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4/09

파견법 개악 저지전선에 대한 단상

      지난 9월 10일에 정부의 파견법, 기간제 노동법 개악안이 발표된 후 노동운동진영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매일노동뉴스에 의하면 발표전날인 9월 9일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과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이 열린우리당 이부영 당의장과 10일로 예정되었던 당정협의를 연기하고 노동계의 의견을 수렴하기로 합의한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발표된 개악안이라는 점에서 노동운동진영을 더욱 경악케 하고 있습니다. 이에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까지 노동부의 노동법 개악안에 대해 비판을 목소리를 더함으로써 향후에 노동법 개악저지투쟁은 노동계 뿐만 아니라 전사회적 영역으로 확대 발전될 여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10월 10일로 예정되었던 양대노총 비정규직 대회 등 기존에 하반기 투쟁계획으로 상정했던 투쟁 일정등을 압당겨 진행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파견법 개악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진영의 노동법 개악저지전선이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하반기 정세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현 상황은 정부의 파견법 개악에 맞선 노동운동의 저지투쟁으로 급격하게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저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고민의 단상이나마 한번 정리볼까 합니다.


정부의 노동법 개악의 방향성


  개악된 노동법의 해악성은 이미 민주노총을 비롯한 각각의 운동진영에서 발빠르게 분석,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식 네거티브 방식의 파견법 도입을 통한 파견업종의 전 업종으로의 확대, 기간제 노동의 사용기한 3년 연장등등...

  그런데 이번 파견법 개악안에서 핵심적인 것은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 대한 파견법 적용이 제외되었다는 점입니다.(사실 이것도 예상되었던 지점이었지요) 이번 파견법 개악안의 방향은 지난 근기법 개악때와 같이 조직력과 투쟁력이 살아있는 제조업 정규직 노동자와 조직적으로 아직 투쟁력이 취약한 비제조업 비정규직 노동자를 갈라치기 한다는 정부의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이런 개악 방향에 대해서는 최근 일본 파견노동연구회 오사카 대표 와키다 시게루씨가 한 운동단체와의 인터뷰에서 제시한 일본의 예를 참고하면 좋을 듯 합니다. 한국정부의 파견법 입법 방향은 일본의 파견법 적용 예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의 예봉을 피하고 단계적으로 각계격파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정부에서 노동법을 개악할 때마다 정형적으로 사용하는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근 현대자동차에 대한 불법파견진정에서 8개업체에 대해 불법파견확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 놈들이 거져 줄리가 없는데 순순히 불법 파견을 인정할 걸 보면 이도 역시 파견법 저지 전선에서 제조업 대공장 투쟁을 사전에 정지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한 듯 합니다.

  법안에서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노동3권 보장이 제외된 것도 특징적입니다.(이 내용은 이미 향후 설치될 노사정위원회에서 다루기로 넘긴 사안이었죠) 지난 화물연대 파업에서도 드러났듯이 특수고용노동자의 투쟁도 정부로서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겠죠.


... 신자유주의 시대에 와서 특히 강화도니 전략인데,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항상 가장 약한 곳의 노동자를 먼저 공격한다.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중소영세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등...

  그들이 그러한 전략을 취하는 중요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추고 있는 조직노동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미조직 노동자들을 먼저 공격하여 무너뜨린 후에 조직 노동자들을 공격함으로써 전체 노동운동의 단결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사이드(피플타임즈), "하반기 핵심이슈는 비정규개악안을 둘러싼 정부와 노동계의 격돌!"에서)


  타당한 지적입니다. 사이드 동지가 양동전략이라고 표현한 정부의 노동정책은 산업 영역별로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갈라치고 분리타격한다는 방식입니다. 현재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 개악입법은 작년부터 화두가 되어온 노사관계 로드맵이라는 전체 노동법 개악의 방향성 속에서 한 부분을 점하고 있습니다. 결코 전체 개악안을 한큐에 통과시키겠다는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지난 97년 노동법 날치기 개악 때도 드러났듯이 자칫 노동법 개악이 전체 노동자의 연대투쟁으로 들끓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다는 심산인 것이죠. 산업별, 업종별, 정규직 비정규직등으로 분리,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깨고 관철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에서 최초 공격의 시발점으로 잡고 있는 것은 투쟁력이 취약한 비정규직, 그것도 비제조업입니다. 일본의 예에서도 드러나듯이 일본에서 파견법을 제조업을 포함한 전 업종으로 확대하는데 10여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10년동안 전체 노동조합의 연대와 투쟁력을 서서히 약화시키면서 결국 투쟁력이 강한 노조를 최종적으로 고립무력화시키는 방식입니다. 남한에서도 정규직 이기주의라는 광폭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 정규직 운동의 발목을 묶어놓고(상반기 임금때와 같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행동을 수동화시키고) 약한 부위부터 현장 통제를 기반으로한 법제도개악의 목줄을 죄어오고 있습니다.

  파견법이 전산업으로확산된 일본의 예를 보면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합니다. 99년이후 4년만에 파견노동자 수가 100만명에서 200만명으로 2배로늘어났으며 93년부터 2002년까지 쟁의행위건수는 657건에서 304건으로, 노동손실일수는 11만 6,003일에서 1만 2,262건으로 노동운동의 투쟁력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일본노동운동이 정부의 법개악을 제도로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일상적인 과로사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정부의 개악입법안을 둘러싼 파견법 저지 전선은 단순히 비정규직에 한정된 문제가 아닌 전체 노동계급운동의 사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전체 노동운동이 개악된 파견법을 저지하지 못하고 자기 사업장지키기라는 조합주의에 빠져들면 일본 노동운동처럼 정권에 의해 노동운동 자체가 무력화 당하는 수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차별철폐의 관점으로 노동법 개악을 막아낼 수 있을까


