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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상무위원회 사태


2005년도 일이 생각난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 공공연맹 등과 함께 제작했던, 일명 ‘비정규직 포스터’. 카피가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인데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김원정 씨가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전화 돌리던 기억이 난다. 포스터 배포를 못하게 하려고 당과 노조 여러 단위의 여성위원장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이 날의 일과 노동계 포스터에 대해서는 내가 10여 년 전에 글을 쓴 바 있다.


<노동계 뽀스떠(http://blog.jinbo.net/diary/66)>

 

1.


당시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 포스터의 이미지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현재 ‘정의당 상무위원회 사태’(정의당 상무위가 주장하듯이 ‘문예위 논평 및 메갈리아 사태’가 아니다. 사고 친 건 상무위니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의 언어에 대한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태도가 남성 중심적 태도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여성 중심적 표현’이 무엇인지 이미지를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여성 중심적 표현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왜 표현이 쉽게 남성 중심적으로 흐르게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여성 중심적 이미지와 언어를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다. 어렵다. 데보라 카메론의 <페미니즘과 언어 이론>(한국문화사, 1995)에서 인용한다.

 

“<비성차별적> 언어의 지지자들은 언어를 현실을 가능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상하기 위해서는, 남성적 단어를 중립적 단어로 환치함(chairman→chairperson 따위: 인용주)으로 해서,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자를 포함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관계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성차별적인 이상, 이 현실에 중립적인 단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어란, 이것은 성차별적, 저것은 중립적, 또 저것은 페미니스트적이니 하는 식으로 언어의 국제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최종적 판단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번역이 좀 웃기긴 한데, 어쨌든) 이미 언어도 성차별적으로 물들어 있다는 얘기다. 위의 책에서 계속 인용한다.

 

“남자의 단어가 힘, 지위, 자유, 독립을 함의하는데, 전에는 그것과 평행해서 쓰이던 여자의 단어는 지금은 열성, 의존성, 부정성, 성을 함의한다.
이를테면, bachelor(독신 남성)(자신가이며 독립해 있고 성적으로 자유로운)의 반어는 spinster(독신 여성)(추하고 성적 매력이 없고 좌절된)이다. (생략)
의미의 불평등의 그 밖의 예로서는, governor(힘센 통치자)와 governess(어린이의 일을 돌봐 주는 가난한 여자)라든지, master(유능한 힘센 남자)와 mistress(성적,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여자)나 tramp(부랑자)와 tramp(매춘부)가 있다.”

 

언어의 의미 구조가 성차별적으로 공고하므로 몇몇 단어 바꾼다고 언어의 성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의 의미 구조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방법은 있다. 그래서 위의 저자는 사람을 총칭하는 모든 대명사는 she(그녀)로 바꾸어 책을 서술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녀가 누구지? 생뚱맞게 갑자기 여자가 등장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후에, ‘아차, 그냥 사람이지.’ 한다. 저자는 이러한 서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즉 모든 부정 혹은 총칭적 지시대명사를 여성형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나 이외에도 몇몇 언어학자들이 항시 이런 실천을 하고 있다. 이것을 기묘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건설적인 언어를 통해 적극적 차별을 실천하고 있다고 우리는 대답한다. 남자에게 he라 말하거나 쓰거나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여자인 나에게 she라 말하거나 쓰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비남성 중심적 세계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인간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처럼 건설적인 언어가 세계를 바꿀 것이라느니 하는 그런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가 she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해서, 지금보다 많은 여자들이 과학을 전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she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의 편견에 직면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식을 높일 수는 있을 것이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도만큼 현 질서의 문제를 지적하는 좋은 방법은 없을지 모른다. 위 책의 저자야 교양 없어 보이면 안 될 터이니 참으로 얌전한 방식으로 편견을 지적한다. 우리 사회의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교양 따위는 집어치운 불쾌한 언어를 사용하는 점과는 다르다. 메갈리아와 워마드도 단일대오는 아니겠지만, 그들은 왜 상쾌함을 짓밟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장 폭력적인 언어는 성과 관련된 상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친놈’과 ‘미친년’이 다른 의미이듯이, ‘씨발놈’과 ‘씨발년’은 완전히 다르다(내가 자대에 배치되어서 가장 먼저 들은 욕이 ‘씨발년’이었다, ‘씨발놈’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타부어는 남자의 신체보다 여자의 신체를 가리키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cunt(여자 성기)라는 말은 prick(남자 성기)보다도 강하기 타부시 되며, 타부로 되어 있는 유의어도 prick보다 많다. (생략)
여자 전체를 성의 먹이로 보는 ass(엉덩이), tail(꼬리), crumpet(둥근 빵), skirt(치마), flash(섬광)(이런 의미가 전이해서 성교나 성교의 대상으로서 여자를 가리킨다)와 같은 단어들은 있으나 이에 해당하는 남자의 단어는 없으며, slag(쓰레기)에서 전이해서 <몸가짐이 나쁜 여자>, tart(<과일이 곁들이 빵>에서 전이해서 <매춘부>), nympho(<님프>에서 전이해서 <여색정증>), pricktease(남성 성기를 조롱하는 의미로, 성교에 있어서 남자를 흥분시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끝까지 가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에 대한 모욕어)에 해당하는 남자의 단어도 없다.
아마도 이것은 남자에게만 관용한 이중 기준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성교가 이성 간에 행해진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자에게는 성적 욕망이 없다고 여겨지므로, 여자가 욕망을 갖는다는 것을 나타내거나, 남자의 욕망에 응하지 못하면 비난당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들이 한국어에 없을 리 만무하고, 이 모욕적인 언어를 뒤집어보자는 의도가 메갈리아, 워마드의 언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메갈리아의 언어로 지목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지 않을 방법은 없다. 성적 주체에서 대상으로 바뀌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옆에서 듣는 사람도 기분 나쁠 만하다. 이렇게 기분 나쁜 표현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집단)이 채택할 수는 없겠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반대로 메갈리아의 언어를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이라고 규정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를 규탄한다면? 그러니까 우리 언어에 깊이 각인된 성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언어를 뒤집어서 남성을 향해 사용하는 것을 억압하는 것은 어떤가? 이는 우리 언어의 차별적 구조를 드러내는 행위를 막는 것이다. 우리 언어가 남성 중심적이므로, 그 남성 중심적 언어를 지키는 꼴이 된다.

