켜본 후로는 스스로 난민이 되기를 결심하고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멜라 캠프에서만 16년을 살아온 그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적잖은 고생을 겪었지만 전 세계로부터 소수민족의 인권을 지키는 성직자의 표상으로 부각했습니다. 그는 미국 침례회가 수여하는 제2회 인권상 수상자이지요. 제1회 수상자는 노벨상 수상자인 투투 남아프리카 성공회 주교였다고 하네요.

그는 맬라라 캠프 안에는 과투레이 신학교 운영하면서 미래에 카렌족을 이끌 지식인을 양성하는데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이먼 목사와 신학교를 찾아 끊임없이 카렌족 젊은이들이 이 곳에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10명의 교사와 1백여명의 학생이 4년 과정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버마가 민주화 되는 날 카렌족은 다시 자신들의 땅인 버마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연신 한국인들의 봉사활동에 대해 최대한의 감사의 표현을 한국민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생활에 제약이 많은 난민들이기 때문에 한국 치과의사들의 방문을 너무나 고맙고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 한국인 당신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이런 일을 계속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고 카렌족은 한국인들처럼 꼭 역경을 극복해 내겠다.”
사이먼 목사는 ‘버마의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88.8.8운동을 거론했습니다.

자 이제 이야기가 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 카렌족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과거에 이들이 전혀 기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웅산 수지 여사를 기억하지요?

아웅산 수지 여사입니다. 88년 ‘버마 랭군의 봄’의 주역으로 버마 민주주의의 상징이지요.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인 만큼 이미 국제적인 인물이지만 가택연금을 반복해 가면서 어느새 버마 군부와 싸워온 시간만 20년이 흘렀네요. 국제적인 관심이 얼마나 지속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버마의 군부 독재에 대해서는 독자님들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줄이도록 하겠습니다.(1990년 버마 총선에서 82%나 넘는 득표율로 압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이양을 거부하는 버마 군부에 의해 끊임없이 탄압 받고 있습니다. 버마식 사회주의가 실패한 버마는 네윈 장군이란 분이 일당 독재를 해왔는데,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화 세력에 일단 네윈 장군이 실각하기에 이릅니다.  88.8.8 이란 버마 민중의 저항이 본격화 된 날로 이날을 중심으로 사망한 버마 시민들이 1천명을 넘는다고 하네요)

▼전쟁의 상처
  
전쟁의 상처입니다. 국경지대를 넘어오면서, 발생한 지뢰 피해자들이 치료소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카렌족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종교 갈등과, 민족 갈등과, 게다가 민주주의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사이먼 박사의 말대로, 버마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날 카렌족이 버마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민족 문제가 풀리는 첫번째 지름길이 되겠지요.

우리 역시, 이념 문제와 지역갈등 문제 그리고 민주주의 문제를 고단하게 겪어 왔습니다. 때문에 이들 동남아시아의 현실이 남의 일 같이 않고 애틋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꺼낸 김에 두 가지 이야기를 첨부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뱀발이지요^^

매솟 지역구에 출마한 타이락타이 당 후보화 함께 포즈를 취한(?) 태국의 탁신총리(왼쪽).
민주주의 여망이 강해서 그런지 매솟에서는 야당인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태국에 자리하고 있는 난민촌이니, 태국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옳는 수순 같습니다. 제가 태국을 방문했던 2월 6일은 태국의 총 선거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태국이란 나라에 대해 여러분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동남아시아의 최강국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태국의 수도 방콕은 실질적인 동남아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었고, 특히 태국의 바트화가 갖고 있는 파워는 상당해 보였습니다. 나라 이름부터 태국(泰國), 큰 나라 아닙니까.

그런 최근의 태국의 정치에 대해서 설명을 잠깐 한다면, 수십 번의 쿠테타를 거치면서도 차근차근 진행해 왔던 태국의 민주주의가 약간 정체한 느낌입니다. 현재 태국 수상은 ‘탁신’이란 분입니다. 아주 논쟁적인 지도자이지요. 제2의 마하티르 라는 호평이 있는가 하면, 필연적으로 파쇼, 포퓰리즘 이라는 비판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가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선 까닭은 태국고위 경찰 출신으로, 이후 통신과 석유업체를 거느린 태국 최대의 재벌로 부각한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이른바 정경유착의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특유의 정치력으로 중산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당을 이끌고 있는 현역 정치인입니다.

이번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탁신이 이끌고 있는 ‘태국을 사랑하는 당(TRTㆍ일명: 나의사랑 태국당)은 전체 500석 가운데 375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최초의 단독정부라고 하는군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2001년 집권이후 눈에 띄는 경제성장을 이끌고, 강력하게 마약을 퇴치한 공로를 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남부 무슬림들과의 갈등과 소수 민족들과의 눈에 보이는 대치 국면도 있지만 중산층 이상 태국인들의 탁신에 대한 지지는 압도적입니다.  

그의 포퓰리즘은, 얼마 전 그가 잉글랜드 프로축구 명문클럽 리버풀의 지분을 곧 인수한 뒤  태국 축구팬들에게 그 주식을 나눠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단한 포퓰리스트이지요. 반대로, 마약 퇴치를 위한다고 20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을 사법적 절차 없이 사형시킨 것으로도 유명해졌습니다.

그 덕인지 정말 태국에서 마약이 싹 사라졌습니다. 이쯤 되면 극우적인 정치인으로 불러도 될 것 같은데, 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왜 인기를 끄는 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말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관심을 갖고 좀 지켜 보시죠.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이지요.
바로 카렌족을 중심 주제로 연구를 하고 있는 ‘이상국 박사님’ 과의 짧은 인연 때문이지요. 이 박사님은 서울대 인류학과 졸업 이후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동남아시아 지역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젊은 학자입니다.
앞에서도 느끼셨겠지만, 소수민족 하나 연구하기 위해서도 버마의 정치 경제적인 상황, 그리고 태국, 주변국인 중국과 강대국인 영국 또한 인근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역사까지 충분한 연구가 이뤄져야 합니다.