  지난 7월 12일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공동으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을 발의했습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원내입성이후 변화된 투쟁양태를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정부의 노동법 개악 흐름을 미리 파악하고 노동운동 진영이 법개정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선제출함으로써 법개악 전선을 우선적으로 선점한 점, 법개정 투쟁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선전하는 효과를 가져온 점은 온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정부가 개악안을 발표하면 부랴부랴 노동운동의 입장을 마련하고 국회 외각에서 청원하는 과거의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래서 인지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이 발표되자, 비정규직 연대회의는 즉각 환영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8월 26일 대표자 회의에서는 하반기 투쟁의 중심적인 목표로 파견법 개악저지투쟁과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결의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입법안은 파견법 저지전선의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한계 또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면한 투쟁의 방향이 정부의 파견법 저지 전선임을 분명히 하고 이것에 노동운동의 역량을 집중시키는 것은 분명히 옳지만 이 투쟁이 어떠한 방향성과 내용을 담아할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순간인 것 또한 분명합니다.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 투사들은 당장의 전선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파견법 저지 투쟁의 장기적인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라 현재 제출되어 있는 민주노동당의 입법안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법에 대해서는 문외한 이라 분석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나마 제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98년 민주노총 국민파 지도부인 배석범이 정리해고, 파견법을 직권조인한 이래 노동운동진영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성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졌습니다. 하나는 기왕 합의해준 정리해고, 파견법의 틀거리 하에서 점진적으로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고 정규직, 비정규직간의 차별을 해소하자는 개량주의 주류 노동운동의 입장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투적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또는 비정규직 철폐의 관점으로 비정규직 투쟁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현재 민주노동당이 제출하고 있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의 중심기조는 주류 개량주의 진영의 차별철폐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차별철폐라는 관점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관점이 근본적으로 대정부 또는 대자본과의 상층협상과 노사정 위원회와 같은 사회적 합의주의의 필요성을 필연적으로 불러 온다는 점입니다. 이는 국민파를 비롯한 노동운동내 개량주의 진영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계급협조주의적 노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노동법 개악 저지를 얘기하지만 그들이 얘기하는 노동법 개악저지란 자본의 저지 음모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고 정말 노동계급적인 입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노동법 개악저지의 상이란 국회를 중심으로 하는 원내외 압박시위, 대국민 여론전을 통해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적당한 지점에서 정부와 합의를 보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법 개악저지가 아니라 


철폐한다는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한 권리가 개선되는 시점에서 항상 협상과 타협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두개의 전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국가보안법 폐지론에 동의하기 어려운 몇가지 이유

 

국가보안법 폐지론에 동의하기 어려운 몇가지 이유

- 데이모스(펌)

  

  국가보안법 폐지/개정의 논란히 전사회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일종의 {지각현상}인 것 같다. 국가보안법 폐지하자고 플래카드 거는 것도 그 법에 저촉된다는 골때리는 현실이 바로 엊그제이다. 그리고 그 국가보안법에 의해 감금되고 감시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헌법적으로 위헌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법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가행위, 혹은 개인들과 개인들의 권리와 의무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규칙같은 것이다. 그 법이 위헌이라면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지만, 위헌이 아니라고 해도 법의 필요성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문화되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위헌이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법의 개폐는 의회의 일이며, 보다 근원적으로는 인민의 이해라는 것에 귀속된다. 아무리 좋은 법도 인민의 이해에 반하거나 혹은 인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라져 마땅한 것이다. 하물며 그동안 온갖 자의적 해석과 정치적 집단의 이득을 위해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었던 그 국가보안법이 존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개정으로 양분되어 있는 현재의 정치적 대립에서 나는 폐지론에 손을 선뜻 들어주기가 어렵다.

  사회적으로 무효화되고 있는 법을 폐기하자, 만일 재활용할 부분이 있다면 형법상에 반영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폐지후 보완론과 아직도 유효하다, 북한이 적화통일을 추구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유지-개정론의 대립은 {명목성}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준거하고 있다. 이 {명목성}에 대한 입장은 국가보안법이 {국가안보}를 규정하고 있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러있다. 사실상 폐지후 보완론이나 유지-개정론이나 모두 명분, 명목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명목, 명분이란 본디 실제, 실리에 준거한다. 유지-개정론자들은 국가보안법이 북한의 적화통일 책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다는 {명목}을 주장한다.

  과연 그러할까? 대북관계에서 국가보안법에 우선하는 것은 {정전협정}이었다. 북한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진술은 국제적인 협약관계 등과 관련되어 전혀 무의미하다. 때문에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은 {정전협정 위반}이라는 항목을 통해서 쟁점화되는 것이다. 즉 국가보안법이 {북한의 적화통일}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럼 소위 간첩, 선동의 문제도 어떨까.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변란}을 도모하는 모든 행위들을 규제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한다. 그런데, 실제 이 국가보안법에서 규정한 {국가}란 무슨 국가일까? 5.16 쿠테타를 통해서 헌법적 정부를 전복한 {국가}는 이 국가에 해당할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통해 {정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고 몰아낸 4월 혁명은 {변란}에 해당할까? 또는 87년 6월의 항쟁은?

  이런 {변란}들은 찬양고무하거나 선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물리적이고 집단적인 대중행동이었다. 이 사건들에 대해서 {국가보안법}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즉 국가보안법은 지금까지 국가에 심각한 위기상태가 왔을 때,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던 것이 진실이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은 평화적 시기에, 국가에 반하는 대중들의 행동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던 시절에, 인민을 투옥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역할을 해왔다. 실제 무장한 대중들의 행동이었던 5월 광주는 어떠했는가? 그자리에 국립묘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는가.