 

물론 메갈리아와 워마드에는 또 다른 소수자들을 비하하는 내용들이 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런데 메갈리아에서 시작한 미러링이 다른 소수자들을 모욕하는 내용을 포함한다고 해서, 메갈리아의 전략이 곧 다른 소수자를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용의 맥락이 있다. 어떤 맥락에서 메갈리아의 유저가 장애인을 심하게 비하했다면, 그리고 그 유저에게 환호하는 여럿이 있다면, 그들의 바로 그 행위를 비난하면 된다. 한편으로는, 소수자들의 경우보다 복잡할 수 있는데, 노인이나 역사적 인물들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는 행위가, 언뜻 생각이 드는 것처럼 아주 질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이것이 전략적으로 계산된 행위가 아니고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배설 행위라 하더라도, 위대한 남성과 평생 여성을 폄하하며 살아온 늙은 남성을 조롱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실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채택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태도는 결국 메갈리아의 기본적인 언어 사용(남성을 향한)을 지켜주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여성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지 더 많이 보여주게 된다. 확실히 데보가 케메론보다 과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정의당 상무위원회는 남성 중심적 언어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행위를 억압하고 있다. 정의당 상무위가 스스로 확인한 입장은 문예위 논평이 메갈리아의 언어를 지지한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정의당 문예위는 메갈리아의 티셔츠를 구매한 한 성우의 노력이 게임에서 삭제됨을 비판했다. 그 성우는 메갈리아가 사용하는 SNS의 계정이 삭제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티셔츠를 산 것이다. 정의당 상무위는 메갈리아의 언어 전략이 사용될 수 없도록 열심히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2.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의 언어에 경기를 일으킬까? 그 역겹고 혐오스런 표현이 싫기는 하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정 역겹고 혐오스런 말과 행동은 전쟁광과 군국주의자, 신자유주의자와 재벌, 돈에 미친 자들과 별별 권력자들에게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는 짓들이 그토록 싫어서 분노하고 데모도 하고 농성도 하고 글도 쓰고 서명도 하지만, 경기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추정컨대, 작은 불의에 더 가혹한 것이 세상 이치라서 그런가 싶다. 전쟁의 언어는 핵실험과 사드 배치로 현실이 된다. 하지만 메갈리아가 떠들어봐야 한국 남자들이 벌레가 되지는 않는다. 메갈리아의 언어는 현실을 폭로하는 언어, 한편으로는 배설의 언어이지 현실을 바꾸는, 의지를 실현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 말고는 힘이 없는 언어이다. 작은 불의에 가혹하면 아주 쉽게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다른 추정은 메갈리아의 언어가 사람의 감정을 표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감정은 쉽게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마련이다. “나 상처받았어!” 진보정당의 윤리는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적인 힘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3.

 

정의당 문예위 논평에 항의하며 정의당을 탈당한 사람들은 정치적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메갈리아의 활동에 조력한 그 성우를 배제하는 조치가 게임업체로서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그 게임업체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논쟁적인 주제이므로 문예위 논평에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다. 하지만 탈당하는 행위는 그 게임업체의 아이디를 삭제하는 것과 똑같다. 돈 냈으니 자기가 원하는 서비스를 다오. 자기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지 않으니 더 이상 돈 못내. 이들은 정당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정당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고민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공동체 경험이 일천한데다가 진보정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냥 징징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수 백 명이 넘는다는 것은 정의당이 당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정당임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문예위 논평이 문제가 있다면 박 터지게 싸워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내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조직원은 박 터지게 싸우려는 의지도 없고 조직에는 룰도 통로도 없다면 당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싸울 의지와 방법이 없다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젠 문예위 논평을 내린 상무위를 비판한 사람들이 코너에 몰렸다. 상무위는 자기들이 젠더TF라고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당의 입장을 정해 놓았다. 젠더TF는 상무위의 입장을 사실상 합리화하는 논리 말고는 어떤 것도 내놓을 수 없다. 웃긴다. 이젠 ‘니들이 나가라!’인가?