태국어에 능통한 이 박사님은 5년 전에는 이곳 난민촌에서 3개월간 숙식을 하며 카렌어를 마스터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단순한 여행지로의 동남아시아가 아닌 우리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동남아시아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하더군요.
지나가는 말로 “우리나라가 너무나 협소하게 동북아 중심으로 아시아를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쉽다”고 말하더군요. 저 역시 짧은 여행 속에서도, 우리가 어째서 이 땅과 사람들을 주목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알게 모르게 우리의 학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렇게 연구성과를 진행시킨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우리도 서서히 선진국이 돼 가고 있는 것이지요) 수입도 충분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물론입니다만 아주 즐겁게 태국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어느새 5년째 타지 생활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혹시 궁금한 사항은, 제가 아닌 이상국 박사 메일인 josephlee811@hotmail.com 로 문의하셔도 좋겠습니다. 짧게 방문한 기자의 견문은 사실 전문가의 식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헤어짐을 아쉬워 하는 카렌족 꼬마들


이 밖에도 이 같은 분쟁 지역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우리와의 네트워크를 넓혀주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알게 모르게 촘촘하게 진출해 있는 선교사님들이 계시고, 물건을 팔기 위한 기업이 있습니다. 또한 전세계 대표적 분쟁지역 사명감을 갖고 오다니는 기자분들도 계시지요. 특히 이 지역에 대해서 좀 더 알기 위해서는 한겨레 21의 정문태 기자의 글을 읽어 보는 게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정기자님은 버마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국내 유일의 언론인입니다. 정기나님이 분쟁지역 전문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 사건은 1988년 ‘랑군의 봄’이었다. “버마 민주항쟁 이후 1만 여명의 버마 학생들이 타이 국경에 쫓겨가 있었던 때였지요. 그곳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 혁명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다양한 민족해방 혁명가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분쟁 지역을 취재하는 종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기타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는 일도 있겠군요.
www.freeburma.org 가장 대표적인 버마민주화 운동 사이트 입니다.
www.dassk.com 아웅산 수지 여사 홈페이지 도 있군요
www.unhcr.ch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입니다.

짧지 않은 글이 끝났습니다.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 왜 미얀마가 아니고 버마인지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미얀마는 국명은 버마 군사정부가 일방적으로 나라 이름을 개명한 것이라는군요. 그래서 버마의 민주주의를 바라는 이들은 미얀마로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군사정부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소수민족이 미얀마로 부르지 않는 것이 지당했기 때문에 계속 버마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버마라는 표현보다는 미얀마란 표현이 민족 탕평책의 의지라고도 합니다. ^^ 많이 헛갈리지만…좀 더 연구해 보지요.

도깨비 뉴스 리포터 = 호자이 Hojai@dk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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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난민촌 르포 1

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난민촌 르포 1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잠시나마 따뜻한 남쪽 나라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만일 ‘버마의 카렌족(Karen)’이란 표현이 친숙하게 다가온다면, 당신은 아마 다음 세가지 부류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첫째,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선교활동에 관심이 많은 분. 둘째, 태국 북부의 명소 ‘치앙마이’에 오랜 기간 여행한 분. 마지막으로 전세계의 민주화 운동, 혹은 소수민족에 높은 관심을 가진 분이겠지요.

이제껏 이것저것 주어들은 것이 적지 않다고 자부해왔지만, 부끄럽게도 이번 설 연휴 직전까지는 ‘버마의 카렌족’에 대해서 완벽하게 백지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스스로 버마나 태국은커녕 동남아 여행조차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위안 삼아 봅니다.(아~! 제가 왜 정식 국호인 ‘미얀마(Myanmar)’가 아닌 ‘버마(Burma)’란 표현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대개는 ‘카렌족 난민(Karen Refugee)’이란 표현으로, 비교적 우울한 어휘(난민)가 함께 쓰이는 이 소수민족에 대해서, 저처럼 처음 접한다는 분이 태반이라는 전제를 깔고 짤막한 여행기를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카렌족이란?

▼ 카렌족 난민촌을 향해서

태국 여행을 해보신 분이라면 쉽게 감을 잡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태국 북부터미널에서 약 7시간(2등 버스)을 달려가니 버마국경과 인접한 매솟(Mae Sot) 이라는 조그만 국경마을이 나옵니다. 다시 그 도시에서 버마 국경을 향해 1시간 정도 달려가면 태국 내 최대(약 5만 이상)의 난민촌이라 불리는 ‘맬라(Mae La) 캠프’에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 태국 군인들이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난민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간단치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20여 개나 되는 국제 NGO들이 난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활동을 펴고 있기 때문에, 사전에 적절한 협의를 거치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난민촌?! 사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표현입니다. 나라를 잃거나 군사정부의 폭정 혹은 민족갈등을 피해 딴 나라에 얹혀 살아야 하는 피난민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코소보나 소말리아 난민, 혹은 북한 난민의 처지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태국의 국회의원 선거가 2월 7일, 흥분감과 긴장감을 가슴에 품고 난민촌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버마 국경에 가까워졌다는 순간, 갑자기 도로변에 난민촌이 등장했습니다. 어랍쇼?
어디가 난민촌이냐구요? 조금 더 집중해서 보면 매직 아이처럼 떠오르게 됩니다. (저쪽 높은 산 너머가 버마 국경 쪽이군요)





2번의 검문소를 지나, 태국 정부가 관리하는 대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면 카렌족 난민촌인 맬라 캠프가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합니다.(아, 이문을 넘어가는 순간 시간은 30분 늦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비록 태국 땅이라 할지라도 버마 시간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돌아가고 싶다는 또 다른 표현이겠지요.)





자. 이제는 집의 형태가 갖춰졌지요. 저 멀리 정글에 숨어 오밀조밀 모여있는 난민촌의 모습들이 조금씩 가까워 지기 시작합니다.





혹자는 “정말 평화로운 광경이구나”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첫인상에 비쳐진 우리 옛 시골과 비슷한 정감 넘치는 풍경에 적잖이 놀랬습니다. ‘난민촌’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오는데, 실제 무슨 안락한 산촌 마을에 온 것처럼 느껴지는군요.(물론 이는 이방인이 느낀 편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닫게 됐습니다)





맬라 캠프의 중심을 이루는 광장의 풍경입니다. 유달리 어린아이들이 많이 보이죠. 바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인근에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평화로운 모습이군요. 이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좀 살펴볼까요?





  
우리나라 아이들이라고 주장해도 믿을 분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들은 몽고족 혹은 티벳족 계통일 거라고 추측됩니다. 태국 북부지방 혹은 버마 북부지방의 고산족들은 중국 쪽에서 남하한 민족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에 남아시아 인종과는 뚜렷하게 구분되고, 오히려 우리와 더 가까운 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고구려 민족의 후예라고 알려진 라후(La hu)족도 태국 북부 지방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이 어린이는 유달리 더 한국사람과 닮아 있군요.(약간 이마가 튀어나오고 콧대가 움푹 패어 있는 게 이들 민족의 특색입니다) 실제로 이들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증언(?)도 있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최대 500만에서 700만까지 추산되는 카렌족은 전체 인구의 25~30%가 기독교 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19세기 영국의 지배와 서구 선교사들의 활동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 법도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몇 안 되는 민족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70%가 불교도라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혹자는 이들이 놀라운 신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황금의 책’이란 신화이지요. 카렌족 신화에 따르면 자신들이 고생하는 이유가 아주 오랜 과거에 하늘이 주신 귀중한 책을 잊어버렸기 때문인데, 하얀 피부를 가진 형제가 그 책을 갖고 오면 구원 받으리라는 신화입니다.(신화 속에 책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실제 이 신화 때문에 하얀 영국인들이 가져온 성경을 환대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멕시코 께짤꼬아들 신화와 유사성도 엿보입니다.)  