  국가보안법이 합헌적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국가보안법은 그 소기의 역할을 달성하고 있지 못하다. {국가 안보}가 위태로울 때, 국가보안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한편 폐지후 보완론은 {국가보안법}의 오,남용을 지적한다. 즉 국가보안법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이 그동안 어떻게 이용되어 왔는가를 말이다. 이런 논리는 {명목}에 걸맞지 않는 실제를 문제삼는다. 그 때문에 그들은 형법상 보완을 주장하고 나선다. 민주수호법 같은 식의 새로운 법을 만들자는 민주당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폐지후 보완론자들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지난날의 역사를 {법의 폐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실제, 그 역사속에서 고통받고 죽어가거나 억압받았던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으로 끝내자고 한다. {국가안보}라는 지고지상의 명목을 위해서 논란이 많고, 부실하게 운영되었던 {국가보안법}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국가안보}가 중요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보완론자나 유지-개정론자들 모두 국가보안법의 명목에 매달린다. 하지만, 실제 국체를 유지하며, 국체의 존재근거를 밝히는 것은 바로 {헌법}이다. 국체에 적대적인 집단, 개인, 국가들이 어떠할지라도 헌법은 그것과 무관하게 헌법적 주권자들의 계약에 근거해서 국체의 존재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국가안보}의 실체는 인민의 계약을 유지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저 적으로부터 방어한다. 혹은 반국가적 단체로부터 정부를 보호한다는 수준의 기술적이고 절차적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국가안보를 얘기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얼마나 인민의 계약을 존중하는지 혹은 국가보안법 폐지로 역사를 깨끗이 정리하려는 열린우리당이 얼마나 인민의 계약을 존중하는지 확인하자.

  그들이 국가안보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적국도 아닌 이민족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었나? 파탄난 경제, 피폐한 경제생활에 신음하는 인민들의 삶에 한푼이라도 보태준적이 있던가? 경찰은 군대는 국가의 관료들은 지금 거리를 방황하는 인민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고 했다. 아니, 이렇게 폐지되어서는 안된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린치와 권리의 박탈, 고통들의 실체가 낱낱히 고발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하고 모든것을 빼앗겨버린 사람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정당했다고 변론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변론이 옳지 못하며, 옳지 못한 변론을 한다면, 그에 따른 응당한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국가보안법은 반통일 악법인가?

[PoS 펌]국가보안법은 반통일 악법인가?

*** 최근 국가보안법의 정가의 쟁점이 되고 있는데, PoS라는 분의 글이 진보누리에 등록되어 있어서 가져왔다. 일독하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국가보안법은 반통일 악법인가?



1. '빌미'라는 단어


  분명 한국사회에는 아직도 '북한으로부터의 상존하는 위협 때문에 남한 민중의 민주적 권리는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들이나 그러한 목적의 법과 제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사회 내에서 북의 위험 때문에 민중의 정치적 권리가 제약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제도들이 듣는 평판은 그다지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이나 제도들은 오래 전부터 '북한의 위험'에 대한 사실관계의 문제 이전에 그 동기와 목적의 '진정성' 자체를 의심받아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북한의 위험을 이유로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는 법과 제도 들에 대한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평가는 무엇일까? 아마도 '과거 독재정권들이 남북한 대치상태를 빌미로 삼아 억압적, 비민주적 제도와 정책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여기서 키워드는 다름아니라 바로 '빌미'라는 단어이다. 일반적으로 현대 한국인들,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은 '빌미'라는 단어를 상대의 행동에 대해 그 동기나 목적이 불순하다고 여길 때 사용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냉전적 민중통제'에 대한 이러한 대중적인 불신이 없었다면 어쩌면 한국의 반공군사독재는 휴전선 '이북'의 맞수와 함께 지금까지도 장수를 누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 '적대적 상호의존'의 기원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이 상대로부터의 위협을 이유로 억압적, 비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해 왔던 역사를 흔히 '적대적 상호의존'이라고 불러왔다. 이러한 '적대적 상호의존'의 과정을 통해 자리잡은 강압적인 민중통제 질서는 '국가간 폭력의 내부화', 혹은 '냉전의 내부화 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일체의 정치적, 사회적 저항을 외부세력의 '비정규전'으로 몰아버릴 수 있는 냉전적 민중통제는 남북한의 지배세력 모두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정치수단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전쟁 후 50년 이상 남북한 양국 내부에서 사회 전체가 준 전시상태, 병영적 상태로 치달은 것을 냉전의 영향 속에서 남북한 양국이 서로에 대해 가하는 현실적 위협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분명 냉전적 민중통제의 성립과 유지는 남북한 지배세력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상황을 일방의 '의도'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것은 결국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일종의 '음모이론'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역사상 '음모이론'의 고객이 제대로 된 '좌파'였던 일은 별로 없다. 즉, 남북한의 정권이 군사-정치적 대치상태를 통해 정치적 이익을 얻어왔다는 '적대적 상호 의존론'의 정치적 효용은 '햇볕정책'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으로 끝나듯 말이다.

따라서 이른바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라고 일컫어졌던, 남북한 양국에서의 남북대치상태를 '빌미로' 벌어진 병영적 민중통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배집단이 그러한 의도를 지녔다는 것 뿐 아니라, 그러한 폭력적 억압적인 민중통제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가능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럼 일단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대한민국에서 남북대치상태가 민중통제의 '빌미'로 어떻게 활용되어왔는가를 간직한 역사유산을 꼽으라면 아직까지도 법전의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들 수 있다.

  '냉전시대의 억압적 유산'의 대표격으로 간주되는 국가보안법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한국사회에서 발생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체제적 비판이나 저항은 근본적으로 '북한의 공작'이거나 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세계에서 한국사회 내부에서 어떤 진지한 체제적 비판이나 저항이 발생할 가능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대중에게 학살과 공포의 기억으로 남은 '한국전쟁'을 정치적 담론으로 영속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가간의 전면전에서 철저하게 객체화된 존재로 동원과 학살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한반도 민중의 경험 속에서 한국전쟁은 '체제와 이념의 문제'가 민중의 자발적 행동에 의한 사회적 투쟁이 아니라 국가간 무력 대결의 문제로 치환되어 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보법으로 대표되는 냉전적 민중통제가 실제로 성립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한국전쟁을 거치며 좌익세력과 자율적 민중조직의 '물리적 절멸'에서, 즉 자본에 대한 일체의 대항세력이 물리적으로 말살됨을 통해 확립된 일방적인 정치, 사회적 세력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이 말살의 기억이 한국사회에서 국보법으로 대표되는 냉전적 민중통제, 국가간 폭력의 내부화의 알파요 오메가, 그 성립의 조건이며 동시에 목표이다. 즉, 냉전적 민중통제의 본질은 다름 아니라 자본에게는 축복이요, 노동자 민중에게는 저주인 한국전쟁을 통해 확립된 일방적 세력관계를 영속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담론적 실천에 있다.


3. 유령의 시대


  체제 내적인 모순을 국가간의 대결로, 하나의 '전쟁행위'로서 대중의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체제에 대한 비판, 저항 세력 또한 과거의 기억, 전쟁의 두려운 기억 속에 갇힌 '과거의 유령'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유령이 되려면 우선 죽어야 하는 것이다. 즉 대중의 동시대의 현실 속에 그 살아있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자. 이를테면 한때 서유럽의 많은 공산주의 정당들은 모스크바의 노선을 맹신하던 스탈린주의 정당들이었다. 하지만, '소련'을 진짜 대안으로 여기는가와는 다소 독립적으로 현실의 이해에 의해 상당수의 대중은 그 '스탈린주의 공산당'을 지지했다. 또한 반대로 자국의 대중에게 스탈린주의적 전망이 대안으로 잘 받아 들여 지지 않는다는 인식은 결국 공산당들 자체에게 이를테면 '유로코뮤니즘'으로의 변화 등등을 발생시켰다. 이런 동시대적 상호작용 속에서 누군가 '공산당'이라는 것과 '간첩'이라는 것을 동일시하는 주장을 했다면 웃음거리 밖에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즉, 한국 사회를 사는 대중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적의 공작원'이라는 '유령'을 재생산하는 국보법식의 논리는 대중과 상호 작용하는 체제적 비판 세력이 부재하는 상황에서만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유령'의 일반적 기능이 그러하듯, 그것은 끊임없이 반추되는 악몽으로서 전쟁의 공포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고립을 지속시키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오늘 이후로 좌익은 모두 간첩'이라는 주장이 현실의 힘을 지니려면 대중에게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좌익이라는 사람들은 죽거나 월북한 사람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다. '70년대 반공드라마의 한 토막처럼, 월북했다고 알고 있는 친구나 친척이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경우를 빼고 '좌익인사'를 대면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나 '반체제=간첩'의 등식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잊어버렸는가?


  하지만 오늘날 국가보안법은 반쯤 사문화된 법률이다. 법 집행이 중단된 것은 아니지만, 대중은 그 법을 별로 두려워하지도, 정당한 것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국보법이 이런 반신불수 상태가 된 것은 별로 최근의 일도 아니다. 남북정상회담이나 '6.15 공동선언' 같은 건 기대조차도 하지 않던 시점부터 국보법은 대중에게 잊혀졌다. 국보법은 그 전성기에는 '막걸리 보안법'이나 '남산으로 끌려간다'가 일상적인 농담이 될 정도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존재였다. 대체 그동안 '통일'이라도 되 버린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남북한 정상이 악수라도 한 번 하고 사진이라도 한 장 찍는 수준의 남북관계 변화는 대중이 국보법을 까먹어버린 한참 후에야 벌어진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국보법이 대중의 망각 속의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한 시점을 사실 기억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주욱 진행된 과정인 것이다.

  국가보안법, 그 법을 만들어낸 '반공군사독재'의 핵심논리는 다름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저항, 특히 자본의 지배력에 대한 저항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군사독재는 자신이 결정적 위기에 처한 '87년에 - 광주항쟁을 간첩들이 사주한 폭동이라 매도했던 - 북한이라던가 간첩이라던가 하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100만의 시위와 그보다 더 충격적인 300만의 파업을 차마 '간첩이 사주'한 것이라 주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사주'로 백주대낮에 전국적 시위와 파업이 벌어지고, 그것이 자신들의 정권연장 구상을 위협할 정도라면, 날이면 날마다 '안보'와 '북의 위협'을 떠들어온 군사정권 그 자신들이야말로 '간첩'이 아니면 '바보' 그 둘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6월 항쟁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의 표출이 되었고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소외된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가 된 것이다. 물론 그 후로도 최루탄과 곤봉세례는 계속되었고, '조직사건'에 따른 '국보법 위반' 구속자도 계속 존재했지만, 더 이상은 막걸리 보안법과 같은 정치-사상적 탄압에 대한 내면화된 공포가 사고의 준칙으로 대중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5. "Size Does Matters"