카렌족은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자부심도 대단합니다. 현재 카렌의 정부 역할을 하는 KUN(카렌국민엽합)의 지도부들 역시 대부분이 기독교 인들이고, 일부 카렌족 불교인들이 같은 불교 국가인 버마정부에 협력하고 있다는 점도 그런 이유를 부추기고 있습니다.(정말 일부랍니다) 특히 난민촌에 기독교 비율이 높습니다. 불교 국가인 버마와 달리 태국 내에 자리잡고 있는 난민촌의 경우 서구 NGO를 통해 외부문물을 보다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제시대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신학대학을 나오신 종교지도자들이 독립지도자로 활약하는 비율도 더 높습니다. 독립운동 혹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는 근대화 정신이 필요하다는 논리와 비슷합니다.

좀 더 카렌족 아이들을 만나볼까요?


잉크를 가지고 장난치는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나 천진난만 합니다. 별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멍을 6개를 파서, 구멍을 오가며 상대편의 구슬을 따먹는 게임. 어릴 적 제 동네에서는 ‘알롱’ 이라고 했는데(워낙 지방 마다 이름이 달라서…^^), 꼭 그 모습과 같더군요. 아이들의 문화는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굉장하게 유사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구멍 파고 구슬치기 놀이하는 모습이 보이시죠?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지나치게 많군요. 아무래도 난민촌이다 보니까 아이들과 노인들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일찍 결혼하는 풍습때문인지 한 가구 당 대개 8명에 달하는 자녀들을 갖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 없이도 형제끼리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한 이유를 대자면 쓸만한 청ㆍ장년층 남자 어른들은 버마 땅에서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내전의 여파 때문인지 결손 가정 아이들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사진 이지호>




▼  왜 난민이 됐을까

자 이제 왜 이들이 난민촌을 형성하고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서 짧게나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버마에 살고 있던 카렌족은 이웃나라 태국으로 밀려오게 됐을까요.



한 젊은이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갖고 계시던 한 여인은 “내 아들인데 오래 전에 죽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른바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내전인 버마족과 카렌족의 내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버마라는 나라는 다수 민족인 버마족과 무려 130여 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대표적인 소수 민족이라면 중국 국경 지방의 샨족(한때 쿤사라는 ‘마약왕’의 집단으로 더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태국 국경과 이라와디강의 황금 삼각주 지방에 분포한 카렌족, 카친족 등이 있습니다.
최대의 민족이라면 역시 카렌족이지요. 버마 정부는 유엔의 눈치가 있다 보니 약 220만 정도로 추산하지만, 실제로 500만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박해 받는 민족이다 보니 제대로 된 통계조차 불가능합니다.

버마 내의 다른 소수 민족들 역시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할 꿈을 가졌지만 실제 실행에 옮긴 민족은 카렌족이 유일합니다. 벌써 1949년에 벌어진 일이니 55년도 넘었군요. 지금도 전쟁은 계속 되고 있으니 세계 최장기간 내전 기록을 갱신 중에 있습니다.

1949년 당시 카렌족은 자기가 살아온 땅에 툰구(Toungoo)라는 독립국을 선포합니다. 곧장 버마와 치열한 전쟁에 들어갔지요. 일부는 점령되고 점점 땅을 빼앗기더니 결국은 1997년 신의 아들이 이끄는 본거지를 점령당하면서, 버마 동부지역 일부와 태국 쪽으로 좁혀지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육과 강간 등 민족 말살 정책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래서 맬라 캠프를 비롯한 난민촌들이 80년대 후반과 90년 초반에 대량으로 건설되기에 이릅니다. 버마 정부의 소탕 작전에 맞선 카렌족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영국의 지원도 있었지만 더 큰 힘이 된 전쟁비용은, 이 지역의 특산물인 ‘티크’ 나무 판매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티크 나무를 팔아서 탱크까지 보유하면서 끊임없이 독립 전쟁을 펼쳐왔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카렌족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하는 카렌국민연합(KNU) 힘이 많이 미약해졌다고 합니다.

현재 태국 국경에는 8개의 카렌족 난민촌이 30만에 가까운 카렌족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유엔은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태국 정부로는 줄곧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왔습니다. 태국도 정치상황이 시끄러웠는데, 딱히 이웃 버마 군부와 관계도 있는데 소수 민족인 카렌족 편을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실상 동남아 모든 나라들이 이 소수민족 정책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강경정책으로 절대로 독립을 못하게 막는 원칙을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태국도 남부의 종교가 다른 무슬림 민족간의 갈등이 심각한 편입니다)

태국정부는 유엔난민협약에도 가입해 있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1990년부터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난민들에게 돌을 사용해서 집을 짓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집들이 하나같이 나무로 이뤄졌는지 감이 잡히시죠?



난민촌 시장의 모습입니다. 미약하게나마 여기도 시장경제가 돌아가고 있네요. 물론 생산은 거의 불가능하고, 자연에서 수집한 수준에서 시작해서, 인근 마을에서 노동해서 모은 돈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수준이지요. 계속 집 모양이 인상적이지요?





이게 바로 티크 나무 잎사귀를 모아 나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열대지방의 나무다 보니 잎이 굉장히 크고 넓습니다.이 나뭇잎을 하나 하나 엮어서 기왓장을 만드는 거지요. 아무래도 추위가 덜한 지방이다 보니까 나무 만으로도 집을 지을 수 있는 장점이 있기는 합니다.




  
조그만 상점의 주인이신 한 할아버지. 그는 “나도 젊었을 적에는 버마 군대랑 참 치열하게 싸웠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계속 전쟁 이야기시더군요.



설명을 조금 더 계속해야 합니다. 버마와 카렌이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단순한 민족문제라면 조금이라도 화해할 길이 열리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 바로 외세의 침략으로 모른 것이 흐트러지고 만 셈입니다.

버마는 인도가 점령된 이후 영국의 동진 정책에 의해 1885년에 인도의 한 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효과적인 버마 지배를 위해서 민족 이간질 정책을 씁니다. 분열정책이란 강대국이 작은 나라들을 다스리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정책이기도 하지요. 버마 민족을 탄압하면서 동시에 카렌족을 1등 시민으로 부각시킨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버마족의 분노는 영국에서 카렌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물론 카렌족이 영국과 친해진 이유는 재빨리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도 있을테고 정복왕조인 버마 민족에 대한 악감정도 작용했겠지요.

또 다른 변수는 일본이었습니다. 2차 대전을 기화로 일본군이 잽싸게 동남아시아의 점령자로 부각되자 버마족은 이틈을 타서 일본군과 한편이 되서 ‘영국-카렌’ 연합군과 대립전선을 형성하게 됩니다. 결국 일본군이 버마를 완전 점령하게 되자(콰이강의 다리를 기억하시지요?) 버마족은 카렌족의 교회를 불태우고 수많은 카렌족을 학살하는 대한 피의 보복을 벌이게 됩니다.