  내적인 모순을 남북한의 국가 간 대치로 떠넘기는 국가보안법적 논리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인 모순이 대중적 저항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 무력해졌던 것이다. 이미 지난 80년대 후반이래 우리가 경험해온 역사적 현실로서 이 과정의 핵심은 '양의 축적'에 있었다. 일정한 임계질량을 넘는 핵분열 물질의 축적이 원자폭탄 제조의 핵심이듯 말이다. 물론 필요한 것은 '임계질량 이상의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이지 아무거나 모은다고 핵분열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민주적 제 권리'와 '생존권'이라는, 대중의 구체적 '생활의 필요'에서 출발하는 저항의 양이 '임계치'를 넘을 때 비로서 국보법적 논리는 자기 스스로의 허구의 무게로 붕괴된다. 국보법으로 대표되는 냉전적 민중통제에 대한 여러 해석들, 여러 접근들이 분명 존재했지만, 결국 민중의 구체적인 삶의 필요, 구체적인 권리가 걸린 정치적 행동만이 '국가보안법적 논리'를 무력화 할 - 단지 '비판의 무기'가 아니라 - '무기의 비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뒤집어 말해서 남북한 관계 그 자체는 물론, 남북한 관계의 상황에 대한 '해석'의 칼자루까지 기본적으로 남북한 양국의 국가권력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적 행동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절박한 필요에서 출발한다는 확신만이, '간첩의 사주'나 '적국의 비정규전'을 우스개 소리로 전락시킬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절대로 북의 공작원일 가능성이 전무한) 순도 100%의 대한민국 국민이며, 다른 어떤 것이 개입할 필요도 없는, 피부로 체감하는 자기 삶의 비인간적 현실에 대해 대항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대중에게 '공작'을 운운하는 순간 지배집단의 주장들은 총체적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치적 자각의 경험들의 총량을 지속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느냐가 이 과정의 성패를 가늠했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과 자각의 지리한 시초 축적의 과정에는 당연히 '80년대 진보세력이 존재한다.) 그 총량의 지속적, 상황적 축적이 임계점을 돌파해서 민중의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의 문제가 철저하게 '국내문제화' 되었을 때 냉전적 민중통제는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나의 주장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한가지 자문을 해 보라. 지금 민주노동당에 이른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해결되었던가? 만일 당신이 '통일운동'의 객관적인 정치적 효과를 과장하는 '주사-NL'류의 입장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노동자운동이나 진보정치운동에 그 '통일운동'이 별다른 효과를 낸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뭔가 좀 황당스런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즉,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은 아마도 '그냥'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자본주의의 모순을 '주적'으로 삼은 노동자운동이나 진보정치운동은 적어도 '87년 이후로는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라는 걸 그다지 심각한 고민의 대상으로 삼지 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옛 노래가사처럼 그저 '깨어지고 부서져도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걷다 보니 '적들의 목전에' 다가서 있던 것 아닌가?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의 유령을 굳이 붙잡고 싸울 이유도 없었고, 그다지 싸운 적조차 드물다. 그럼에도, 아니 도리어 그 때문에 우리는 그 냉전의 유령에게서 거의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6. 거울속의 유령


  대한민국의 (또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노동자·민중에게 국보법과 같은 냉전적 민중통제 논리의 핵심은 '나라를 지키는 것'도, '통일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국보법과 같은 냉전적 민중통제는 한국전쟁이 남북한의 지배세력에게 내려준 축복을 영속화 시켜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자율성을 박탈하는데 핵심이 있는 존재로 다가올 뿐이다.

내부의 저항을 '간첩과 다름없는 것'으로 둔갑시키는 냉전적 민중통제의 논리는 실제의 간첩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한민국의 자국민을 상대로 할 뿐이다. 국보법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주장은 그 나라를 자국민에게서, 자국 민중의 가능한 민주적 결정에서 지킨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대체 그 나라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정치적 재갈을 물려 지켜지는 나라는 적어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일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이 위험스런 적이냐, 함께 할 동반자냐, 심지어 따라 배울 모범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대한민국 민중의 경제적, 정치적 제 권리는 그딴 외교적 문제와는 무관하게 보장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다. 북한을 논하고, 남북관계를 논하고, 무슨 통일을 언제 어떻게, 아니 할건지, 말 건지 자체까지도 모두 그 다음의 문제, 특히 대한민국의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이들로서는 대한민국 노동자, 민중의 이해에 따라 평가할 여러 문제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국가보안법은 그저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 민중의 입에 부당하게 채워져 있는 반민주적, 반인권적인 정치적 재갈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이 '반통일 악법' 이라던가 '통일운동이 잘되어야 민주화가 된다'는 식으로 대한민국 민중의 민주적 기본권을 남북관계의 상태와 연루시키는 발상은 그 충심과 무관하게 사실은 국가보안법식 논리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의 정도가 남북한 긴장의 종속변수라는 냉전적 유령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단지 '무시'의 대상일 뿐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의 존재 유무를 논하는 것은 여전히 신학적인 논쟁에 불과한 것이다. '유령'을 퇴치하느냐 아니면 그 한을 풀어주어 승천시켜 주느냐를 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정체가 뒷산에 고구마를 숨겨둔 만득이네 어머님인 걸 확인하면 족한 것이다.


7. '조선로동당' vs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


  때문에 나는 '80-90년대 '공안사건'중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은 다름아니라 '남한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즉, '사노맹 사건'과 '국제사회주의자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는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참 싫어했었다. 그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와, '공안사건'으로서 그들이 관련된 사건의 의미를 평가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사노맹 사건'은 분명 전형적인 '80년대 이후 운동권 조직사건'에 해당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무기 혹은 사형이 언도된 공안사건은 많았다. 그러나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등 이전의 중대 공안사건들의 주역들이 본질적으로 극히 제한된 범위의 활동에 국한된 '비밀결사'에 가까웠다면, '사노맹'은 그리 '인기'있는 세력은 되지 못했어도, 어쨌거나 노동운동, 학생운동등 대중운동, 사회운동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던 '80년 이후 운동조직'의 대표적인 세력 중 하나였다. 그리고 80년대 이후의 운동조직들이 걸었던 행보가 그러했듯, '최대규모'의 조직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선을 따르던 운동세력들을 역사의 뒤편으로 보낸 것은 탄압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선 전환을 통해서였다. 그 핵심인물이던 백태웅, 박노해씨는 지금 모두들 잘 지내고 있지만, 혹시 그들의 죄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는지?

  그들의 죄목은 '이적단체 구성죄'가 아니었다. 그들의 죄목은 '반 국가단체 구성'이었고, '반 국가단체의 수괴'였다. 그것이 국보법의 논리상 무엇을 뜻하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이다. 즉 적어도 법률적으로 백태웅, 박노해씨는 김정일과 동급이다. 하지만 안기부의 기소내용에서 조차 '사노맹'은 '6.25이후 최대의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세력'으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누가 반잠수정 타고 와서 사주하지 않아도, 그저 한국사회에 발붙인 자생적 활동만으로 '반 국가단체'의 레벨에 등극하는 세력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 법원이 인정 한 것이다.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전략'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국가보안법적 세계관은 말짱 헛소리가 된 것이다.