그 때부터 시작된 전쟁의 상흔은 55년 동안 진행중입니다. 맬라 캠프만 해도 건설된 지 16년이 지났지만 90년대 말까지도 이곳 태국에 있는 난민촌까지도 버마군에 의해 공격을 받아 왔다고 합니다. 여러 난민촌이 전소되고 주요 인사들의 암살도 계속되자 카렌족 정치 지도자들은 이곳 난민촌을 떠나 모처에 은신 중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사진에서 본 난민촌들이 산 바로 밑에 은거해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바로 산 너머 버마 국경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서 랍니다. 이 곳 맬라 난민촌 역시 깎아지르는 듯한 산 아래 있기 때문에 버마군대의 포탄에서 약간이나마 안전하다고 합니다.



새벽의 난민촌 시장 광경입니다.





▼  신학교

  
여기에 자리한 신학교이지요. 서구 사회와 기독교의 연관성 때문에 많은 NGO들의 관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요즘에는 약간 그 관심이 줄었다고 합니다.


  

한 신학생의 기숙사를 잠깐 훔쳐봤습니다. 아무래도 열대성 기후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 가고 있는지 한 눈에 들어오리라 생각합니다. 프라빗(Provit)이라는 이 스무 살 청년은 영어에 익숙하더군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궁금함으로 가득 차 있어 보였습니다.  

  
카렌족 교회 내부 살짝 살펴보시지요.


  

다음주 주말 2부가 계속 됩니다.

도깨비 뉴스 리포터 호자이 Hojai@dk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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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버마를 '겁 많은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quot;

"버마를 '겁 많은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아시아 인권 투어] <11> 한국은 '한국 밖'을 모른다

 

'8888'. 한번 들으면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듯한 이 숫자는 역사 속의 한 날을 뜻한다. 1988년 8월 8일. 이 날은 버마인들이 신군부에 맞선 '버마민중항쟁의 날'이었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세 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한국에서 '8888 항쟁'의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의 손길이 바쁘다. 바로 버마의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정당 민족민주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의 한국지부다.
  
  이 곳에서는 현재 22명의 당원이 활동 중이며 그 중 6명은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10년 째 살고 있는 샤린 씨가 바로 현재 NLD 한국지부에서 활동 중인 '정치적 난민' 중의 한 사람이다.
  
  <프레시안>은 지난 5월부터 연재한 '아시아 인권 투어'의 마지막 순서로 한국에서 난민으로 체류 중인 버마인들을 만났다.
  
  (신군부와 이들이 바꾼 국호 '미얀마'를 인정하지 않는 민주화운동가들의 뜻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 글에서는 미얀마 대신 '버마'로 표기한다.)
  
  "해외에서 버마를 어떻게 도울지 고민했죠"
  

▲ 한국에서 10년 째 체류 중인 샤린 씨. 그의 뒤에는 버마 국기가 걸려 있다. ⓒ프레시안

  샤린 씨는 96년 한국에 올 당시 대학생이었다. 신군부는 96년에 집회, 시위를 이유로 전국의 대학을 일방적으로 폐쇄해버린 상태였다. 그는 '일단 해외로 나가고 보자'라는 심정이었다. 한국을 택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 '물가가 좀 더 저렴해서였다'고 한다.
  
  "한국에 온 뒤부터 온갖 공장에서 일했죠. 주로 가구 공장, 프레스 기계 공장, 도금 공장 같은 데서 일했어요."
  
  여느 외국인 노동자와 다를 바 없이 살던 그는 1998년 다른 버마인들과 함께 '해외에서 우리가 버마 국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뜻을 굳히고 NLD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현재 NLD는 태국에 본부가 있으며 뉴질랜드, 일본, 미국 등에도 지부가 있다.
  
  한국지부 당원들의 의지는 투철했지만 활동을 지속하는 과정이 쉬울 리 없었다.
  
  "우리 중에는 버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처음 운동을 시작한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엔 40명 정도가 모였는데 막상 해보니 어렵고 하니까 많이 떠나서 6명만 남았을 때도 있어요. 그러다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고…. 지금은 2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어요.
  
  부천에 버마인은 약 300명 정도 살고 있지만 NLD 활동에는 겁내는 사람이 꽤 많아요. 다시 버마로 돌아갔을 때 신군부가 민주화운동 했다고 보복을 할까봐 두려운거죠."
  
  대부분 당원들이 부천 등지의 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당 활동을 꾸려나가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당원들은 한달에 15만 원씩 회비를 내요. 그 돈으로 사무실 운영도 하고, 태국 난민촌에 있는 어린이들 교육도 지원합니다."
  
  "버마의 민주화보다 가스 개발에 더 관심있는 한국"
  
▲ NLD 태국 본부에서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당원들이 민주화 항쟁에 대한 책과 선전물을 확인하고 있다. ⓒ프레시안

  현재 버마는 88년 이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신군부의 탄압은 그 강도가 높아졌다.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NLD는 특히 탄압의 대상이다.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비롯해 약 1200명 이상의 양심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신군부 집권 이래로 지금까지 대학은 폐쇄 상태가 반복되고 있고, 또 세 집마다 감시원이 존재하는 3호 담당제가 존재한다. 인터넷, 팩스 등을 통한 해외와의 정보교류는 완전히 차단돼 있다.
  
  소수종족들에게 행해지는 '초토화작전'은 매년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고 있으며 현재 태국과 버마-태국 국경 근처의 난민캠프에 있는 난민들은 최대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샤린 씨는 "버마 국내에 사는 이들은 해외와 차단돼 있다"며 "한국에 있는 우리가 운동을 지속하는 이유는 버마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그 당위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현재 이들은 버마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2004년부터 서울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매주 목요일 1인 시위를 진행 중이고, 한국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해외에서 캠페인하는 것이 버마에 어떤 도움을 주냐고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만나면 '도와주겠다'고 하고서 아무 일도 안 하더라고요. 오히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버마 가스개발에 투자하기 바쁘죠. 모두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행동에 나서지 않아요. 미국이 이라크를 왜 공격했나요? 석유를 위한 것 아니었나요? 한국이 버마에 투자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쪽이 더 이익이 되니까요. 다른 나라의 민주화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들의 '이익'이예요."
  
  "한국에서 난민 인정받아도 별 차이 없더라구요"
  
▲ 사무실 앞에 앉아 있는 NLD 한국지부 회장 아웅 민 스위 씨. 며칠 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한 회사에 전화했지만 '난민 같은 거 모른다'며 거절당했다. ⓒ프레시안


  샤린 씨는 2004년 1월 '정치적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어렵게 받은 난민 지위지만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는 이전에 비해 큰 차이점이 없다고 얘기한다.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역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NLD 한국지부의 회장 아웅 민 스위 씨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한 회사에 전화했다.
  
  "외국인이예요?"
  "네. 그런데 불법 아니예요."
  "한국 여자랑 결혼했어요?"
  "아니요. 난민 인정 받았어요."
  "난민? 그런 거 몰라요. 다른 데 알아봐요."
  
  이제 머리가 희끗한 아웅 민 스위 씨는 취직하려면 일단 결혼부터 해야겠으니 어디 참한 여자 없냐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저기 저 커피잔 있잖아요. 저걸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는데 가게 주인이 '이 컵 너무 예쁘지? 너희 나라엔 이런 거 없지?'라고 하더라고요. 식당에 들어가면 '너희 나라엔 쌀 없지?'라고 물어요. 그런 말에 이제는 '네, 우리 나라엔 쌀 없어서 물 마시고 살아요'라고 대꾸하죠."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런 사람들과 싸우기도 했다는 샤린 씨는 담담히 덧붙인다. "전 그런 한국 사람들 이제 이해해요. 한국 밖에 있는 세상을 잘 모르니까 그러는 거예요."
  
  "버마를 '겁많은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샤린 씨의 눈에는 한국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한국은 '겁이 많은 나라'예요. 북한도 무섭고, 미국도 무섭고, 중국도 무섭고…. 난 버마가 민주화된다면 이런 식으로 나라를 만들지 않을 거예요."
  
  계속 한국에서 살 거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기회만 되면 버마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진 못하고…. 일단 앞으로 더 공부하고 싶어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이제 정치나 국제 관계를 배워보고 싶어요. 공부는 한국보다 여건이 좋은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하고 싶고요."
  
  인터뷰가 끝나고 그와 작별한 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이룬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과 피부색과 인종이라는 잣대로 외국인을 판단할 뿐 '한국 밖'의 상황에 무감한 한국, 그 두 가지 모습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우리의 모습일까?
  
  NLD 한국지부는 '8888 민중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참여연대, 국제민주연대 등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6일 오후 명동성당 앞에서 사진전을 개최할 계획이며 8일에는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강이현/기자

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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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ween watch

corinalis님의 [[아시아민중의 인권현장] 버마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 에 관련된 글.

 



THREATENED PEOPLES, THREATENED RIVER

 

The Salween River, one of the great rivers of Southeast Asia, is under threat. The governments of the Salween countries; Burma, Thailand and China have been pushing forward with plans to dam this still free-flowing river. It is planned to both exploit the hydropower potential of the entire river basin, as well as to divert water to Thailand. A series of large dams along the course of the river, in southern China and the eastern states of Burma are being considered.

The dams will have major impact on the local ethnic people, who will suffer displacement and dispossession. In Burma, these people have already been suffering from many decades of brutal conflict that has decimated their populations. Preparations for the dam construction, including securing the dam sites and clearing the flood areas, have already caused gross human rights violations and massive population displacement (maps), although this has been concealed by the context of the ongoing civil war.

The development plans were made without consideration of the recommendations made by the World Commission on Dams. This reality together with the many negative impacts of large dams, make the projects unacceptable. In Burma the dams will be used by the military dictatorship for further oppression of its people. In order to bring an immediate halt to the Salween dam plans, urgent action is needed.


Salween Dams - Critical Reasons to Oppose:

  • Civil War is raging in the area around the dam sites and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have been displaced at gunpoint
  • Dams are being used as a military strategy against the ethnic peoples of Burma
  • Torture, rape, and killings of villagers are continuing as more soldiers are being deployed and more landmines laid
  • Dams will provide financial support to the military junta
  • Massive corruption is inevitable given the complete lack of transparency
  • The dams will permanently degrade Southeast Asia’s longest free flowing river’s fisheries, floodplains, teak forests and wildlife habitats, and flood villages and fertile agricultural land

  

The dams on the Salween River in Burma are extremely controversial, due to the ongoing civil war against the ethnic people in the areas where the dams are planned, and the continuing rule of a military junta, the 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SPDC), that denies the most basic rights to the entire population. The dam plans are seen by many as being one of the strategies used by the military regime to gain foreign support and funding for its ongoing war effort. It is also viewed as a strategy to increase and maintain its control over areas of ethnic land after many decades of brutal conflict.

 

Thailand which has already exploited most of its natural resources and faces environmental destruction due to large dam projects and commercial logging, has been looking to neighbouring countries to meet its energy wants. The government shows little concern about exporting the environmental and social problems, while importing only electricity.

Thailand is already paying US$600 million a year to the SPDC and the multinational oil companies that invested in the Yadana gas pipeline from Burmese offshore gas fields ( see ERI Website ). The revenue from the gas sale is the major source of income for the regime. This money is used directly for military purchases and the expansion of armed forces, which is currently under sanctions from most Western nations. The Salween dams would be by far the biggest investment in Burma. Building even one of the dams would bring in a minimum of 5 billion investment dollars into the country. Although the country faces a major energy crisis, the Salween dams, like the gas pipeline, are not designed to supply electricity throughout Burma but almost exclusively for export.

 

The SPDC is trying to maintain an illusion of peace following a long process of pressuring and persuading some of the many armed opposition groups to join them in ceasefire agreements. However, the areas where the dams are to be built are precisely where the conflict remains most intense. Despite claims that peace rules in Burma's ethnic states, the number of refugees flowing into Thailand has not decreased, and the Thai government is not allowing new arrivals to register for refugee assistance with the UNHCR. Since the Thai government aims to rebuild ties with the SPDC, it is keen to repatriate the over 140,000 refugees in border camps. The SPDC would like to see the refugees returned to their control in order to exert pressure on the armed groups, who have many family members among the refugees. Recent Thai orders for refugees to be moved from areas located near the planned dam areas to sites closer to the border show how the Thai government and the Burmese military regime are collaborating.

 

Thailand's renewed push to construct the Salween dams emerges from a government that is aggressively promoting economic growth and increased energy consumption. The country currently has approximately a 40% oversupply of electricity, however, it is seeking dams and other energy infrastructure projects in neighbouring countries for its long-term expansion plans. This is based on uncertain demand projections, and without regard to sustainability.

The Salween hydropower projects are also being promoted in the context of a regional electricity support network with neighbouring countries, but it will greatly benefit Thailand as an industrial centre. The Greater Mekong Subregional Development Program, a network of governments supported by the Asian Development Bank, is being used to legitimize and raise funds for harmful development plans such as these.

China's plans for development of dams on the Upper Salween River have recently come into the spotlight. There are plans for 13 mainstream dams in China alone ( see China plans 13 megadams on the Salween ). There are concerns that China, which has shown little regard for the huge impacts of its giant hydropower and other development projects, may also support the construction of dams on the Salween in Burma. China is already playing a key role in construction of large dams on other rivers in Burma.