  그 얼마 전에 발생했던 '국제사회주의자 사건'은 다른 의미에서 국가보안법적 논리의 자기 파탄을 과시한 소극이었다. 즉 사건이 발생한 당시, 오로지 '북한 탓'으로 점철된 국가보안법을 가지고서는 '북한 역시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이적단체'로 조차 규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이 '이적단체'의 '영예'를 얻게 되는 것은 국가보안법이 좀더 논리적으로 무질서하게 부분 수정된 후 다른 사건을 통해서였다. 분명한 사실은 '북한정권 역시 노동자 계급의 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적단체'로 규정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은 '그래 난 사실은 그냥 사상탄압, 인권탄압 법이다, 어쩔 테냐'는 논리적 자포자기 상태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정치적 저항, 특히 자본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북한 탓'으로 돌릴 수 없다면 국가보안법은 법조항의 존치 여부 이전에 정치적으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건 '노동해방'이란 단어를 보면서 그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찬양, 고무'하는 문구라고 여길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문구는 무슨 정치단체도 아니고 노동조합의 깃발마다 들어있었다. 그 때 이미 '국가보안법 체제'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당한' 것이다. 물론 남북관계의 대단한 진전 따위는 꿈에도 등장하지 않던 시절에 말이다. 그리고 북풍이 불던 남풍이 불던,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고 이어진, 인간다운 삶은 자본의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는 단순 명료한 사실에 대한 자각이 (당명만 봐도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없어 보이는) 민주노동당을 원내에 진입시키기에 이른 것 아니겠는가?


8. '독재자와 부자를 지키는 법'


  며칠 전 KBS의 TV 토론에서 노회찬 의원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하다 국보법 위반으로 잡혀가고 보니 그저 독재자와 부자를 위한 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경험담을 술회 하셨다. 옳은 말이다, 정답이다. 정말로 국보법과 일체의 냉전적 민중통제는 결국 '독재자와 부자들을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방송시간 대부분을 잡아먹었던 '북한 뭐 길래'라는 끝도 없는 논란은, 심지어 다음 날 아침 똑같은 한나라당 의원과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의 토론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북한이 어쩌고'라는 논란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완전하게 무의미한 악무한의 반복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북한만큼 아무렇게나 자기 편한 대로 말하기 좋은 대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원하는 만큼 악마를 만들던, 쓸데없이 미화하든 북한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제대로 된 응답이 돌아올 수 없는 순수한 외부로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국보법 옹호론자들의 목소리에서 굳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대충 두어가지 정도뿐이다.

  첫 번째로, 박정희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의 잔상이 어른거리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나라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송두율 교수 뺨치는 내재적 접근법에 의하면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길은 '우리는 요런 걸 민주주의라 부른다'고 선언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공식적으로 왕정이나 신정을 주장하는 극히 일부국가를 제외하면 지구상은 민주주의 국가가 가득 차 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북한을 비난 할 근거조차도 설자리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는 결국 발언자 자신의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을 반영해줄 뿐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특수주의, 예외주의는 있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소위 '사상전'을 운운하는 발언이다. 재미있게도 사상전이라는 단어를 역시 사용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북한정부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절대로 사상의 문제를 '전쟁기술'로 다루지 않는다. 사상의 문제를 전쟁기술을 통해 해결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절차와 원칙이 함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주장하고 토론하고 설득하고 표결하는 것으로 사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체제이다. 사상의 문제에 대해 대중의 합리적, 이성적 판단을 존중하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토론 이외의 어떤 수단의 사용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즉 강제력이나 조작적 기술에 의해 사상의 문제를 다루는 것, 즉 '사상전'과 같은 발언이야말로 민주적 질서에 대한 도전행위이다.

  남북한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국보법은 북한을 상대로 적용되는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보법으로 고생을 할 수 있는 것은 북한사람도, 미국사람도 아닌 오로지 대한민국 국민뿐이다. 국보법의 존재이유를 무엇이라 주장하건 결국 그 법 적용의 결과는 대한민국 국민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일 뿐이다. 그 실제 작용 속에서 국보법은 완전하게 대한민국의 국내 문제,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적 권리와 인권의 문제에서 조금도 벗어나 본 일이 없다.

따라서 국보법 문제에 대해 해줄 말은 북한이 적이거나 말거나, 남북한 관계가 봄날이던 겨울날이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민은 민주공화국의 국민답게 살수 있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이는 북한이 무엇을 어쩌는가, 남북한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다 수십, 수백 배 중요한 문제이다. 대체 북한 탓을 왜하는가? 북한에 유사한 법 조항이 있어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렇게 북한을 따라 하고 싶다는 건가? 민주공화국이라고 간판 걸었으면 그냥 멀쩡한 민주주의를 하자, 제발.


P.S)

  국가보안법 논란에서 남북한 관계의 '실상'을 따지는 것은, 지극히 보조적인 논쟁 기술(상대방 주장의 사실관계를 논란에 붙여 신뢰성을 낮추려는)에 불과하거나, 도리어 문제를 지속적인 해결할 수 없는 무익한 논란에 몰아넣는 근거가 된다.