Salween Watch considers the megadam plans on the Salween River to be part of an unsustainable development model that will have serious impacts on people's lives and on the whole environment. The Salween dam projects disregard the well-being and concerns of the local people, and supports an exceptionally oppressive dictatorship in Burma.

 

Livelihood

A temporary stall where fuel is sold to boatmen at the mouth of the Salween, Mon State Distinctively styled dugout canoes remain in common use along the Salween by fishermen, people crossing the river and those tending riverbank cultivation sites.
In a country where many of the main "highways" and roads remain as dirt tracks, large numbers of vehicles are arbitrarily commandeered for military use or are subject to prohibitively expensive registration and fuel costs, river transport is vital - and often the only option. At a market in Central Shan State, local women sell a variety of species caught in the abundant waters of the undimmed river
A moderately sized specimen of an exceptionally delicious fish, shown proudly by its Karen captor Boat transport in the muddy delta, with some of the spectacular limestone (karst) formations the Salween is renowned for in the distance
 
An indigenous elder from Karenni (Kayah) State newly arrived at a refugee camp on the Thai border shows curious neighbours how to prepare a kind of nut he found in the vicinity that they had never seen before – some of the rich biodiversity of the Salween watershed  



Dam Sites

Rocks painted with Japanese characters and a sign with elevation readings bearing the words Dam Left Axis at the site of the proposed Ta Sang dam in Southern Shan State in year 2000 One of the many large sandbanks on the heavily silted but fast flowing Salween, with a view of it's steep gorges beyond
Japanese tunneling technology at work at the Paunglaung Dam site close to the new capital of Nay Pyi Daw, recently completed with Chinese, Burmese and Japanese input. Chinese and Japanese funds, expertise and technology have been sought and or gained for the Salween dams. Surveyors crude markings on rocks at the site of the proposed Wei Gyi dam on the border of Northern Karen State and Thailand



Salween Delta Area


Landscapes of the Salween Delta, with it's floodplains annually blessed with fertility renewing silt brought down and spread by the river and its distinctive karst outcrops Lone fisherman out in the rainy season floodwaters of the delta
Local transport vessels load people and trade goods for journeys between the Mon State capital of Moulmein (Mawlamyine) and the Karen (Kayin) State capital of Hpa-an and beyond Peaceable dawn scenes at the rivers mouth
First class "A-Grade" protected forest on a Salween tributary threatened by the planned Mae Lama Luang dam, which would divert some 2 billion cubic metres of water from the Salween to send into the flood prone Chaophraya River of Thailand Yuam River, looking up from the edge of the refugee camp towards the site of the nearby Mae Lama Luang water diversion dam site.



Relocation of Mae Kong ka camp


Refugees were shifted from Mae Khong Kha Camp to the "A-Grade" forest area along the Yuam river in 2002(??) by the Thaksin government citing the refugees harmful impact on the forest in the Salween National Park, and alleged concern for their safety in the storm and flash-flood prone area. However, expressing concerns about the forest was duplicitous as much of the national park around Mae Khong Kha would be flooded by the dams, and the new refugee camp was in even better quality forest. New refugee huts crowded onto steep and unstable slopes
Good forest cut and burnt to clear space for the refugee camp in an area dangerously close to the border where pro-regime groups in the past have repeatedly attacked and burnt down refugee camps Closely packed huts on the steep slopes of the dry forest, through

 

 

take action! Sign the petition letter http://www.petitiononline.com/9202006/petition.html

 

http://www.salweenwat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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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민중의 인권현장] 버마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

[아시아민중의 인권현장]

버마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

군부의 대규모 토지강제징수에 고통 받고 있는 버마 민중들

슈에 묘딴(Shwe Myo Thant)/번역 - 이상희
플레이 레 씨는 2000년 초 태국 북부에 있는 카레니 난민 캠프로 도망나왔다. 버마 군인들은 플레이 레 가족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땅을 빼앗고, 플레이 레 씨에게 1주일 중 3일간 빼앗긴 땅에서 군인들을 위하여 농사를 짓도록 강요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곤 태국행 뿐이었다.

이는 플레이 레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버마에서 진행되고 있는 군사화와 그에 따른 토지 강제 징수로 고통 받고 있는 소수 민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버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사화

1989년 이후 버마 군부는 ‘군사력이 국력을 좌우한다’는 선전 하에 군사력 증강에 총력을 기울였다. 단기간 내에 급속히 진행된 군사화는 군부대와 군사시설의 전국적인 확장을 가지고 왔다. 특히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소수 민족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면, 1989년 이전에는 카레니 주(*)에 3개의 대대만 주둔했었다. 그런데 현재는 27개의 대대가 주둔해 있다. 16년 사이에 거의 3배 이상의 군사화가 진행되었다. 다른 소수 민족 지역도 비슷한 상황이다. 군부독재 기간 동안 국방비가 GDP의 30%-40%까지 늘어났다. 대부분의 예산이 군사시설의 근대화에 쓰이고 있다.

사진설명버마 국경지역에 있는 매써리 마을의 학교와 아이들.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버마 군인들의 토지 강제징수와 강제노동을 피해 고향을 떠나 국경지역까지 도망 나왔다. 아이들의 머리속에서는 강제노동을 위해 버마 군인들에게 끌려간 부모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군사화로 진행된 토지 몰수가 농민들의 생존권을 침해

그러나 부정부패와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버마 군부는 군인들의 월급이나 식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군부는 자력갱생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즉, 각 대대가 필요한 식량이나 기타 운영비를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지역의 사령관들은 군인들에게 가축을 사육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확보하라고 명령한다. 각 대대는 위 명령에 따라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필요한 경우 농민들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강제한다.

각 대대는, 다년생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100에이커의 땅과, 채소를 재배하기 위한 10에이커의 땅, 테미날리아 벨레리카(채소 일종)를 재배하기 위한 100에이커의 땅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1000마리의 암탉, 1000마리의 수탉, 10마리의 돼지, 5마리 염소, 10마리의 소, 12개의 연못을 위해 10에이커의 땅을 확보해야 한다. 한 대대를 위해 이만큼 필요하다고 하니, 대대가 늘어날수록 얼마나 많은 농민들의 땅을 빼앗을까.

이러한 군사화가 농민들에게 미칠 영향은 불 보듯 뻔하다. 인구의 약 60%가 소수 민족 지역이나 농촌에 거주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농사, 사냥, 채취, 벌목 등 농지나 산림이 주는 혜택에 의지해 살고 있다.