  아무리 민족주의적 수사를 퍼부어도 남북한 관계의 핵심은 결국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다. 국가간 관계의 양상은 일차적으로 정부에, 정치권력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실관계에 대한 논란이 존재해도 실제 정책은 결국 '정책결정권자'의 판단에 달린 문제 아닌가? 싸우기도 전에 칼자루를 상대에게 쥐어주면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민중은 언제나 '심증은 있으되 물증은 없는'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국보법식의, 남북한 관계에 대한 판단과 국내의 민주주의의 문제를 연결짓는 발상은, 남북한 관계의 객관적 상황자체 뿐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까지도, 즉 대체 객관적인 실제 상황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남북한의 국가권력이 기본적인 우위를 지닌다는 것에 의해 힘을 얻는다. 결국 해법은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대중적 압력으로 정부가 태도를 바꾸게 하거나, 선거 등으로 정치권력의 구성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런데 '남북관계의 현 상황에서 국보법은 꼭 필요하다'는 정부나 정치세력의 주장을 대중의 힘으로 꺾을 정도라면 사실은 대중이 그러한 냉전적 민중통제의 논리를 이미 불신하는 상태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국보법 논란 등에서 마주치는 좀더 근원적인 문제는 공존보다 통일을 우위에 두는 사고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국보법과 같은 냉전적 민중통제의 논리는 무엇보다 자국이 '분단국'이라는, 그것도 정부라고 인정할 수 없는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나 '외세와 그 앞잡이'가 국토의 일부를 강점한 위기상태라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처럼 남북한이 서로를 엄연히 국제법상의 별개의 주권국가이고 오직 자국민의 판단에 따라 앞날을 선택할 불가침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애써 부인하는, 그래서 남북한 두 국가의 정상적인 관계에 기반한 안정적인 공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심지어는 그런 장기적, 안정적인 공존상태를 있어서는 안될 것으로 간주하는 논리가 단지 국보법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공존에 대한 거부는 '통일'을 국가적 지상과제로 삼는 논리의 기저에도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연 북한이 반국가단체가 아니고, 남한이 '미제의 괴뢰'가 아니어서 남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간 관계를 도모하고 장기간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도 과연 '통일'이 그렇게 항상 시급하고 절실한 '꿈에서도 소원'으로 남아 줄지는 의문이다. 물론 북한이 '반국가단체'로 규정되는 것에 국보법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북한이 반국가단체가 아니라면 남북한을 통일하자는 이야기와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영토여야 한다는 주장'사이에 '국제법상' 어떤 차이가 있게 될지 좀 궁금하다.

  대한민국 민중에게, 아니 남북한 민중에게 '냉전과 분단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남북한 정상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흐뭇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남북한의 국가간 관계와 민중의 민주적 권리, 인간적 존엄을 연동시키는 준-전시적 민중통제를 해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그저 한반도에 두개의 국가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 곧 민중이 고통받아야하고 평화도 공존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면 나치스의 '생활권 이론'이라도 신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단병호 의원, 8월 25일 울산강연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지 점점 엷어져 걱정”

단병호 의원, 25일 울산강연서 ‘비정규직 중심성’ 강조…“상위 정규직만으로 미래없다” 진보·노동운동 진영에 경고

매일노동뉴스 / 이수현 기자   

 

  단병호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초청강연회<사진>가 8월 25일 오후 7시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주최로 울산 현대자동차 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는 4백여 명이 참석해 단 의원의 열띤 강의를 들었다.

  단 의원은 먼저 “10명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힘은 미약하지만 국회의 비민주적인 관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해 일하고 있다”며 의정활동을 소개했다. 이어진 강연에서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민주노동당의 비정규 관련 개정법안을 설명했다.

  단 의원은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 못하면 정규직 또한 정부와 자본에 의해 무력화 되어 설자리를 잃을 것”이라며 “상위 계층의 정규직만으로 노동운동을 이끌어가기 힘들다”고 말했다. 단 의원은 또 “비정규직을 외면한 정규직만의 노동운동은 대의와 도덕성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하며 “비정규직의 문제를 노동운동과 당의 중심적인 문제로 가져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정규직과 공무원노조 문제가 하반기 쟁점이 될 것을 예상한 단 의원은 운동내부의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지가 부족함을 ‘위기’로 표현했다. 단 의원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지가 점점 엷어지는 것을 보면서 문제의식을 넘어 위기의식을 느낀다”며 “800만이 넘고 있는 비정규직의 문제 해결 없이 노동운동이나 진보운동은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고 역설했다.

  정부의 비정규직 보호 법안과 관련해서는 “인신매매법에 다름 아닌 파견법을 전 업종으로 확대하고, 기간제 노동도 1년에서 2년으로 확대하려는 개악안으로, 이는 비정규직 확대 법안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단 의원은 이어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 관련 법개정안을 소개하면서 “파견제 전면폐지, 특수고용직 노동자성 인정, 노동3권 보장, 단시간 노동을 정규노동시간의 70% 범위 내에서만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강연 전문이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은 ‘국회를 서민의 눈높이로 맞추는 것 이였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권위의 상징인 국회를 개혁하는 것이 세상을 개혁하는 시작으로 생각하고 국회의 권위를 없애기 시작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국회에는 국회도서관, 의사당, 의원회관으로 3개의 건물이 있는데 이건물마다 식당, 출입문이 2개씩 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도 6개가 있는 데 3개씩 나누어 의원용과 직원용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 먼저 의원전용 출입문과 엘리베이터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의원전용이라는 의미가 상실되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보좌관들과 함께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쳐다보아서 곤혹을 치뤘지만 이제는 다른 당의 소장파 의원도 직원식당에서 밥을 먹기 시작하였고 밥의 질도 좋아졌다.

  그리고 국회의 주요 통로 가운데는 융단이 절반정도 깔려 있다. 이것 또한 국회의원 권위의 상징으로 국회의원은 융단이 깔려있는 길로 다니고 보좌관들은 그냥 길로 다녔는데 민주노동당이 이 권위를 무너뜨렸다.

 

국회의 권위를 없애는 것과 더불어 국회의 운영을 민주화 시키는 데 노력했다.


  국회의 대부분의 업무는 교섭단체 중심으로 밀실정치로 이뤄지고 주요 사항은 대표회담 등으로 더욱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번에 국회의장선거에서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갈라먹기 식으로 진행되어 국회의장과 부의장에 누가 출마했는지도 모르고 정견 발표 한번 없이 선출되어 초등학교의 반장선거보다 못한 선거로 치러졌다.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했는데 발언 기회를 회의가 끝나고 주는 등 비민주적인 행위들이 서슴없이 진행된다. 우리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299명 가운데 10명으로, 힘은 미약하지만 이러한 비민주적인 관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해 일하고 있다.

  국회에서 입법 발의를 할 수 있는 기준이 10명인데 국민들이 이것을 알고 10명을 당선시켜 준 것 같다. 그래서 법안 발의는 마음대로 진행할 수 있다.

  이미 국회에 비정규직 관련 법안으로 근로기준법중개정법률안,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중개정법률안, 직업안정법중개정법률안,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안폐지안 등 4개의 법안이 상정되어 있고 정기국회를 준비하면서 손배가압류, 최저임금과 관련된 법안을 준비중이다. 환경과 관련해서는 지율스님 단식의 쟁점이 되고 있는 환경영양평가제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으며 산업안전과 관련해서는 건강권공대위와 함께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비정규직법안을 만들면서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비정규직관련 노조 및 관련단체 등 8개의 단체가 참여하여 2개월 동안 준비를 해 발의하였다. 민주노동당의 각 의원들이 상임위별로 발의 법안을 준비하기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동지들이 지켜봐 달라.

  국감은 단순한 폭로식 국감이 아닌 대안을 제시하는 진보적인 국감으로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각 사안별로 워크샵을 진행하고 있다. 이상으로 의정활동에 대한 보고는 마치겠다.


하반기에는 비정규직과 공무원노조의 현황이 쟁점이 될 것이다.


  IMF를 전후로 하여 비정규직이 많이 양산이 되었고 정규직과의 차이 또한 심화되어 왔다. 비정규직의 문제가 사회 쟁점이 되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는 적은 것 같다. 우리 내부 또한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이야기는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는 점점 엷어지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문제의식을 넘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현재 비정규직이 800만을 넘고 있다. 정부는 350만정도로 이야기를 하지만 정부의 기준은 근로기간을 정함이 없는 사람은 정규직으로 본다. 그런데 일용공들이 근로기간을 정하고 일을 하는가?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근로기간을 정하고 일을 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정부의 통계는 조작이다. 800만이 넘고 있는 비정규직의 문제 해결 없이 노동운동이나 진보운동은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정부는 공무원노조와 관련된 법안을 입법예고 하였고 비정규직과 관련된 법안 또한 곧 입법예고 할 예정이다. 법안이 입법예고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법안을 제출한 정부의 의지와 법안의 내용이 중요하다.

  정부는 이 2개의 법안을 올 하반기에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테이블에서 다시 논의를 해야 하지 않는가?”는 질문에 정부는 “노사정위에서 충분히 논의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 없다”고 한다. 이렇듯 정부는 공무원노조와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올해 안에 꼭 통과시키려고 한다.


정부의 비정규직 보호 법안은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아니다.


  내용을 보면 파견제를 확대하고 있다. 현재 26개 업종에서만 가능한 근로자 파견이 거의 전 업종에서 이루어진다. 파견법은 인신매매법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으므로 꼭 폐지되어야 한다. 기간제 노동의 경우는 현재 1년으로 되어 있는 계약기간을 2년으로 늘려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을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기업이 비정규직을 사용하려는 이유는 단 두 가지이다. 하나는 노동력의 탄력적 이용이고 다른 하나는 비용절감이다. 이 두 가지 요소만 없애면 비정규직의 문제는 대부분 해결될 것이다. 비정규직의 사용을 없애는 결정적 요인은 동일가치 노동에 동일임금 적용을 명문화하는 것이다. 비용이 동일하면 비정규직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며 차별의 문제는 해소된다.

  그리고 비정규직 사용에 있어서는 합리적인 사유가 있을 때만 허용해야 한다. 합리적인 사유란 출산휴가, 병가, 산재 등으로 단기간의 대체 인력이 필요할 때이다. 이 경우에도 그 기간은 1년이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기간은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업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법안을 제출했기 때문에 이번 국회에서 정부법안과 우리의 법안이 비교되면서 검토될 것이다. 정부의 안과 민주노동당이 제출한 법안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1. 파견제는 민주노동당 안은 전면폐지이다.

2. 특수고용직(화물, 레미콘, 학습지등)의 경우는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안이고 정부의 안은 노사정위에 위임하여 처리하려고 하고 있다.

3. 단시간 노동의 경우 정부는 현행 법안을 유지하려고 하고 민주노동당은 정규노동시간의 70%이내에서만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단시간노동의 경우는 이것은 선호하는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에 폐지하기는 힘들다.


  우리의 법안은 노동관련 8개의 단체가 모여 심도 있게 만든 것이며 실제적으로 비정규직을 없애는 방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정부의 법안은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법안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법안은 꼭 막아야 한다. 법은 한번 만들면 바꾸기가 싶지 않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문제해결 없이 진보운동 또한 한치 앞도 나가기가 힘들다.

  궤도연대 5개지하철이 얼마 전 파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세상은 조용하다. 90년대 초 서울지하철 하나만 파업을 하여도 그 파급효과는 대단하였다. 그런데 지금 정부와 자본의 대응은 세련되어져 있다. 군 특수부대 기관사를 투입하여 파업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제 새로운 투쟁동력을 형성해야 한다.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 못하면 정규직 또한 정부와 자본에 의해 무력화 되어 설자리를 잃을 것이다. 노동자간에도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다. 상위 계층의 정규직만으로 노동운동을 이끌어가기 힘들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외면한 정규직만의 노동운동은 대의와 도덕성도 가질 수 없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노동운동과 당의 중심 문제로 가져가야 한다. 현장에 가면 누가 보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구별된다.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회는 점점 양극화 되어가고 있다. 한 극에 있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진보는 없다.

  민주노동당이 정책을 실현해 가는 길은 노자간의 대립에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다. 여성, 장애인등 소수자의 문제가 이슈와 사회적 의미는 갖지만 민주노동당의 정책 실현의 근본적인 대안은 노자간의 대립의 문제를 투쟁으로 극복해 가야 한다.

  하반기 공무원노조와 비정규직의 문제를 중심사업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침체되어 있는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는 정규직 노동운동만으로 돌파의 어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문제는 사회적인 명분은 있지만 투쟁동력이 부족하다.

  민주노동당이 앞장서서 민주노총, 한국노총 그리고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만들어 내고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어 해결해 나가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