카레니 주 코이코에 사는 수레 씨는 ‘군대가 내 땅 7에이커를 뺏아 갔다. 그들은 1에이커 당 250짯의 보상금을 지급하였으나 그 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때때로 군인들이 토지 몰수에 대해 보상을 한다고는 하나 터무니 없는 금액을 지불한다. 수레 씨의 경우에도, 몰수 당시 1에이커당 시가가 15,000짯인데, 군부는 250짯만 지불했다. 그 돈으로 다른 경작지를 구입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군인들은 농번기나 수확철 등 농사일로 한창 바쁠 때, 농민들로부터 몰수한 경작지를 위해 주민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

토지몰수로 인해 전통적인 토지 소유 개념 파괴

아직도 버마 농촌이나 소수 민족 지역에는 근대적 토지 소유권 개념이 아닌 전통적인 토지 제도가 있다. 토지는 자연지역, 마을 공동산림, 전통보호지역, 성지 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독특한 관리, 또는 소유 시스템이 있다. 예를 들면, 카렌이나 카레니의 일부 지역에서는 개인이나 가족이 벌집을 포함한 나무만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는 법률적 개념도 아니고 법률 문서화 되어 있지도 않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관습일 뿐이다.

지역 주민들은 전통보호지역이나 성지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땅을 경외하며 보호한다. 이런 땅에서는 사냥이나 낚시, 벌목 등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버마 군부는 군사화라는 미명하에 토지를 강제몰수 하면서 공동체의 관습과 땅을 파괴하고 있다.

사진설명운동장과 학교, 기숙사, 그리고 몇 채의 집. 이게 매써리 마을의 전부이다.


민중들의 터전을 빼앗는 개발프로젝트

한편, 버마 군부는 인프라 구축이라는 미명하에 민중들의 땅을 빼앗고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 카레니 개발 연구 그룹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Dammed by Burmese Generals, http://www.salweenwatch.org/pub.php)는 카레니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로피타 수력발전소가 지역 주민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났고 물자원은 사유화 되었다. 더구나 이런 수력발전의 혜택은 버마 중부에 사는 일부 사람들에게 돌아갈 뿐, 지역 주민들과는 무관하다. 더 이상 사람들은 자유롭게 농사를 짓거나 낚시를 하거나 벌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소박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던 그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다.

계속되는 버마 군부의 폭력

버마 군부는 오늘도 계속해서 민중들의 토지를 빼앗고, 땅에 대한 권리를 위협하고 있다. 버마의 현행법 하에서는 이와 같은 버마 군부의 범죄행위를 고소하고 하소연할 길이 전혀 없다. 현재 버마에는 헌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버마 민중들에게 땅은 그들의 생명이자 삶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땅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지금까지 민중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반환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에 대한 그들의 관습을 인정해야 한다.

버마 민중들의 식량 안보와 진정한 평화는 탈군사주의화와 함께 지역과 소수 민족 지역의 토지에 대한 권리가 보장 될 때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 버마는 7개의 도와 7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7개 주는 그 지역의 주요 소수 민족의 이름을 따서 ‘카레니 주’, ‘카렌 주’, ‘아라칸 주’, ‘몬 주’, ‘샨 주’, ‘카친 주’, ‘친 주’ 등이다.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weekly&id=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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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인물 사진이란 인연 놀음이다&quot;

"인물 사진이란 인연 놀음이다"

[화제의 책] 이미지프레스의 <사람들 사이로>

 

 

같은 인물이나 장소를 찍어도 사진이 풍기는 느낌은 제각각이다. 찍은 사람의 생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아무런 설명없는 사진을 보다 보면 사진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프레임에 이 장면을 담았을까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단순한 풍경 사진이 아닌 인물 사진일 경우 보는 이의 호기심은 한층 커진다. 작가가 왜 그 인물을 선택했는지, 왜 그런 표정의 순간을 잡아냈는지.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들은 사진이 말해주지 않는 사진 속 인물과 작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혼자서 지어내 보기도 한다.
  
  오랜 시간 활동해 온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사람'을 주제로 기획한 작품들을 엮은 책이 나왔다. 작가들이 직접 쓴 사진에 얽힌 이야기들이 함께 실려 있어 작품에 대한 이해를 한층 돕는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집단 '이미지프레스'가 펴낸 <사람들 사이로>(청어람미디어 펴냄)는 '인물 사진'의 다양한 변주와 함께 작가들의 속사정을 들려준다. 2005년 '풍경'을 주제로 엮은 <여행하는 나무>에 이어 이미지프레스가 만든 두 번째 무크지(부정기 간행물)다.
  
  "사진 속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묻고 있었다"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기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를 담은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는 노순택 작가는 '작품 소재 중 하나'였던 두 마을에 어떻게 애정을 갖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또 전남 강진 남녘교회의 임의진 목사를 촬영하기 위해 숨박꼭질과도 같은 두 달여를 보내야 했던 김홍희 작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 "대추리에 사는 일흔아홉 살 강귀옥 할머니는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지만 이곳에서 산 지 어언 40년이 넘었다. 그때 대추리는 사람 사는 마을 같지 않았다. 미군 불도저에 집과 땅을 잃고 떠밀려 나온 주민들은 옛 대추리 옆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였다.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아 온 마을 사람들을 또 쫓아낸다니, 그건 안 될 일이여….'
  
  할머니는 들에서 우렁이를 잡다가 해가 뉘엿뉘엿할 때 사진관에 찾아왔다. 한평생을 들녘에서 살아 온 분이었지만, 고운 한복을 갈아입자 고생이라곤 모른 채 곱게 늙은 할머니만 같았다. 나는 2005년 여름 황새울사진관에서 찍은 할머니를 2004년 2월의 필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붉은 머리띠를 질끈 묶은 채 결연한 투사의 모습이었던 강귀옥 할머니. 인생의 황혼을 맞는 이 분의 머리에 붉은 머리띠를 동여매게 한 이 나라는 대체 제정신일까." (노순택) ⓒ이미지프레스

  
▲ "임의진 목사가 손님을 위해 잔솔가지들을 그러모아 군불을 땐다. 성질도 강직하고 술은 또 말술이라 사람이 꼬이는 집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손님을 맞는 태도가 극진하다. 부엌 가득 구수하고 은은한 소나무 향기가 퍼져나간다." (김홍희) ⓒ 이미지프레스

  "어디 한 곳이라도 마음의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었다"
  
  우연히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혼혈인'이라는 주제를 잡았다는 이재갑 작가의 작품 동기 또한 만만치 않다. 그는 지난 14년간 혼혈인 1세대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1992년 프로젝트 하나가 끝난 후 슬럼프에 빠져 있던 그는 집에서 우연히 모 TV의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가수 박일준 씨의 인생역정을 듣게 됐다고 한다.
  
▲ "왜관에 살고 있는 커티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넨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습관처럼 카메라를 준비해서 어머님이 계시는 병원으로 향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그러나 어머님이 잠들어 계신 곳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다. 불편해서가 아니라 혼자 어머님 옆을 지키고 있는 넨시의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순간 내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4년 동안 무엇을 위해 사진작업을 한 것인가, 깊은 고민을 하게 했던 시간이었다." (이재갑) ⓒ이미지프레스


  "진행자의 질문에 답하는 중, 박일준 씨는 어렸을 때 우유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유는 '어린 마음에 계속해서 마시면 피부가 하얗게 된다고 믿어서….'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방청객들이 '하하하' 큰소리로 웃는 모습들이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작업을 시작한 지 6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때야 비로소 혼혈인 '형님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형님 한 사람, 한 사람 어디 한 곳이라도 마음의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 동안 내면의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는 형님들의 모습은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목회자의 길처럼,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해 결코 부정적이거나 힘겨워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들을 촬영했던 작가는 작업과 인간적인 도리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던 순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처음 만난 혼혈인과의 만남에서, 오랜 시간 알고 지낸 혼혈인의 모친상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사진가가 된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작가에게는 촬영 모델들의 아픔이 이미 전이돼 있었다. 사진 속 인물들이 카메라를 편하게 응시할 수 있었던 건 작가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작가를 통해 또 다시 이어지는 사람들
  
  이처럼 <사람들 사이로>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촬영 인물을 만나면서 느낀 인간적인 고뇌와 일화들을 통해 그들의 작품이 단순한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 인연의 결과물이었음을 고백한다. "사람 얼굴 찍는다는 것, 알고보니 인연 놀음이다"라는 김홍희 작가의 말은 사진작가들이 느끼는 바를 잘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 속 인물들과 한껏 친숙해진다. 사진 속 인물들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들은 독자들을 응시하는 눈빛을 통해 자신들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묻는다.
  
  이제는 작가를 통해 이어진 사진 속 인물들과 독자의 인연이 시작될 것이다. 그 인연을 지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이제 사진 속 인물들과의 대화에 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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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이지 않는 총성…험난한 '팔 통합정부'의 길

끊이지 않는 총성…험난한 '팔 통합정부'의 길

<기고> 이스라엘 점령 40주년 팔레스타인을 가다(3)

 

팔레스타인 현지시간 29일 오후 3시,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이며 무바다라(Mubadara)당 총재인 무스타파 바르구티를 만나기로 했다. 2006년 6월 하마스와 파타 간의 분쟁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바르구티는 내분을 종식시키고 통합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 협상안을 만들고 협상을 주선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무바라당 부총재인 칼리드 사이피가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크리스마스호텔에서 라말라로 필자를 안내했다.
  
  바르구티를 만나기에 앞서 우선 하마스와 파타의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라말라에 있는 한 호텔에서 정오에 열린 회견은 무바다라당이 주도한 것으로 총재인 바르구티를 비롯해 타이시르 타미미 이슬람 최고 법정 최고 판사와 아탈라 한나 그리스 정교 최고지도자 등이 참가했다.
  

▲ 팔레스타인 내분의 봉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프레시안

  이들은 "즉시 파타와 하마스의 싸움을 멈추고 상호 협상하라. 이 싸움은 점령 세력에게 도움을 줄 뿐이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의 유대화를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 파타와 하마스는 형제들의 피를 부르는 싸움을 즉각 중지하라.
  · 파타와 하마스의 내부 투쟁을 중지시키기 위한 대중 시위와 회의를 개최하자.
  · 팔레스타인 다른 파벌들은 이 내부 투쟁에 참가하지 말아야 한다.
  · 예루살렘은 모든 종교와 파벌들이 공존하는 곳어이야 한다.
  · 모든 갈등은 무력이 아닌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만 한다.
  · 우리는 화해를 위해 모든 사람들과 접촉할 것이다.
  · 통합정부 구성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기자회견 후 2시에 라말라 중심가에 다시 모인 이들은 거리의 주민들에게 내부 투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무바다라당이 주도하는 이 시위에는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 추산됐다.
  
  독립 대신 시민권 획득?
  
  이날 3시 라말라 중심가에 위치한 바르구티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필자를 만나자마자 "2006년 6월 말 막바지에 이르렀던 통합정부 구성 작업이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안지구 공격으로 무산됐다. 협상이 거의 완료되던 지난 11월에도 이스라엘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실패했다. 통합정부만이 내부 분쟁의 해결책이다"라고 입을 열었다.
  
▲ 29일 오후 라말라에서 열린 시위에서 무스타파 바르구티(마이크를 쥔 사람) 무바다라당 총재가 내분의 종식을 요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필자가 '대부분의 세계 미디어들은 하마스가 이스라엘과 대화를 거부하고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 말하자 바르구티는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모든 파벌들은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원한다. 그러나 이 협상은 1990년대의 오슬로 협상이나 2003년 '로드맵' 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일대일로 하는 협상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참가하는 다자협상이 되어야 한다. 하마스를 포함하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파벌들은 1967년 전쟁 이전의 경계를 국경으로 팔레스타인 땅 전역의 22%, 즉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이스라엘은 이미 1991년 국제사회가 참가하는 다자협상인 마드리드 협상을 거부했다. 그 대신 이스라엘은 1993년 팔레스타인 협상팀을 자치정부 전직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와 현직 수반인 마흐무드 압바스로 교체시키면서 양측의 일대일 협상인 오슬로협상을 시작했다.
  
  바르구티 총재는 이스라엘이 거부한 다자협상의 팔레스타인 협상단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이스라엘은 다자협상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필자의 지적에 "그렇다면 해결 방안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필자가 "팔레스타인땅 22%에 국가 건설을 요구하는 '두 국가 안'보다는 차라리 이스라엘 내에서 이스라엘인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요구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답하자 그는 "사실 그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인구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인들과 거의 동등하다. 그러나 지금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두 국가 안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논의를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고 답했다.
  
  실제로 주변국에 거주하는 난민까지 포함하면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현재 이스라엘 인구의 거의 2배다. 따라서 시민권 부여에 대한 논의는 팔레스타인인들보다는 이스라엘인들이 거부할 가능성이 훨씬 크고 따라서 양 측 누구도 시민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내분의 총성
  
  마흐무드 자흐라 팔레스타인 외부 장관 29일 저녁 파타와 하마스가 공격을 멈추고 납치된 모든 대원들을 상호 석방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파타와 하마스도 각각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동예루살렘 국제문제 연구소(PASSIA)의 소장 마흐디 압둘 하디는 30일 "하마스와 파타의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지만, 오늘 아침 다시 서로 공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파타와 하마스 지도부는 휴전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지만, 파타가 하위 파벌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겨울 비가 내리는 30일에는 무바다라, PFLP, DFLP가 공동으로 주도하는 연합 시위가 라말라 중심가에서 또 열렸다. 이날 시위에는 17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각 정당 혹은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거리 시위를 거의 매일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때때로 공격하고,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역에서는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장하는 사업을 중단없이 계속하고 있다. 내우외환에 직면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처지를 상징하듯 비 내리는 팔레스타인의 공기는 싸늘하고 추웠다.

 

홍미정/프레시안 기획위원,한국외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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